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7화 (587/605)

북상하는 태풍

2024년 2월 3일 19:10 (러시아시각 13:10),

러시아 모스크바 야로슬랍스키 구청 건물.

오전 9시경, 벙커 스테이트 R-21에서 푸틴 대통령이 박영남 소장에게 정식 항복 의사를 밝힌 후 1시간 지나서야 새벽 내내 모스크바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시가전 총성은 10시가 돼서야 잦아들었다.

모스크바 내 수도방위 사령부의 방위군을 포함 러시아 전군에 항복 명령과 퇴각 명령이 전달되기까지 통신장애로 1시간이나 소모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지금 모스크바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 길거리에 시민들이 간혹 돌아다니긴 했으나 대부분 시민은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무장한 한국군의 감시를 받으며 비무장한 러시아 군인들이 엉망이 된 모스크바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정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편 붕괴한 벙커 스테이트 R-21의 비상 게이트는 수도방위 사령부 소속의 공병대가 총동원되어 3시간에 걸친 작업을 통해 통로를 확보했고 이에 푸틴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관료들과 군 수뇌부들은 포로 신분으로 이곳 야로슬랍스키 구청 건물로 옮겨져 한국군의 감시하에 반 감금상태로 향후 항복 조건과 종전 발표에 관해 조율 준비에 들어갔다.

대한민국 대표로는 피스부대 사령관인 안국진 중장과 현재 외교부 전용기를 타고 러시아 모스크바로 향하고 있는 강경희 외교부 장관이었다.

강경희 장관이 도착 후 본격적인 조율에 들어가겠지만, 그전에 안국진 중장은 정부로부터 전달받은 자료를 가지고 대략적인 항복 조건과 관련한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실로 보이는 널따란 방에 기다란 탁자 사이로 안국진 중장을 중심으로 제3해병기동사단(화룡) 사단장 조규홍 소장과 피스부대 참모들이 앉아있었다. 반대편에는 비상대책부 이고르 셈쇼프 장관과 루슬란 피메노프 총비서관, 그리고 군 수뇌부 대표로는 총참모장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이 자리에 앉았다.

회의실은 긴장감보다는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대략적인 부분에서 일단 조율을 해봅시다. 사실 조율이라기보다는 러시아 측에서 무조건 수용해야겠지만 말입니다.”

피스부대 사령관 안국진 중장이 서두를 열었다. 그러자 러시아 측 협상단의 얼굴에서 즉시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음, 그럼 이것부터 시작합니다.”

한국 정부로부터 대략적인 협상안 자료를 전달받은 안국진 중장이 탁자 위에 문서 여러 장을 펼쳐 보였다. 한국어와 러시아로 된 문서였다.

각자 자신 앞에 노인 문서를 읽어나가는 러시아 측 협상단이 표정이 시간이 흐를수록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이고르 셈쇼프 장관이 탁자에 문서를 던지다시피 내려놓으며 화난 어투로 말했다.

“지금 장난하십니까? 이걸 우리 러시아 보고 수용하라는 얘기입니까?”

패전국 대표로 나왔다는 것을 망각했는지 이고르 셈쇼프 장관은 서슴없이 하고 싶은 말들을 내뱉었다.

“절대로 영토 이양은 수용할 수 없습니다. 또한, 전쟁 배상금이라니요? 어느 나라 피해가 컸습니까? 대부분 전장은 러시아 영토에서 일어났고 한국군의 폭격으로 모스크바는 물론 수많은 도시가 폐허가 되었습니다. 전쟁 배상금은 우리 러시아가 아니라 한국이 내야지 않겠습니까?”

뻔뻔함의 극치를 보여줬다.

“음, 셈쇼프 장관께선 현대 돌아가는 상황 판단이 안 됩니까? 아니면 일부러 유리한 협상을 하고자 억지를 부리는 겁니까?”

강인한 인상의 소유자인 조규홍 소장이 상체를 앞으로 당기며 강한 어투로 말했다.

“상황 판단이오? 억지요? 허허, 적어도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해야 수용을 하든 말든 하지요.”

분위기가 험악해지려 하자 루슬란 피메노프 총비서관이 다급히 나섰다.

“그렇습니다. 우리 러시아가 항복한 것은 세계평화를 위해 항복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인정하시지요? 그러니 수용 가능한 조건으로 수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총비서관의 말 역시 허무맹랑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붙잡힌 마당에 세계평화를 위해 항복했다고 운운하는 꼴이 가당치 않았는지 조규홍 소장이 살짝 으름장을 놨다.

“그럼, 전쟁 계속합시다. 뻔뻔함에도 정도는 있는 법입니다.”

“아니, 전쟁을 계속한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펄쩍 뛰는 루슬란 피메노프 총비서관의 말에 조규홍 소장은 한층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패전국이 승전국에 항복 조건을 수용할 수 없다면, 수용할 때까지 전쟁은 계속되어야지 않겠습니까?”

“이보시오. 지금 푸틴 대통령께서도 이곳에 감금당한 상태인데 누구의 지시를 받고 당신들과 전쟁을 수행하겠소”

이고르 셈쇼프 장관이 조규홍 소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누구의 지시를 받을까요? 현재 정부 관료들은 물론 군 수뇌부가 모두 우리 손에 있는데 말입니다. 허허, 뭐 일선에 있는 군 지휘관들의 지시를 받으면 되겠습니다.”

“지금 놀리시는 겁니까?”

총참모장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까지 나서서 조규홍 소장과 설전을 펴려 했다.

“아! 다들 진정들 하세요.”

안국진 중장은 조규홍 소장을 비롯해 러시아 측 협상단에게 자제해달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러시아 측에서 오해하신 듯한데, 사실 이 자리는 뭔가를 협상하고자 만든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제시한 항복 조건을 보시고 푸틴 대통령에게 전달해 최대한 빨리 종결짓고자 한 것입니다. 방금 드린 항복 조건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상관없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중국이나 일본과 항복 조건을 가지고 이렇게 협상 테이블에서 설전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잠시 후면 본국에서 강경희 장관께서 오십니다. 그때까지 심사숙고하여 수용 여부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안국진 중장은 제멋대로 생각하는 러시아 협상단과 더는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는 것을 알고는 깔끔하게 정리해버렸다.

“우리 러시아는 수용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측 협상단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이고르 셈쇼프 장관이 딱 잘라 말했다.

이에 안국진 중장은 순간적으로 눈을 번쩍이며 가슴 서늘한 말을 전했다.

“뭐, 어쩔 수 없지요. 여기 계신 분들과 푸틴 대통령은 사망처리하고 다른 사람을 찾는 수밖에요.”

“사망처리요? 지금 말 다 했습니까?”

이고르 셈쇼프 장관이 탁자에 손을 짚고 벌떡 일어나자 참모 중 한 명이 KS5 레이저 피스톨 꺼내 들고는 이마에 갖다 댔다.

“다시 한번 입 벙긋했다간 대가리에 총구멍 날 줄 알아!”

그제야 자신이 포로 신세라는 걸 새삼 느낀 이고르 셈쇼프 장관은 부르르 떨며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시간은 대략 3시간 남았습니다. 그럼 다시 봅시다.”

안국진 중장을 비롯해 대한민국 협상단이 차례대로 나가자 회의실에 남은 러시아 협상단 3명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총비서관이 탁자 위 항복 조건이 담긴 문서를 하나하나 챙기며 말했다.

“설마! 수용하지 않으면 우릴 모두 죽이진 않겠지요?”

“그런 협박을 믿는 겁니까? 그리고 그걸 왜 챙깁니까?”

이고르 셈쇼프 장관이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총비서관은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챙겨서 대통령께는 보여드려야지 않겠소?”

“제길! 저런 놈들에게 이런 개 같은 굴욕을 당하다니,”

이고르 셈쇼프 장관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반대편 출입문으로 향했다.

★ ★ ★

2024년 2월 3일 22:00 (현지시각 23:00),

미국 괌 북동단 태평양 해상.

중부사령부 소속의 제5함대가 괌으로 100km 떨어진 해상에서 전방위 경계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괌으로부터 군수지원함을 통해, 탄과 각종 식량 등 전쟁 물자를 전시체제 상황만큼 보급받은 남방미해군 소속의 제4함대와 대서양함대 소속 제2함대 그리고 유럽미해군 소속의 제6함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어두운 해상을 가로질러 서서히 한반도를 향해 항해에 들어갔다.

현재 대한민국 영토인 동주까지는 2,234km로 15노트로 항해한다면 4일 안으로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고 대한민국 해군이 해상으로 나온다면 2일 안으로 서로 간 교전 거리까지 다다를 수 있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이들 3개 함대는 함대 간 거리를 50km 간격으로 교전 가능한 항공모함 및 순양함과 군축함, 그리고 강습상륙함으로 편제하여 항해했고 각종 군수지원함은 후방지원 역할을 하게 될 제7함대와 함께 항해에 들어갔다.

즉 3개 함대가 부채꼴 모양으로 기동했고 후방에 제7함대와 100여 척의 군수지원함이 대형을 유지했다.

그리고 북서단 해상에서 전방위 경계 임무를 수행하던 제5함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주로 향하는 4개 함대와는 다르게 단독 임무를 수행하게 될 제5함대는 현재 평화도(구 오키나와) 왼쪽으로 우회하여 직접 제주도로 항해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깊은 해심에는 콜롬비아급 핵잠수함을 비롯한 수많은 핵잠수함이 전방위 대잠 경계를 펼치며 항주해 가고 있었다.

이렇게 제5함대가 나머지 4개 함대와 분리되어 독립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이유는 대한민국 해군 전력과 공군 전력을 양쪽으로 분산시키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한편, 아폴론 정찰위성으로 24시간 괌 해상에 모여있는 미 해군 함대 상황을 정찰하던 합동참모본부는 여러 함대가 대한민국 방향으로 항해를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고는 곧바로 해군작전 사령부에 대응기동 명령을 내렸다.

또한, 제5함대가 나머지 4개 함대와 떨어져 단독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해군작전 사령부는 제7기동전단 소속의 호큘라 구축함 5척과 CF/A-32P 적주작 전폭기가 착함한 다목적상륙함인 남주함(LHD-6201)을 제7함대를 전담 마크하는 함대 구성 작전 안으로 긴급 수정했고 잠수함 전력으로 제11기동잠수함전단 제111기동잠수함전대 230급 호쿨라 잠수함 4척과 제9잠수함사령부 제91잠수함전단 209급과 214급 잠수함이 편제시켰다.

이외 나머지 모든 해군 전력은 미 해군 4개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하나둘, 거친 파도를 가르며 괌 방향으로 항해에 들어갔다.

★ ★ ★

2024년 2월 3일 22:50 (러시아시각 16:50),

러시아 모스크바 야로슬랍스키 구청 건물(회의실).

한러전 종전과 관련하여 모든 권한을 추은희 대통령에게 부여받고 외교부 전용기를 타고 이곳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도착한 강경희 장관은 제1공수특전여단 소속의 특전사에게 에스코트를 받으며 이곳 야로슬랍스키 구청에 도착했다.

국제공항에서 이곳 구청까지는 직선으로 21.5km 내비게이션으로는 61km였지만, 원활한 차량흐름 덕분에 30분 만에 올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고생하셨습니다”

구청 현관에 외교부 전용차가 도착하자 안국진 중장을 비롯해 조규홍 소장 등 군 장성들이 반가운 얼굴로 마중 나와 있었다.

“고생은요. 저보단 여러분들께서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 명 한 명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건넨 강경희 장관은 안국진 중장의 안내를 받으며 구청 내 마련된 방으로 들어왔다.

아마도 구청장이 사용하던 사무실인 듯 실내장식은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래요. 푸틴은 뭐라고 하나요?”

엉덩이가 소파에 닿자마자 물어보는 강경희 장관의 말에 안국진 중장이 환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하하, 장관님! 잠깐 차라도 드시고 얘기 나누시죠.”

“아! 제가 너무 보챘나요? 호호”

“아닙니다. 막중한 자리이시니 그럴 만도 합니다.”

잠시 후 부관이 내놓은 커피를 마신 후 본격적으로 한러전 종전과 관련된 주제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비행기 안에서 보고받으신 대로 현재 러시아 협상단 쪽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습니다. 아마도 고심하는 듯합니다.”

안국진 중장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안 중장님께서 수용 여부 말미를 언제까지 주신 거죠?”

“네, 이곳 현지시각으로 16시입니다.”

그러자 강경희 장관이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음, 1시간이 지났군요.”

“네,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지금 러시아 협상단에 전해주세요. 20분 후 푸틴과 단독회담을 요청한다고 말입니다.”

“푸틴과 일대일 단독회담을 하시려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강경희 장관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안국진 중장을 비롯해 함께 앉아있던 장성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교부 수장으로써 지금까지 몸으로 직접 뛰며 세계 여러 국가와 외교 성과를 올린 여장부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러시아 불곰 푸틴과 단독회담을 하겠다고 말하는 강경희 장관의 얼굴에는 당당함과 여유로움이 묻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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