제8화
나는 미궁 내를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며 괴수들을 학살하고 다녔다.
확실히 난이도가 오른 만큼 이전에 상대했던 괴수들에 비하면 월등히 강했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
강자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나한테는 아쉬움이 남았다.
“뭔가 한끝이 부족한 것 같단 말이야.”
나는 괴수의 피에 적신 붕대를 교체하며 혀를 내둘렀다.
정확히 한 방에 끝낼 수 있는 괴수도, 목숨을 건 혈투를 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닌 애매한 괴수들.
그렇다 보니 미묘한 감질맛이 남았다.
그래도 방금 전에 싸웠던 고릴라형 괴수는 ‘싸운다는’ 감각이 남아있기라도 했었는데.
그런 놈을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지만, 그놈이 특출났던 모양인지 그만한 상대는 발견할 수 없었다.
아쉽네.
나는 몸에 걸친 빳빳한 가죽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고릴라형 괴수를 쓰러뜨리고 얻은 전리품.
‘다른 사람들은 괴수를 경험치라고만 생각하는데 이렇게 재료로 써먹는 것만큼 짭짤한 건 또 없지.’
가령 예를 들자면 내가 쓰는 검처럼 말이야.
뭐든지 자급자족해야 하는 튜토리얼에서 얻은 생존 지식이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괴수의 목을 비틀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 손아귀 속에서 죽어가던 괴수는 최후의 발악을 하기라도 하듯 온몸을 부풀렸다.
그 모습은 마치 물풍선을 연상케 했다.
‘어차피 죽겠다면 길동무로 데려가겠단 건가?’
피식.
귀엽기까지 한 발상에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튜토리얼과 탑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것.
어디까지나 기곗값을 도출하듯 수동적으로 움직이던 튜토리얼의 괴수들에 비해 탑의 괴수들은 하나 같이 지성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다른 플레이어는 그게 뭔 차이냐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겠지만 나한테는 달랐다.
능동적으로 움직인다는 뜻은 언제든지 변수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변수는…
“이런 것도 가능하지.”
나는 부풀을 대로 부푼 괴수의 대가리를 붙잡고는 벽을 향해 내던졌다.
쿠우우⎯ 콰앙!
빠른 속도로 날아간 괴수는 충격으로 가공할만한 폭발을 일으켰다.
강력한 화염이 치솟아 오르며 뜨거운 열기가 대기를 데웠다.
얼마나 뜨거운지 입고 있던 옷가지가 녹아내릴 정도였다.
“아씨, 벌써 찢어졌어?”
넝마가 된 옷조각을 내려다보며 혀를 내찼다.
평소에는 무기에만 신경을 기울이다 보니 비교적 옷차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걸레가 될진 몰랐다.
다행히도 전리품으로 얻어둔 괴수의 가죽은 열기에도 녹지 않고 멀쩡했다.
나는 몸에 남아있는 천 조각을 우악스럽게 찢어내고는 괴수의 가죽을 몸에 걸쳤다.
‘혹시 몰라도 챙겨둬서 망정이지.’
그냥 버렸으면 어쩔 뻔했어.
덕분에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지만, 어차피 괴수들밖에 없는 곳인데 누가 볼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그깟 방어구가 없어도 그냥 근육으로 때우면 되기 때문에 별문제는 없었다.
그것도 잠시.
나는 시선을 옮겨 폭발이 일어난 근원지를 바라봤다.
방금 전의 폭발로 인해 벽면 전체를 가리던 웅장한 연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옅어져 갔다.
손바닥을 휘둘러 남은 연무를 걷어내자, 한쪽 벽면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없던 쥐구멍.
“찾았다.”
도대체 어디에 있나 싶었는데 여기에 있었나.
흥분에 들뜬 얼굴로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괴수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깨달은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미궁의 벽면은 내 힘으로도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
천장과 바닥은 쉽게 무너지는 것에 반면 벽은 멀쩡하다.
나는 거기에서부터 의문점을 가졌다.
‘다른 곳은 몰라도 굳이 벽만?’
그리고 결정적으로 괴수들의 공격은 벽에 통용된다.
그 뜻은 간단했다.
“뭐긴 뭐야. 탑이 약은 수를 써놨다는 거지.”
탑이 하는 짓이야 뻔하잖아.
이미 수차례나 겪어놓고도 못 알아차리면 그건 얼간이나 마찬가지다.
벽에 걸려 있는 횃불을 들고 구멍의 너머로 들어서자, 꿉꿉한 습기와 함께 지하로 향하는 또 다른 통로가 이어졌다.
계단을 통해 내려가자 처음 미궁에 들어섰을 때처럼 웅장한 문이 나타났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이전에 봤던 문보다도 훨씬 큰 규모.
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활짝 열리며 상당한 넓이는 습지가 펼쳐졌다.
전체적인 인상은 어릴 적 다큐멘터리에서 봤었던 아마존을 연상케 했다.
찰박! 찰박!
지금 와서 생각하니, 옷가지를 버려두고 오길 잘한 거 같다.
괜히 거추장스러울 뻔했는데 잘됐네.
다 큰 성인 남성이 가죽 하나만 걸치고 진흙탕을 뒹굴고 있는 걸 생각하니 조금 소름이 돋는 기분이긴 했지만,
뭐 어때.
나만 편하면 됐지.
손으로 진흙탕을 걷어내며 걸어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위히히잉!”
습지대 전체를 울리는 울음소리에 고개를 들자, 멀리서부터 순백의 백마 무리가 늪지대의 상공을 가르고 날아오고 있었다.
단순한 말이 아니다.
백마의 등에는 거대한 날개와 머리에는 신성한 마력을 내뿜는 뿔이 달려 있었다.
지구에서는 전설로만 불리어왔던 존재.
“유니콘.”
나는 아름다움에 홀린 채 종족명을 입에 담았다.
오직 순결한 영혼에게만 다가가며 악한 존재에게는 저 강력한 뿔을 사용해 한 방에 꿰뚫어 죽인다는 전설은 유명했다.
실제로 목격하니 성스럽다 못해 뒤에서 후광이 일어나는 듯한 모습에 나는 감탄을 토했다.
‘근데? 이런 습지대에서 유니콘이라고…?’
왠지 모르게 매치가 안 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냥 신경 끄기로 했다.
탑에서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개연성을 찾으려면 끝도 한도 없다.
간단히 무시하려고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유니콘들은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야말로 기품이 넘치는 발걸음.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유니콘은 백옥같이 순수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본다.
익히 알려진 유니콘의 전설과 더불어.
놈의 성스러운 매력에 남녀노소 불문하고 한 방에 넘어갈 법 싶었지만.
‘역시 이쪽에는 유니콘 말고는 괴수가 없나?’
나는 차갑게 식은 머리로 상황을 분석했다.
이전에는 괴수와 전투라고 하면 이번 미궁은 아주 단순히 환경적인 제약인가?
아니, 탑이라면 그럴 리가 없다.
탑은 언제나 플레이어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허를 찌른다.
저명한 플레이어의 인터뷰와 커뮤니티를 통해 배웠기에 속지 않는다.
그렇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했을 즈음.
촤아악!
공기를 찢는 파공음과 동시에 유니콘의 뿔이 내 이마를 향해 쇄도해 들었다.
반응해내기 힘들 정도로 재빠른 일격이었으나.
나는 그보다도 빨리 유니콘의 뿔을 허공에서 낚아챘다.
“네가 생각하기에도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무 뻔한 함정이라고.”
“위히힝!”
“뭐가 히힝이야.”
한 손으로 뿔을 잡은 채, 놈의 배를 걷어찼다.
저 멀리에 나가떨어진 백마는 진흙밭을 뒹굴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애초에 나를 속일 거였다면 전제조건부터가 틀렸다.
이놈이 정말로 순결한 영혼에게 다가오는 전설 속 순백의 유니콘이었다면 가죽 하나만 걸치고 헐벗고 있는 남정네에게 찾아오지도 않았다.
안 그래? 그렇잖아.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주변에 있던 백마들은 인상을 험하게 일그러뜨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내세웠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구만.”
저게 어디 봐서 유니콘이야. 영락없는 괴수들이잖아.
이제 와서 돌변한다고 한들, 이전과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차피 승자는 정해져 있었으니까.
확실히 미궁에서 상대했던 괴수들에 비하면 훨씬 강해졌지만, 그래봤자 짐승 새끼라는 사실은 달라질 게 없었다. 저것들이 괴수라는 것도 알았겠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나는 일말의 가차도 없이 유니콘의 목을 날렸다.
짤랑!
유니콘을 쓰러뜨리자, 명쾌한 금속음이 들리며 금화 한 닢이 바닥에 떨어졌다.
단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상황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금화를 주었다.
〈금화: 6층 한정 아이템.〉
〈깐깐하기로 유명한 상점의 주인장을 통해 물건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주의! 주인장의 마음에 들기란 쉽지 않을 테니, 혹시나 화가 난다고 얼굴에 집어 던지는 만행은 저지르지 맙시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스템의 설명.
‘6층에 이런 아이템이 있었던가? 커뮤니티에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거 같은…’
나는 생각하다 말고 모순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6층의 미궁에 들어선 플레이어는 나밖에 없을 테니 다른 등반자가 모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말은 즉, 이걸 얻은 자는 탑에서 내가 최초라는 뜻.
그 외에도 상점에 대한 설명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지금에서 관심 가질 이야기는 아니다.
상점이든 뭐든 한 닢 가지곤 별 의미도 없을 테니까.
상점을 이용하기 위해선 금화가 필요로 하고.
이 금화는 유니콘을 사냥하면 드랍한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유니콘은 적어도 수십 마리.
“흐흐, 그렇담 고민할 것도 없겠네.”
내가 혀를 날름거리며 속물적인 미소를 짓자,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 유니콘들은 곧바로 꼬리를 내빼기 시작했다.
얼마나 빠른 속도인지 내 눈으로도 겨우 따라잡을 정도.
뭐, 상관없다.
어차피 미궁에 있는 시간은 제한은 없으니까.
그리고.
“감질맛 나게 잡을 바에는 한 방에 모아서 잡는 게 최고지.”
아무래도 뽕을 뽑는다는 건 이런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것 같았다.
* * *
나는 미궁 내를 둘러보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괴수 사냥은 조급히 움직인다고 해서 무조건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옛말 중에 급하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잖아?
그렇게 미궁을 어슬렁거리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울창한 풀숲에서 세련된 분위기의 작은 가게를 발견했다.
인적이라곤 보이지 않는 습지대와는 전혀 매치 되지 않는 건물.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게의 내부에는 단출한 테이블과 의자밖에 없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저 그런 휴식 공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나.
“아직도 살아있었다니 의외로군.”
이어진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인상을 구겼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허리춤까지 오는 대검을 양손으로 붙잡은 노인이 서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6층의 입구에서 봤었던.
“뭐야 아저씨 아직도 있었어?”
“훗, 풋내나는 애송이가 건방 떨긴. 미궁을 겪고도 아직도 자존심을 세울 수 있다니 그게 언제까지 갈지 보자꾸나.”
감정이 훤히 드러나는 그의 태도에 나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설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도 꿍해 있는 건 아니지?”
“…….”
설마 했는데 몸을 움찔하는 걸 보니 정곡이었나 보다.
전에 있었던 일을 아직까지 담아두는 걸 보면 저 아저씨도 은근히 속이 좁은가 보다.
기왕이면 곱게 나이를 먹을 것이지.
“그래서 아저씨는 여기에서 뭐 하고 있는데?”
“보면 모르겠나? 소소하게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네.”
상점?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시스템에서 말한 상점이 어딘가 싶어서 계속 찾고 있었는데, 그게 여기였어?
“자세하게 상점에선 뭘 팔고 있어?”
“이제야 관심이 드나 보지? 포션부터 시작해서 무기, 방어구, 액세서리까지 탑에서 취급하는 건 내가 거의 다 취급하고 있지.”
노인은 어디에서 꺼냈는지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아티팩트들을 진열했다.
아티팩트에 대해 무지한 내가 봐도 확실히 하나하나가 전부 상당한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그중에서는 내가 지구에 있을 당시, 탑에서 나온 랭커가 지니고 있던 물건들도 여럿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내가 관심을 가지자 노인은 팔짱을 끼며 콧대를 세웠다.
“훗, 애송아 이제야. 관심이 좀 생기나 보지?”
“됐고, 이런 건 사려면 얼마나 필요해?”
내가 말을 끊고 질문을 던지자, 노인은 불쾌한 안색을 보이는 듯하면서도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아서라 그건 너 같은 애송이가 욕심낼 물건이 아니다.”
노인은 내가 짚은 갑옷을 들어 올리며 능청스러운 얼굴을 지었다.
“고릴라 같이 생긴 괴수의 가죽과 금화 100개, 너 같은 애송이한텐 불가능할 테니 그냥 포기하는 걸 추천하지.”
“원하는 건 겨우 그거야? 할만하네.”
“그래, 처음부터 그렇게 포기했으면 얼마나 편… 어? 지금 뭐라고?”
“네가 말한 게 이거지?”
나는 미궁에서 내내 걸치고 있던 괴수의 가죽을 벗어서 책상 위에 내려놨다.
“에송아 아무 가죽이나 들고 와서 우기는 건 나쁜….”
“딴말하지 말고 이게 맞는지 자세하게 확인부터 해 봐”
내가 말을 끊고 재촉하자, 노인은 돋보기를 꺼내 가죽을 자세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돋보기를 꺼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의기양양할 때는 언제고, 시간이 흐를수록 가죽을 내려다보는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아니 이걸 어떻게….”
“어떻게 하긴 적당히 두들겨 패니까 알아서 죽던데. 아 참고로 그건 전리품으로 갖고 온 거고.
“그, 그놈을 진짜로 쓰러뜨렸다니. 도대체….”
“그냥 두들겨 팼다니까? 그래서 네가 원하는 건 그거면 되지.”
“자… 잠깐만 멈춰보게나!”
미리 점 찍어둔 갑옷을 들고 가려고 하자, 노인은 내 손을 허겁지겁 붙잡았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 놈이 치매라도 왔더냐? 내가 분명히 말했잖나. 이것 말고도 금화 100개가 필요하다고.”
“100개?”
금화가 100개면 대충 어림잡아 유니콘 100마리를 사냥해야만 했다.
내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노인은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후후… 그래, 아무리 네 녀석이라도 당장 금화 100개는 없을 테지.”
이제는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 노인의 모습에 나는 아무 말 없이 금화 1개를 떨어뜨렸다.
쨍그랑!
금화는 책상을 굴러 노인의 손에 들어갔다.
“…금화 한 닢?”
“그건 팁, 기다리는 동안 그거나 빨고 있어.”
금화 100개?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금방 갖고 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