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7화 (547/605)

하얀전쟁

2024년 1월 24일 15:00 (러시아시각 15:00),

러시아 자바이칼 지방 발레이시 남서단 11km 지점(제20기갑사단 60기갑여단 26전차대대 임시주둔기지).

오전 내내 제설작업을 마치고 오후 들어 꿀맛 같은 휴식 시간을 보낸 26전차대대 장병들은 1시간 전부터 대대 간부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대대본부 막사에서 모여든 간부들은 아무래도 상급 부대로부터 하달된 명령에 관한 브리핑을 듣고 있는듯했다.

간부들이 그러든지 말든지 사병인 김일수 상병은 간이침대에 누워 플라즈마 전지로 발열하는 손난로의 온기에 취해 제대 후 여자친구를 만나 영화도 보고 카페에서 카라멜 마끼아또를 마시는 상상을 하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이렇듯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상황에서 먼가가 그의 이마를 강타했다.

딱!

“악! 아파라!”

“기상! 비상이다.”

간부회의 참석했던 김영주 중사가 막사에 언제 들어왔는지, 침상에 누워 눈감은 채로 실실 쪼개는 김일수 상병의 이마에 알밤을 선물하고는 곧바로 자신의 군장을 꺼내서는 꾸리기 시작했다.

“무슨 비상입니까?”

“이동 명령 떨어졌다. 염 하사는?”

“부식 좀 챙긴다고 중대 식당 갔습니다.”

“호출해! 시간 없어! 1시간 후 이동이다.”

“아! 갑자기 이동이야. 아직도 눈이 천지에 쌓여있는데 말입니다.”

“시끄럽고 염 하사 호출하고 너도 군장 꾸려!”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호출받은 염훈기 하사가 양손에 한가득 부식을 끌어안고 막사로 들어왔다.

“아! 뭔 일입니까요?”

“무슨 일이긴? 이동 명령이야.”

“아! 개뿔! 일주일 내내 휴식이라며 제설작업만 하다가 이제 다시 시작하는구나.”

자신의 간이침대에 가져온 부식을 털어내며 투덜거렸다.

“아나 시간 없다니까. 어서 준비해!”

“네! 네! 알겠습니다요”

“다들 준비하면서 들어! 사단 본대는 내일 오전 9시 정각에 진공을 시작하고 우리 대대는 사단 기갑수색대대와 함께 진공로 정찰 임무를 수생한다. 이동 시간은 정확히 16시 20분! 알겠지?”

“근데 우리가 왜 기갑수색대대처럼 정찰 임무를 수행합니까?”

커다란 군장에 가져온 부식을 마구마구 쑤셔 넣던 염훈기 하사가 또다시 입을 빼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눈 때문에 그렇지 않겠습니까? 매복 위험이 크니 정찰 전력을 늘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오! 김 상병이 짬밥 좀 먹었다고 상황판단이 빠른데? 맞아! 사단 지휘부에서는 눈 때문에 러시아군의 매복 위험이 크다고 판단, 이에 사단 수립된 진공로에 대한 확실한 정찰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후후, 다음 달에 병장 달 짬밥이면 그 정도는 한 번에 알아채야지 말입니다. 염 하사님은······. 계급만 높지 아직 먼 듯합니다.”

“죽을래?”

“아아! 농담입니다. 염 하사님!”

“야! 입은 놀리더라도 빨리빨리 움직여라! 행보관님이 늦게 준비하는 소대는 나중에 박살 낸다고 엄포를 하더라!”

“아! 행보관! 무식하기만 해서리······. 그러고 보면 예전 우리 오영택 상사님이 행보관으로 있을 때가 좋았음. 아! 보고 싶네. 장가가는 날 입이 귀에 걸린 게 아직도 생생합니다. 하하”

“그러게. 지금 뭐하고 계시려나?”

염훈기 하사의 말에 기억이 떠올랐는지 김영주 중사도 피식 웃었다.

1시간 후,

쿠르르르르르릉! 쿠르르르르르릉! 쿠르르르르르릉!

제설작업으로 희미하게 나만 흙색이 보이는 대지 위에 여단 정비창에 보내진 전차 2대를 제외한 나머지 C-3A1 백호 전차 44대와 각종 장갑차가 거친 엔진음을 울리며 보기 좋게 도열한 가운데 하늘에서 스파이더-II 정찰드론과 이글-I 공격드론이 동시에 진공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대대 기동한다. 이상!

드디어 대대장의 기동 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26전차대대 선봉 역할을 맡게 된 7중대부 소속 전차부터 차례대로 앞으로 튀어나가기 시작했다.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휴식 아닌 제설작업에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던 장병들은 입가에 미소가 보였다. 어쨌든 제설작업보다는 목숨이 오가는 교전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만큼 장병들에게는 제설작업만큼 싫은 건 없었다.

어느새 기다란 종렬 대형을 갖춘 26전차대대 선두에는 여단 본부에서 파견 온 장애물 개척 전차인 C-600A1 황소 전차 2대가 지뢰제거용 쟁기를 장착한 채로 허리 높이까지 쌓여있는 눈을 좌우로 가르며 길을 만들었고 이에 C-3A1 백호 전차들이 뒤를 따랐다.

C-600A1 황소 전차의 용도가 각종 지뢰를 제거하는 장애물 개척 전차답게 가공할 무기는 탑재되지 않았지만, 대신 선두에서 기동하는 만큼, 기존 백호 전차보다 2배에 이르는 강력한 방호력과 신형 플라즈마 엔진인 KPP-200을 장착해 엄청난 출력으로 어떠한 장애물이든 손쉽게 헤쳐나갈 수 있었다.

“잘 있어라! 발레이여~ 아리따운 러시아 여자도 못 보고 제길슨!”

조준경을 통해 멀어지는 발레이 시내를 보며 염훈기 하사가 중얼거리자, 김영주 중사는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놀려대기 시작했다.

“염아! 실망할 거 없다. 세상천지 어떤 러시아 여자가 너를 쳐다보겠냐? 괜한 꿈 꾸다가 현타 와서 심장 폭격당하지 않은 게 다행인 거지!”

“허허, 모르시는 말씀이네요. 저 대학 다닐 때 여자들 엄청 따랐습니다.”

“증거 없다고 막 거짓부렁 쏟아내지 마라!”

“정말입니다.”

“당최 믿을 수 없는 말이다. 하하하!”

“야! 김 상병! 너 웃지 마라?”

- 왜 가만히 있는 저한테 그러십니까? 웃지도 않았구먼!

“안 웃긴 다 들렸거든?”

- 왜 괜히 전차장님한테 팩폭 당하고 저한테 화풀이합니까?

“그러게 말이다. 웃는 소리 안 들렸는데······. 저놈 갈수록 성격이 이상해져!”

“아! 쫌! 전차장님!”

“워! 워! 알았다. 그만하자. 크크크”

★ ★ ★

2024년 1월 24일 16:00,

남주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 국가위기상황센터 지하 벙커(NSC 회의실).

전날, 태평양함대와의 해전 결과 보고서를 받은 추은희 대통령은 금일 오후에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소집, 이에 국무총리를 비롯한 상위위원 전원이 모여 현재 돌아가고 있는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서 심도 있는 회의를 벌이고 있었다.

“미국 반응은 어떻습니까?”

태평양함대가 적잖은 피해를 본 상황에서 미국의 반응이 가장 궁금했던 추은희 대통령이 질문을 던지자 이내 강경희 장관이 대답했다.

“네, 아직 대외적으로 이렇다 할 발표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선제공격을 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패했다는 결과를 밝히고 싶지 않은 듯합니다.”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외교라인을 통해서 뭔가 교섭하려는 움직임도 없습니까?”

“네, 대통령님! 모든 라인을 개방한 상태이지만 특별히 연락은 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강 장관은 미국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거로 보입니까?”

“정확히 백악관에서 생각하는 바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외교부에서 분석한 바로는 미국은 일본 동맹국의 ‘자주국가선포’ 요청에 따른 명분으로 우리 해군 함대를 선제공격하였습니다. 사실상, 그러한 명분은 말장난일 뿐, 미국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가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이 USSC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또한, 여당이든 야당이든 미국 정치인 대부분이 USSC와 관련된 자들이기도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서로에게 옭아맨 약점을 역으로 이용해 재선에 성공 대통령 임기 1년을 남기 상황에서 다시금 우리 대한민국과 전쟁을 벌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기 전, USSC의 비밀을 알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을 청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태평양함대는 시작일 뿐, 지금도 백악관에서는 대한민국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 준비를 마쳤거나 준비 중일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한 분석이었다. 이에 참석한 상임위원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분석으로 바라봤다.

“저기, 강 장관님! 그렇다면 미국과의 전면전이 벌어지기 전에 USSC와 관련된 비밀을 국제사회에 폭로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미국과의 불필요한 전쟁도 없을 거고요.”

행정자치부 김수겸 장관은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냐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마도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을 때 폭로되는 것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권력을 가진 상태에선 어떻게든 진화할 힘이 있으니까요. 즉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가 끝난 후의 폭로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땐 대처할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음, 강 장관님 말씀을 들어보니 그럴 만도 합니다.”

이때 차세대기술협력부 임태연 장관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미국은 정말 우리 대한민국과 국운을 건 전면전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그 부분에 대해선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국방부 강이식 장관이었다.

“현재 러시아 톨스카야 오블래스트에는 유럽 나토군 소속이었던 미국의 신속기동여단이라 불리는 스트리커(Stryker) 부대 여러 개가 진출을 완료하여 러시아 서부군구와 함께 남부진공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즉 한러전에 미국이 공식적으로 러시아와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참전한다는 뜻입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미국과의 전면전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사실 강 장관님 탁월한 분석력에 속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대단하십니다.”

강이식 장관의 결론은 이상하게도 강경희 장관의 칭찬으로 끝이 났다. 이에 강경희 장관이 감사의 의미로 엷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요. 미국 태평양함대가 사이판으로 퇴각항해에 들어갔고 미국의 반응이 조용하다고 해서 안심할 때는 아니라는 저 역시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국방부 장관님!”

“네, 대통령님!”

“국방부에서 그동안 보류하고 있던 1급 동원예비령 선포하세요.”

한러전이 발발한 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실제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일부 전장 지역에서나 2급 동원예비령이 내려졌을 뿐 대부분 현역병 위주로 전쟁을 수행해 왔다. 이에 1년 차부터 5년 차까지의 예비군 대상자들은 평소와 같이 일상생활을 하며 지내왔다. 하지만 이제 국방부가 공식적으로 1급 동원예비령을 내리는 순간, 1년 차부터 2년 차까지의 100만에 이르는 예비군은 현역병 수준에 걸맞은 각종 군사 장비를 지급 받아 실제 전장에 투입되고 나머지 3년 차부터 5년 차까지 200만 예비군은 향토예비군사단에 편입되어 전국 각지로 이동하게 된다.

수백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사회경제 구성원에서 빠지게 되면 경제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에 그동안 1급 동원예비령을 보류하고 있던 추은희 대통령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대비하고자 이와 같은 큰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 ★ ★

2024년 1월 24일 16:50 (러시아시각 16:50),

러시아 자바이칼 지방 안디노 포셀리라 북서단 3km 지점(제20기갑사단 60기갑여단 26전차대대 임시주둔기지).

눈밖에 안 보이는 설원 위를 위성 GPS와 연동된 디지털 지도를 의지해 기동하던 26전차대대는 어느덧 안디노 포셀리라는 마을을 우회하고 있었다. 사전에 정찰드론으로 하여금 세밀한 정찰을 했지만, 이렇다 할 수상한 점을 찾지 못해 대대장으로부터 그대로 지나가라는 명령이 내려온 상태였다.

안디노 포셀리 마을에서 동단 방향, 직선으로 11km 거리에는 운다강의 종착점이자 북서단으로 길게 뻗어있는 오논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말해 오논강 서단 설원에는 북서부전선에서 패퇴한 러시아 동부군구와 중부군구 소속의 예하 부대들이 재정비를 마치고 도하 저지를 위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26전차대대가 개척 중인 진공로와 도하 예정지역 맞은편에는 동부군구의 정예라 할 수 있는 붉은기갑군단이 숨죽인 채로 전개 중이었다. 만에 하나 이곳으로 제20기갑사단(결전)이 도하에 성공하여 오논강을 따라 남진을 하게 된다면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던 또 다른 러시아군들은 측면 공격을 허용하게 되면서 최후의 방어 라인인 오논강 방어작전은 실패로 돌아갈 수 있는 매우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동부군구의 정예 중의 정예인 붉은기갑군단이 이곳 방어를 맡게 된 이유였다.

또한, 푸틴 대통령의 뜻에 따라 총참모부에서는 붉은기갑군단 사령부에 ‘목숨을 걸고 이곳을 사수하라’는 특별 지령을 내린 상태로, 이들에게 더는 퇴각은 없었다. 즉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이곳이 그들의 무덤이었다. 이에 다른 러시아 군인들보다 앞으로 치러질 교전에 대한 각오가 남달랐다.

그러한 상황에서 도하 예정지역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다가오는 26전차대대에서도 서서히 긴장감이 불어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별의별 농담으로 대화를 주고받던 26전차대대 713호 전차장 김영주 중사와 포수 염훈기 하사, 그리고 조종수 김일수 상병도 지금은 진지한 상태로 전방 경계를 하면서 기동했다.

“와! 어디가 강이고 어디가 평지인지 알겠습니까?”

조준경을 통해 전방 상황을 본 염훈기 하사가 고개를 절레거렸다.

“난들 알겠냐? 디지털 지도상으로 어디쯤이 강인지만 구분이 가능한 거지!”

“김 상병아!”

- 네, 전차장님!

“나중에 도하 할 때 꼭 디지털 지도 참고하면서 기동해야 한다.”

- 네, 알겠습니다.

하늘에서 바라본 이곳 자바이칼 지방은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마을이든 숲이든 강이든 온 천지가 하얀 눈으로만 덮여있어서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구분이 안 되었다. 하늘을 날고 있는 스파이더-II 정찰 드론의 카메라에 담긴 영상이 딱하니 이래 보였다.

어떻게 보면 쉽게 구경하지 못할 광활하고 멋진 풍경일 수도 있지만, 너무나 하얀 나머지 조금은 무섭게 느껴지는 풍경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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