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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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리지않는 헬멧을 쓰고, 배트를 든 게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선수.
하지만 저 어설픈 타자에게 명전행이 확정이라는 그레인키는 제대로 한방 얻어맞고 말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커쇼는 그날 그 방송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저렇게 어설퍼 보이는 타자가 의외로 타격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빚은 갚아주되.... 조금의 방심도 하지 말자. 최고의 공을 던지고 창피를 안겨주는거야!'
지금 열리는 월드시리즈는 아메리칸리그 구단들을 모두 이겨낸 팀과 내셔널리그 구단들을 모두 이겨낸 팀이 벌이는 대결이었다.
두 리그는 서로 규정에 차이가 있는 만큼 내셔널리그 홈구장에서는 내셔널리그 규칙이, 아메리칸리그 홈구장에서는 아메리칸리그의 규칙이 적용되었다.
오늘. 월드시리즈 1차전은 내셔널 리그 팀인 LA 다저스의 홈구장에서 열리는 경기.
이들의 규칙은 지명타자 대신 선발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는 것이었다.
'삼진을 잡아서 팀의 분위기를 바꾸는 거야.'
클레이튼 커쇼가 글러브 속에 있던 공을 꺼내며 네 손가락으로 공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셔널리그 규정에 따라,
오늘 뉴욕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1차전 마운드를 책임지고 있는.
성호가 배트를 움켜쥐고 타석에 들어섰다.
1.
월드 시리즈 1차전.
그러니까 LA 다저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상대 선발 투수가 다저스의 에이스 클레이튼 커쇼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클레이튼 커쇼를 상대해 본 타자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개리! 넌 커쇼의 공을 상대 해 봤잖아. 혹시 약점 같은거 알아?"
"클레이튼 커쇼? 나야 무조건 내가 치기 편한 포심 패스트볼을 노리고 타석에 들어서지. 타석에서는 어김없이 한 개 이상의 포심 패스트볼이 날아오거든."
개리 산체스의 답은 간단했다.
"커쇼의 투구 중에 포심 비율이 50퍼센트에 가까운데 타석에 서면 2개의 공 중 하나는 포심을 던진다는 거잖아. 그중 완벽한 코스로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면 알고도 못 치는거고, 혹시나 제구가 좀 안되서 몰렸다 싶은 공을 치면 1루를 밟을 수 있는 거고. 뭐, 난 그걸로 만족하고 있어. 어차피 그를 상대로 홈런을 치는건 엄청 힘든 일이니까."
"토드 프레이저는?"
"어, 음.... 나는."
이에 반해 오랜 선수 생활동안 그를 많이 상대해본 토드 프레이저의 이야기는 훨씬 더 개인적인 경험에 가까웠다
"긁히는 날이 아니라면 커브볼을 노리지. 그게 커쇼가 던지는 공 가운데 가장 날카롭다 생각하거든. 그래서 타이밍이 뺏기기 쉬워서 쳐내기 힘든 건 사실인데, 커브 특정상 기다리다보면 타이밍을 맞추기 쉬우니까."
개리 산체스가 통계적인 정보를 이용해 결과를 내길 원했다면, 토드 프레이저는 개리 산체스에 비해 자주 치지 못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치고 있었다.
"이건 내가 커쇼랑 안면이 좀 있어서 아는 사실인데 사실 커쇼가 자기 커브를 가장 자신있어하거든. 근데 아무리 커브라고 해도 구종을 기다리는 타자에겐 속수무책이잖아. 그래서 그의 커브를 쳐낼 땐 그만큼 짜릿하기도 해. 그리고 다음 타석에서도 자신감이 두 배로 커지기도 하고."
재밌는 것은 두 선수 모두 클레이든 커쇼를 상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순순히 인정했다는 것이다.
보통의 다른 투수를 타석에서 상대할 때라면 굳이 노림수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아도 될 베테랑 선수들이, 클레이튼 커쇼에게만큼은 그가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만의 대비책을 찾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메이저리그에서 최고로 홈런을 잘 치는 외야수, 지안카를로 스탠튼 역시 마찬가지였다.
"으음. 리, 뭐라고? 커쇼 상대로 노리기 쉬운 공? 역시 커브 아닐까? 내 경험상 그 공을 예측했을 때 가장 띄우기 쉬웠거든. 그리고 그걸 알아야 돼. 커쇼 상대로 어중간한 안타를 하나 쳐낸다고 해서 점수를 무조건 뽑아낼 수 있지 않아. 포스트시즌의 그라면 다르겠지만 이번 월드시리즈에선 컨디션도 좋다고 하니까..... 무조건 한 방에 점수를 낼 수 있는 홈런이 최고겠지?"
그리고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되고 드디어 나의 첫 타석이 돌아왔다.
2.
3회 초 투 아웃 상황.
주자는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타석에 들어섰다.
겉으로 보이는 표정은 담담했지만, 머릿속으로는 경기전 양키스 타자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정리하며 그들과 마찬가지로 클레이튼 커쇼에 대응할 자신만의 대응책을 찾기에 바빴다.
그리고 가진 의구심.
'커쇼가 날 상대로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까?'
보통의 상황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투수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볼 판정을 받을 수 있어 변화구를 던지지 않는 투수는 무수히 많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클레이튼 커쇼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정평날 만큼 끝내주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줄 아는 선수였다.
설사 커쇼가 이번에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거라는 사실을 괴짜 그레인키가 그랬던 것처럼 정확한 사인으로 알려줘도 쳐내지 못할 타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전 타석에서 토드 프레이저를 삼진으로 잡았을 때로 던진 공도 바로 포심 패스트볼.
이미 그의 공은 충분히 봐둔 상태였다.
'나를 경계하는 낌새인 것 같은데.... 공이 눈에 익었다고 생각하는 구나.... 그럼 포심 대신 역시 변화구를 던지겠다. 커브는 좀 그러니 슬라이더? 그래. 슬라이더를 결정구로 던질 확률이 제일 높은 것 같아.'
커브가 될 순 없었다.
아무리 클레이튼 커쇼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커브를 던진다 할지라도, 커브는 상대의 노림수에 걸렸을 때 가장 위험할 수 있는 구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투수인 나를 상대로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지 않을 것을 가정하면, 그와 반대되는 커브 역시 던지기 어려울 게 분명했다.
두가지의 구종을 섞어서 던진다면 타자의 타이밍을 완전히 어긋나게 할수 있겠지만, 하나만 던질 수 있다면 포심 패스트볼은 몰라도 느린 속도로 날아오는 커브는 애초에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커쇼에게는 다른 훌륭한 선택지가 여럿 있었으니 말이다.
알고도 칠 수 없는 그의 슬라이더.
커쇼는 데뷔 초, 포심 패스트볼과 커브 조합으로만 던지다가, 슬라이더를 장착한 이후에야 최고 투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요즘 야구팬들에게는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가 가장 유명하지만, 그 이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레프티 그로브 - 워렌 스판의 뒤를 잇는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좌완 투수 중 한명인 스티븐 칼튼이 있었다.
그의 결정구 역시 날카롭게 뻗어나가는 슬라이더.
그 날카롭던 그의 슬라이더가 오랜 팬들의 기억에서 잊혀질만큼 커쇼윽 슬라이더를 치기 어려웠고 팬들에게서 칭송을 받기 시작했다.
그만큼 커쇼의 슬라이더는 치기 어려웠고, 상대 타자가 이를 노리고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마음 놓고 던질 수 있는 구종 중 하나였다.
'답은 정해졌네.'
타석에 선 나는 배트를 세게 움켜쥐었다.
노리는 공은 오직 하나.
나의 컷 패스트볼과 같은 위력을 지닌 클레이튼 커쇼의 명품 슬라이더.
그것이 답이었다.
그리고 내가 슬라이더를 노리는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커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와인드업을 가져갔다.
'몸쪽'
좌투수인 클레이튼 커쇼가 던진 공이 우타자인 나의 몸쪽을 파고 들었다.
구종은 짐작한 대로 슬라이더였다.
나는 이 기회가 다시없을 것임을 확신하고, 조금의 힘도 남기지 않은 채 배트를 휘둘렀다.
다행히 공과 배트가 점차 가까워지는게 눈에 들어왔다.
완벽해보이는 타이밍!
그리고 공과 배트가 맞다은 순간.
-쫘악!
데구르르르르르.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이 하늘로 치솟았다.
하지만 배트가 부러져버렸다.
그리고 공은 느린 속도로 투수 앞으로 떠올랐다.
마운드에 선 클레이튼 커쇼는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 당연한 표정으로 뜬 공을 잡아내고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덕아웃으로 향했다.
그리곤 다시금 뒤를 돌아보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고.
'해보자는 거야?'
과거, 잭 그레인키와 있었던 일.
그 일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래도 다른 점이 있었으니.
'후우.. 그때에 비해 쉽지는 않겠네.'
아무리 스킬의 능력이 있어도 낮은 등급.
나는 커쇼의 슬라이더가 자신이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력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월드시리즈. 어쩌면 쉽지 않겠어.'
내가 전생에 들었던 클레이튼 커쇼.
그는 전생에 내가 들었던 그 선수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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