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의 하얀 깃발
2024년 1월 30일 06:20 (러시아시각 29일 11:30),
러시아 모스크바 벙커 스테이트 R-21(상황실).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블라디미르 베샤스트니흐 대장이 좌천되고 새롭게 총참모장 자리에 오른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은 온갖 인상을 쓴 채로 상황실 스크린 화면 속의 한 장성을 노려보며 보며 일갈을 퍼부었다.
- 무슨 짓이라니요? 말이 심하지 않소?
“말이 심하다고 하셨소? 정찰위성의 탐지정보를 끊어 우리 공군전력은 물론 대공 전력 대부분이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았소이다. 그런데도 내 말이 지금 심하다는 것이오?”
- 허허, 그건, 우리가 일부러 끊은 것이 아니오.
“아니긴 뭐가 아니오? 대대적인 교전이 막 시작되려는 시점이지 않소이까? 당신들 정찰위성만 믿고 있었다가 완전히 괴멸되었단 말이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은 급기야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스크린 화면에 손가락질까지 해댔다.
- 정말이오. 우리도 현재 원인파악을 하는 중이오. 지금은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지만 말이오.
손가락질까지 당하자 조금은 당황한 듯 방어적인 입장으로 변명을 늘어 논는 화면 속 주인공은 미국 합참의장인 오스틴 베리 대장이었다.
“그런 변명 듣고 싶지 않소. 이건 분명히 양국이 체결한 조약을 위반한 행위요.”
- 허허, 이거 참, 조약 위반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시오.
“그럼, 왜 그 중요한 시점에 탐지정보를 끊었는지를 말해보시오.”
- 방금 말하지 않았소? 우리도 원인을 찾고 있다고 말이오.
“흥! 개가 웃을 소리!”
- 뭐요? 개? 이 사람이?
서로 간 번역된 자막을 읽으면서 점점 험악해지는 화상통신! 그나마 자막이었기에 감정적인 부분이 일부 절제되어 그렇지 만약 같은 언로로 이러한 대화를 했다면 이미 야단이 나고 남을 정도로 심각해졌을 것이다.
“오스틴 베리 합참의장! 앞으로 6시간 안에 탐지정보를 끊은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때, 후회하게 될 것이오. 알았소?”
마지막 한 말을 내뱉은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 고개를 돌려 오퍼레이터를 향해 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막 대답하려는 오스틴 베리 대장의 모습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쿵!
앞에 놓인 총참모장 전용 탁자를 내리친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은 총참모장 자리에 오른 지 하루 만에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다.
“빌어먹을 미국 놈들······.”
아랫입술을 깨물며 분노를 표출하는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의 머릿속에는 당장에라도 상황실 출입문을 박차고 들어온 푸틴 대통령의 모습이 선하게 보였다. 어쨌든 그런 푸틴 대통령이 오기 전에 현재 북서부전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길게 심호흡을 하고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이번에 총참작전관 자리에 오른 샤브카트 무라야노프 중장을 불렀다.
“무라야노프 중장! 아직 동부군구나 중부군구 사령부와는 연락이 되지 않나?”
“네,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럼, 그 아래 각 군 사령부라도 연락해봐!”
“해봤지만, 각 군 사령부 역시 통신 두절입니다. 총참모장님!”
총참작전관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연락이 가능한 하급부대라도 찾아야 할 게 아닌가?”
“현재 연락이 가능한 부대들을 찾고 있지만, 이상하게 모두 통신 두절입니다. 아무래도 위성상태가 문제인 듯합니다. 그래서 다른 통신 수단으로 연결 시도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쿵!
“제길! 되는 게 하나도 없군!”
다시 한번 자신의 탁자를 양손으로 내려친 산자르 투르수노프 대장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2024년 1월 30일 07:00,
남주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 국가위기상황센터 지하 벙커.
‘시베리아 불곰 덫’ 작전 상황을 지하 벙커에서 지켜보고 있던 추은희 대통령과 청와대 수석들은 합동참모본부로터 북서부전선 일대의 러시아 지상군들이 일제히 항복 의사를 표했다는 보고에 일시적으로 모든 작전을 보류시킨 후 심도 있는 회의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시베리아 불곰 덫’ 작전의 피날레를 장식하려던 제15특수임무비행단의 CMS/A-30P 청룡 전략폭격기들은 오논강 동단으로 비행한 후 지금은 가장 가까운 후룬베이얼 임시 비행장으로 귀환 비행에 들어간 상태였다.
추은희 대통령을 비롯해 강현수 안보실장과 강이식 국방부 장관, 그리고 청와대 수석들의 시선은 분할된 화면으로 현재 오논강 서단 설원 일대를 촬영한 영상에 꽂혀있었다.
해외정찰국의 아폴론 정찰위성은 물론, 각 군단에서 운용하는 무인정찰기와 일선부대의 정찰 드론은 자바이칼 지방 곳곳을 날며 HUD급 고해상도로 항복 의사를 밝히는 러시아 지상군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작은 크기의 정찰 드론 같은 경우는 고도 100m 이내로 낮게 날아다니며 러시아 지상군을 촬영했지만, 그들로부터 어떠한 위협공격 반응은 없었다.
“저게 정말 러시아군이란 말이죠?”
눈동자를 이곳저곳으로 돌리며 분할된 스크린 화면을 주시하던 추은희 대통령이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대부분 동부군구와 지원 온 중부군구, 그리고 일부 남부군구 소속의 러시아 지상군들입니다.”
대통령의 질문에 강이식 국방부 장관이 바로 대답했다.
“음, 확실히 항복 의사를 보이는 듯하군요.”
군사지식이 많지 않은 추은희 대통령의 눈에도 지금 보이는 화면만 봐도 러시아 지상군이 교전 의사가 없을뿐더러 항복을 표한다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현재 분할된 화면 속의 영상 대부분은 각자 운용하던 전차와 장갑차의 포탑 방향은 한국군이 아닌 바이칼 호수가 있는 서단 방향으로 가리키고 있었고 포신 역시 축 처진 채로 있었다. 또한, 승조원을 비롯한 전투 보병들 역시 각종 개인 장구류를 비롯해 개인화기를 한곳에 보기 좋게 정렬해 놓은 상태로 그들은 비무장 상태로 한곳에 모여 불을 피우고는 몸을 녹이며 쉬고 있었다.
“대통령님! 문제는 현재 북서부전선의 군 수뇌부에서 항복한 것이 아닌 일선 부대들의 자체 판단하에 항복 의사를 표했다는 것입니다.”
국방부 장관의 말에 분할된 화면을 보던 추은희 대통령이 의아해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그게 무슨 차이입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쉽게 설명하려고 잠시 생각하려던 그때 합동참모본부에서 파견 온 작전처장 박대일 준장이 상체를 치켜세우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부분은 제가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자네가 설명해 드리게”
“네, 감사합니다. 장관님!”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박대일 준장은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추은희 대통령의 질문에 관해 설명해 나갔다.
“현재, 자바이칼 지방에는 대략 러시아 지상군 34만여 명이 전개 중입니다. 현재 항복 의사를 밝힌 러시아군은 대부분 오논강 서단 설원에 전개 중인 러시아 지상군으로서 합동참모본부에서는 대략 22만여 명으로 예상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국방부 장관께서 말씀하신 대로 상급부대의 명령체계로 내려진 항복이 아닌 일선부대에서 자체적인 판단으로 항복한 경우입니다.”
“그러니까요.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세요.”
군과 관련된 지식 부족으로 인해 쉽게 이해되지 않았는지 추은희 대통령은 조금은 심통 난 표정을 지으며 재차 물었다.
“네, 죄송합니다. 쉽게 말해서 명령계통으로 움직이는 군 특성상 이처럼, 군 수뇌부로부터 하달된 항복명령이 아니라면, 저 중에는 정말 항복하려는 부대가 있는가 하면, 아니면 기만전술에 따른 위장항복부대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2만여 명의 항복 군인 중에 가짜 항복 군인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기존 작전 안대로 제압 폭격을 가했으면 이런 고민할 필요도 없는데, 이러다가 북서부전선 정리가 생각보다 늦어질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강현수 안보실장은 살짝 꼬인 상황이 아쉬웠던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고뇌에 찬 말을 흘리자 강현수 국방부 장관이 살짝 목소리에 힘을 주고는 진언했다.
“대통령님! 러시아와의 빠른 종전을 위해서는 북서부전선의 승리는 물론 빠른 정리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지금 일부 러시아 지상군이 항복 의사를 표했다 하더라도 기존 ‘시베리아 불곰 덫’ 작전을 밀고 나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순간 놀란 눈을 한 강현수 안보실장이 국방부 장관을 바라보며 불렀다.
“강 장관?”
“네, 알고 있습니다. 향후 국제사회로부터 큰 파문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부분은 제가 정치적으로 책임을 지겠습니다.”
“허허, 자네 왜 그러는가?”
답답한 마음에 강현수 안보실장이 혀를 차며 나물 하듯 말했으나 국방부 장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어갔다.
“대통령님, 안보실장님, 미국과의 전면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전에 러시아와의 전쟁은 어떻게든 끝내야 합니다.”
단호하고 절박해 보이는 강이식 국방부 장관의 말에 잠시 상황실은 적막감이 흘렀다.
“제 생각에는······.”
잠시간 무거운 분위기가 연출된 상황에서 임종원 비서실장이 입을 열었다.
“강 장관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만, 어쨌든 향후 발생 될 국제사회로부터의 정치적 파장의 책임자는 대통령입니다. 그렇기에 강 장관의 의견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일단, 항복 의사를 표한 러시아 지상군이 22만여 명이라면 사실 북서부전선은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고 봐야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서둘러 항복한 러시아 지상군을 수습하기보다는 이러한 상황을 전 세계에 일단 알린 후 신중하고 안전하게 천천히 수습하면서 제2차 작전인 ‘불곰 포획’ 작전을 정상적으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안보실장과 국방부 장관, 그리고 여러 수석은 임종원 비서실장의 말에 귀를 기울여다.
“사실, 북서부전선 일대의 승리 소식이나 22만여 명의 러시아 지상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봅니다. 둘 중 어떤 것이든 러시아 본국의 군 수뇌부는 큰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럴싸한 임종원 비서실장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에 추은희 대통령이 결심했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 강 장관의 의견 충분히 존중하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항복하려는 러시아 군인들을 죽일 순 없습니다. 그것도 무려 30만여 명이나 되지 않습니까? 그건 학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에 임 비서실장 말대로 러시아 군인들이 항복 의사를 밝혔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포로 관련 진행은 최대한 신중하고 천천히 하도록 합시다. 그 부분은 합동참모본부에서 계획안을 수립하여 보고하라고 해주세요.”
추은희 대통령의 깔끔한 결정에 강이식 국방부 장관도 더는 할 말이 없는지 짧게 대답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네, 알겠습니다.”
이날 상황실에서 한 회의가 끝나고 가용한 모른 언론 매체를 통해 현재 북서부전선 일대의 러시아군이 항복 의사를 밝혀 교전은 중지되었으며 향후 항복에 따른 무장해제와 포로 수습이 시작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북서부전선 만큼은 대한민국의 승리였다. 이에 세계 모든 국가의 초관심사는 러시아 남부전선과 향후 대대적으로 벌어진 미국과의 전면전에 쏠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