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8화 (588/605)

북상하는 태풍

2024년 2월 3일 23:10 (러시아시각 17:10),

러시아 모스크바 야로슬랍스키 구청 건물(회의실).

몇 시간 전, 양국 협상단이 별다른 성과 없이 마친 회의실에 강경희 장관과 푸틴 대통령이 기다란 탁자 사이로 마주 앉았다.

변함없은 여유로움을 보이는 강경희 장관과 비교하면 푸틴 대통령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고 뭔가 심기가 단단히 꼬인듯했다. 하지만 특유의 카리스마는 여전히 회의실 분위기를 압도했다.

“오랜만에 뵙겠네요. 대통령님!”

“그러게요. 한 2년 만이지요?”

“네, 맞습니다. 기억하고 계신 군요.”

“그 당시 강 장관님 인상이 강렬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두 사람의 대화는 탁자 위에 올려진 원형 형태의 인공지능 통역기에 의해 무리 없이 대화가 진행되었다.

본론에 앞서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서로 간 눈빛을 교환하고는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갔다.

“대한민국에서 제시한 항복 조건 문서는 보셨나요?”

“네, 봤습니다.”

“수용하시겠습니까?”

강경희 장관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니요. 절대 수용할 수 없습니다.”

“수용을 못 하시겠다면, 그럼 어떻게 하시겠다는 건가요?”

강경희 장관의 질문에 푸틴 대통령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수용 가능한 조건으로 수정해 주시오.”

“수용 가능한 조건이라면 어느 부분을 말하는 겁니까?”

순간, 푸틴 대통령의 눈빛이 반짝였다.

“말하면 그렇게 수정할 수 있는 겁니까?”

“아니요. 일단 들어보겠다는 겁니다.”

단호히 거절하는 강경희 장관의 태도에 혹시나 했던 푸틴 대통령은 투덜대듯 말했다.

“일단, 우리 러시아 어떤 영토도 한국에 이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전쟁 배상금 역시 우리 쪽 피해가 큽니다. 도리어 우리 쪽에서 전쟁 배상금을 받아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푸틴 대통령님!”

강경희 장관이 푸틴 대통령의 말을 잘랐다.

“음, 우리는 지금 종전 협정을 하는 게 아닙니다. 승전국으로써 패전국인 러시아에 항복 조건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한데, 대통령님의 말씀을 듣자면 꼭, 양 국가 간 평화를 위한 종전 협정으로 보시는 듯합니다. 그런 겁니까?”

푸틴 대통령은 묵묵부답했다. 이에 탁자 위에 한쪽 팔을 걸친 강경희 장관이 한층 더 목소리 톤을 올려 말했다.

“몇 시간 전에도 러시아 측 협상단으로부터 대통령님과 비슷한 말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우리 대한민국에 항복한 것이 아닙니까?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거침없이 내뱉은 강경희 장관의 말에 살짝 주눅이 들었는지 아니면 마땅히 맞받아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푸틴 대통령은 시종일관 날카로운 눈빛만 발산할 뿐이었다.

이에 강경희 장관은 탁자 위에 문서 하나를 놓고는 검지로 슬쩍 푸틴 대통령 쪽으로 밀었다.

“이게 뭡니까?”

“직접 확인하시지요.”

“협상단에 보여줬던 항복 조건 그 문서입니까?”

“아닙니다. 일단 보시고 말씀하시지요.”

푸틴 대통령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문서를 집어 들고는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갖 인상을 쓰고는 문서를 탁자 위에 내던졌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손가락질을 하며 일갈했다.

“지금 이런 종잇장으로 날 속이려는 겁니까?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입니까?”

이에 강경희 장관 역시 두 손으로 탁자를 짚고는 벌떡 일어나 맞받아쳤다.

“이게 속임수로 보이십니까? 푸틴 대통령께서 일으킨 이 전쟁으로 수만, 아니 수십만이 희생했고 천문학적인 돈이 이 빌어먹을 전쟁 때문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은 근래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과 전쟁해서 승리한 대한민국입니다. 하물며 세계 1위의 경제 대국이며 세계 1위의 군사 대국입니다. 그런 대한민국이 속임수를 쓰겠습니까? 정녕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으윽!”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호통치듯 강경희 장관이 말하자 푸틴 대통령은 부들거리며 노려만 볼뿐이었다.

“그래요. 정녕 이 문서가 속임수라 생각한다면 몸소 확인하세요. 사망자 리스트에 푸틴 대통령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현 시간부로 대한민국은 러시아의 항복 요청을 거부하며 다시금 전시체제로 전환할 것입니다. 또한, 러시아 내 산업시설은 물론 기관시설은 초토화가 될 것입니다. 그래도 민간인 피해는 최소화할 것이니 너무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새로운 러시아 지도부와 협상을 해야 할 테니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부디 다시 태어나신다면 평화를 사랑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면담을 끝내시지요.”

할 말을 마친 강경희 장관은 그대로 뒤돌아 출입문으로 향했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 무리의 특전사들이 회의실로 들어와 이내 푸틴 대통령에게 KS2 레이저 라이플을 겨냥했다.

이에 깜짝 노란 푸틴 대통령이 막 출입문을 벗어나려던 강경희 장관을 불렀다.

“저, 저기, 강 장관님!”

“네? 또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저는 할 말이 없는데요.”

고개만 돌린 강경희 장관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그 문서가 추 대통령이 재가한 문서가 맞습니까?”

“그런 질문을 할 거면 부르지 마세요. 그럼 이만,”

고개를 획 돌린 강경희 장관은 다시금 걸어나가려 하자 다급해진 푸틴 대통령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겠소. 항, 항복 조건 수용하겠소.”

“정말입니까?”

어느새 포근한 인상으로 돌아온 강경희 장관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돌아봤다. 그리고는 천천히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정말 좋은 결정입니다. 푸틴 대통령의 결판으로 많은 생명을 살린 겁니다.”

결국, 푸틴 대통령은 강경희 장관의 강단 있는 협박 아닌 협박에 넘어가고 말았다. 사실, 푸틴 대통령에게 보여준 문서는 가짜였다.

푸틴 대통령과 단독면담을 하기 전, 러시아 협상단과 주고받았던 대화를 전해 듣던 중, 협상 결여에 따라 마지막에 안국진 중장이 내뱉은 한 마디에 이와 같은 가짜 문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항복 조건을 수용하지 않을 시 푸틴 대통령을 비롯해 포로로 잡힌 정부 고위관료와 군 수뇌부를 모두 사망자로 처리하고 새로운 지도부와 협상을 하겠다는 얼토당토않은 협박을 강경희 장관은 이용하고자 했다.

이에 강경희 장관은 안국진 중장이 한 말이 사실인 거처럼 속이기 위해 이와 같은 가짜 문서를 만들었다. 종전과 관련한 중요한 협상 테이블에서 위조문서는 중대한 범죄였다. 하지만 기 센 푸틴 대통령을 원하는 대로 제압하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결과는 대성공했다.

또한, 남성도 아닌 여성인 강경희 장관이 두 눈 부릅뜨고 푸틴 대통령을 노려보며 강단 있게 질타한 것도 푸틴 대통령이 속는 데 있어서 큰 요인 중 하나였다.

★ ★ ★

2024년 2월 4일 00:30 (미국시각 3일 11:30),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NSC 회의실).

몇 시간 전, 미국 나토군이 한국군에 포위되어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았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화가 끝까지 났는지 합참의장을 비롯한 각 군 최고 지휘관들까지 죄다 호출하여 대규모 NSC 회의를 소집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를 가지고 나토군의 피해집계 현황 보고가 끝나자 이곳 NSC 회의실 분위기는 그야말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심통한 표정을 지은 채 앉아있을 분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대략적인 피해현황은 이랬다. 미국 나토군의 피해비율은 대략 80%에 달했고 사상자 추정 1만 3천여 명, 부상자 추정 1만 8천여 명, 그리고 실종자 4천여 명으로 극히 일부 병력만 퇴각 중이었다. 즉 아군 시신 수습은커녕 부상자마저도 챙기지 못하고 줄행랑을 치는 꼴이었다.

“이게 모두 러시아 놈들 때문입니다. 그놈들만 아니었어도 우리 나토군이 이런 피해를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국무부 메인 존스 장관이 흥분한 얼굴로 탁자를 내리치며 분노를 표출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CIA 제프 홀든 국장을 바라봤다.

“아직도 모스크바에 있는 요원들로부터 상황 파악이 안 되었나?”

“이곳에 오기 전 새롭게 확인된 정보입니다. 현재 모스크바에서의 교전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민들의 외출허용이 되지 않아 정보 수집에 애로사항이 크다고 합니다. 정보 수집을 위해 외출했다가 한국군에 잡힌 요원도 있습니다. 어쨌든 모스크바 시내에는 무장한 한국군이 분대별로 돌아다니고 있으나 러시아군은 별로 보이지 않으며 보이더라도 모두 비무장 상태라 합니다. 아무래도 모스크바는 한국군에 넘어간 듯합니다.”

“모스크바도 결국 한국군에 넘어간 게 아닐까요?”

보고 내용을 유추해봤을 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기에 파비안 존스 안보보좌관은 고개를 절레거리며 안타까워했다.

“푸틴 행방은 아직인가?”

“네,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대체 푸틴 그 인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원······.”

“모스크바가 한국군에게 넘어갔다면 분명 다른 곳으로 피신했을 듯합니다.”

아직도 미국 정부는 푸틴 대통령 일행이 한국군에게 포로로 잡힌 것에 대해 상상도 못 했다.

철컥!

대통령 비서관 중 하나가 상기된 표정으로 NSC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와 다급하게 말했다.

“현, 현재, TV에서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성명발표를 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 회의실 벽에 걸려있는 200인치 스크린 화면이 켜지자 NSC에 참석했던 모든 인사의 시선이 스크린 화면에 고정되었다.

화면 속 푸틴 대통령의 얼굴은 조금은 초췌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러시아로 내뱉은 푸틴 대통령의 말을 자막이었다.

자막 내용은 이랬다.

「러시아는 2024년 2월 3일 현지시각 18시 30분을 준하여 대한민국에 정식으로 항복합니다. 항복조인식은 내일 오전 10시이며, 그 전에 항복과 관련하여 양국이 합의한 항복 조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발표에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해 모든 사람은 입을 벌리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푸틴 대통령이 종전 협정문과 관련된 자막이 나오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종전 협정문

1항 : 2024년 2월 3일 현지시각 18시 30분 기준으로 패전국 러시아는 승전국 대한민국에 조건 없는 항복을 한다.

2항 : 현재 러시아 영토 내 대한민국 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모든 영토는 대한민국에 이양한다.

- 극동 지역 : 사할린스카야 오블래스트, 하바로브스키 변경주. 프리모르스키 크레이, 아무르스카야, 자바이칼 지방, 부랴티야, 사카, 마가단스카야 오블래스트, 캄차카 지방, 추코츠키 아브토놈니 자치구, 쿠릴열도, 이르쿠츠카야 오블래스트

- 남부 지역 : 다게스탄, 스타브로폴스키 크레이, 아디게야. 크라노야르스키 변경주, 갈미키야, 아스트라칸스키야 오블래스트, 로스토프스카야 오블래스트, 볼고그라드스카야 오블래스트, 크라스노야르스크 크레이 예니세이 강 동단 전체.

3항 : 러시아는 전쟁 범죄국으로써 20년간 전쟁보상금 명목으로 대한민국에 45억 달러를 매년 1월에 지급한다.

4항 : 러시아는 핵보유국에서 비핵보유국으로 전환하며 향후 그 어떠한 군사적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한다. 이에 매년 2차례 NPT(핵확산금지조약)와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받는다.

5항 : 영토 이양에 따른 실제 주거하고 있던 러시아 국민에 대해 원칙은 소개(疏開)이나 대한민국으로 국적변경을 원하는 시민에 대해서는 제2 국민 이민자로 살 수 있도록 허용한다. (제2 국민 이민자는 5년 이내에 귀화시험을 통해 정식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있다.)

6항 : 평화적 종전에 적극적으로 합의한 현재의 러시아 정부 체제를 인정하며 향후 민주주의 국가로 변모할 수 있도록 정치적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은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7항 : 러시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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