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시선
2024년 1월 19일 01:00 (라트비아시각 18:00),
라트비아 리가 EU 본부 건물 앞.
대표이사회와는 다르게 30개국 정상이 모인 자리인 만큼 세계 언론매체로부터 주목받고 있는 이곳 EU 건물 주변은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었고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기자들로 인해 북적거렸다.
보통 EU 정상회의가 개최되어도 이 정도까지 수백 명에 달하는 기자와 방송국 관계자들이 이리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 적은 없었다. 아마도 금일 상정된 안건 내용과 더불어 어제 홍콩 아이콘 호텔 기자회견장에서 있었던 이윤연 국무총리의 발언 역시 이러한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에 대해 한몫 단단히 한 것으로 보였다.
영하에 가까운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외투와 온갖 방안장구류를 두르고 건물 밖에서 기다리던 기자들은 어느덧 2시간이 흘러 회의가 끝날 시간이 되자 저마다 카메라와 같은 취재 장비를 점검했다.
사실 정상회의가 끝나고 상정한 안건 결과에 대한 공식적인 기자회견이 없음에도 극도로 치솟은 관심사에 뭐라도 하나 건져 기삿거리를 만들려는 기자들의 분투는 대단했다.
잠시 후, 건물 현관문이 열리고 무장한 군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현관 주변을 에워 쌓았다. 그리고는 검은색의 의전 차량이 현관 앞에 섰고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에게 둘러싸인 이탈리아 주세페 코시가 대통령이 가장 먼저 모습을 보이고는 바로 의전 차량에 탑승했다. 기자들에게 살짝 비친 이탈리아 주세페 코시가 대통령의 표정은 침울했다.
이에 몇몇 기자들이 경호라인을 넘어 질문하려 했으나 이내 무장한 군인들의 제지를 받고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이처럼 각국의 정상들은 저마다 대기하고 있던 의전 차량에 몸을 싣고 하나둘 EU 본부 건물에서 떠났고 마지막으로 보이는 터키 대통령 마저 별다른 말 없이 의전 차량을 타고 사라지자, 추운 날씨 속에서 벌벌 떨며 기다리다가 이러다 할 정보를 얻지 못한 기자들이 흥분했는지 과격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자 이로 인해 분위기는 점점 더 삭막해졌다.
이에 EU(유럽연합) 행정실에서는 소란 사태를 수습하고자 예정에도 없던 기자회견을 마련했다.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기자회견이라 EU(유럽연합) 건물 내 대형 응접실을 기자회견장으로 세팅했고 30분에 걸쳐 기자들이 빼곡히 기자회견장을 차지했다.
잠시 후 임시로 만든 단상 위로 EU(유럽연합) 의장국의 대변인인 루델루스크 세피오가 상기된 표정으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금일 발표할 내용이 담긴 조그마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고는 탁자 위에 올렸다.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콧등에 걸친 루델루스크 세피오 대변인은 슬쩍 기자들을 살펴보고는 마이크에 입을 갖다 대고는 의사를 전달했다.
“급히 마련된 기자회견장에 오신 여러분 반갑습니다. 여러 기자님께서 매우 궁금해하는 금일 정상회의에 올랐던 상정 건 결정 결과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루델루스크 세피오 대변인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자 웅성거렸던 기자회견장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금일 상정 건은 전 세계를 전쟁 화마로 만드는 대한민국에 대한 경제제재와 전쟁 확산을 막기 위한 나토군의 군사적 활동 여부 건입니다. 이에 정상회의 투표 결과는 찬성 14표, 반대 15표, 기권 1표로 부결되었습니다.”
부결되었다는 말에 모든 기자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대부분 기자는 이번 상정 건이 가결되어 EU(유럽연합) 역시 한러전에 참전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유는 상정을 촉진한 국가가 바로 유럽 내에서도 한 입김 하는 미국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짜 탄성을 내지른 진짜 이유는 이랬다. 경제제재 국가가 러시아가 아닌 대한민국이었고 또한, 나토군의 상대가 대한민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윤연 국무총리 말대로 EU(유럽연합)가 러시아가 아닌 대한민국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진 순간이었다.
“기자님들! 질문은 3분께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있으신 분들은 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일순간 기자들이 저마다 손을 번쩍 들며 흔들기까지 했다.
“네, 뒤쪽 중앙 부분의 남자 기자님!”
루델루스크 세피오 대변인이 기자 한 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프랑스 2 방송국의 플로리앙 지루 기자입니다. 현재 항간에는 EU가 미국의 입김에 놀아나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상정 건의 내용만 봐도 그 소문이 틀리지 않다고 보는데요. 러시아가 아닌 대한민국에 대한 조치 문제로 이러한 상정 건이 정상회의까지 올라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뼈를 치는 플로리앙 지루 기자의 말에 루델루스크 세피오 대변인의 한쪽 눈썹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찌 EU가 한 국가에 의해 놀아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전혀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이번 상정 건은 심히 EU 안전을 위해 심사숙고하게 정상회의까지 올라왔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저기! 대변인님, 너무 두리둥실 하게 대답하지 마시고 정확하게 왜 어떤 이유로 말도 안 되는 상정 건이 정상회의까지 올라왔는지를 말씀해 주세요.”
플로리앙 지루 기자는 재차 질문한 내용을 상기시키며 다시 한번 똑같은 질문을 했지만, 대변인은 고개를 돌려 다른 기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는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저기! 왼쪽 앞줄에 있는 기자님! 질문하세요.”
“이탈리아 Rai 3 방송국의 마누엘 체르치 기자입니다. 저 역시 상정 건과 같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상정 건 내용을 보자면 도리어 EU에 전쟁의 불씨를 나을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또한, 앞서 프랑스 기자님이 질문한 대로 왜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상정 건이 정상회의까지 올라왔는지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들의 질문마다 심기를 건드리는 말에 루델루스크 세피오 대변인은 까놓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기에 속으로 죽을 맛이었다.
“음, 그 부분은 앞서 대답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네? 무슨 그런 대답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기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정확하게 대답해 주세요.”
“다음 기자분 질문을 받겠습니다.”
유리한 쪽으로 질문을 받으려는 듯 루델루스크 세피오 대변인은 뻔뻔할 정도로 마누엘 체르치 기자의 질문을 묵살하고 세 번째 질문할 기자를 찾고자 웅성거리는 기자들을 살폈다.
그 중, 안면이 몇 번 있는 미국 기자를 찾고는 그를 가리켰다.
“중앙에서 세 번째 줄 여성 기자님 질문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폭스 뉴스의 디나 라이언 기자입니다.”
어제 이윤현 국무총리와 설전을 벌여 참패를 당했던 저메인 존스 기자가 소속된 미국의 대표적인 우파성향의 언론사였다.
“정상회의에서 상정 건이 부결된 결과는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EU 정상들은 과연 유럽의 안전을 생각하고 이러한 결정을 했는지 참으로 의문스러운데요. 투표 결과에서 반대 뜻을 고수한 국가들을 알 수 있습니까?”
마치 부결되어 유럽 안전에 위협이 될 결정을 했다는 듯 매우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죄송합니다. 그 부분은 비밀투표이기에 어떤 국가가 반대했는지 찬성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향후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유럽까지 전쟁이 확산한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부결된 결과를 잘못된 결정이라고 전제를 깔고 질문하는 디나 라이언 기자에게 주변에 있던 기자들이 야유를 보냈다.
우우우우우~
좀처럼 기자회견장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저는 단지 대변인이라 부결된 결정에 대해서 이러다 할 말 할 처지는 되지 못하나, 개인적으로 참으로 안타깝다고 생각합니다.”
은근슬쩍 한 발짝 물러나 빗겨 대답한 루델루스크 세피오 대변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그럼 이상 기자님들의 질문은 이것으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추운 날씨에 밖에서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급히 마무리 멘트를 날린 루델루스크 세피오 대변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상 뒤로 사라졌다.
하지만, 기자들은 불만을 성토했다. 기삿거리로 쓸 만한 건 상정 건이 14대 15로 부결되었다는 것뿐이었다. 이에 따라 부결이 된 이유가 무엇이며, 이러한 상정 건이 왜 올라왔는지 등 기사의 뼈대가 될 만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마치 앙꼬없는 단팥빵과 같았다.
★ ★ ★
2024년 1월 19일 01:20 (라트비아시각 18:20),
라트비아 리가 EU 본부 의장실.
“아니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밖에서 루델루스크 세피오 대변인이 기자들과 기자회견을 하는 시간, 이곳 의장실에서는 화끈거릴 정도로 얼굴이 붉게 물든 미 국무부 메인 존슨 장관이 따지듯 마리스 펠식스 의장을 질타하고 있었다.
메인 존스 장관을 통해 미국 정부로부터 적잖은 뇌물을 받은 마리스 펠식스 의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어제까지만 해도 적어도 찬성표가 18표가 나올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14표뿐이라니요? 가결을 위해 얼마나 많은 자금을 투입했는데······. 제길,”
의장의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친 메인 존슨 장관은 소파에 벌러덩 앉았다. 이번 일로 인해 자신의 정치생명도 큰 타격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좀처럼 화를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미안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저 역시 나름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대표회의도 아니고 각국의 정상들입니다.”
“그걸 지금 핑계라고 말하는 겁니까?”
“핑계가 아니고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됐고, 반대한 정상들 명단을 알려주세요.”
“그건, 비밀투표 형식이기에 알 수 없습니다.”
“마리스 펠식스 의장! 지금 농담할 마음이 아닙니다.”
“농담이 아니라, 찬반 투표는 익명으로 표기됩니다. 그래서······.”
“이보시오. 의장! 지금은 안된다고 말할 때 까 아니라 어떻게든 알아내겠다고 나한테 말해야 할 때가 아닙니까?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겁니까?”
EU(유럽연합) 의장국의 의장을 마치 부하 대하듯 메인 존슨 장관에게 질타함에도 마리스 펠식스 의장은 꼼짝하지 못했다. 뇌물 받은 사실이 옥쇄가 된 꼴이었다.
“알았습니다. 행정실장과 말해서 어떻게든 알아내겠습니다.”
마리스 펠식스 의장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적어도 내일 오전까지 알아내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메인 존슨 장관은 그대로 의장실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이에 혼자 남게 된 마리스 펠식스 의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인터폰을 눌렀다.
“지금 당장 행정실장 오라고 하게”
“네, 의장님!”
몇 분이 지나고 호출받은 행정실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앉게나”
의장실에 들어온 파발스 차우나 행정실장이 공손히 인사를 하자 마리스 펠식스 의장은 접견용 의자를 가리켰다.
파발스 차우나 행정실장이 의자에 앉자 맞은편 의장에 앉은 마리스 펠식스 의장이 두 명밖에 없는 의장실임에도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금일 있었던 정상회의에서 있었던 상정 투표 결과 중에 반대표와 기권표를 누른 국가들의 리스트를 알 수 있겠는가?”
“네? 그건, 불,”
“알아! 알아! 불법인 거, 하지만 지금 문제가 심각해! 미국이 지금 난리라고.”
“의장님 아무리 그렇다고 그건,”
“어허!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나? 자네 저번에 내가 도와준 거 생각이 안 나나? 벌써 잊은 건가?”
재작년 파발스 차우나 행정실장이 음주운전 사고를 내적이 있었고 마리스 펠식스 의장이 권력을 행사하여 무마시켜준 적이 있었다. 지금 그걸 미끼로 내세운 것이었다.
“아! 그렇긴 하지만, 알, 알겠습니다.”
파발스 차우나 행정실장 역시 약점을 잡혀있는 상황이었기에 대답하고 말았다.
“그래, 고맙네. 서로 어려울 때 도와야지 않겠나?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 알아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