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1채널로 진입합니다.〉
- 님들 알고 있음? 6층에 있는 그 영감
⤷ 아아, 그 노망난 영감 새끼 잘 알고 있지.
⤷ ㅅㅂ 아, 욕부터 나오네 ㅈㅅㅈㅅ
⤷ ㄱㅊ 뭐 그럴 만도 하지. 그 새끼는 욕 좀 처먹어도 싼 놈임.
- 그니까 뭐 하나만 해도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그냥 난리 치잖아.
⤷ 그 영감이 한 번이라도 인정하는 꼴을 못 봤음
- 헤으응, 그게 뉴규에염?!
⤷ 컨셉질 치워라 역겹네ㄹㅇ
- 나도 그 영감탱이가 아예 기본도 안 되어 있다면서 처음부터 매타작부터 시작하드라. 진짜 종일 맞기만 했었는데 역시 나만 그런 게 아니…
⤷ 어… 난 그 정돈 아니었는데 그건 진짜로 님이 못 한 거 아님?
⤷ ㅋㅋㅋㅋ 오히려 닌 그 할배한테 감사해야 할 듯
* * *
잇따른 내 선언에 노인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허허, 증명이라… 내가 좋아하는 말이지. 헌데, 이제 막 탑이 들어온 초심자가 객기를 부리면 쓰겠나. 자고로 한평생을 수월한 고수들조차 겸손하거늘.”
“뭐, 길고 짧은 건 대보면 알겠지.”
그의 말에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한평생이라고 해봤자 100년.
그까짓 시간이야 나한테 있어선 스쳐 지나가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아득히 긴 세월 동안 너덜너덜해진 천을 손 위에 덧대며 말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매듭을 묶은 후,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튜토리얼에 있는 천 년 동안, 괴수를 상대하기 전마다 반복해서 행해왔던 일종의 루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인은 호기로운 눈빛으로 말을 건네왔다.
“흐음… 그런데 자네. 등에 걸친 검은 사용하지 않는 겐가?”
아, 이거 말인가?
나는 곁눈질로 괴수의 뼈를 훑어보며 별 감흥 없이 대답했다.
“나중에 필요하면 쓸 건데, 지금은 그다지 필요 없어,”
1층에서 5층을 겪으면서 느낀 건데, 튜토리얼 안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레벨에선 굳이 쓸 필요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고블린같이 자잘한 놈들을 상대하기엔 주먹이 편했다.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을 필요는 없다.
참 아이러니하지.
가장 기본 중에서도 기본을 가르치는 튜토리얼보다도 탑이 더 등반하기 쉬울 줄이야.
무뚝뚝하기까지 한 내 대답에 노인은 옅은 미소를 보였다.
“그런가? 수십 년간 이곳에 서 있으면서 다양한 얼간이들을 봤지만, 자네만큼 특이한 등반자는 처음이로군. 후후후….”
“그래?”
근데 이 아저씨는 조금 전부터 왜 내 곁에 있는 거야?
분명 커뮤니티에서 다른 플레이어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상당히 빡센 걸로 유명한 NPC라고 들은 거 같은데.
막상 겪어보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커뮤니티는 함부로 믿는 게 아니라고 했으니까. 이상할 건 없나.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쯤이었다.
쿠구구궁!
강렬한 진동과 함께 지면이 울리는가 싶더니, 바닥이 모래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발이 바닥 밑으로 푹푹 빠진다.
마치 늪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서 있으면 끝도 한도 없는 모래 늪 밑에 내려가 질식사하고 말겠지.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노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허공 위에 서 있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직접 증명해보라는 얼굴.
반항하면 할수록 모래 속에 빠져, 결국 탈진해 질식사하고 마는 보편적인 함정.
‘물론 해결 방법만 안다면 별것도 아니지만.’
나는 오른팔을 견갑골로 쭉 당긴 채, 주먹을 쥐었다.
이미 모래 늪에 대퇴골까지 들어간 바람에 제대로 된 힘은 실리지 않았지만, 그 정도는 상관없다.
다리 힘이 부족하면 나머지는 허릿심으로 때우면 되니까.
“내가 증명한다고 했지? 그 옹이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어.”
내가 증명하는 걸.
나는 팽팽하게 끌어당긴 팔을 일거에 터트리듯 내질렀다.
퍼엉!
상당한 파공음이 일대를 울리더니, 풍압으로 인해 내 발밑을 감싸고 있던 모래는 하나도 빠짐없이 날아갔다.
간단하리만치 깔끔한 결과.
걷힌 모래 늪 밑으로는 상당한 규모의 미궁이 있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될 정도의 외견에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찾았네.”
빙고.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은 점차 차오르는 모래 늪에서 살아남는 게 바로 6층의 클리어 조건이다.
허나, 6층을 클리어 한 사람 중에서는 이런 의문을 가진 자가 있었다.
‘모래 늪이 위로 점점 차오른다면 그 밑에는 숨겨진 보물이 있지 않을까?’
그 의문에 타당성을 느낀 플레이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도전했지만, 이는 줄줄이 실패하고 말았다.
상당한 속도로 차오르는 모레 늪에서 벗어나는 것조차도 버거웠기 때문에.
나는 미궁을 훑어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밑에 있는 건 이거였나?”
그럼 그렇지.
튜토리얼과 이전 층들을 겪으며 탑이 등반자들에게 정직하지 않다는 점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2-4층.
내가 미궁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자, 곁에 있던 노인은 핼쑥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 어떻게 여길….”
“영감, 그래서 실력을 증명하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부족하면 언제든지 말해둬 보여줄 테니까.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미궁으로 나아갔다.
미궁에 다가서자, 지면에서부터 자그마한 석상이 솟아났다. 석상에는 손바닥 모양의 작은 판이 있었다.
여기에다가 손바닥을 대라는 건가?
툭!
석판에 손바닥을 올리자,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절로 소름이 끼칠만한 감각.
[등반자 식별 완료.]
[31기 플레이어 신한별님의 능력치는 최상입니다. 따라서 미궁의 난이도가 조절됩니다.]
콰드드드득!
시스템창이 눈앞에 뜨는가 싶더니, 미궁 내부의 마력 흐름이 폭발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강한 흐름인지 튜토리얼에서 온갖 산전수전을 전부 겪은 나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한동안 그 상태를 이어가던 미궁은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끼이익⎯!
이윽고 잠잠해진 미궁으로부터 문이 개방되었다.
이대로 들어올 수 있을 테면 한 번 와보라는 가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제안을 받고도 포기할 내가 아니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미궁에 들어가려는데, 바로 뒤에서부터 내 이름을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자네 잠깐 멈춰보게나! 5분… 아니, 1분이라도 괜찮으니 자네만 괜찮다면 조금만 얼굴을 보고 가게….”
“아 미안한데, 이미 선약이 잡혀 있어서.”
나는 그의 말꼬리를 자르고는 미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바로 뒤에서부터 아쉬워하는 낌새가 팍팍 느껴졌다.
커뮤니티를 보면 플레이어들 간에 저 아저씨에 대한 욕이 워낙 말았는데, 저렇게 남에게 관심 가져주는 보니 또 그런 것만은 아닌 거 같았다.
역시 커뮤니티는 믿을 게 못 되나 보다.
“여하튼 나하고는 별 상관없는 일이지만.”
지금의 나에게 우선순위는 미궁.
이곳을 클리어하는 게 먼저다.
* * *
끼이익! 철컹!
미궁에 들어서자마자 소름이 끼치는 금속음과 함께 출입구가 잠겼다.
혹시 몰라 문에 손을 가져다 대고 힘을 줬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걸로 퇴각로는 끊겼다.
물론 처음부터 도망친다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 나한테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
발걸음을 뻗을 때마다 천장에 걸린 횃불에 불꽃이 화르르 붙으며 미궁 내부가 활짝 밝혀졌다.
확실히 밖에서 본 것보다도 더 넓은데?
체감상 바깥에서 본 것보다도 몇 배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이것도 탑의 권능인가?”
뭐, 그건 둘째치고.
규모 면에서도 거대해진 만큼 나오는 괴수의 수도 이전과는 달라진 듯 보였다.
그도 그럴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살기를 뿜으면 당연히 알지.’
나는 등에 짊어진 검을 땅바닥에 내려둔 다음, 주먹을 서로 맞붙이 치며 전의를 끌어올렸다.
횃불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에서부터 수십 개의 붉은 안광이 번뜩인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수십.
기척으로 느껴지는 괴수들은 수백을 훌쩍 넘었다.
확실히 탑에 들어온 뒤로 상대한 괴수와는 체급부터가 다르다.
“후우… 간만에 몸 좀 풀 수 있겠네. 요즘엔 하도 안 움직이다 보니 찌뿌둥했었는데 잘됐네.”
이어지는 대립 상황 속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나였다.
상당한 속도로 괴수의 턱밑에 파고든 나는 가볍게 정권을 찌르는 것으로 놈의 관절을 꺾고는, 휘청이는 타이밍을 계산해 놈의 턱을 걷어찼다.
반항할 새도 없는 빠른 타격에 괴수는 공중으로 나가떨어졌다.
벽에 부딪히는 것으로 괴수는 절명했다.
단 5초 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압도적인 무위.
일반적인 괴수 같았으면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났을 텐데, 괴수들은 두 눈에 호승심을 불태웠다.
-크에에에엑!
귀청을 울리는 포효 소리를 시작으로 괴수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다방면에서 쏟아지는 괴수.
본의 아니게 포위망이 만들어진 격이지만, 나한테는 이미 익숙하다.
“스읍!”
깊게 숨을 들이킨다.
타앗!
나는 지면을 박차고 상공으로 뛰어오르면서 그 가속력을 사용해 괴수의 머리를 박살 내고는 이어서 발로 걷어찬다.
괴수의 시체를 지르밟으며 공중에서 공중으로 이동했다.
가히 범접할 수 없는 속도와 파워!
뜻밖의 상황에 대부분의 괴수가 당혹스러워하는 도중, 우람한 거구를 자랑하는 고릴라형 괴수가 주변에 떨어진 시체의 다리뼈를 우악스럽게 뜯어냈다.
촤아아악!
다리의 절단부로부터 산성을 띠는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지만, 고릴라형 괴수는 괘의치 않는다는 듯 콧김을 내뿜는다.
놈의 기백에 주변에 서 있던 괴수들은 눈치를 보며 물러났다.
고릴라형 괴수는 땅바닥에 뼈를 박고는 자기 가슴에 양 주먹을 휘둘렀다.
어느새 저놈을 제외한 다른 괴수는 눈을 아래로 깔고는 뒤로 물러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만들어진 1대1 구도.
오호라, 괴수들 사이에도 서열이라는 게 있나 보네.
“맞대결이라… 좋지.”
튜로리얼에선 한 번도 볼 수 없는 상황의 연속에 나는 비릿한 웃음기를 얼굴에 띠었다.
나야말로 환영이다.
나는 그 대결에 응한다는 의미로 주먹을 거두고 바닥 내려뒀던 검을 쥐었다.
그제야 만족했는지 놈은 괴수의 다리뼈를 뽑아 들고는 뜨거운 콧김을 내뱉었다.
싸늘한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나는 녀석에게 두 손가락을 펼치며 말했다.
“딱 2합. 넌 두 번이면 충분해.”
어때? 기왕이면 빨리 끝내주마.
내가 보낸 제스처를 눈치챘는지, 놈은 잔뜩 분노한 얼굴로 달려들었다.
역시나 예사로운 놈은 아닌 모양이었는지 분노한 와중에도 무기의 끝은 냉정하고 예리했다.
허나.
그게 전부였으면 애초에 덤빌 생각을 말았어야지.
나는 무미건조한 움직임으로 검을 좌에서 우로 그었다.
복잡한 기교나 검술이 들어가지 않은 아주 단순한 휘두름.
괴수의 뼈와 내 검이 중간에서 맞붙이 친다.
하지만 놈의 무기는 허무하리만치 쉽게 두 동강 났다.
이걸로 한 합.
상상치도 못한 상황에 놈은 당황한 얼굴을 지으면서도 노련하게 재정비를 거친 후, 내 얼굴을 향해 우악스러운 주먹을 내찔렀다.
더할 나위 없는 대처였지만.
“틀렸어. 나한테 정말로 맞설 생각이었으면.”
다시 달려드는 게 아니라 그 길로 도망쳤어야지?
나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놈의 주먹을 간단히 회피한 다음에 검을 내질렀다.
솨악!
통나무같이 두껍던 놈의 목은 그걸 끝으로 간단히 떨어졌다.
단 두 합 만에 목을 잃은 괴수는 아주 허무하게 쓰러졌다.
나는 얼굴에 묻은 피를 손끝으로 스윽 닦으며, 남은 괴수를 향해 선언했다.
“그래서 다음은 누구야? 들어올 테면 들어와.”
누구든지 받아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