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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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초부터 초구를 104마일 포심 패스트볼을 뿌리는 성호 리, 오늘 컨디션이 상당히 좋아 보이는 군요.]
[그렇습니다. 게다가 제구 역시 상당히 좋아요. 이제 고작 2회 초입니다만, 1회 초 적은 투구 수로 틀어 막은 만큼 크리스 데이비스 선수에게 혹시나 위험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제구력이 완벽하군요. 다시 보기에 나오네요. 바깥쪽 코스로 포구를 가져가는 개리 산체스의 글로브가 한치의 움직임도 없었을 정도입니다.]
[저런 모습을 보니 폭스 스포츠에서 리를 주제로 했던 한 토크쇼가 생각이 나는군요.]
[웁스, 리를 주제로 벌써 토크쇼를 했었나요?]
[네. 음, 그러니까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사건이 있고 이틀 뒤에 있었던 일인데요....]
1.
며칠 전, 메이저리그 중계사인 Fox sports에서는 자신들의 새로운 해설자인 존 베네티를 중심으로 1시간짜리 특집 쇼를 방송한 적이 있었다. 현재 리그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인 성호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곳에서 존 베네티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전 리의 가장 놀라운 능력은 터무니 없는 수준의 다재다능함이라고 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구요? 하하, 저도 한가지를 꼭 집어서 칭찬하기가 힘들다는 거에요. 투수에게 중요한 덕목은 삼진을 잡거나 땅볼을 잡거나 뜬공으로 아웃을 잡는것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점을 하지 않는 것이죠."
테이블 위에 있는 물로 목을 적셨다.
"현대에 들어서 투수들의 지표로는 대개로 평균 자책점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죠. 예시로 수비의 실책으로 주자를 내보내고 안타를 맞아 실점을 한다면 그것은 투수의 자책점일까요, 아니면 수비의 자책점일까요?"
"으음, 지금은 비자책점으로 쓰여지지않나요?"
"맞습니다. 결국 기록엔 비자책점으로 기록돼어, 투수의 평균 자책점이 오히려 줄어드는 이상한 현상이죠.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평균 자책점'이 아니라 '실점'을 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수비의 실책이 나왔을 때 타자를 직접적으로 상대하는 것도 투수일뿐더러 .. 물론 삼진, 땅볼, 뜬공 모두 이것에 포함되어 있구요. 그래서 제가 리의 장점을 꼽을 때 다재다능함을 답해드린겁니다. 리는 열두타자를 삼진으로 잡았을 때처럼 언제나 삼진을 잡을 수도 있고 볼티모어 전에서 첫 실점을 했을 때 땅볼을 잡아낼 수도 있고 뜬공은 뭐.. 리의 데뷔전 이후로 단 1개의 피홈런이 없는 것으로 입증이 되죠."
존 베네티의 이야기에 진행자인 쥬비디가 물었다.
"그렇군요. 결국, 존 베네티 해설위원의 말은 투수는 삼진을, 땅볼을, 뜬공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실점을 안하는 것이 중요하다. 뭐 이런 이야기인가요?"
그리고 쥬비디의 질문에 존 베네티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크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겉보기엔 맞겠죠. 하지만 모든 일엔 시작과 결과가 있듯이 과정도 있습니다. 과연 리가 일반적인 루키였다면 첫 실점을 하고도 피칭 스타일을 바꿔가며 시련을 이겨낼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는 휴스턴이 사인을 훔치는 것을 알고도 경기에서 이겨냈죠. 무려 8이닝 13K로요. 역사적인 경기로 손꼽히는 데뷔전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러니까 제 말은 이런 일들을 하나하나 이겨내는 그의 정신력! 향상심! 집중력! 모두 대단하다는 겁니다. 단순히 실력만 뛰어나선 안된다는 겁니다."
"하하하, 그러니까... 존 베네티 해설위원의 뜻은..."
"리를 굳이 한가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생각나는건 단 한가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검지를 치켜들고 자신있게 말했다.
"완벽(Perfect)."
2.
경기가 이어졌다.
초구 104마일의 포심 패스트볼 이후로,
-따악!!!
던진 체인지업에 파울을 때려내더니,
-부웅!!!!
크리스 데이비스의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스트라잌, 아웃!!!!"
저 너머 양키스 팬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평소의 그들같지 않은 매우 격렬한 반응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웃었다.
아직이다.
오늘 나는 저들에게 25번의 환호와 박수를 받을 마음의 준비가 끝나있었다.
3.
밥 멜빈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엉망진창이구만.'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메이저리그의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30%가 넘는 득표율로 뛰기 싫은 팀이었던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이은 20%대의 수치로 2위에 꼽힌 팀이었다. 오클랜드의 막장 치안과 썩어빠진 구장 환경 때문도 있었지만 한 경기만 망쳐도 살해 협박에 시달리는 팀에서 뛰고 싶은 선수는 드문 법이니까.
하지만 그런데도 밥 멜빈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라는 팀을 제법 사랑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선수로써 큰 성공을 거둬보지 못한 자신이 감독으로써 6년동안 나름 괜찮은 성적을 보이고 있는 만큼 처음으로 무언갈 이룬다고 느낀 이 팀은 이미 자신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물론 메이저리그에서는 단장의 힘이 감독의 힘보다 강하다고는 하나 경기 내용에서만큼은 자신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팀이 3년째 고의적으로 경기에서 진다는 것은 끔찍한 경험일 수 밖에 없었다.
2012. 2013. 2014.
머니볼 시즌2라고 불리던 그 시절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선수들과 자신이 꾸렸던 스텝진은 이미 뿔뿔히 흩어졌고, 그나마 남아있던 밥 멜빈 감독은 제발 다음 시즌 에서라도 이 작은 팀이 꽃을 피워줬으면 싶다고 생각을 하며 마운드에서 오만해보이는 애송이가 자신의 안방에서 편안하게 오클랜드의 타자들을 농락하는 것을 바라봤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2회 초, 1회와 같이 두 개의 삼진을 포함한 삼자범퇴. 스윙 삼진을 잡아내고도 녀석은 기뻐하는 표정 하나 없이 환호하는 팬들에게 손을 들어주며 마운드를 내려갔다. 맏지 자신이 삼진을 잡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한 자세였다.
그리고 그 모습은 밥 멜빈 감독에게 커다란 짜증을 안겨주었다.
밥 멜빈의 짜증을 한층 더 불러일으키는 것은 삼진을 당한 오클랜드 타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나마 2회 초에 선두 타자로 나섰다가 삼진을 당했던 크리스 데이비스는 아쉽다는 표정이라도 지으며 들어왔는데 5, 6번 타자로 나선 타자들은 그저 껌을 씹으며 덕아웃에 돌아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것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코치진.
'씨발.'
벌써 3년째 이어진 탱킹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지만 겨우 이정도로 흔들리면 안된다.
아니, 흔들릴 수도 없다.
아무리 치안이 좋지않고 살기 좋지 않은 곳이라고 해도 팬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팬들은 어디선가 팀을 응원하고 있겠지. 지난 2년간 팀의 노골적인 탱킹에도 홈으로 돌아오면 경기를 보러와주는 고마운 팬들이다.
밥 멜빈은 잘 알고 있었다. 선수 생활 시절 팬들의 환호 한 번 받아보지 못했기에, 아무리 성적이 안좋아도 응원해주는 팬들이 귀하다는 것 쯤 하나는.
최근 4연패를 했음에도 구단 페이지에서는 미래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응원해주는 팬들이다.
선수 생활 시절의 밥 멜빈은 그런 팬들을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기에, 더 고마웠다.
'그런데.... 이번 년도도 이딴 식으로 경기를 하면 어떻게 하자는거야. 분명 단장이 제대로 경기를 하라 했는데.'
어느새 패배에 찌들어 힘없이 픽픽 쓰러지는 타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내년, 어쩌면 내후년.
자신이 이 자리에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2017시즌 에이스로 급부상한 앤드루 트릭스를 바라봤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덕아웃에 들어가며 모자를 내던지는 카스트로가 눈에 들어왔다.
'앤드루 트릭스라.... 허, 참. 재밌는 친구야. 조금만 더 스스로의 장점을 깨닿는다면... 빌리 빈도 저 친구를 쉽사리 버리진 못할텐데 말이야.....'
2.
양키스 덕아웃으로 돌아온 카스트로가 짜증을 냈다.
"젠장!!"
포심과 슬라이더, 슬라이더와 싱커, 그리고 그 사이를 교묘하게 끼어드는 체인지업까지. 구위에 압도당할만한 공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네 가지나 되는 공이 자신의 약점에 완벽하게 들어오는 공들은 타자 입장에서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카스트로는 평소 그보다 더한 괴물과 많이 상대해본 타자였다.
'뭔가 이상하다고. 리랑 닮은 것 같으면서도... 수준이 낮은데 공이 안맞아!'
왠지 성호를 상대하는 타자들이 그간 보였던 그 절망적인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카스트로는 음료를 한잔 따라 벌컥벌컥 마시고 성호에게 다가갔다.
"리, 목 안말라?"
"어, 그다지."
다른 선발 투수 중에는 등판일이나 등판전날에 말조차 거는 것에 예민하게 구는 투수들도 많았지만 성호는 좋은 성격만큼이나 예민해하지도 않았다. 경기마다 선발 투수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불편했던 카스트로 입장에서는 꽤 좋은, 편하게 대할수 있는 몇없는 상대였다.
"치기 힘들어서 그래?"
"어, 어?"
"막 치기 힘들고, 오는 공마다 안맞는 것 같고 눈빛 마주치면 화가 끌어오르고 참을성도 사라지고 타석에만서면 여러가지 생각 들고 그러지?"
"....어떻게 알았어?"
성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랑 비슷하거든. 아니, 지금은 아니고, 과거에 비슷했다ㅡ 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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