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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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누구 하나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성호의 선발 등판 일이라면 언제나 만원 관중을 유지하기 때문에 관중석에서 조금의 동요만 있어도 마운드에 선 성호에게 부담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야구의 오랜 불문율에 따르면, 대기록이 나오기 전에 먼저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기록 달성에 실패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미신도 있었다.
이에 대해 양키 스타디움을 찾은 팬들은 혹여나 경기장 분위기에 자신의 에이스가 부담을 느낄까 설레발을 치지 않았고 그저 마운드에 올라서는 나에게 기대감이 찬 눈빛으로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어떤 기록에 도전하는지 말이다.
'애초에 내 목표 중 하나였는데, 그걸 모를까.'
내가 오늘 경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A급에 오른 컷 패스트볼의 위력도 있었고 어느 새 53이닝까지 이어진 무실점 기록도 있었지만,
언제나 궁극적인 목표는 따로 있었다.
전생에서 13시즌을 보낼 동안 왔던, 단 3번의 기회.
[퍼펙트게임]
퍼펙트 게임은 어떤 타자도 가리지않고 9이닝 동안 전부 잡아내는 기록이다.
퍼펙트게임이라는 상징적인 기록을 시작부터 떠올리지는 않았지만, 어떤 타자가 타석에 나타나도 잡아내겠다는 것이 오늘 내가 가슴에 품고 나온 바람이었다.
전생에서 늘 굵직한 기록을 바랬던 내게 당연히 궁극적인 목표 중 하나가 퍼펙트 게임이었다.
그러다보니 점차 이닝이 거듭 될수록 퍼펙트 게임을 신경쓸 수 밖에 없었고.
결과는 현재까지 완벽.
안타와 볼넷을 단 하나도 내어주지 않았다.
오늘 경기뿐만 아니라, 나는 메이저리그 데뷔 이후에도 안타와 볼넷을 잘내어주지 않았지만 오늘 경기같이 완벽했던 적은 없었다.
이미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적응도 끝낸 상태.
수비수들의 실책도[팀]의 버프를 받고 현재까지 제로.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그리고 퍼펙트 게임은 이 세가지가 모여 운까지 겹쳐 만드는 길, 가장 끝에 놓인 이상향과도 같았다.
'물론 아직 경기가 끝나진 않았지만.'
오늘 경기의 남은 이닝은 2이닝.
여섯 명의 타자를 더 잡아내야만 했다.
그들은 이미 7이닝 동안 내 공을 지켜본 상태.
거기다 나에게 점수를 얻어낸 3, 4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설 만큼.
사실 여기서부터가 진짜였다.
대기록에 도전했던 여러 투수가 경기 막바지에 와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9명의 타자와 1명의 투수가 싸워야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불리해지는 구조였으니.
많은 투수들은 이닝이 거듭될수록 자신의 상태를 과신하거나 혹은 너무 잘 아는 만큼 실수를 하는 경우가 대개로 8이닝 이후부터 일어났다.
실제로 전생에서 내가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번 생의 나는 달랐다.
전생의 여타 선수들과 비슷하게 7이닝 즈음부터 기록에 신경을 쓰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고
미리부터 기록에 준비를 하고 있었다.
8이닝에 들어선 지금까지 내가 던진 공 개수는 73구.
평소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정면 승부에 나서 최대한 공의 갯수를 줄여왔다.
이제는 꿈에 그리던 기록에 도전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내가 생각했던거 이상으로 힘이 남아 있었다.
남은 이닝 동안 지금보다 더 공격적으로, 압도적으로 던질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있었다.
1.
8회 초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공격.
타석에는 4번 타자 매니 마차도가 들어섰다.
2012년 메이저리그에서 데뷔해서 2013년부터 매년 10개의 홈런을 때려낸 타자.
2015년부터 2016년까지는 각각 35개, 36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기어코 장타율 5할을 넘겼으며 기량이 만개했다.
하지만 2017시즌 시작 후, 시즌 중반이 끝나가는데 13개의 홈런이 초라해질만큼 2할 초반의 타율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으니.
출루율과 타율이 떨어지지만 한번 걸리면 넘어가는 장타력은 팀 내에서 크리스 데이비스 다음으로 최고인 선수였다.
매니 마차도가 긴장된 눈으로 성호의 전신을 살폈다.
'이런 상황에서는 투수보다 타자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많지.'
첫 번째는 볼넷.
상대는 지금 퍼펙트게임을 노리고 있었다.
그것을 가장 허무하게 깰 수 있는 것이 바로 볼넷이다.
어쩌면 리그 최고를 다투는 양키스의 수비수의 실책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가능성이 있기도 했고.
볼넷은 누구의 핑계도 될 수 없는, 오로지 투수 본인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재 2이닝이 남은 이 순간 체력적으로 지치고 기록이 다가오는 8회 초, 투수는 실투를 던질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졌다.
그러나 매니 마차도가 바라는 것은 단순히 기록을 깨는 것이 아니라 저 루키에게서 4월 달에 쳐냈던 것 처럼 점수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자그마한 실투라도 득달같이 달려들 심산이었다.
'긴장되지? 그럼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갈 거야. 너가 아무리 많은 기록을 세우고 있지만 퍼펙트게임은 그 질이 다르다고... 무슨 공을 던질거냐!'
물론, 지금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루키는 보통 루키가 아니었다.
괴물, 그 자체.
데뷔시즌이 이제 3개월이 다 되어가는데 150년 역사를 몇가지나 새로 쓴, 규격 외의 존재였다.
말그대로 뭐라고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괴물의 등장.
그 괴물이 지금 다리를 치켜들었다.
'일단 하나 보자.'
스윙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급할 필요는 없다.
로마의 황제였던 아우구스트스가 급할수록 천천히 하라했으니.
매니 마차도는 그것을 따를 생각이었다.
-뻐엉!!!!
"스트라이크!!!"
'씨발! 개새끼. 날 이렇게 만만하게 본다고?'
타석에 서 초구를 지켜본 매니 마차도도 흥분할 수밖에 없던 공.
69마일의 슬로우 커브볼이었다.
그것도 한가운데를 꽉 채운.
힘을 줘 던진 것도 아닌, 70마일이 넘지않는 느린 커브볼이 스트라이크 존 한가운데로 정확하게 들어왔다.
'이 상황에서 이런 공을 던지는 게 도대체 말이 되냐고! 어? 아무리 마음 편한 상태에서 던져도, 8회 초에, 퍼펙트를 앞두고 이런 공을 던진다고? 후우.... '
내심 한개의 공을 지켜보자는 자신의 선택에 한숨을 내셨지만 얼른 마음을 추슬렀다.
자신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4년 동안이나 중심 타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선수였다.
공 한두개가 자신의 의도대로 오지 않았다는 것에 흔들리는 것은 스스로를 추하게 할 뿐이었다.
빠른 생각의 전환이 필요했다.
'지난건 잊고, 다음 공에서 보여주겠어.'
성호가 던지는 두 번째 공.
매니 마차도가 이번만큼은 헛되게 카운트를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타석에 벗어나 장갑을 조여매고 배트를 꽉 쥐고 몸을 붙였다.
이윽고 마운드의 투수를 바라봤다.
동시에 날아오는 공.
그것이 매니 마차도의 눈에 쏙 들어왔다.
'하이 포심 패스트볼?'
그의 포심 패스트볼이 위력적인 것은 알고 있다. 제구가 되는 104마일은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공이었으니까.
하지만 못칠 공은 아니었다.
장타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가볍게 밀어내듯 수비수의 키를 넘기는 안타정도만 바랬다.
그정도라면 기록을 부수고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할 수 있을테니.
매니 마차도는 배트를 가볍게 돌렸다.
-부웅!!!"
"스윙, 스트라이크!!!!"
'퍽킹! 진짜 개 같은 공이잖아!'
도저히 욕을 참을 수 없는 공.
가운데 높게 쭉 뻗을 것 같은 포심 패스트볼이 배트를 휘두름과 동시에 급격히 왼쪽으로 움직여 배트를 피해냈다.
빠르단 첫 느낌만큼이나 급격하게 우회하는, 포심 패스트볼이 아닌 컷 패스트볼이었던 것이다.
매니 마차도의 배트가 타석 앞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공이 한 뼘 이상 옆으로 빠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 공은 그냥 지켜봤어도 스트라이크였잖아!'
포수의 미트가 놓인 위치가 정확히 바깥쪽 구석에 걸치는 스트라이크 존이었다.
좌완 투수 성호가 던진 커터는 좌타가의 가운데 높은 코스부터 바깥쪽 구석에 꽂히는 스트라이크 존까지, 매우 이질적인 움직임으로 미트에 처박혔다.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움직임을 가진 공.
매니 마차도가 한숨을 내셨다.
이제 볼 카운트는 투 스트라이크 노 볼.
매니 마차도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이다음에 저 어린 루키가 던질 공이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7회에 들어 가장 많이 사용했던 구종.
그것을 던지겠지.
그렇다고 그 공이 어디로 날아올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제대로 던진 공은 아무리 자신이라도 운이 좋아야만 맞출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아래든 위든. 바깥쪽이든 안쪽이든.'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날 리는 없었다.
마운드에 우뚝 서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이는 저 괴물이 유인구를 던질 리가 없었으니.
그저 스트라이크 존 안 어디를 정하고, 무조건 휘두르기만 하면 됐다.
그래.
눈 딱 감고 휘두르자. 후회없이.
그리고 와인드업을 가져가는 움직임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휘둘렀다.
-부웅!!!!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삼구 삼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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