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5화 (5/175)

제5화

한 방만에 다진고기가 되어버린 고블린은 그대로 벽 한가운데에 박혔다.

그 영향으로 인해 벽의 정중앙에서부터 시작해 금이 거미줄처럼 쩌저적 갈라지더니, 붕괴가 일어났다.

나조차도 전혀 생각지 못한 전개.

“이건 뭐야?”

나는 넋을 잃은 채 고블린과 왼손을 번갈아 봤다.

별다른 스킬이나 블러프를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탑의 1층은 어떤 수준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가볍게 툭 쳤을 뿐.

그다지 힘을 준 것도 아니다.

‘알고 보니까. 탑의 수호자 같은 게 아니고 노쇠한 바람에 고블린들 사이에서 낙오된 그런 건가?’

간혹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런 부류가 있지 않은가.

오죽하면 저 고블린도 비슷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양쪽 눈을 비비며 다시 확인해봤지만, 내 주먹이 적중한 수호자의 대가리는 흔적도 없이 폭발했으며 여파로 인해 몸은 걸레짝이 되었다.

그제서야 현실을 직시한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 있을 때쯤이었다.

쿠구구궁!

수호자가 박혀있던 벽에서부터 균열이 균형이 발생하더니, 놀라고 있을 틈도 없이 붕괴가 일어났다.

통로 전체가 붕괴에 휘말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5분가량이 남았을까.

나는 다음 층으로 올라갈 것이냐고 물어보는 시스템을 무시한 채, 다진고기가 된 고블린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갈 땐 가더라도 빼먹을 수 있는 건 전부 빼먹고 가야지.’

하나하나가 성장을 하기 위한 밑바탕이다. 이런 꿀 같은 기회를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순 없지.

나는 다진 고기가 된 고블린의 몸에 손을 대며 권능을 발동했다.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연보랏빛의 빛은 마치 촉수처럼 변하며 고블린의 몸을 휘감았다.

이걸로 능력치를…

〈삐삑! 획득 실패!〉

〈얻을 수 있는 스탯의 양이 너무 적습니다.〉

“어?”

권능에도 제한이 있는 거였어?

튜토리얼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문구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하긴 이상할 것은 없었다.

튜토리얼에 있을 당시엔 덩치가 산만 하고 각종 개조를 한 괴수들까지도 상대했었는데, 그런 놈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하고 있을 때였다.

〈직업: [이터]의 부가 권능으로 대상의 기억을 흡수합니다.〉

“기억? 이런 효과도 있었나?”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이내 수긍했다.

튜토리얼 안에서 발생하는 괴수들은 전부 시스템에 의해서 짜인 물체인 것에 반면 탑의 괴수들은 모두 지력과 의지를 가진 어엿한 생명체다.

권능이 다른 방향으로 개화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나는 곧바로 권능을 사용해 수호자의 기억을 흡수했다.

일순간 수호자에 대한 단편적인 필름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기억들을 차분히 정리해 순서대로 나열한 나는 히죽 웃었다.

불과 일주일 사이의 단편적인 기억이었으나, 고블린인 주제에 대박 정보가 들어 있었다.

“이거면 충분하지.”

나는 2층으로 올라가라는 시스템의 권유를 무시한 채 수호자가 걸어왔던 방향으로 달려갔다.

방금의 충격으로 인해 떨어진 잔해들이 정면을 가로막았지만, 내 앞에서는 장애물조차 되지 못했다.

손을 휘두르자 풍압만으로도 장애물이 쓸려나갔다.

힘 조절을 적당히 하지 못하는 지금으로선 몸을 부딪치는 직접적인 수단보단 간접적인 방법이 유용했다.

괜히 일을 만들었다가 1층이 붕괴라도 되면 곤란할 뿐이었다.

끝도 없는 복도를 달리자, 얼마 가지 않아 넓은 규모의 공동이 펼쳐졌다.

처음 보는 장소.

허나 얼 타고 있을 틈은 없다.

“여긴가.”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공동에 설치된 비석을 향해 달려나갔다.

수호자에게서 봤던 기억의 파편과 주변 환경은 동일했다.

그렇다면 확실하다.

확신을 거듭한 나는 찰나의 고민도 없이 로우킥으로 비석을 걷어찼다.

대포가 터지는 듯한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 난 비석.

풍압을 이용해 잔해를 걷어내자 그 자리에는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법한 크기의 포탈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럼 그렇지. 정답이었네.”

나는 시선을 돌려 시스템을 바라봤다.

〈2층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5초 안에 선택해주시지 않으면 1층에 영원히 갇히게 됩니다.〉

〈5, 4, 3……〉

〈어서 결정해주십시오!〉

마치 이곳을 은폐하려는 듯이 다급하게 떠오르는 상태창.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이걸 보고 다급히 2층으로 향한다고 선택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이것 자체가 일종의 트리거.

나는 지구에 있을 적에 봤던 공략집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 평등하게 탑에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시작점은 다르다.

처음에는 플레이어마다 경험치 양이 다르다는 걸 암시하는 구절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파고들면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더라도 튜토리얼에서부터 모두가 알 수 있는 사실을 뭐하러 표현했을까.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니 나는 그에 대해 생각해봤다.

‘사과는 과일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셈이니까.’

그리고 나는 그 답을 금방 도출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에 한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탑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정의라고.

그 해답은 바로…

“수호자의 기억이지.”

이터의 권능을 통해 획득한 수호자의 기억에 의하면 원하는 것은 바로 이곳에 숨겨져 있으리라.

짧은 고민 끝에 결론을 내리고는 포탈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비밀 구역으로 향하는 트리거를 해제하셨습니다.〉

“빙고.”

답은 바로 근처에 있었다.

* * *

〈비밀 구역 2-4에 진입합니다.〉

〈이곳을 클리어할 시, 2층~4층을 건너뛸 수 있으며 활약에 따라서 보상이 차등 지급됩니다.〉

눈을 뜨자, 환한 섬광과 함께 어두운 공간이 펼쳐졌다.

주변을 둘러보자 아주 멀리서부터 피비린내와 유황의 냄새가 짙게 느껴졌다.

지구에 있을 당시에도 탑에 대한 공략집과 각종 정보를 착실하게 수집한 나로서도 처음 들어보는 장소.

“탑에 미개척된 비밀 공간이 여럿 존재한다고는 들었는데, 층을 건너뛸 수 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인데.”

탑은 무조건 한 층, 한 층을 클리어하면서 등반해야 한다.

이는 하늘이 다시 열린다고 한들 깰 수 없는 불문율이라고 여겨졌다.

많은 랭커들과 과학자들이 오랜 기간 연구한 결과 밝혀진 이야기일 터.

혹시 몰라 커뮤니티에 검색해봤지만, 다른 플레이어들 중에서 나와 같은 사례를 겪었다는 얘기는 없었다.

‘그렇단 얘기는 내가 최초라는 거네.’

나는 싱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탑의 5층은 모든 플레이어들이 모이는 안전지대.

2층에서 4층을 한 번에 건너뛸 수 있다는 이야기는 크나큰 메리트였다.

필요 없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결심을 마친 나는 유황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호자의 단편적인 기억을 통해 대략적인 위치라면 꿰뚫고 있으니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자,

“크르릉.”

늑대와 봉황을 두루 섞은 듯한 이미지의 괴수가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1층에서 상대했었던 수호자들이 경비를 지키고 서 있었다.

이 장소를 간략하게 성명하자면.

일종의 탑의 감시망, 그리고 저기에 있는 개새끼가 일종의 중간 관리자였다.

“요는 저 개새끼를 두들겨 패면 된다는 거잖아.”

난 또 복잡한 일이 아닐까 하고 긴장했는데 별거 아니었네.

다른 플레이어들이었다면 저걸 보자마자 쫄았겠지만, 반대로 나한테는 굉장히 반가운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개새끼 하나 조련시키는 거라면 내가 전문이지.”

튜토리얼에 있는 천 년간 개와 관련된 종은 내 손으로 거의 다 때려 잡아봤다.

오만 종을 섞은 혼종들에 비해 온전히 개의 형태가 남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귀여워 보였다.

치지지징칭!

땅바닥에 걸음 질질 끌며 다가가자 쇳소리에 반응한 수호자들이 살기를 품으며 달려온다.

1층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존재들의 공격.

내 실력을 모르던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우습기 짝이 없었다.

“막을 수 있으면 막아보던지!”

양손에 힘을 실어 검을 휘두르자 수십 미터 밖에 떨어져 있던 수호자들은 저 너머로 나가떨어졌다.

오러나 마법 같은 거창한 힘이 아니다.

그저 강한 풍압을 일으킨 것뿐.

이걸로 놀라기에는 한참 이르다.

나는 지면을 박차고 단숨에 놈의 코앞까지 다가간 뒤에 검을 좌에서 우로 크게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놈의 가죽이 손쉽게 절단되더니,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위협을 느꼈는지 나를 견제하기 위해 괴수는 입에서 불꽃을 내뿜었다.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펼쳐진 화염은 사방을 화르르 전소시키며 타오른다.

비장의 한수로는 썩 나쁘지만은 않은 공격이었으나.

“이 정도 화력으로는 고기도 못 구워 먹겠네.”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불길 속을 뚫고 걸어 나왔다.

튜토리얼에서 겪었던 고온의 화염에 비하면 불꽃이라고 부르기도 뭣했다.

괴수 역시 이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는지 볼만한 표정이었다. 튜토리얼 내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양한 감정 변화.

너무 놀랄 것은 없다.

“튜토리얼 외에서 괴수를 만난 건 나도 네가 처음이니까. 신경 쓰지 마.”

피차 첫경험인 셈이니 쌤쌤이네, 너무 원망하진 마라.

나는 아주 살짝 힘을 실어 놈의 대가리에 주먹을 휘둘렀다.

-끼잉! 끼잉! 깨개갱!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괴수는 개소리를 내며 몸을 까뒤집었다.

명색이 중간 관리자라는 존재인데 절로 부끄러워질 정도로 적나라한 광경.

혹시 내 허점을 노리고 반격하기 위한 엄살인가 싶었는데,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인지 너무나도 생동감이 넘쳤다.

나는 주먹을 휘두르다 말고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어… 이것도 최대한 힘 빼서 한 건데….”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건 전부 좋은데, 전부터 시작해서 하필이면 이게 문제다.

그놈의 힘 조절.

다른 플레이어들의 평균 레벨은 알 수 없지만, 초반부인 1층의 난이도를 연상하자면 현재 내 위치는 쉽게 지레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필요한 정보는 대충 습득했으니까. 슬슬 끝내볼까.’

흥이 식었다.

나는 차갑게 식은 얼굴로 검을 휘둘러 괴수의 머리를 뎅강 날렸다.

분리된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나왔다.

이걸로 상황은 마무리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중간 관리자가 목숨을 잃자, 공간 전체가 무너지듯 붕괴하기 시작했다.

〈최단 시간으로 비밀 구역을 클리어하셨습니다.〉

〈곧바로 안전구역 5층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안전지역의 환경은 플레이어의 정보와 클리어 속도를 종합하여 결정됩니다.>

〈플레이어의 정보와 클리어 속도를 종합하여 지급될 보상을 집계 중입니다.〉

〈따링! 보상이 지급됩니다.〉

무수히 많이 떠오른 창들과 동시에 내 앞으로 엄청난 섬광이 솟구쳤다.

이윽고 지급된 보상을 확인한 나는 눈을 번쩍 뜨며 외쳤다.

“이…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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