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게임
2024년 1월 20일 18:00 (영국시각 10:00),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외교부 청사.
템스강 서단에 자리 잡은 외교부 청사는 중세기 건물양식 특유의 멋스럽고 고풍스러운 자태를 뽐내는 건물 중의 하나였다.
* 제1차 동북아 전쟁이 끝난 직후 영국은 1968년 외교부와 영연방부를 통합하면서 신설한 외무·영연방부를 다시금 외교부와 연연방부로 분리하여 신설했다. 이유인즉슨 하루가 다르게 격동하듯 변해가는 국제정세를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외교력을 집중시킬 필요성을 느꼈고, 더불어 영연방에 속한 국가에 대한 철저한 관리 역시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붉은 벽돌 사이로 장미 넝쿨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외교부 청사는 평상시와는 다르게 중무장한 영국군 병력까지 동원되어 삼엄한 경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적어도 200여 명에 가까운 중무장한 영국군과 경호원들이 외교부 청사를 에워싸고 있었다. 외교부 청사 안에 안전을 요구하는 중요한 인물이 방문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중요한 인물은 바로 이틀 전, 라트비아 리가에서 암살범으로 위장한 CIA 요원들에게 암살당할뻔했던 김명환 2차관이었다.
암살사건 발생 이후 안전가옥으로 이송되어 집중적인 치료를 받은 김명환 2차관은 입고 있었던 보호슈트 덕분에 중상은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근거리에서 십여 발에 달하는 총격을 받아 가슴을 비롯한 신체 여러 곳이 시퍼렇게 멍이 든 상태였다. 천만 다행히도 얼굴에 총격을 당하지 않은 것이었다.
어쨌든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온몸이 멍든 김명환 2차관은 강경희 장관으로부터 복귀 명령이 내려졌음에도 주어진 특사 임무를 끝까지 마치고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몇 차례 더 복귀 명령이 내려왔지만, 끝내 김명환 2차관은 아픈 몸을 이끌고 금일 오후 2시에 런던에 도착한 후 바로 영국 외교부 청사로 이동해 엔더스 장관과 비밀회담을 했다. 엔더스 장관과의 비밀회담은 어제 약속되어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암살사건으로 인해 오늘로 연기되었고 영국 외교부 역시 대략적인 내용을 알고 있는 터라 김명환 2차관에 대한 안전 경호에 신경을 쓴 이유였다.
천장이고 벽이고 간에 화려한 조각과 고풍스러운 그림 액자가 걸려있는 이곳 외교부 청사의 접견실은 중세시대를 촬영하는 영화 세트장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예전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접견실 정 중앙에는 꽃 모양으로 조각된 널따란 사각 탁자 사이로 두 명의 사내가 푹신한 의장에 앉아 마주 보고 있었다.
10분 전, 서로 간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보좌관이 내어온 커피를 마시며 보이지 않은 기 싸움에 들어간 상태였다.
“엔더스 장관님! 정원에 있는 몇 그루의 나무를 보는 것보다 멀지마는 무성한 숲을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의미심장한 말로 비밀회담을 시작한 김명환 제2차관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의 압박감도 묻어있었다.
“음, 조금 난해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향을 음미하며 한 모금 들이킨 엔더스 장관은 탁자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양어깨를 들썩였다.
역시나 영국 외교부 수장답게 능청스러운 행동이었다. 이에 김명화 2차관은 유리한 고지점령을 위해 먼저 공격에 들어갔다.
“하하,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말을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아니지요. 아니지요. 모르는 게 아닙니다. 김 특사께서 한 말 중에 어디가 정원의 나무고 어디가 숲인지 그것이 난해하다는 말입니다.”
엔더스 장관은 정녕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영국 특유의 의회 토론 정치에 훈련이 되어 있던 인물로 30여 년간 의회 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여당 당수로 수상과 토론을 벌여 몇 번이나 궁지에 몰아넣었던 화술가이기도 했다.
매주 수요일 의회에서 30분간 수상에 대한 자유 질의는 사전에 대답을 준비할 수 없는 수상이 불리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자유 질의를 통해 수상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풍부한 지식이 받쳐줘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상황에 따른 빠른 대처능력과 화려한 언변술을 가져야만 가능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엔더스 장관께서는 정원의 나무는 어디이고, 숲은 어디라 보십니까?”
살짝 당황한 김명환 2차관은 마음속으로 혀를 내둘렀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 바로 질문을 이어갔다.
“글쎄요. 앞서 말했듯이 난해한 부분이라······.”
순간 김명환 2차관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엔더스 장관께서는 우리 대한민국이 숲인지, 미국이 숲인지 판단이 잘 안 된다는 거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반짝이는 김명환 2차관의 눈빛과는 다르게 엔더스 장관의 표정은 순간 굳어졌다. 이렇게 대놓고 맞받아칠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하하하, 그거야······.”
애써 웃음을 보인 엔더스 장관은 커피잔을 들어 다시금 들이켰다.
“장관님! 그럼 제가 무성한 숲이 어디인지를 확실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조금은 강한 말투로 내뱉은 김명환 2차관은 서류 가방에서 몇 가지 문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리고는 그대로 엔더스 장관 쪽으로 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뒤쪽은 나중에 천천히 읽어보시고요. 맨 위에 있는 문서가 요약본이니 잠깐 읽어보시지요.”
엔더스 장관은 여러 문서 중 가장 위에 있는 얇은 두께의 문서를 들고는 이내 첫 장을 넘겼다. 김명환 2차관은 고개를 들고는 유심히 엔더스 장관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요약본이라 불리는 문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엔더스 장관은 굳은 표정 그대로 김명환 2차관을 쳐다봤다.
‘허허! 역시나 엔더스 장관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니군!’
엄청난 비밀을 읽고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는 엔더스 장관의 모습에 김명환 2차관은 놀랄 따름이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기겁하며 놀라 나자빠지고 남을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떻습니까? 생각이 조금 바뀌셨습니까?”
머리를 쓸어올리며 의중을 파악하고자 질문을 던진 김명환 2차관, 하지만 엔더스 장관은 무표정으로 쳐다볼 뿐 이내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김명환 2차관 역시 재차 질문하지 않고 대답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등받이에 몸을 지탱하며 자세를 편히 했다.
접견실의 공기가 한층 더 무거워질 때쯤 엔더스 장관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실 상상 이상으로 놀랬습니다. 하지만, 이 문서의 사실 여부가 궁금하군요.”
엔더스 장관은 손가락으로 방금 읽은 문서를 튕기며 말했다.
“진위라······.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엔더스 장관님이었어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관님! 비록 이 자리가 비공식적 비밀회담이긴 하나, 대통령으로부터 모든 전권을 위임받고 온 특사가 거짓 정보를 가지고 왔겠습니까? 자칫 영국은 물론 미국과의 국제적인 큰 문제로 번질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뒤쪽 문서에도 상세한 내용이 있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3년 전, 우리 대한민국은 미국본토까지 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대대적인 보복공격은커녕 갑작스럽게 평화 모드로 전환하여 우리 대한민국과 평화협정을 맺음으로써 끝을 냈지요. 과연 미국이 그런 국가입니까? 예를 들어볼까요? 지난 2차 세계대전 당시만 해도 일본으로부터 본토도 아닌 하와이 진주만이 공격을 받자마자 바로 참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초강대국이 된 미국이 말입니다.”
“그거야. 한때 같은 동맹국이었고 더는 전쟁확산을 막고자 하는 미국의 의지가 아니었습니까?”
“하하, 엔더스 장관께서는 한 나라의 외교부 수장이면서도 어찌 국제정세를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눈으로 보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겁니까?”
김명환 2차관의 순간적인 일침에 엔더스 장관의 표정이 일순간 꾸겨졌다. 미국을 두둔하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말도 안 되는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제길! 저 어린놈에게 당했군!’
순간 실수했다는 생각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엔더스 장관은 한쪽 눈썹을 실룩거리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반면 김명환 2차관은 다소 여유롭게 자세를 취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요약본 외에 제가 드린 나머지 문서들을 읽어보신다면 충분히 믿으실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나머지 문서는 천천히 읽어보도록 하지요. 한데 왜 이러한 문서를 보여주면서까지 우리 영국에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김명환 2차관과의 기 싸움에서 밀렸다고 생각했는지 엔더스 장관은 한층 표정을 풀고는 금일 비밀회담의 안건에 대해서 먼저 말을 꺼냈다.
이에 김명환 2차관도 밝게 미소를 보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
“현재 미국이 나토군에 소속된 영국군을 동원하기 위해 영국 내각에 힘을 쓰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뭐, 들었다기보다는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 더 현실적이겠군요.”
사실 그랬다. EU(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서 나토군의 참전 안건이 부결되자 미국은 곧바로 영국에 몇 가지 달콤한 제안을 하면서 손을 벌렸다.
현재 영국은 나토군을 관리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회원국이면서도 2020년에 EU(유럽연합)에서 탈퇴하여 정상회의 결정과 무관한 국가였다. 즉 나토군 내에서 유일하게 영국군만이 미국이 요청하여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군대였다.
또한, 나토군 내에서 영국군은 규모 면이나 장비 면에서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현재 기준 유럽과 아프리카에 주둔 중인 나토군의 각 국가 파병군 비율을 보자면 50%가 미군이었고 15%가 영국군이었다. 나머지 35%는 프랑스군을 비롯한 나머지 EU(유럽연합) 국가들의 파병군이었다.
즉 미군과 영국군만 합쳐도 현존 나토군의 65% 전력이었다. 수치상 15%였지만 현재 상황에서 미국으로서는 나토군 내 영국군의 전력이 매우 필요했다. 아니 절실했다.
“하하, 어떤 경유로 알고 있다고 하는지 모르겠으나, 미국으로부터 그런 요청을 받은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엔더스 장관은 단번에 잘라 말했다.
과거 동맹관계는 이데올로기에 따른 동맹국들의 관계였다면 현대의 동맹은 힘의 논리와 자국의 이익 타산에 따른 동맹관계가 우선이었다. 현재 영국과 미국은 후자에 따른 힘의 논리와 자국의 이익 타산에 있어서 서로 간 요구한 국가관계였다.
쉽게 말해 대한민국과 미국, 두 국가 중 한 국가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현재의 영국은 미국을 선택할 확률이 높았다.
영국은 아직 까지는 미국이야말로 초강대국으로서 국제질서를 좌우 지할 국가라 믿고 있었으며 맞물려 서양문명을 제치고 동양의 작은 국가였던 대한민국이 세계 초강대국이라는 것을 용납하기 싫어했다. 이것이 실제로 미국을 선택하는 이유 중의 이유라고 봐도 무방했다.
“아! 그런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미국에 이러한 요청을 받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하, 앞으로 벌어지지 않을지도 모른 일을 가지고 미리부터 대답 드려야 하는 겁니까?”
저 말의 의미는 요청 시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난해한 말이었다.
“대답을 피하시는군요.”
“아니지요. 피하는 게 아니지요. 국가 간 외교관계에 있어서 가정을 두고 미리 대답을 드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겁니다.”
역시나 능구렁이마냥 빠져나가는 엔더스 장관이었다.
“좋습니다. 장관님! 그럼, 나머지 문서들도 읽어보시고 내일 다시 얘기해보시지요.”
“아! 그럴까요?”
“네, 내일 오후 2시에 다시 방문해도 되겠는지요?”
“그렇게 합시다.”
“그럼, 오늘은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1시간가량 엔더스 장관과 비밀회담을 한 김명환 2차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로비까지 안내하겠습니다. 가시지요.”
“네, 감사합니다.”
엔더스 장관이 앞장서 앞으로 나가며 안내를 하자 일어섰던 김명환 2차관은 순간 가슴부위에서 밀려오는 통증에 살짝 인상을 쓰면서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