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숙인 불곰
2024년 2월 03일 13:30 (러시아시각 07:30),
러시아 모스크바 벙커 스테이트 R-21(제4-2구역 세이프 룸).
77대대 대원들이 상황실까지 진입하기 전, 극적으로 모스크바 수도방위사령부 소속의 방위군과 통신이 재기 된 후 이곳으로 지원병력을 보내고 있다는 소식에 푸틴 대통령과 총참모부 수뇌부 그리고 고위관료들은 지원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세이프 룸에서 버티기 위해 이동한 상태였다.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세이프 룸에서 숨죽여 기다리는 동안 요란하게 들여오던 총성이 서서히 잦아들더니 지금은 완전히 멈췄다. 세이프 룸에서도 밖의 상황을 CC 카메라로 확인할 수 있었으나, 현재 모든 CC 카메라가 망가졌는데 모니터 상에는 지직거리는 소음만 들려왔다. 이에 몇몇 장성들은 세이프 룸 출입문에 귀를 대고 밖의 상황을 알아보고자 했지만, 워낙 두꺼운 철문으로 만들어졌기에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방위군이 도착할 겁니다. 대통령님!”
의자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기다리는 푸틴 대통령에게 다가간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이 속삭이듯 말을 전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옆에 있던 SVR(대외정보국) 예브게니 레베데프 국장이 질문을 던졌다.
“총참모장님! 이곳 세이프 룸은 정말 안전한 곳입니까?”
상기된 표정으로 물어보는 예브게니 레베데프 국장의 말에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은 대답 대신 보안실 책임관 아지즈벡 카파제 대령으로 눈을 돌렸다.
“네, 절대로 이곳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카파제 대령! 아까도 상황실과 연결된 차폐문은 절대 뚫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예브게니 레베데프 국장은 눈을 흘기며 꾸짖듯 말했다.
“그것이······. 무슨 수로 차페문을 뚫었는지 모르지만, 이곳 세이프 룸 출입구는 안쪽에서 열지 않은 이상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 말, 책임져야 하네?”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 역시 보안실 책임관의 말이 미덥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책, 책임지겠습니다.”
이때, 출입구 밖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려왔다.
쾅! 쾅! 쾅!
뭔가로 출입문을 세차게 치는 듯한 소음이었다. 세이프 룸에 있던 모든 사람이 시선이 출입구에 못 박혔다.
눈 감고 있는 푸틴 대통령을 제외하고 다들 설마 출입문마저 뚫고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겁먹은 표정들이었다. 총참모부 장성이든 고위관료든 현재 상황에서 겁먹지 않은 게 더 이상할 상황이었다. 이때 비상대책부 이고르 셈쇼프 장관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혹, 이곳에 갇히면 어떡합니까?”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에는 적어도 한 달 정도는 생활할 수 있는 음료와 식량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아지즈벡 카파제 대령은 총참모장을 대신해 대답했다.
“몇 명 기준으로 한 달인가?”
“네, 10명 기준입니다.”
“10명?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이 50명이 넘는데? 그럼 고작 6일 치밖에 되지 안잖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스테이트 R 지하벙커에는 대통령 전용 피난시설인 세이프 룸이 필수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세이프 룸 공간은 30평에 달했고 내벽은 1m에 가까운 초강철으로 외벽은 2m에 달하는 콘크리트로 둘러싸여 있었다. 또한, 10명 기준 한 달을 버틸 수 있는 음료와 식량, 그리고 각종 편의시설이 갖춰있었다.
“셈쇼프 장관님, 6일이면 수도방위사령부의 방위군이 지원 오고도 남을 시간입니다.”
이때 다시 한번 밖에서 거대한 충격음이 전해왔다.
쾅! 쾅! 쾅!
“대체 저 자식들은 뭘 하는 거야?”
깜짝깜짝 놀라게 하자 짜증이 난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이 일갈하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혹, 철문이라도 부수려고 뭔가로 치는 거 아닙니까?”
“저 출입문이 뭔가로 친다고 해서 부서질 출입문이 절대 아닙니다. 셈쇼프 장관님!”
아지즈벡 카파제 대령은 확신 찬 음성으로 말했다.
★ ★ ★
2024년 2월 03일 13:40 (미국시각 14:40),
미국 괌 동단 220km 해상.
10일 전, 대한민국 해군과 결렬한 해상전을 벌여 큰 피해를 보고 괌으로 퇴각한 제3함대와 제7함대 소속 함정 중 미미한 타격을 입은 함정들은 긴급 보수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외 함정은 탄 보급은 물론 각종 전장 물자를 최대한으로 선적했고 승조원들에게도 충분한 휴식을 주고 있었다.
한편 한창 치열한 해상전이 벌어졌던 당시 필리핀해 루손 해협 근해까지 도달했던 중부사령부 소속의 제5함대는 괌으로부터 북단 100km 해상에서 만에 하나 대한민국 해군과 공군 공격을 대비하고자 대잠, 대공, 대함경계 중이었다.
또한, 남방미해군 소속의 제4함대와 대서양함대 소속의 제2함대 그리고 유럽미해군 소속의 제6함대 역시 괌으로부터 동단 200km 해상까지 도달하며 서로 간 거리를 유지한 가운데 괌에서 출항한 각종 군수지원함으로부터 탄과 식량 등의 전쟁물자를 공급받았다.
위에서 나열한 4개 함대가 괌 군항에 정박하여 전쟁물자를 공급받지 않은 것은 괌 군항에 2개 함대가 정박한 상황에서 또 다른 함대의 각종 수상함이 정박하기엔 정박 시설이 부족한 면도 있었지만, 진짜 이유는 혹여나 모든 함대의 수상함이 괌 군항에 정박했다가 대한민국으로부터 미사일이나 폭격기에 의한 폭격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가장 큰 이유였다. 혹, 핵미사일에 버금가는 플라즈마 증폭탄 한기만 떨어져도 미국 해군의 80% 전력을 한순간에 잃을 수 있었다.
어쨌든 괌을 중심으로 반경 200km 해상에는 당장에라도 전투가 가능한 7척의 항공모함과 150척의 각종 구축함과 순양함 그리고 200척에 달하는 각종 상륙함과 군수지원함이 푸른 바다 위에 떠 있었고 깊은 해심에는 몇 척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핵잠수함이 잠항 중이었다.
한편, 대한민국 해군 역시 앞으로 미국 해군과의 대격돌을 대비하고자 가용한 해군 수상함을 동주 상원도(가고시마현과 미야자키현) 명일(미야자키) 항구 일대로 이동시켰다.
태평양함대와의 격전을 통해 큰 피해를 본 제2함대(남해함대)에서는 기함이자 호큘라함인 을지문덕함(DDG-1013)과 이지스함인 태종대왕함(DDG-996), 율곡이이함(DDG-992)만이 동원됐고 제1함대(동해함대)와 제3함대(서해함대)에서는 호위함을 제외한 모든 수상함이 동원되었다. 당연히 호큘라 순양함인 차리석함(CG-1105)과 강우규함(CG-1106)도 이번엔 승조원 및 각종 탄약에 대한 완전보급을 마친 상태로 동원되었다.
그리고 제7기동전단 중에서는 Mk 101 초공동 중어뢰에 피격되어 반파 당한 정조대왕함(DDG-1007)을 제외한 나머지 호큘라 구축함 5척이 모두 동원되었고 제9잠수함사령부에서는 214급 이상의 모든 잠수함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향후 괌과 사이판 상륙작전을 위해 제10상륙함대는 포항 군항에서 제1해병사단(해룡)과 제2해병사단(청룡) 해병들을 승선시키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더불어 대한민국 해군의 히든카드라 할 수 있는 제12항모전단 소속의 호큘라 순양함인 충무공이순신함(CG-1101)과 손병희함(CG-1103), 그리고 260급 슈퍼호큘라 잠수함인 최준함(SSP-092), 윤봉길함(SSP-093), 홍범도함(SSP-094)도 29일 밤 페르시아만에서 50노트에 달하는 속도로 기동 및 잠항하여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믈라카 해협과 싱가포르 해협을 통과한 후 지금은 아시아해(남중국해) 해역으로 진입 중이었다.
이처럼 대한민국 해군 역시 80%에 달하는 해상전력을 총동원한 상황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러시아 남부전선의 제공권 확보를 위해 항공모함 백범김구함(CV-001)과 박열함(CG-1102), 이회영함(SSP-091)이 동원전력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었다.
구축함이나 잠수함 전력은 수적으로는 불리했지만, 성능적으로 충분히 비빌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항공전력을 운용하는 항공모함 전력에서는 절대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7개 항공모함과 35척의 강습상륙함에서 운용하는 각종 전투기만 해도 1,190기나 달했다. 웬만한 국가의 공군전력을 웃돌고도 남을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해군 항공전력이었다.
그에 비해 대한민국 해군의 항공전력은 이랬다. 배수량만으로 따지면 미국 항공모함 크기에 가까운 다목적상륙함 남주함(LHD-6201)과 북주함(LHD-6202)이 있었고 강화도급 강습상륙함 4척이 있었지만, 운용 항공기 중 전투기 타입은 192기뿐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지상공격기인 CWA-11P 봉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동안 CF/A-31P 흑주작을 모델로 함재기이자 수직이착륙기를 연구 개발하여 며칠 후 32기의 CF/A-32P 적주작 전폭기를 생산 완료하여 남주함(LHD-6201)에 실전 배치된다는 것이었다.
미 해군의 항공기 전력에 비해 터무니없는 수량이었지만, 가장 최신에 개발되어 고도의 테크놀로지가 접목된 CF/A-32P 적주작 전폭기의 성능으로 볼 때, 합동참모본부와 해군작전사령부에서는 은근 큰 기대하는 눈치였다.
★ ★ ★
2024년 2월 03일 13:50 (러시아시각 07:50),
러시아 모스크바 벙커 스테이트 R-21(제4-2구역 세이프 룸).
밖에서 가끔 들려오는 충격음에 세이프 룸에 있던 장성들과 고위관료들의 신경은 온통 출입구에 쏠려 있었다.
보안실 책임관 아지즈벡 카파제 대령이 몇 번이고 안심을 시켰지만, 한차례 속은 경험이 있던 탓에 불신하는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몇 분간 조용해지자 살짝 긴장감이 풀어질 때쯤 출입문 한가운데가 뻘겋게 달궈지는 듯하더니 이내 검붉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용광로에서 들끓은 쇳물처럼 커다란 구멍을 내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에 기겁한 몇 명의 고위관료들은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숨을 곳을 찾아 도망쳤고 총참모부 장성들과 참모들은 일제히 권총과 AK-74MR 돌격소총을 출입문 쪽을 향해 겨눴다.
그동안 의자에 앉아 아마 말없이 눈만 감고 있던 푸틴 대통령도 즉시 AK-74MR 돌격소총을 들었다.
슈슈슈슈슈슈슈슈~
순식간에 뿜어져 나온 메케하고 희뿌연 연기가 세이프 룸을 가득 채웠다. 이에 총을 겨누고 있던 장성들과 참모들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고 호흡마저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되자 기침을 하며 고통을 호소했다.
이때를 기회 뚫린 구멍 사이로 뭔가가 날아왔다.
따닥! 떼구르르르르~
바닥에 떨어진 후 몇 바퀴를 구른 조그마한 물건은 C-51 음파탄이었다.
피융! 파아앗!
공중도약과 함께 C-51 음파탄은 강렬한 충격파를 발산했다. 음속 이상의 속도로 세이프 룸 전체에 퍼지자 장성들과 참모들, 그리고 이리저리 도망치던 고위관료들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며 실신했다.
푸틴 대통령 역시 짧은 신음을 토하고는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중대장 동지! 상황 끝입네다.”
92중대 대원으로 보이는 대원 하나가 녹아내린 구멍 사이로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이 내밀고는 세이프 룸 곳곳을 살피고는 소리쳤다.
“정말이네? 비켜보라우!”
92중대장이 대원을 제치고는 직접 구멍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는 실드 글라스를 세이프 룸 구석구석을 확인했다.
희뿌연 연기로 인해 한 치 앞도 안 보였지만, 실드 글라스를 통해 보인 세이프 룸 바닥에는 충격파로 기절한 인형들이 잔뜩 너부러져 있었고 그 중 표적 중의 표적인 푸틴 대통령이 엎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불곰국이라 불리는 러시아의 대통령으로 10여 년간 특유의 카리스마를 풍기며 세계 각국에 영향력을 행세했던 푸틴의 말로는 참으로 비극적이었다.
“하하하하하”
한참을 박장대소를 터뜨리는 92중대장은 곧바로 통신망을 통해 대대장을 호출했다.
“대대장 동지! 푸틴 아새끼래 잡았습네다.”
- 정말이네?
“와서 보시라요. 상황 끝났습네다.”
“알았어야. 당장 가갔어!”
저 멀리서 대대장의 뛰어오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10여 분 전, 세이프 롬의 출입문이 차폐문 못지않은 강철로 만들어진 걸 확인한 92중대장은 대원들이 입고 있던 보호 슈트를 죄다 벗기고는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는 CS1 레이저 라이플을 소지한 대원들에게 고출력 모드로 전환한 후 지정한 곳곳을 차례대로 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런 이유로 몇 번이나 출입문에서 쾅쾅거리는 소음이 들렸던 이유였다. 웬만한 장갑차도 박살 낼 수 있는 고출력 레이저 빔은 출입문 곳곳을 흠집을 냈고 이후 모아뒀던 보호 슈트를 끼워 넣은 후 차폐문을 뚫었을 때 방법을 그대로 재현하여 세이프 룸 출입문을 뚫을 수 있게 되었고 더불어 운이 좋게도 전사한 대원의 방탄조끼에서 사용하지 않은 음파탄 하나를 찾아내 손쉽게 푸틴 대통령 일행을 제압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