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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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오늘 경기에서의 내 투구는 짧게는 1이닝. 많으면 2이닝으로 끝이었다.
한마디로 시즌을 보낼 때처럼 힘을 아끼고 자시고 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였다. 평소 나는 선발 등판일에 불펜투구장에서 30구 가량의 공을 던지며 몸을 풀고는 했다. 하지만 오늘은 거기에 30구 가량을 더 던졌다.
'무조건 공격적으로'
평소 나는 볼넷을 내주느니 과감하게 던져서 두들겨 맞겠다는 식의 공격적인 플레이를 즐겼다. 모든 타구는 안타가 아닐 뿐더러, 실제로 투구 수를 절약하기 위해서는 볼넷을 주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투구 수를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즉, 오늘 마운드에 가장 먼저 오른 나였지만 선발 투수가 아닌 불펜 투수처럼 경기를 운영할 생각이었다.
아메리칸 리그 올스타전 포수로 낙점 받은 개리 산체스에게도 이미 말해둔 바였고.
-뻐엉!!
초구 몸쪽 높은 코스 106마일의 포심 패스트볼.
날카롭게 날아갔다. 하지만 마지막에 조금 더 채여서 그런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높게 로케이션이 형성됐다. 내셔널 리그 1번 타자 블랙먼이 휘둘렀던 방망이를 급작스럽게 멈춰세웠다.
"스트라이크!!!!"
하지만 심판의 입에선 콜이 튀어나왔다. 이에 나의 공을 받았던 개리 산체스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리그에서 프레이밍으로 손꼽히는 포수 중 한명인 개리 산체스인만큼 몸쪽 높은 코스로 날카롭게 살짝 빠져나간 포심 패스트볼을 스트라이크 콜로 변모할만큼 그의 프레이밍은 최근 나와 함께 한단계 더 나아가고 있었다.
블랙먼은 이게 왜 스트라이크냐는 표정을 지었다. 심판에게 몇마디를 건넸지만 심판의 반응을 보아하니 오늘 상당히 후한 판정을 펼칠듯 싶었다.
오늘은 올스타전, 일종의 축제인 만큼 그리 빡빡하게 굴지 않겠다는 것.
제 2구.
개리 산체스가 보낸 사인은 바깥쪽 낮은 코스.
-부웅!!
"스윙, 스트라이크!!!"
존 밖으로 빠져나가는 낮은 코스 슬라이더에 블랙먼의 배트가 스트라이크존을 반으로 쪼개버렸다. 초구의 후한 판정 덕분인지 여전히 개운치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제 3구.
개리 산체스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세 번째 공을 던졌다.
-부웅!!
"스윙, 스트라잌 아웃!!!"
몸 쪽 하단에 깊숙하게 파고드는 106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에 블랙먼의 배트가 뒤늦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입니다!! 아메리칸리그 올스타팀의 선발투수인 19살의 리가 선두타자인 찰리 블랙먼을 삼구삼진으로 잡아냅니다.]
[휴우~ 저게 그 106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이군요. 정말 말도 안되는 구속입니다. 해설석에서 지켜봐도 뭐가 지나가는지 보이지도 않는데 타석에선 타자들은 어떨까요? 이건 무조건 헛스윙할수밖에 없죠.]
[리가 무섭다는 것은 제구 또한 완벽하다는 것입니다. 106마일을 4분할로 나눠 던지는 투수는 없죠]
[하하, 존. 애초에 106마일을 던질 수 있는 투수를 찾아야하지 않나요?]
[하하하, 그렇네요. 제가 멍청했습니다. 자, 다시 경기가 진행됩니다. 타석에는 내셔널리그 2번 타자 스탠튼 선수가 들어섭니다.]
타석에서는 내셔널리그 2번타자 스탠튼이 들어섰다.
뉴욕 양키스에서 브렛 가드너가 부상을 입었을 때 대체자로 영입 성사 직전까지 갔던 외야수로 유명했는데, 전반기에만 26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는 괴물타자가 되어버렸다.
비록 아쿠냐 주니어는 그에 부족한 11개의 홈런에 그치고 있지만, 다음시즌, 다다음시즌을 생각해본다면 그리 아쉽지는 않다.
애초에 너무 유리몸이기도 하고.
하지만 아쿠냐주니어의 영입에 내 입김이 들어갔다는 소문을 들어서 그런지 양키스가 드림 클럽이었던 스탠튼은 매서운 눈길로 날 노려봤다.
남들이 보면 승부욕이 강한 줄 알겠지만.... 이번시즌 무려 59개의 홈런을 쳐낼 강타자가 날 노려보니 모골이 송연했다.
초구.
개리 산체스의 사인에 고개를 저었다. 2017년 7월. 비록 스탠튼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쳐내고 있다고 하지만 그를 내가 피할 필요는 없었다.
-부웅!!!
"스윙, 스트라이크!!!"
나는 그보다 뛰어난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씨발!!"
존을 빠져나가는 슬라이더에 그의 배트가 허공을 휘저었다. 공과 상당히 차이나는 헛스윙이었다.
스탠튼은 마치 간발의 차이로 공을 놓친 것처럼 아쉬워했지만 스트라이크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거에 삼진이 많은 그의 약점을 아는 내가 보기엔 우스울 뿐이었다.
스탠튼의 자세가 완벽하게 무너졌다. 하지만 그의 배트는 끈질기게 공을 따라오려 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스탠튼의 장점이겠지만....
-부웅!!!
"스윙-스트라이크 아웃!!!"
부족했다. 아무리 괴물같은 운동능력이라고 해도, 완벽하게 어긋난 타이밍과 무너진 자세에 이어 흥분한 상태로는 106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을 때려낼 순 없었다.
[스윙 삼진!! 또 다시 삼진을 잡아내는 리!!! 리가 26개의 홈런을 때려낸 스탠튼을 단 삼구만에 삼진을 잡아냅니다.]
[와, 오늘 리 정말 무서운데요? 내셔널리그 올스타를 상대로 벌써 두 타자 연속 삼구 삼진입니다. 이러면..... 제이콥 디그롬이 2015년에 세웠던 최초의 기록에 도전 하게 됩니다...]
[이젠 뭐라 할 말이 없네요. 그냥 기록 브레이커입니다.]
그리고 올스타전 또 하나의 기록을 앞둔 세번째 타석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연소 만장일치 MVP의 주인공이 강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브라이스 하퍼.
16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SI공식 표지에 올라올 정도로 엄청난 스타성과 능력을 가진 선수. MLB 역대 19살 WAR 1위 , MLB 역대 19살 홈런 1위 , MLB 역대 최연소 만장일치 MVP.
2015시즌에 비하면 2017시즌엔 활약이 조금 낮아졌지만 3할 초반대의 타율과 4할 초반대의 출루율 그리고 6할에 다다른 장타율을 유지하고 있는 괴물이었다.
기록면에서 홈런의 갯수가 부족했지만 모든 면에서 스탠튼보다 나은 기록을 보이고 있는 브라이스 하퍼.
그가 타석에 들어섰다.
내가 메이저리그 데뷔 했던 2020년대에도 필라델피아에서 꾸준히 활약해 메이저리그의 간판으로 활동했던, 그를 올스타전에서 보게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뻐엉!!
"스트라이크!!!"
그리고 나의 설레던 마음과 일치했던 브라이스 하퍼의 얼굴엔 106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었는지 급격히 얼굴이 굳었다.
[초구, 몸쪽 스트라이크!! 106마일의 굉장히 위력적인 공이었습니다. 이제 106마일이란 숫자가 익숙하군요. 벌써 몇번이나 세계 최고의 구속을 찍는지.... 이제는 리가 그 이상을 던져도 이상해하지 않을지경입니다.]
[이거 오늘 앞선 타자들을 상대할 때도 느꼈습니다만, 오늘 리의 컨디션이 정말 좋은 것 같은데요? 106마일이 최고 구속이라고 해도 최고 구속을 꾸준히 찍어내는건 누구나 못하는 것이거든요.]
브라이스 하퍼는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여러번 내저으며 나를 바라보더니 허탈하게 웃는다.
아직도 웃음이 나온다고?
역시 그의 쇼맨쉽이란...
하지만 그의 웃음과 다르게 그는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을 더했는지 이전보다 날카로운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두 번째 공이 나의 손을 떠났다.
오늘 꾸준하게 관중들에게 재미를 주는 높은 코스, 포심 패스트볼에 메이저리그 슈퍼스타 브라이스 하퍼의 배트가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악!!!
높은 코스에 직선으로 뻗어가는, 하지만 속도는 만만치않는 포심 패스트볼이 개리 산체스의 글로브에 닿기 전에 하퍼가 쳐냈다.
"파울!!"
'후우...'
다행이었다.
페어볼이 될법한 타구가 다행히 파울 판정을 받았다.
만약 페어볼이 되었다면 공든 탑이 무너졌을 수도 있는 상황.
이번 생에서 누구 보다 기록 욕심이 있는 나였기에 일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세번째 공을 기다리겠다는 듯 아쉬운 표정도 없는 브라이스 하퍼를 보자, 망설임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찰나의 망설임, 하지만 그것으로 용기를 되찾기엔 충분했다.
-부웅!!!
개리 산체스의 사인에 맞춰 던진 공이 브라이스 하퍼의 배트를 농락하듯 피해내며 글로브 속으로 들어갔다.
"스윙, 스트라잌 아웃!!!"
[맙소사!! 스윙 삼진!! 또 다시 헛스윙 삼진입니다!!! 성호 리, 성호 리가 1회 초, 그것도 올스타전 멤버를 상대로 세 타자 연속 삼진에 성공합니다!!]
[이것도 사상 최초의 기록이군요. 역대 최연소 올스타 선정, 역대 최연소 올스타 선발 투수가 또 하나의 진기록을 달성합니다.]
9구 3삼진.
제이콥 디그롬이 세웠던 10구 3삼진에 이은 최초의 기록.
19살의 나이에 올스타전 선발 출장한 어린 투수가 올스타 선수를 상대로 세웠다기에 믿겨지지 않는 기록에.
"리ㅡ 리ㅡ 리ㅡ 리!!!!"
6만여명의 관중들이 자리에 일어나, 환호성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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