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의 하얀 깃발
2024년 1월 30일 05:45 (러시아시각 22:45),
러시아 자바이칼 지방 오논강 서단 사우스 레이크 호수.
CF-21P 주작 전투기로부터 공중 엄호를 받으며 강력한 SECM(전파교란시스템)을 방출하며 비행하던 000비행단의 데드원 편대 소속의 CMS/A-30P 청룡 전략폭격기 3호기는 서서히 고도를 낮추고는 이내 내부무장실의 페어링을 개방했다.
지이이이이잉~
리볼버 형식의 컨로드에 장착된 C-PSB(플라스마 확산탄) 80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페어링 오픈 완료! 최종 포격지점 지상 상황 확인 중!”
무장통제관은 각종 모니터를 보며 진행 상황을 조종실에 보고했다. 그리고는 최종적으로 포격지점의 지상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초정밀 망원 카메라를 조작했다.
고도 8km 상공에서도 지상의 사람 얼굴도 식별할 수 있는 초정밀 망원 카메라가 지상 곳곳을 훑었다.
지상은 온통 하얀 세상이었지만, 곳곳에는 하얀 위장막을 사용해 매복하고 있는 한 무리의 기갑군이 곳곳에 보였다.
“목표 대상! 기존 포격지점에서 확인! 최종 승인 요청합니다.”
- 현재 시각! 공 오시 사십오 분! 해당 목표 지점에 폭탄 투하한,
“잠깐, 폭격기장님! 이, 이상합니다.”
갑작스러운 무장통제관의 외침이 조종실을 울렸다.
- 뭔가? 어서 말해! 폭격 경로 지점을 지나치고 있잖아!
“그것이! 해당 영상 조종실로 전송하겠습니다. 직접 확인 바랍니다.”
무장통제관은 보고 대신 카메라에 담긴 영상을 조종실 모니터로 송출했다.
- 대체 뭔데 그래?
살짝 신경질을 부린 3호기 폭격기장은 모니터를 통해 전송된 영상을 살펴봤다.
하얀 위장막으로 자신들의 정체를 숨긴 전차와 장갑차, 그리고 햐얀 군복을 입은 보병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200배 줌으로 당겨진 영상으로 바뀌자 전차와 장갑차에 매달린 깃발들이 조금은 이상했다. 보통 부대 깃발이나 피아식별을 위한 식별 깃발이 아닌 죄다 하얀 깃발이 매달려 있었다.
- 뭐야? 저것들은?
“폭격기장님! 아무래도 저놈들 항복 깃발 같습니다.”
무장통제관의 말에 폭격기장은 순간 고민에 빠졌다. 무장통제관 말대로 만약 항복 의사를 표하는 항복 깃발이라면 폭격 임무는 여기서 중단해야만 했다. 이를 무시하고 폭격한다면 향후 국제사회로부터 생각지 못한 후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고민하는 사이 CMS/A-30P 청룡 전략폭격기 3호기는 폭격지점 항로를 지나치고 말았다. 이에 주조종사는 왼쪽으로 크게 기수를 돌리는 비행에 들어갔다.
- 음, 이거 참, 애매하게 만드는군, 상부에 보고해야 하나?
고민하는 폭격기장에 말에 방금 선회 조종을 했던 주조종사가 자신의 의견을 냈다.
- 보고해야지 않겠습니까? 단순한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폭격기장님!
-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그때 데드원 편대기장으로부터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 데드원 편대는 현 시각 기준, 폭격 임무 중단한다. 상부로부터 추가 명령이 하달될 때까지 오논강 동단 상공으로 이동하여 대기 비행한다. 이상!
다른 폭격기 역시 지상 상황을 파악하고는 편대기장에게 보고한 듯했다.
- 데드원 쓰리! 카피 뎃!
대답한 3호기 폭격기장은 즉시 주조종사와 무장통제관에게 연달아 지시를 내렸다.
- 오논강 서단 상공으로 비행경로 변경! 무장통제관은 내부무장실 페어링 폐쇄!
“알겠습니다.”
공중 엄호를 맡았던 CF-21P 주작 전투기도 상부로부터 명령을 받았는지 3호기를 따라 조용히 비행해 나갔다.
★ ★ ★
2024년 1월 30일 05:50
남주 서울특별시 용산구 B2 벙커(국군 합동지휘통제소 상황실).
“러시아군 수뇌부로부터 정식 항복 의사를 건넨 것도 아닌데 그냥 밀어버리디요. 고민할 게 뭐가 있슴네까? 저것들만 끝장내면 북서부전선의 전쟁은 끝입네다.”
승리를 코앞에 두고 잠시 작전이 멈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 윤기윤 합참차장의 냉랭한 목소리가 상황실을 울렸다.
“윤 차장님! 러시아군 수뇌부가 아닌 일선 부대의 항복 역시 사사로이 넘어가선 안 됩니다. 향후 국제사회로부터 큰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보고가 올라온 바로는 대부분의 일선 부대들이 모두 하얀 깃발을 내걸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김용현 합참차장이 차분한 어조로 조목조목 이유를 말했지만, 윤기윤 합참차장은 답답할 뿐, 이에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기까지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지휘관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이렇다 할 의견을 제시하진 않았다. 나름 판단하기 힘든 고민인 듯했다.
“거참! 일개 부대들의 항복 의사까지 판단해가며 전쟁을 치러야 합네까?”
성격이 불같은 윤기윤 합참차장의 불만은 계속되었다. 급기야 신성용 합참의장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직접적으로 말했다.
“의장께서 결단을 내시라요. 그냥 밀어 벌립세다.”
다소 과격한 어투로 말하는 윤기윤 합참차장의 말에 신성용 합참의장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굳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잠시 확인은 해봐야 할 듯합니다.”
“합참의장님!”
신성용 합참의장마저 자기 뜻과 다르자 힘주어 불렀다.
“윤 차장님! 윤 차장님 말대로 북서부전선의 전쟁의 승리를 위해 하얀 깃발의 의미를 무시하고 공격한다면, 향후 국제사회로부터 받게 될 직접적 압박은 우리 군이 아닌 대통령님입니다. 우리 군 선에서 끝난다면 이렇게 고민할 것도 없지요. 그러니 잠시 확인해 볼 시간은 갖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곤조곤 말하는 신성용 합참의장의 말에 윤기윤 합참차장은 수긍하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에 신성용 합참의장은 엷은 미소를 보이고는 고개를 돌려 작전본부장을 불렀다.
“양 중장!”
“네, 합참의장님!”
“공작사에 연락하게. 추가 명령이 후방 동단 상공으로 물러나라고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전개 중인 부대 중 가장 가까이 진공 한 부대는 어디인가?”
“네, 제20기사단 소속 제61여단입니다.”
“그럼 60여단에서 가장 근접해 있는 대대급 부대는?”
“네, 108전차대대입니다.”
“그렇군, 화상통신으로 연결하게”
“알겠습니다.”
잠시 후 통신담당 오퍼레이터가 소리쳤다.
“5번 스크린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오퍼레이터의 보고와 동시에 5번 스크린이 환해지면서 전형적인 군인 스타일의 장교 얼굴이 보였다.
- 충성! 제108전차대대 대대장 중령 김연석입니다.
절도있는 동작으로 거수경례한 김연석 중령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일선 부대의 대대장이 별들만 수두룩한 합동참모본부와 직접 화상통신으로 연결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모니터 화면 속 수많은 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김연석 중령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목숨 걸고 교전 중인상황에서 이렇게 연결하게 되어 미안하네.”
- 아닙니다. 합참의장님! 현재 전진에 대대적 폭격이 진행된다고 하여 잠시 후방 일대로 퇴각하여 대기 중이었습니다.
청룡 전략폭격기의 대대적인 폭격 시간이 다가오자 포위망을 좁히며 압박 진공에 나섰던 모든 지상군에게 현재 위치에서 후방 일대로 즉각 퇴각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상태였다. 이에 108전차대대도 20분 전까지만 해도 치열한 교전을 벌였었고 지금은 후방 능선 아래쪽까지 퇴각하여 전방주시를 하며 대기 중이었다.
“그래, 그럼 러시아군과 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나?”
- 대략 12.5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부탁 하나만 해야겠네.”
- 네, 말씀하십시오.
다시 한번 절도있는 동작으로 취하며 대답하는 김연석 중령의 말에 신서용 합참의장은 자신의 턱을 한번 매만지고는 말을 이어갔다.
“자네 부하 중 소대급 정도만 하얀 깃발을 세우고 적진으로 넘어갈 수 있겠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때 작전본부장 양민춘 중장이 나섰다.
“합참의장님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신성용 합참의장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양민춘 중장이 대신 설명을 이어갔다.
“현재, 러시아군의 대부분 부대가 항복을 표하는 하얀 깃발을 걸고 있는걸 공중전력으로 확인했네. 그래서 말인데. 진정 그들이 항복 의사로 하얀 깃발을 걸은 것인지 직접 확인해 줘야겠네”
- 아! 그렇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즉시 소대급 병력만 보내 러시아군의 상황을 파악하겠습니다.
“좋아! 바로 해주게나. 아직 상공에는 우리 전략폭격기가 대기비행 중이니까 말이야.”
-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확인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수고해주게나”
“네,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충성!”
★ ★ ★
2023년 1월 30일 05:50 (러시아시각 22:50),
러시아 자바이칼 지방 오논강 서단 사우스 레이크 호수.
쿠르르르릉
C-3A1 백호 전차 4대가 종대대형을 갖추고 하얀 눈밭 위를 달리고 있었고 포탑 후미의 기다란 깃대에는 하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조금 전, 대대장 김윤석 중령의 명령을 받고 중부군구 제41군 소속의 제74독립차량화소총사단의 예하 부대들이 매복하고 있는 구역으로 빠르게 기동 중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얕은 구릉지 위로 올라오자 한눈에 들어오는 널따란 설원지대가 펼쳐졌다.
“11시 방향! 거리 4500 한 무리의 기갑군 포착! 대략 11대, 모델은 T-14 아르마타로 확인됨! 12시 방향 거리 5200에도 기갑군 포착! 13대로 모델은 같음!”
가장 선두에서 기동하던 2중대 211호 전차장 남원길 중위가 뒤따라오는 동료 전차에 적 전차 출현에 대한 브리핑을 이어갔다.
현재 기동은 교전 기동이 아닌, 적 진형까지 이동해 하얀 깃발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언제 어디서 기습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즉시 반격 사격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덧 거리가 1,500m까지 좁혀졌지만, 러시아군 기갑군의 공격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혹, 아군 전차 포탑 후방에 달린 하얀 깃발 때문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정말로 항복하고자 하는 이유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적진 깊숙이 기동하는 108전차대대의 2중대 1소대 전차 4대 승조원들은 조여오는 긴장감을 참아가며 점점 더 앞으로 기동해 나갔다.
쿠르르르릉 끼이익!
기였고 11시 방향에 있는 중대급 규모의 T-14 아르마타 전차가 비전투 대형으로 모여있는 곳으로부터 50m까지 도달한 2중대 1전차소대 C-3A1 백호 전차들이 일제히 멈췄다. 이들 역시 공격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계속해서 세로 틈 대형으로 기동해 왔다.
덜컹!
211호 전차장의 해치가 열리고 남원길 중위가 상체를 밖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T-14 아라마타 전차의 앞부분 해치가 열리며 승조원이 모습을 보였다.
잠시 후 양국 전차 승조원들은 무릎까지 빠지는 눈밭 위를 걸으면 서로 간 거리를 좁혔고 이내 코앞까지 다가섰다.
먼저 남원길 중위가 거수경례를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제20기갑사단 제60기갑여단 제108전차대대 2중대 1소대장 남원길 중위입니다.”
거수경례를 올린 오른손의 반대편 왼손에는 자동통역기 단말기가 달려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제41군 소속의 제74독립차량화소총사단 33연대 511대대 6중대장 안바르 가푸로프 상위입니다.”
서로 간 자동통역기로 간단히 소개한 후 가볍게 악수를 했다.
“현재 러시아군의 하얀 깃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악수를 마치자 남원길 중위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하얀 깃발 의미를 모르시는 겁니까? 항복입니다. 우리 부대는 더는 한국군과 더는 교전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국군이 원하는 대로 모두 무장해제를 할 테니 항복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역시나 러시아군은 항복 의사로 하얀 깃발을 단 것이었다.
안바르 가푸로프 상위 뒤로 보이는 T-14 아르마타 전차의 포탑은 모두 후방으로 회전한 상태로 포신은 최소 고각 상태로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어디서 만들었는지 저마다 다양한 크기의 하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음, 가푸로프 중대장님! 6중대만 항복입니까?”
“아닙니다. 현재 이곳에 전개된 모든 러시아군은 항복하기로 모두 얘기가 된 상태입니다.”
“동부군구나 중부군구 수뇌부도 말입니까?”
“그,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현재 두 군부의 사령부와는 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항복 의사를 밝히 최고선임은 누구입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일선 부대 지휘관들이 자신해서 항복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애매한 상황이었다. 최고 상급부대에서 내려진 항복이 아닌 일선 부대의 지휘관들이 자신해서 항복했다면 그중에는 위장 항복한 부대도 있을 수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현재 위치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최대한 모든 부대에 연락해 위장막을 철거하고 공중정찰전력으로부터 교전 의사 없음을 확실히 보여줘서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일단 대략적으로 정황을 확인한 남원길 중위는 다시 한번 안바르 가푸로프 상위와 악수를 하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웅얼거렸다.
“이거, 골치 아파지는 거 아냐?”
“뭐가 말입니까? 항복하면 해피엔딩 아닙니까? 더는 사상자도 없고 말입니다.”
동행했던 212호 전차장 김일후 중사가 묻었다.
“최상급 지휘관으로부터 항복명령이 떨어졌다면 하급 부대 지휘관들은 마음 편히 항복하겠지만, 지금은 일선 부대의 지휘관들이 스스로 항복하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게 그거 아닙니까?”
“아니지요. 개중엔 충성심에 불탄 위장항복 부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대를 일일이 선별하는 작업이 쉽지 않을 겁니다.”
“아! 그렇군요. 이거 소대장님 말대로 골치 아플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