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발악
2024년 2월 03일 11:35, (러시아시각 05:35),
한편 그 시각 러시아 모스크바 벙커 스테이트 R-21(보안실).
쿵!
책상을 내리친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이 두 눈을 흘기며 이그나티 투라에프 중장을 노려봤다.
“이제야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니?”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보안실 책임관 말 듣다가 그만, 제 불찰입니다.”
이그나티 투라에프 중장은 얼굴이 빨개진 진 채로 머리를 조아렸다.
“듣기 싫네! 제길 난리 났군. 난리 났어. 조금 전, 대통령께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하시는 거 말렸는데······. 이게 다 자네 때문이야!”
“면목이 없습니다.”
“아! 어떻게 말씀을 드리나······.”
어쨌든 상황이 상황인 만큼, 대통령께서 이동할 수 있도록 조치는 취해야 하기에 자리에서 일어선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 그의 얼굴은 마치 하늘이라도 무너진듯한 표정이었다.
상황실 맞은편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 문에 선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은 길게 심호흡을 하고는 노크했다.
똑! 똑! 똑!
“들어오게!”
“대통령님! 급히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대통령과 함께 있던 고위 관료들이 일제히 총참모장을 쳐다봤다.
“방금 보고선 또 무슨 보고인가?”
대통령의 시큰둥한 반응에 잠시 망설인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은 용기 내어 말했다.
“대통령님! 지금 즉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뭐? 아까 전, 내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할 때 뭐라고 하고선, 지금 와서 그딴 소리를 하는 건가?”
“그 부분에 대해서 향후 책임을 지겠습니다. 일단 이동할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비상대책부 이고르 셈쇼프 장관이 물었다.
“총참모장! 이동한다면 어디로 갑니까?”
“메뉴얼대로라면 듀키에 있는 스테이트 R-55입니다.”
“그곳은 미사일사령부 벙커가 아닙니까??”
“네, 그렇습니다. 모스크바에 한국 특수부대가 활동하는 이상 시가지에 있는 스테이트 R로 이동은 어려울 것입니다. 이에 가장 가까우면서도 안전한 스테이트 R-55이 최선책입니다.”
“한국군도 그곳에 미사일사령부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이상, 주시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고르 셈쇼프 장관의 날카로운 질문이 계속되었다.
“장관님! 그런 곳일수록 더욱 안전합니다. 설마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는 곳으로 갈 줄은 생각도 못 할 것입니다. 어쨌든 시간이 없습니다. 20분 안으로 가지고 갈 것만 간단히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만 처리할 일이 있어서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거수경례하고 다급히 빠져나가는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을 노려보던 푸틴 대통령은 예상과 다르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은 급히 거수경례하고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집무실 문을 닫은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불벼락이라도 받을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얘기는 하셨습니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총참작전관이 물었다.
“그래! 준비들 하실 거네. 자네는 지금 즉시 각 군 지휘관들에게 알리고, 지상 상황을 정찰하러 간 병사들에겐 연락이 없나?”
“네, 아직 없습니다. 비상통로 길이를 봐서는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얼마나?”
“대략 20여 분은 더 걸릴 듯합니다.”
“알았네. 그때까지 이동할 준비를 마치면 되겠군.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문제없이 이동할 수도 있도록 만전을 기하게”
“네, 각 군 지휘관에게 알리고 저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빨리 움직이게!”
한편, 현재의 지상 상황은 이랬다.
근접 비행을 하며 벙커 출입구 건물을 중심으로 10여 분간, 무지막지한 지상공격을 퍼붓던 무인전투기 CUF/A-22NP 피닉스는 진작에 하늘에서 사라진 후였고 지상은 지옥도를 방불케 할 정도로 처참한 상황이었다.
벙커 출입구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 주변 건물들은 죄다 폭삭 주저앉아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널따란 도로 위에 가득했던 전차와 장갑차들은 완전히 파괴되어 잔해만이 너부러진 상태로 검붉은 화염이 이글거렸다.
더욱 참혹한 장면은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러시아 군인들의 시체들이었다. 메케한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곳곳에 시꺼멓게 숯덩어리가 된 시체부터 팔다리가 잘리고 머리가 날아간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전쟁의 참상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몇 킬로미터 떨어진 모스크바 방위군 본부 역시 플라즈마 증폭탄 공격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로 갈라진 지면 사이로 마그마가 춤추듯 거대한 액체화 된 불길이 활활 타오르며 솟구치고 있었다.
고작 8기의 무인전투기에 모스크바 방위군 2,000여 명과 각종 전차와 장갑차 40여 대, 그리고 최신형 공격헬기 MI-24 하인드F 12기가 괴멸에 수준의 피해를 봤다.
한편, 건물 안에서 방어 임무를 수행하던 77대대 역시 적잖은 피해를 본 상태로 대대 작전과장인 박만진 소령을 비롯해 15명이 전사했고 47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말았다.
만약 공중화력 지원이 늦거나 없었더라면, 77대대는 전멸했을지도 모를 일이었고 지하로 투입했던 91중대 역시 계속해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다.
다행히 CUF/A-22NP 피닉스 8기를 출격시키라는 본국 합동참모본부의 탁월한 판단과 명령으로 인해 전멸 위기를 벗어나게 된 77대대는 전사자와 부상자를 돌볼 인원 30명을 남기고 91중대를 지원하기 위해 지하로 내려갔다.
★ ★ ★
2024년 2월 03일 11:45, (러시아시각 11:45),
러시아 자바이칼 지방 시시키노 북서단 11km 지점(1전차소대).
26전차대대가 서단 15km까지 기동한 후 그곳에서 P436 도로를 타고 북서단으로 기동하는 사이 1전차소대 C-3A1 백호 전차 4대는 야지 기동을 펼치며 곧바로 북서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은 대대와 합류지점이라 할 수 있는 자바이칼 지방과 부랴티야주의 주 경계선으로부터 14.5km 떨어진 산악지대를 기동 중이었다.
처음엔 얼어붙은 골짜기를 따라 이동하려 했으나, 생각 이상으로 녹은 눈이 많아 물살이 거세 위험하다고 판단한 1소대장은 원만한 경사도를 따라 등산 기동을 결정했다. 다행히 험난한 산악지대가 아니었기에 염훈기 하사가 걱정한 대로 엉덩이에 불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
쿠르르르르릉! 쿠르르르르릉!
어느덧 산 정상 부분까지 도달한 후 다시금 하산 기동에 들어간 상황,
“눈 덮인 설원은 보면 볼수록 아름답지 않습니까?”
정상에 오르자 염훈기 하사는 조준경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설원의 멋진 장관에 탄식에 가까운 감탄사를 연발했다.
“야! 정찰 기동 중에 정신 안 차릴래?”
역시나 군 생활 오래 해 감정이 메마른 김영주 중사의 핀잔이 날아왔다.
“제가, 전차장님 볼 때마다 생각한 건데 말입니다. 저는 장기 절대 안 하렵니다. 그냥 딱 2년만 채우고 제대하렵니다.”
“왜 마!”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군 생활 오래 하면 사람 감정이 사막바닥처럼 바짝바짝 메말랐다니까요? 앙그냐? 김 상병아!”
-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쭈! 빼냐?”
“시끄러워! 감정이 메마른 게 아니고 작전 중이잖아 자식아!”
“에이! 이곳에 러시아군이 있겠습니까? 항복했거나 아니면 서단으로 퇴각했잖습니까?”
“아! 일반 병사일 때는 안 그랬는데, 부사관 되고는 안전히 빠졌어! 전쟁 끝나면 네놈 정신 단도리 좀 쳐주마!”
“아! 전차장님 무슨 섭, 어라?”
“뭔데?”
“방위각 2-7-5 거리 11,800 산릉선 바로 아래쪽 뭔가 이상합니다.”
염훈기 하사가 말한 지점으로 현시경을 돌린 김영주 중사가 16배 비율로 확대했다.
하얀 위장막으로 감싸지만, 포신이 유독 긴 것으로 보아 자주포 같았다. 잠시 후 전차장 전용 모니터에 피아식별로 분석된 정보가 나왔다. 역시나 자주포였고 그것도 러시아에서 최신형인 코알리치야-SV 자주포로 확인되었다.
“뭐지? 본대에서 낙오한 애들인가?”
러시아 포대 편제 역시 한국과 같은 자주포 6대가 한 포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주변 일대를 확인해도 3대만 확인되었다.
“어찌합니까? 그냥 박살 냅니까? 뭐 11km가 넘어도 백발백중 자신 있는데 말입니다.”
“기다려! 소대장에게 보고부터 하자!”
“여기는 골룸 투! 골룸 하나 확인 요망!”
- 여기는 골룸 하나! 골룸 투 말하라 이상!
“방위각 2-7-5, 11시 방향, 거리 11,800 산릉선 바로 아래쪽 러시아 자주포 확인했다. 이상!”
- 골룸 하나! 확인한다. 이상!
잠시 후 맨 뒷줄에서 기동하던 711호 전차가 다른 두 전차를 앞지르고는 이내 712호 전차 옆으로 다가와 섰다.
- 골룸 하나! 골룸 둘! 자주포 3대뿐인가?
“여기는 골룸 둘! 주변 일대 확인했으나 3대뿐이다. 이상!”
- 알았다. 보고 후 추가 지시를 내리겠다. 이상!
“골룸 투! 확인, 이상!”
잠시 기다리는 동안 염훈기 하사는 혹시나 하는 가장 앞서 기동하는 러시아 자주포의 포신에 조준 십자선을 걸치고 발사 판에 발을 갖다 댔다. 아차 하면 그대로 광자포를 쏘고자 했다.
잠시 후 중대장과 대대장에게 보고한 소대장의 지시가 내려왔다.
“여기는 골룸 하나! 대대장님께서 선제공격은 하지 말라고 한다. 가능하면 잡으라는 지시다. 이상!”
“여기는 골룸 둘! 지금 11km 떨어진 놈들을 전차로 잡으라는 얘기?”
황당한 명령에 반말 비스름하게 통신을 마친 김영주 중사!
- 골롬 하나! 나도 어이가 없음, 하지만, 대대장의 명령이니 어절도리가 없어야!”
나잇대가 비슷한 소대장과 김영주 중사는 어느새 평상시 말투로 통신을 주고받았다.
“골룸 둘! 일단 확인!”
“뭡니까? 저걸 어떻게 잡으라고 그런 명령을 내린답니까?”
“알게 뭐냐! 까라는 대로 까야지!”
- 여기는 골룸 하나! 여기서 중턱까지 내려오길 기다렸다가 둘과 셋이 최대한 빨리 기동한다. 하나와 넷은 여기서 지원 사격을 하겠다. 이상!
“골룸 하나 확인 이상!
- 골룸 셋 확인 이상!
- 골룸 넷 확인 이상!
- 와! 졸지에 전차로 경주하게 생겼습니다.
통신을 듣고 있던 김일수 상병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김 상병아! 일단 최대한으로 기동할 수 있도록 지형 숙지해라!”
- 알겠습니다.
“와! 저번 1차 동북아 전쟁부터 지금까지 여러 차례 전쟁했지만,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입니다.”
“나도 그렇다. 것보다. 염이 넌 의자에 뭐라도 푹신한 거 깔아야 하는 거 아니냐? 너 치질 있잖아!”
“아! 이 상황에 치질 얘기는 왜 합니까?”
“말 들어라! 후회하지 말고!”
“제길슨!”
몇 분이 흐르고 포착된 러시아 자주포 3대가 산 중턱까지 내려온 상황, 소대장의 기동 명령이 떨어졌다.
“가자! 김 상병아! 뒤집히지 않을 정도로 최대한 밟아라!”
- 알겠습니다.
쿠르르르릉! 쿠르르르릉!
두 번의 힘찬 엔진음을 뿜어내던 712호 전차와 713호 전차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는 최대 속도까지 끌어올리며 비탈길을 내려갔다.
“우와아아아!”
712호 전차 실내에서 염훈기 하사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712호 전차의 속도는 더욱 올라갔다.
시속 60km에 가까운 속도로 산비탈 길을 기동하는 내려가는 두 전차의 꼬리에 눈과 흙이 뒤섞인 먼지가 흩날렸다.
시야가 확 트인 현재 상황으로 볼 때 러시아 자주포에서도 희미하게나마 확인이 가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산 중턱까지 내려온 상황이라, 다시 올라가든 아니면 비스듬하게 내려가며 좌우 방향으로 틀던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산에서 빠르게 내려오는 백호 전차 2대를 확인했는지 러시아 자주포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며 사선 방향으로 전환하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현재 자주포와 전차 거리는 7km까지 좁혀진 상황, 야지에서 80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는 C-3A1 백호 전차였지만, 7km 거리는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어쨌든, 경주 아닌 경주를 시작한 백호 전차 2대는 어느새 산밑까지 도달했고 오른쪽으로 도망가는 자주포 사로잡기 위해 더욱 속도를 높였다. 한편 산 정상에서 지원 사격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711호 전차와 714호 전차는 도망가는 자주포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위협사격을 가했다.
쮸웅! 쮸웅! 쮸융!
강렬한 붉은 입자가 날아가 자주포가 가는 방향 근거리에서 착탄 하자 거대한 눈 기둥이 20여 미터나 솟구쳤다. 이에 자주포들은 이리저리 회피기동을 하느라 속도가 줄어들었다.
어느덧 5km까지 좁힌 상황, 하지만 지대가 낮아진 만큼 각종 지형의 방해로 인해 가끔 시야에서 사라지긴 했으나 그럴 때마다 소대장 전차로부터 적 자주포의 위치를 확인시켜줬다.
“더 밟아! 더더더더!”
전차 내 통신망으로 김일수 상병을 닦달했다.
- 전차장님! 야지 최대 속도 넘었습니다. 지, 지금, 시속 90km에 가깝습니다.
“필요 없고 더 밟아!
- 아! 그러다가 현수 나갑니다.
“안 나가 안 나가! 더 밟아!”
현시경에 두 눈을 고정한 채 소리를 빽빽 지르는 김영주 중사! 하지만 포수석에 앉아있는 염훈기 하사는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양쪽 손잡이를 잡고는 신음을 토했다.
성능 좋은 현수장치를 장착했더라도 야지에서 90km에 가까운 속도로 기동하면 전차는 마치 자갈밭을 굴러가는 자동차와 같았다.
엄청난 충격과 진동이 앉아있던 염훈기 하사의 엉덩이를 때렸고 이에 고질병 치질이 그에게 최악의 고통을 주었다.
“으캬캬캬캬캬~ 전, 전차장님 나 죽엇! 크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