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9화 (519/605)

폭풍전야

2024년 1월 19일 18:00 (러시아시각 18:00)

러시아 자바이칼 지방 발레이시 남서단 11km 지점.

국경선을 따라 진공 하여 북부전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제7기동군단이 북서부전선까지 진입하여 중부군구의 제20근위군과 제41군을 차례대로 격파했고 이에 러시아군 전체가 오논강 서단으로 일제히 퇴각하자 군단 본부는 모든 예하부대에게 추가 명령이 있을 때까지 현재 위치에서 휴식과 재정비를 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운다강 물줄기를 따라 진공 했던 제20기갑사단(결전)도 2일 전, 인구 18,000명이 사는 군소도시인 발레이 북단 농경지 위에 대대 단위로 숙영지를 차리고 오랜만의 휴식과 재정비 시간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상부로부터 내려온 휴식 명령에 제20기갑사단 사단장인 김주명 소장은 소대장 인솔하에 발레리 외출까지 허락했다. 이에 사단 모든 예하부대에서는 소대별로 오전, 오후로 나눠 시내 구경에 나섰다.

마치 관광객처럼 도시 내 관광명소도 구경은 물론 필요한 생필품도 쇼핑했다. 전장에 투입된 군인들에게 이런 특혜는 없었다. 하지만, 날씨가 문제였다.

며칠 전부터 시베리아 북동풍이 거세치는 듯하더니 이제는 세찬 칼바람을 동반한 눈보라가 쳤고 시간이 흐를수록 폭설 양은 늘어만 갔다. 이제 밤이 되자 어른 무릎 높이까지 쌓여 온 세상을 하얀 게 뒤덮어버렸다. 이에 장병들의 외출 허용도 오늘부로 취소가 되고 말았다.

“아나! 내일 오전 우리 소대 차례였는데······. 이런 개망할 하늘아!”

간이막사 밖으로 나온 60기갑여단 26전차대대 7중대 소속의 712호 포수인 염훈기 하사가 하늘에 대고 주먹 감자를 날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내일이면 발레이 시내에 나가 아름다운 러시아 아가씨들도 보고 먹고 싶은 음식도 닥치는 대로 모조리 해치우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염훈기 하사는 생각지 못한 폭설로 인해 외출이 취소되었다는 청천벼락 같은 소식에 열이 뻗쳐 눈 오는 날 뛰어다니며 짖어대는 동네 똥개처럼 미친 듯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닝기리 쉬밤바야! 어찌 이럴 수가 있는 거야~”

“마! 좀 개소리 안 들리게 해라! 시끄럽다 마!”

4인용 막사에서 얼굴만 내민 김영주 중사가 험악한 인상을 쓰고는 버럭 일갈했다.

“지금 조용하게 생겼습니까?”

“너 그러다가 중대장님한테 걸려서 군기교육대 간다.”

“여기보단 군기교육대가 나을 거 같습니다.”

풀죽은 표정을 지은 염훈기 하사가 막사로 들어왔다.

“이 자식은 사병일 때는 안 그러더구먼. 부사관 되고 나서는 요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네. 너 김 상병이 너 때문에 창피하겠다.”

“김 상병이 내가 창피하냐?”

“크크,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전혀 창피하지 않습니다.”

저녁 식사시간이 되어 중대 식당으로 갈 준비를 하던 김일수 상병이 입을 가려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아! 그냥 제대했어야 했는데······. 괜히 부사관 지원해서 이게 뭐야.”

“이 자식 봐라? 처음에는 월급 많이 준다고 좋아해 놓고는. 그리고 마! 전쟁수당에 생명수당까지 합하면 제대 후 서울 외곽에 아파트 한 채 살 돈은 되지 않냐?”

놀려는 김영주 중사의 말에 염훈기 하사가 눈을 흘기며 중얼거렸다.

“저는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외출! 내일 외출! 내일 외출이 지금 가장 중요하단 말입니다.”

“야! 시내도 폭설 때문에 가게 문 열거나 돌아다니는 사람 없다고 한다. 내일 외출해봤자. 아무것도 못 해 마! 아나 이 자식 정말로.”

철퍼덕

염훈기 하사는 자신의 간의 침대에 벌러덩 눕고는 침낭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야! 저녁밥 먹으러 가야지!”

“안 먹습니다.”

“일수야. 저놈 오늘 메뉴 모르는 거냐?”

“그런 거 같습니다. 김 하사님! 오늘 메뉴 김치돼지고기찜입니다.”

“헛! 김치돼지고기찜?”

마치 로봇처럼 직각으로 벌떡 일어난 염훈기 하사는 번개 같은 동작으로 베레모를 쓰고는 피식 웃었다.

“자식! 가자! 밥 먹으러!”

★ ★ ★

2024년 1월 19일 20:00 (라트비아시각 13:00),

라트비아 리가 시내.

여러 발의 총상을 입고도 보호슈트 덕분에 가벼운 찰과상만 입은 김명환 2차관은 동행했던 의료진에게 치료를 받은 후 현재는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자성 과장이었다.

웬만한 대구경 총알도 충격흡수를 통해 막아낼 수 있는 보호슈트를 입었음에도 이자성 과장의 오른쪽 어깨뼈는 완전히 탈골된 상태로 이에 인근 큰 병원으로 후송되어 긴급 수술에 들어갔다.

톈진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 돌아와 입원한 지 며칠 만에 또다시 병원 신세가 되어버린 이자성 과장의 수술시간은 예상보다 더 늦게 끝났다. 탈골뿐만 아니라 쪼개진 뼛조각들을 일일이 찾아내 다시금 맞추는 시간이 길어졌다.

김명환 2차관은 런던에서의 일정 때문에 외교부 경호원들과 외곽으로 이동 후 비밀리에 TCS 모드를 활성화한 CMV-100 스카이버스로 이동할 예정이고 국가정보원 대외정보1과는 박기웅 팀장하에 이곳 리가에 남아서 암살범들의 정체를 파악하기로 했다.

이에 본국에서 2팀이 지원 올 예정이며 병원에는 1과 본팀이 지키고 1팀은 본격적인 조사 착수에 들어갔다.

조사하던 중, 조금은 의아한 상황에 직면했다. 호텔에 폭탄이 터지고 총격전이 벌어졌는데도 이곳 리가나 라트비아 공영방송에서는 호텔에 화재가 발생하여 몇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보도만 내보냈다. 어처구니없는 보도였으나, 나름 짐작할 수 있었다.

암살범들이 라트비아 언론매체까지 제멋대로 움직일 수 있는 단순한 배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전 내내 사건이 발생한 호텔과 저격수가 있었던 반대편 빌딩에 대한 조사했던 박기웅 팀장과 강원일 주임은 점심 겸 휴식을 취하기 위해 카페에 들어왔다.

카페 직원에게 아메리카노가 포함된 브런치 세트를 주문한 박기웅 팀장과 강원일 주임은 창가 테이블에 앉아 오전 내내 조사한 내용에 관해서 대화를 시작했다.

이상할 일만치 그들이 조사할 때마다 이곳 리가 지역 경찰들이 나타나 방해를 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찾아냈다.

첫 번째는 노부부가 숙박했던 1513호실에 암살범들이 잠입할 수 있도록 눈감아준 프런트 데스크 직원의 정보였다.

이름은 존 하프데일로 나이는 42살, 이곳 라디손 블루 리젠느 호텔에서 11년째 일해온 정상적인 직원이었다. 특별히 수상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호텔 로비를 바라보고 있는 CCTV 영상을 확보해 살펴본 결과, 늦은 밤 2시경에 암살범이었던 남자와 여자가 나타나 프런트 데스크에서 일하던 존 하프데일과 상당한 시간 동안 얘기가 나눴고 마지막엔 서로 간 뭔가를 주고받는 영상이 찍혔다.

확대해본 결과 존 하프데일이 암살범들에게 건넨 건 2개의 호실 스마트키였고 받은 건 그리 크지 않은 가방이었다. 손님이 맡길 수도 있는 가방이었지만, 정보요원들의 느낌상 그것은 돈 가방으로 추정되었다. 현재 양정석 대리와 윤길수 주임이 존 하프데일을 전담 중이었다.

어쨌든 호실 스마트키를 받은 남녀는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에서 내리고는 1205호실로 들어갔다.

즉, 암살범인 두 남녀는 1205호실에서 새벽 5시까지 시간을 보낸 후 다시금 엘리베이터를 타고 술 취해 서로 간 부둥켜안는 연기를 펼치며 노부부가 투숙하고 있던 1513호실에 또 다른 스마트키로 들어와 일을 저지를 것이었다.

두 번째는 이자성 과장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저격수가 있었던 맞은편 빌딩이었다. 조사에 따르면 맞은편 빌딩은 사무실로 사용하는 오피스텔 개념의 빌딩이었다. 그중 18층 한곳에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이 사무실이 있었다.

낮에만 공사를 진행하기에 밤에는 출입문을 잠겨놓지만, 박기웅 팀장과 강원일 주임이 갔을 때는 출입문 잠금장치가 고장 나 있었다. 즉, 이곳에서 저격수가 맞은편 호텔을 향해 저격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주변을 꼼꼼히 살펴 탄피라던가 아니면 저격수가 흘린 만한 증거물을 찾아봤지만, 아쉽게도 찾지는 못했다.

세 번째는 지금은 저세상 사람이 된 암살범 두 남녀에 대한 동공정보와 지문정보를 가지고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현재 본국에 두 가지 정보를 넘겨 조회의뢰를 요청한 상태라 시간은 지체될 수 있겠지만, 만약 확보한 DB에서 정보가 일체 하는 데이터가 나온다면 가장 쉽게 암살범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본국에서는 언제쯤 확인할 수 있고 했나?”

아메리카노 커피를 들이켠 박기웅 팀장이 창가 밖을 살피며 물었다.

“현존 모든 DB와 조회하려면 하루 정도는 소모된다고 합니다.”

“하루? 너무 늦잖아? 자기들이 하는 것도 아니고 컴퓨터가 하는데 말이야.”

“팀장님!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조급한 게 아니라, 열 받아서 그러는 거야.”

쿵!

큰 소리가 날 정도로 박기웅 팀장은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치듯 내려놨다.

‘개자식들 어떤 놈들인지 잡히기만 해봐 아주 지옥이 뭔지를 보여주겠어.’

박기웅 팀장은 중얼거리면서도 계속해서 창밖의 한 곳을 주시했다. 도로 갓길에 주차한 차량 중에 짙은 선팅을 한 SUV 차량이 유독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주차했으면 당연히 안에 있던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주차 후 지켜본 결과 안에서는 그 누구도 내리지 않았다.

“뭐라도 있습니까?”

강원일 주임도 자연스럽게 창밖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 주임은 쳐다보지 말고 슬쩍 화장실 같은 것처럼 해서 뒷문으로 나가서 네 번째 SUV 차량 좀 확인해봐!”

“네, 알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강원일 주임은 카페 직원에게 화장실을 묻는 척하고는 바로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내 실드 글라스를 쓰고는 박기웅 팀장이 가리킨 SUV 차량을 확인했다.

인버터 모드로 전환했기에 짙은 선팅쯤은 쉽게 투과하여 차 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라! 4명이나 앉아있네? 그리고 그들의 뒤쪽 허리춤과 왼쪽 겨드랑이 밑에는 홀스트에 끼워진 권총들이 회색으로 뚜렷하게 보였다.

‘이 새끼들 제대로 걸렸어!’

“팀장님! 안에 4명 탑승 및 모두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 그래? 음, 이곳 경찰일 수 있으니 좀 더 자세하게 확인해봐!

“네, 알겠습니다.”

무음성 통신을 마친 강원일 주임은 최대한 확대하여 차 안에 있는 자들의 신체를 하나하나 스캔해 갔다.

경찰이라면 지갑이나 가슴부위에 금속성의 경찰 배지가 있을 수 있었기에 그것을 찾아보자 했다. 하지만, 없었다. 즉, 경찰이 아닐 수 있다는 거였다.

“팀장님! 경찰은 아닌 듯합니다. 아무리 확인해도 경찰 배지나 직분을 나타낼만한 건 찾지 못했습니다.”

- 알았어! 차량 번호 확보하고 자연스럽게 들어와!

“저것들 안 조지고요?”

- 조지긴 뭘 조져? 저놈들을 역추적해서 본거지든 배후이든 찾지!

“아! 알겠습니다. 들어갈게요.”

잠시 후 화장실을 갔다 온 것처럼 티슈로 손을 닦는 척하며 테이블로 돌아온 강원일 주임이 자리에 앉았다.

“앞으로 10분 후에 나가자! 나가면 저기 택시들 서 있는 데로 가서 따로따로 택시를 타고 강 주임은 호텔로 이동, 나는 아무 곳이나 갈게. 그럼 저놈들이 둘 중의 하나는 따라올 거야. 미행하지 않는 쪽이 역으로 저놈들을 따라가기로 하자!”

“음, 좋은 방법입니다.”

“만약 자네 택시를 따라가면 그냥 호텔로 들어가서 쉬어!”

“팀장님 따라가면요?”

“난 리가 시내 한 바퀴 돌고 호텔로 이동할게. 그럼 자네는 택시를 돌려서 SUV를 미행해!”

“네.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작전을 세운 박기웅 팀장과 강원일 주임은 일부러 여유로운 척하며 브런치 식사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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