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
2024년 1월 19일 06:00 (미국시각 18일 17:00),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대통령 집무실).
모든 관심이 일본 동해상으로 항해 중인 태평양함대에 쏠린 가운데 막 펜타곤 합동참모본부로부터 가칭 ‘2024 태평양 연합훈련’이라는 이름의 진행 상황을 보고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잠시 틈을 내 피곤한 몸을 소파에 몸을 묻고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달콤한 휴식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인터폰을 통해 러시아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핫라인 요청이 들어왔다는 비서실의 보고 때문이었다.
“아니 이 이간은 잠도 없나? 아니지 한국에 쪼들려 잠이 안 오겠군. 후후”
집무실 한쪽 벽면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고는 트럼프 대통령은 시식 웃었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안절부절못하고 잠을 설치는 푸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10분 후 하자고 하게”
- 러시아 쪽에서 급하다며 바로 연결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똥줄이 타긴 타는가 보군’
“알았네, 연결하게”
예전 같으면 언어가 다른 양 국가의 정상들이 핫라인을 통해 화상통화를 하는 경우 보통은 통역관을 대동하여 서로의 의사를 전달했지만, 현재는 기술적 발전으로 인해 화상통화 시 마치 영화처럼 실시간으로 자막이 생성되어 보였다. 즉, 상대방의 말은 자막으로 보여 끊기지 않고 바로바로 대화를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양국 정상 간 보안이 동반되는 중요한 대화 내용이 통역관에게 세어날 길 일도 없게 되었다.
양국의 비서관들이 핫라인 화상통화를 연결하는 동안 트럼프 대통령은 소파에 앉은 자세 그대로 핫라인용 스크린을 주시했다. 그러자 잠시 후 화면이 밝아지면서 조금은 초췌해 보이는 푸틴 대통령의 모습이 보였다.
“풋! 오랜만입니다. 푸틴 대통령!”
자기도 모르게 나온 웃음에 실례를 범할뻔한 트럼프 대통령은 바로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모면하고는 다른 때와는 다르게 밝게 웃었다. 하지만 눈치 9단이 푸틴 대통령이 모를 일 없었다. 평소라면 기분이 나쁘다며 반박을 하거나 핫라인 자체를 무산시켰겠지만, 현재 그럴만한 오기를 부릴 때가 아니라는 것을 본인이 잘 알기에 모른척 넘어갔다. 대신 한마디는 했다.
- 뭐가 그리 기분이 좋습니까? 평소와는 다르게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아 그렇게 보였습니까? 하하, 뭐 나이 먹을수록 웃어야 늙지 않는다는군요. 그래서 요새 실천 좀 하고 있습니다.”
양국의 정상이 핫라인을 통해 화상통신을 하는 대화치고는 조금은 유치했다.
- 살 만큼 살면 저 세상 가는 거지 뭘 그리 오래 살려고 하십니까?
“푸틴 대통령! 온종일 쉬지도 못하고 업무 보다가 막 쉬던 참이었습니다. 우리 간단히 용건만 말하고 끝내시지요.”
- 그럽시다. 바로 용건을 말하리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확실한 군사적 개입을 원합니다.
“아니,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입니까?”
트럼프 대통령이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모른 척하자, 스크린에 비친 푸틴 대통령의 미간이 좁혀졌다.
-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현재 러한전 전개 상황을 말입니다.“
“하하, 잘 알고 있습니다.”
- 아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말합니까?
“아니, 아는 거와 우리 미국이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해야 하는 것과 대체 무슨 관계입니까?”
-트럼프 대통령! 벌써 잊었습니까?
“뭘 말입니까?”
- USSC 말입니다.
순간 조금 전까지 웃음꽃을 피웠던 트럼프 대통령의 표정은 일순간 심하게 일그러졌다. 세상에서 지워야 할 단어가 있다면 바로 USSC라고 말할 만큼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금기 단어였다.
“푸틴 대통령! 그건 예전에 정리된 일이 아니오?”
정색한 트럼프 대통령이 한층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 정리라······. 그런 중대한 사실이 쉽게 정리될 수 있겠습니까?
상황은 역전되었다.
푸틴 대통령의 표정은 밝아졌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런 식이면 정말 곤란합니다.”
- 알고 있습니다. 매우 곤란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니요. 내가 아니라, 푸틴 당신 말입니다.”
살짝 언성이 올라간 트럼프 대통령이었다. 또한, 직책을 빼고 이름만 부르며 당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매우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쁠법한 푸틴 대통령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트럼프 대통령이 화가 난 만큼 USSC라는 히든카드의 가치가 매우 크다는 방증이었기 때문이었다.
- 트럼프 대통령! 흥분 가라앉으세요. 점잖은 분이 왜 그러십니까?
“푸틴 대통령! 마지막 경고입니다. 다시는 USSC라는 단어를 꺼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 하하, 이거 참, 경고라니요? 트럼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떠는 유럽이나 중동 국가의 대통령으로 보입니까? 뭐, 어쨌든 잘 알겠습니다. 대신, 앞서 말한 대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실질적인 군사적 압박을 가해주세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습니다. 일주일 안에 말입니다.
푸틴 대통령이 말을 마치자 트럼프 대통령은 이내 대답하지 않았다.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에 화상 통신상으로 적막이 흘렀다. 푸틴 대통령 역시 기다려줬다.
“좋습니다. 푸틴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들이지요. 하지만, 저번처럼 약속하고 또다시 USSC건을 가지고 이렇게 협박을 하니, 더는 푸틴 대통령을 믿을 수가 없군요. 그래서 말입니다.”
한쪽 눈썹을 치켜뜬 트럼프 대통령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 뭘 말 하시는 겁니까?
“이번에 푸틴 대통령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USSC건은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겠습니다.”
- 어떻게 말입니까?
이때다 싶었는지 트럼프 대통령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영상으로 보이는 푸틴 대통령을 주시하며 말했다.
“푸틴 대통령께서도 USSC건과 맞먹는 약점 하나를 저에게 주셔야겠습니다. 그래야 더는 일방적으로 이렇게 당할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번 역전이었다. 이렇듯 두 정상의 화상통신은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 뭐라고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당연히 말이 되지요. 약속을 어긴 게 누구입니까? 어찌 계속해서 푸틴 대통령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상체를 숙였던 트럼프 대통령은 자세를 풀고는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었다. 이에 다시 한번 찾아온 적막감, 이번엔 트럼프 대통령이 기다려줬다. 그리고 몇 분이 흐르고 푸틴 대통령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좋습니다. 트럼프 대통령께서 원하신다면야. 그렇게 해야지요. 대신 한국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당연하지요. 그 부분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국 모든 전력을 총동원하여 한국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하겠습니다.”
사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푸틴 대통령과의 화상통신이 뜻하지 않은 큰 이득이 될 수 있게 되었다. 푸틴 대통령이 한국에 대한 군사적 압박 요청이 없더라도 현재 태평양함대가 ‘2024 태평양 연합훈련’ 명목으로 일본 탈환이라는 군사작전을 실행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살짝 한반도까지 군사적 행동반경을 넓히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국가도 아닌 수십 년간 적대국이자 경쟁자 국가인 러시아에 USSC건으로 약점을 잡힌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이번 기회가 자신의 약점을 확실히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왔다.
- 트럼프 대통령님, 나에 대한 자료를 드리기 전, 어떤 식으로 한국을 군사적으로 압박을 가할 건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들어볼 수 있겠소?
“그럼요. 알려드리지요. 현재 태평양함대 소속의 제3대함대와 제7함대가 일본 동해상으로 항해 중인 건 잘 아시지요?”
- 대충 알고 있습니다.
“현재 ‘2024 태평양 연합훈련’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개 함대는 언제든 실전에 투입할 수 있을 정도로 각종 무기와 전쟁물자, 그리고 미 해병대 6개 사단이 탑승한 상태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 전력을 이용한다면 충분히 한국을 압박할 수 있겠지요?”
- 압박이 아니라 실질적인 군사적 행동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압니다. 알아요. 보채지 좀 마세요. 태평양함대를 항로를 변경하도록 하겠습니다. 제주와 남주로 말입니다. 됐습니까?”
- 좋습니다.
“자! 그러면 저 역시 푸틴 대통령께서 보내주시는 자료를 가지고 결정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 흥! 당연하겠지요. 정리되는 대로 내일 오전까지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그때 자료를 보고 최종적으로 합의를 보도록 합시다.”
- 좋소. 그럼, 이만 끝냅시다.
화상통신이 끝난 후, 트럼프 대통령의 얼굴에는 함빡 웃음꽃이 피었고 10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 2시, 다시 한번 핫라인으로 화상통신을 하게 된 트럼프 대통령은 만족할만한 푸틴 대통령의 약점이 담긴 자료를 받고는 극비의 미러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태평양함대 외에도 중동 일대를 책임지고 있는 중부군 사령부 소속의 제5함대에도 긴급 이동 명령을 내렸다. 이에 1척의 항공모함과 4척의 핵잠수함 그리고 20여 척의 각종 수상함으로 구성된 제5함대는 즉시 인도양으로 항로를 변경하고 최대속도로 항해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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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9일 07:30 (라트비아시각 00:30),
라트비아 리가 어느 건물(CIA 유럽본부 리트비아 지부 비밀 안가).
몇 시간 전,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멘탈이 흔들릴 정도로 온갖 욕을 얻어먹고 CIA 안가에서 잠자리에 든 메인 존스 국무부 장관은 잠이 오지 않는지 침대에서 뒤척이고 있었다. 아마도 본국으로 돌아가면 이번 건으로 옷을 벗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인 듯했다.
이런저런 잡념 때문에 쉽사리 잠을 청하지 못하는 메인 존스 국무부 장관은 침대에서 일어나 장식장에서 위스키를 꺼내 들어 잔에 가득 채웠다. 술기운을 빌려 잠을 자려고 했다.
얼음까지 띄운 위스키 잔을 들고 창가로 다가간 메인 존스 국무부 장관이 커튼을 열고 창밖을 보며 위스키 잔을 들이켜려는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루이스입니다.”
CIA 리트비아 총괄 담당자인 에디 루이스 지부장이었다.
“들어오게”
철컥
문이 열리고 육중한 체격을 가진 에디 루이스 지부장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급히 보고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유럽본부에는 이미 보고했습니다.”
“그래? 앉게나”
의자에 앉아 위스키 잔을 들이킨 메인 존스 국무부 장관은 반대편 손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아닙니다. 바로 보고 하겠습니다. 어제 오전, EU 국가 중 5개국의 외교 수장들이 한국에서 온 외교특사와 면담을 가진 걸 확인했습니다.”
“뭐라? 그걸 지금에야 알았단 말인가?”
위스킨 때문인지 아니면 화가 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메인 존스 국무부 장관은 충혈된 두 눈으로 노려보며 질타했다.
“죄송합니다. 모든 요원이 각국의 정상에게만 신경을 쓴 바람에······.”
“그걸 지금 핑계라고 말하는 것인가?”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난 메인 존스 국무부 장관은 에디 루이스 지부장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화를 냈다.
“죄송합니다.”
“제, 제길! 대체 그 5개국은 어딘가?”
“이탈리아, 핀란드, 오스트리아, 스페인, 스웨덴입니다.”
쨍그랑!
위스키 잔이 날아가 벽에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났다.
“이거였어! 정상회의에서 부결된 이유가 바로 이거였어!”
메인 존스 국무부 장관은 부들부들 떨며 창밖을 봤다.
“한국에서 온 그 외교특사는 누구야? 알아냈나?”
“네, 외교부 2차관으로 있는 김명환이라는 인물입니다.”
“김명환?”
기억을 더듬은 메인 존스 국무부 장관은 이내 김명환이 누군지 생각이 났다. 1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강경희 장관과 함께 두세 번 본 인물이었다. 첫 대면 당시 강경희 장관은 김명환 2차관을 두고 나이는 어리지만 특출한 외교력을 발휘하여 외교부에서는 없어선 안 될 귀중한 인재라고 자랑한 것이 생각났다. 당시 나이가 38살로 차관급치고는 매우 어린 나이였다.
‘그놈이었어.’
아랫입술을 질근 깨문 메인 존스 국무부 장관은 지부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놈 위치는 확인되었나?”
“네, 장관님! 현재 라디손 블루 리젠느 호텔에 묵고 있습니다.”
“그래? 그놈을 그냥 둘 순 없지! 지금 호출할 수 있는 요원들은 몇 명인가?”
“지금 당장이라면 저 포함 18명입니다.”
“18명? 충분하군, 지금 당장 모든 요원 호출하여 김명환을 암살하게”
“네? 암살입니까?”
“그래! 내가 책임질 것이니 조용히 처리해! CIA 국장에게도 내가 말해놓겠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