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3화 (3/175)

제3화

아무런 예견도 없이 갑작스럽게 눈앞에 떠오른 레벨 업의 문구.

그와 동시에 레벨 업을 암시하는 환한 섬광이 내 몸에서 발했다.

방금의 전투로 인한 잔상처가 하나도 빠짐없이 치유됐으며 숙면을 푹 취하고 일어난 것처럼 기력이 회복되었다.

환상도, 꿈도 아니었다.

수백 년간 내가 그렇게도 바래어 왔던 레벨 업이었다.

“아….”

나는 짤막한 탄성을 지르며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수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튜토리얼 내에 있으면서 감정이 결핍된 줄 알았는데,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수많은 세월을 튜토리얼에서 허비한 보상을 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것도 잠시.

이내 처한 현실을 깨달은 나는 제자리에서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어? 잠깐만 아무 문제 없이 레벨업이 됐다는 뜻은….”

내 레벨은 버그가 걸린 게 아니라는 뜻이잖아.

그 말은 곧 3레벨을 달성하기 위해선 399년 가까이 튜토리얼에서 썩은 것과 마찬가지의 세월을 또다시 보내야 한다는 얘기다.

아니, 더 세세하게 따지자면 레벨은 오르면 오를수록 필요로 하는 경험치는 더 늘어난다.

아무래도 2배나 3배처럼 급격한 상승 폭을 그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2레벨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백 년이 걸렸던 나한테는 그게 그 말이나 다름없었다.

직접 처한 현실을 깨닫자, 없던 절망감마저도 생기는 기분이었다.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매고 있던 나는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아니지. 그래도 아무도 없는 튜토리얼 안에서 영원히 있는 건 아니란 뜻이잖아.”

기왕이면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자.

언젠가는 탈출이 가능하단 얘기니까.

게다가…

〈2레벨의 달성 특전으로 직업 선택이 해금됩니다.〉

‘그렇지!’

눈앞에 떠오른 창을 확인한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망의 직업 선택!

지금까지는 2레벨이 더욱 절실했기 때문에 직업 선택에 대해선 뒤로 미뤄놨으나. 튜토리얼에 들어올 때부터 얼마나 꿈에 그리어 왔는지 모른다.

꽤 오래전 일이긴 해도 같이 튜토리얼에 들어온 기수들을 보고 철저하게 분석했다.

‘분명 초기 선택은… 마법사, 도적, 궁수, 전사.’

〈기본 직업으로는 마법사, 도적. 궁수, 전사가 있습니다.〉

〈한 가지를 선택해주십시오.〉

역시나였다.

내 예상대로의 상황, 그리고 기다림의 기간은 수백 년이나 있었으니 내가 선택할 직업에 대해선 상당히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나는 괴수의 뼈로 만든 대검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응당 진정한 고수라면 검을 사용해야지.”

고민은 없다.

부푼 가슴을 진정시키며 검을 다루는 전사를 선택하자.

〈삐삑!〉

〈플레이어님의 육체 스텟은 전사의 능력치 상한선을 초과하셨습니다. 따라서 전사의 선택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내 로망을 박살 내듯 상태창으로부터 내 손이 튕기며, 선택지 중 하나가 사라졌다.

지금껏 튜토리얼 내에서 한 번도 벌어지지 않은 일.

“어?”

당혹스럽긴 했지만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남은 선택지를 바라봤다.

“후… 그래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했잖아.”

비록 대검을 못 쓰더라도 도적 같은 경우에도 같은 검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

부정할 이유는 없었다.

다시 한 번 더!

〈삐삑!〉

〈플레이어님의 육체 스텟은 도적의 능력치 상한선을 초과하셨습니다. 따라서……〉

“또?”

나는 억울한 표정으로 상태창을 노려봤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2개.

마음 한편에서 짜증이 확 올라봤지만, 최대한 참았다.

인생에서 단 한 번밖에 없는 기회 놓칠 순 없었다.

“아무렴 궁수도 괜찮지.”

〈삐삑!〉

〈플레이어님의 육체 스텟은 궁수의 능력치 상한선…〉

“…….”

여지없이 발생한 창.

이걸로 남은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치솟은 짜증으로 인해 온몸의 핏대가 솟아올랐지만, 나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래,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2레벨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비록 내 마음에 안 바르다고 해도 예전에 비교하면 감사하고도 남을 일이다.

“하… 조금 마음에 안 들더라도 마법도 나쁘진 않지.”

어떤 게임에서는 마법을 사용해 온몸에 버프를 걸고 전장에서 학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통하는 밈에 따르면 마법(물리)라고 하던가.

게다가 어쩌면 내 적성에 맞을지도 모르는 일.

한 차례 결심을 마친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은 선택지를 눌렀다.

그러자.

〈삐삑!〉

〈플레이어님의 육체 스텟은 마법사의 능력치 상한선…〉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에 봤던 문구가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이젠 인내심에도 한계다.

“야!! 이 새끼들아!! 다른 것도 전부 안 된다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나는 검을 휘둘러 눈앞에 떠 있는 창을 베어 가르며 울분을 담아서 고함을 질렀다.

설마설마했는데 남아있는 모든 선택지가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이걸로 내가 고를 수 있는 직업도 이걸로 끝.

허무하다 못해 이젠 분노할 기운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걸 포기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으려던 때였다.

〈플레이어의 적성을 재탐색 중입니다.〉

〈히든 트리거의 해제 조건 완료!〉

- 괴수 1,000,000,000마리 이상 처치

- 누적 경험치 1조 이상 획득

- 튜토리얼에서 1,000번 이상 사망하기

〈해당 조건을 전부 클리어해, 히든 직업: 이터(EATER)를 획득합니다.〉

“어?”

이건 또 뭐야.

단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직업의 이름에 나는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지구에 있을 당시에도 이런 튜토리얼 내에 히든 직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히든 직업의 해방 조건이 저따위면 아무도 모를 만도 하네.’

상식적으로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이 클리어하는 것은 불가능한 조건투성이였다.

그 말은 간단했다.

이 직업을 가진 것은 지구상에서 나 하나뿐.

무엇보다도 직업을 획득하자마자 원래부터 내 몸인 양, 직업의 사용방법까지도 전부 머릿속 안에 들어왔다.

가만히 앉아 정보를 정리하던 나는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속물적인 미소를 지었다.

“잘 됐네.”

이거 잘만 써먹으면 제대로 뽕을 뽑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로운 변화도 있었겠다.

나는 새롭게 획득한 직업을 시험해보기 위해 검을 쥔 채로 사냥한 괴수의 옆으로 다가갔다.

2레벨에 획득할 수 있는 직업은 저마다 각기 다른 스킬을 지니고 있다.

검사는 검술, 마법사는 마법처럼 전투나 일상생활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스킬이라는 형태로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획득한 히든 직업 [이터]는 아주 간단한 능력이었다.

‘죽은 괴수가 가진 스탯의 일부분을 빼앗아 영구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야말로 이터(EATER)라는 호칭과 딱 맞는 능력이었다.

하나 일부분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단어였다.

직접 실험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직접 여기까지 찾아왔고.

괴수의 머리 위에 손은 가져다 대자, 맞닿은 손바닥에서부터 연보라빛의 섬광이 뿜어져 나오더니 괴수의 몸을 뒤덮었다.

1초가량의 시간이 지난 후.

권능을 발동한 나는 손바닥을 쥐락펴락하며 간단하게 몸을 움직여봤다.

혼신을 다해 집중하고 느껴야지만 간신히 느껴질 정도로 적은 신체 변화.

다른 직업과는 달리 바로 직후에 도움이 되는 능력이라고는 부를 순 없었으나.

꽈드득!

나는 손에 쥔 괴수의 다리를 단숨에 박살 내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사소한 변화가 매일 매일 거듭되어 수십 년… 수백 년이 차곡차곡 쌓이게 되면 어떤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까.

하물며 트레이닝을 매일매일 해도 근육이 발달한다.

한데 거기에 도핑까지 더한다면 그 효과는 내 상상을 가뿐히 뛰어넘고도 남으리라.

그야말로 오직 나를 위해 준비되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능력이었다.

우선 일차적인 목표는 정해졌다.

“3레벨이 되기 전, 튜토리얼을 벗어나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스탯을 흡수해서 최강이 되는 것.”

그러고 나서 완전한 무장을 갖춘 뒤에 탑에 진입한다.

계획은 완벽했다.

* * *

탑에 들어온 지도 벌써 한참이 지났다.

1레벨에서 2레벨로 오르기 위해서 걸린 세월보다도 더 긴 시간.

일일이 세는 것조차도 힘겨울 정도로 엄청나게 긴 기간이었지만, 시간을 세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999년 364일 17시간 58분.〉

고개를 돌리자 분 단위로 점멸하는 창이 눈에 들어왔다.

999년, 그것은 내가 튜토리얼에 들어온 뒤로 지난 시간이었다.

일반인이라면 까무러치고도 남을만한 세월이었으나 내가 멀쩡히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2레벨- 직업: 이터〉

“레벨이 오른다는 뜻은 곧 3레벨도 있다는 얘기니까.”

2레벨이 되고 나서부터 수백 년이 경과 했다.

지구에서 주워들은 지식과 같은 기수의 플레이어들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한 내 계산이 맞다면 기다림의 기간도 이제 곧이다.

튜토리얼 안에서의 생활도 전부 청산했으니 남은 미련은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의 일과로 괴수를 쓰러뜨렸을 때였다.

〈3레벨이 되었습니다.〉

〈탑에 진입하시겠습니까?〉

〈YES/NO〉

레벨업을 증명하는 환한 섬광과 함께 두 개의 선택지가 생성되었다.

고민할 가치조차도 없는 내용이었다.

그야 그에 대한 답이라면 999년 전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

“당연히 예스지.”

감동에 벅차 떨리는 손가락으로 선택지를 누르자, 내 의식이 새하얗게 물들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걱정할 것은 없었다.

튜토리얼이 종료되고 탑에 진입할 때 발생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

나는 흐름에 몸을 맡기며 말했다.

“드디어 탑이다.”

* * *

〈플레이어 일괄 메시지: 31기수의 마지막 도전자가 튜토리얼을 클리어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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