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7화 (487/605)

수상한 움직임

2024년 1월 08일 21:00 (라트비아시각 14:00),

라트비아 리가 EU 본부 대표이사회 회의실.

주요 정책을 수립하고 결정하는 정상이사회에 이어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대표이사회가 이곳 EU 본부 대표이사회 회의실에서 막 시작되었다. 30개 EU 회원국 중 자국의 정상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외무 및 외교부 수장인 장관들이 원형 탁자에 둘러앉은 가운데 마리스 펠식스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은 메인 존스 장관이 발언 단상에 올랐다.

“친애하는 EU 회원국 대표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오늘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전할 내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사말을 시작으로 메인 존슨 장관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현재 동북아시아는 세계 경제의 몰락은 물론 자칫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수 있는 매우 심각한 위기상황에 직면했다고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형적 특성상 지국 반대편 일이라며 치부할 수준은 이미 넘었다고 보입니다. 하물며 어제 대한민국의 추은희 대통령은 마치 세계 모든 국가와 전쟁마저 불사르겠다는 매우 과격하고 오만한 대국민 성명발표를 하였습니다.”

서론부터 자극적인 단어만을 골라 시선을 집중시킨 메인 존슨 장관은 한 박자 쉬고는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이러한 이유로 트럼프 대통령께서는 EU와 함께 적극적인 관여가 필요하다는 판단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21세기 세계 경제는 하나의 사슬로 이어져 있기에 만약 세계 대공황에 직면하게 된다면 연쇄작용으로 인해 수많은 국가는 존폐 위기를 넘어 국가 부도 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며 우리 미국이나 EU 회원국 역시 피해 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께서는 EU 회원국과 함께 현재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대한민국에 대한 경제 제재는 물론 더 이상의 전쟁 확산을 막고자 나토군을 움직이고자 합니다.”

나토군이라는 말이 나오자 EU 회원국 대표들의 눈빛들이 달라졌다. 예상치 못한 내용이라 생각한 듯했다. 이런 눈빛을 의식했는지 메인 존슨 장관은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현재 대한민국은 전쟁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신중국의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무려 천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이 수치는 대략적인 것일 뿐 아마도 사상자 수는 2천만 명이 넘을 것으로 우리 정보당국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북아에서 시작된 전쟁은 이제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러시아 남부까지 전선이 확대되어 전쟁 규모는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바로 유럽의 앞마당이지 않습니까? 언제 유럽 전체로 전쟁이 확대될지 모를 일입니다. 이에 미군을 포함한 나토군은 더 늦기 전에 적극적인 참전이 필요하다는 판단입니다. 친애하는 EU 회원국 대표 여러분!”

메인 존슨 장관은 대표로 참석한 각국의 국무부 장관이나 외교부 장관의 눈을 일일이 마주치고는 비장한 어조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더는 방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계평화 공존을 위해 함께 합시다.”

조금은 과장된 제스처를 하며 발언을 마친 메인 존슨 장관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이때 EU 회원국 대표 중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프랑스 대표로 온 외교부 피에르 드골 장관이었다.

“존슨 장관님! 경제 제재는 현재 전쟁에 관여한 한국, 러시아, 신중국 모두를 포함하자는 겁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메인 존슨 장관은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음, 아닙니다. 경제 제재 대상국은 오직 대한민국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대한민국은 신중국 민간인에 대한 대량 학살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는 경제 제재를 가할 충분한 명분이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번 제2차 동북아 전쟁은 러시아가 시작했고 신중국 역시 전쟁 중간에 선제공격을 가하면서 참전하지 않았습니까? 즉 전쟁 발발원인을 보자면 러시아와 신중국인데 도리어 민간인 학살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만 경제 제재를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데요?”

핵심을 파고드는 피에르 드골 장관의 역질문에 메인 존슨 장관은 이미 그런 질문을 할 것이라 예상하였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여유를 부리며 곧바로 대답했다.

“전쟁이라는 건 상대국 간의 보이지 않은 여러 속사정에 의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모르는 어떠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전쟁을 가장해 선량한 민간인을 그것도 수천만 명을 학살했다는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정상적인 국제사회라면 그러한 국가에 대해 당연히 엄하고 강력한 제재수단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메인 존슨 장관의 대답에 피에르 드골 장관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더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경제 제재는 그렇다 쳐도 나토군을 움직이자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나토군을 한러전에 참전시키자는 말입니까?”

이번엔 독일 대표인 요한 호프만 장관이 거구의 상체를 움직이며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유럽 역시 전쟁의 화마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전에 나토군을 움직여 방비를 단단히 하고 더는 유럽으로 전쟁 불씨가 넘어오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해야지 않겠습니까?”

“적절한 조치라······. 제 생각에는 나토군 참전으로 도리어 유럽에 전쟁 화마를 불러드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군요.”

항상 미국과 대립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독일이었기에 이번에도 은근슬쩍 반대하는 뉘앙스를 풍겼다.

“전쟁이라는 것은 예고하고 터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마냥 강 건너 불구경하다 언제 불똥이 튀길지 모르는 일이지요. 즉 불똥이 튀기기 전에 미리 진압에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토군을 어떻게 활용하겠다는 겁니까?”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 대한민국에 군사적으로 협조하는 모든 국가에 강력한 경고 조치는 물론 나토군을 진출시켜 대한민국 국군을 몰아내야지 않겠습니까?”

“네? 대한민국 국군과 전쟁을 하잖은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허허, 그건 아닌 거 같습니다.”

“아닌 게 아닌 거지요. 뭐가 그리 무섭다고”

“무서운 게 아니라···.

“그만, 그만, 존슨 장관, 호프만 장관, 그만 하세요.”

설전이 거칠어지자 마리스 펠식스 의장이 급히 제지했다. 이에 요한 호프만 장관은 먼 산 보듯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지만, 메인 존슨 장관의 시선은 요한 호프만 장관을 노려봤다.

EU 의장국 내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독일 대표인 요한 호프만 장관이 이렇게 대놓고 반대 의사를 피력하는 것이 못내 못마땅했기 때문이었다.

잠시간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마리스 펠식스 의장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자자! 대표 여러분! 이번 메인 존슨 장관이 발언한 내용에 대해서 정식으로 대표이사회에 상정하겠습니다. 대표분들께서는 자국의 정상들과 협의를 걸친 후 내일 오후에 있을 2차 회의에서 투표권을 행사해 주시기,”

“잠깐만요.”

요한 호프만 장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의장의 말을 끊었다.

“호프만 장관! 의장인 제가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살짝 기분이 나빠진 마리스 펠식스 의장이 한쪽 눈썹을 실룩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요한 호프만 장관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의사를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회원국도 아닌 미국의 존슨 장관 발언을 정식으로 대표이사회에 상정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터키 대표인 외무부 뤼슈티 젠킨 장관까지 합세해 상정 건에 대해 부당함을 주장했다.

* 터키는 2년 전에 EU 회원국이 되었다.

“허허, 상정 승인은 의장의 고유 권한이 아니오? 두 분은 대표이사회의 절차와 권한을 무시하는 겁니까?”

“무시하는 게 아니라, 회원국도 아닌 타 국가의 발언에 대해 상정하니 그러는 거 아닙니까?”

요한 호프만 장관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따졌다. 이에 마리스 펠식스 의장은 싸늘한 눈빛을 발산하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상정권과 관련해서는 의장의 고유 권한이니 더는 의장의 권한을 무시하는 언행은 삼가세요. 그리고 오늘 1차 대표회의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내일 오후 2시에 있을 2차 회의 때 보도록 하겠습니다.”

탕! 탕! 탕!

마리스 펠식스 의장은 자신의 말을 마치고는 그대로 의사봉을 쳤다.

“지,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결정을 하다니······.”

자리를 뜨는 마리스 펠식스 의장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질타하는 요한 호프만 장관! 그 옆으로 메인 존슨 장관이 지나가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며 나지막이 속사이듯 말했다.

“호프만 장관! 대세는 기울어졌습니다. 너무 티 나게 우리 미국과 대립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뭐요?”

“하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씩씩거리는 요한 호프만 장관을 뒤로하고 메인 존슨 장관이 한 손을 들어 흔들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 ★ ★

2024년 1월 09일 09:00,

일본 도쿄 지요다구 중앙청(국가안보회의실).

3년 전 한국에 패전한 일본은 대폭적인 헌법 개헌이 이뤄졌다. 특히 중의원과 참의원으로 나뉘어 있던 양원제국회를 의원내각제에 입각한 단원제국회로 변경했다. 의회 이름 역시 평의회로 변경했으며 평의회를 구성하는 평의원 수는 총 600명으로 지역구 의원 400명과 비례대표 의원 200명이었다.

더불어 총리의 임기는 3년으로 한 번의 연임이 가능해 최대 6년 동안 총리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선출 방식 또한 기존 방식대로 평의원 출신 중에서 평의원들의 투표로 지명되었다.

하지만 총리의 실권은 예전 아베 정권 때와 비교하자면 대폭 축소되었다. 축소된 권한들은 대부분 각 부처 장관들에게 넘어갔고 내각 총리에게는 오직 국내 행정권만이 주어졌다. 하지만 행정부 수장이기도 한 총리는 국가에 중대한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각 부처의 장관들을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이를 안보회의라 했다.

총리 못지않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각 부처의 장관들이 의전서열대로 기다란 탁자를 사이로 양쪽에 앉아있는 가운데 탁자 끝 중앙에 앉은 우치다 총리가 이번 안보회의를 소집한 이유에 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금일 이렇게 안보회의를 소집한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치다 총리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국가안보회의실 전체에 울리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각총리실 비서관 두 명이 손에 들고 있는 문서를 각 부처 장관 앞에 올려놨다.

“다를 천천히 읽어보시지요.”

우치다 총리의 말에 장관들은 일제히 자신 앞에 놓인 문서를 들고는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나자 우치다 총리는 20여 명의 장관 표정을 차례대로 살폈다.

“이게 정말입니까? 정말로 미국이 제시한 문서입니까?”

항복과 함께 자위군이 폐지된 후 최소한의 자국 안보를 위해 새롭게 창설된 보안대는 지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 전쟁 발발에 따른 미군 파병으로 일본 본토의 치안 공백과 1952년에 통과된 보안청법에 의해 창설된 그때의 보안대보다 못한 전력으로 해상과 항공전력은 전무했고 오직 육상전력만 운용했다. 또한, 규모는 총 6만 명으로 육상보안대의 무장체제는 개인화기와 기본장구류뿐이었고 이동 수단 역시 수송 트럭이 대부분이었고 시가지 전투를 위해 일부 장갑차를 운용했다.

이런 보안대를 관할하고 통제하는 예전 방위성이라 볼 수 있는 보안부 장관이 놀란 입을 닫지도 못하고 가장 먼저 질문을 던졌다.

“미이케 다카시 장관! 읽은 내용 그대로네.”

“하! 매우 위험한 제안입니다.”

외교부 구로사와 키요시 장관도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깊은 우려를 내비쳤다.

“맞습니다. 이런 제안은 무조건 거절해야 합니다.”

노동후생부의 곤노 야스유키 장관마저 벌떡 일어나 강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출했다. 이때 탁자를 치며 듣기 거부한 쇠소리를 내는듯한 목소리가 국가보안회의실을 덮쳤다.

“허허, 거절이라니요? 이런 절호의 기회를 거절이라니요? 당신들은 언제까지 조센징에게 구걸 거리며 살려고 하는 겁니까?”

극우성향 정치인 중 유일하게 장관급에 오른 경제산업부의 이시하라 신타로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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