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 밖
2023년 11월 05일 16:20 (이란시각 11:50),
이란 서아제르바이잔주 코이 남단(제7기계화보병여단 79전차대대).
교전이 시작되고 20여 분이 지난 코이 남단 농경지에는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다는 걸 보여주듯 참혹한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었다.
검붉은 화염에 이글거리며 검은 연기를 내뿜는 티암 전차가 곳곳에 주저앉아 있었고, 그 뒤로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도 처참히 파괴된 여러 장갑차의 잔해들이 널려있었다. 이외에도 움푹 팬 수많은 구덩이와 불에 타 시꺼멓게 변한 시체들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쿠르르르릉! 콰지직!
이렇게 처참하고 잔인한 땅으로 변해버린 코이 남단 작은 농경지에 K-2A1 전차 여러 대가 파괴된 이란군 장갑차를 밟고 지나가며 활강포에서 불을 뿜었다.
퍼엉! 퍼엉!
콰앙! 콰아앙!
파괴된 전차 뒤에서 엄폐하고 있던 락흐쉬 장갑차 2대가 측면에서 날아온 플라즈마탄에 폭발을 하며 산산조각이 났다.
쏟아지던 박격포 포화를 뚫고 강력한 화력을 뿜어낸 79전차대대 전차들은 2세급 차이의 전차성능에 힘입어 이란 기갑전력을 학살했다. 현재 제2혁명차량화사단의 유일한 전차대대 소속 티암 전차는 진작에 괴멸된 상태였고 그 뒤에서 따라오던 토산 경전차와 락흐쉬 장갑차도 몇 대 남지 않았다.
다수의 적을 상대로 79전차대대 2개 전차중대는 좌우로 크게 벌려 우회해 이란군 기갑전력의 측면을 공격한 것이 먹혀들었다. 또한, 플라즈마 전지팩을 교체한 이글-I 드론이 재차 출격해 이란군 박격포 포대를 괴멸시킨 것도 주요했다.
30여 분만에 연대급 규모의 기갑과 보병을 와해시킨 79전차대대는 서서히 속도를 늦추며 시가지 전투를 앞두고 잠시 재정비 시간을 갖고자 했다. 그래서 흩어진 전차들이 한곳으로 몰려드는 그때, 6시 방향과 9시 방향에서 새로운 이란군 기갑전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9시 방향! 새로운 이란군 기갑전력 출현!”
“6시 방향에서도 새로운 이란군 기갑전력입니다.”
가장 왼쪽에 있던 1전차중대의 중대장과 후방 본부중대의 중대장으로부터 다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대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야?”
대대통신망을 통해 문기철 중령이 물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포위하듯 사방에서 튀어나온 적 출현에 대해 알지 못했다. 잠시 통신망에서 정적이 흐른 후 문기철 중령은 다급히 본부중대장을 불렀다.
“본부중대!”
- 네, 대대장님! 대위 김진방입니다.
“지금 당장 양방향으로 드론을 보내서 규모가 얼마인지 확인해!”
- 네, 알겠습니다.
“각 중대! 현 위치 고수하고 방어 전술을 펼친다. 2중대가 후방 6시로 이동해 중대본부를 엄호하고 1중대는 9시, 3중대는 12시 전방을 맡는다.”
당황할 법도 한 상황에서 문기철 중령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고 가장 적절한 명령을 각 중대에 하달했다.
더불어 코이 도심에서도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기갑전력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들은 러시아로부터 각종 군사 장비를 지원받은 제6혁명기갑사단의 제31혁명기갑여단이었다.
러시아의 최신무기로 무장한 제6혁명기갑사단의 제31혁명기갑여단은 중부 전선의 요충지인 코이 방어를 위해 해디쉐이에서 긴급 지원 온 부대였다.
한편, 6시와 9시 방향에서 갑작스럽게 출현한 이란군 기갑전력은 사실 2일 전부터 라할과 차보쉬로호의 지하기지 안에서 잠복하고 있던 제2혁명차량화사단의 예하부대였다.
1980년에 시작해 1988년에 끝난 이란과 이라크 간의 전쟁 당시 이란은 국경선 일대 모든 마을에 지하기지를 건설했다. 지하 20여 미터에 지어진 지하기지는 공습에 따른 주민 대피와 각종 전쟁물자를 저장하는 장소로 지금은 매우 낡았지만, 공간만큼은 대대급 규모의 병력과 각종 장비를 저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웬만한 건물을 투시해 탐지하는 인버터 기능이 장착된 이글-I 드론도 수십 미터 지하기지에서 숨어있던 이란군을 탐지할 수 없었다.
5일 전, 대한민국 피스부대의 진공이 시작되자, 이란 최고사령부는 중부 전선의 요충지인 코이를 방어하고자 주변 도시와 마을에 방어 병력을 분산 및 엄폐시켜 향후 적군의 코이 진격 시 포위섬멸 작전을 수립했었다.
결과적으로 지금 79전차대대는 이란 최고사령부가 수립한 포위섬멸 작전에 말려든 것이었다. 처음엔 코이를 공격하는 피스부대의 규모가 대대급 전차부대라 코이를 방어하는 부대만으로 상대하려 했으나, 예상외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자 포위섬멸 작전을 지시했다.
현재, 6시 방향인 라할에서 진공 중인 부대는 경전차와 장갑차로 구성된 2개 대대급 규모의 부대였고 9시 방향 차보쉬로호 진공 중인 부대는 전차로 구성된 대대급 부대였다.
- 3중대 대위 김현준입니다. 현재 12시 방향에 새로운 기갑전력 출현!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3전차중대 중대장로부터 다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규모 및 전차 기종 확인 가능한가?”
-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는 전차만 20여 대가 넘습니다. 기종은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때 중대본부 중대장으로부터 스파이더 드론으로 정찰된 정보를 알려왔다.
- 현재 6시 방향, 토산 경전차 33대, 사리르 장갑차 38대로 2개 대대급 규모! 9시 방향, 사바란 전차 33대입니다.”
“김 대위!”
- 네, 대위 김진방!
“전방 전력도 확인해봐!”
- 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현재 드론 2기가 날아가고 있습니다.
본부중대장의 추가보고를 기다리는 동안 K-22 지휘장갑차 안에서는 긴장감이 흘렀다. 이에 초조했는지 옆에 있던 작전과장이 재차 물었다.
“아직 확인이 안 됐나?”
- 네, 확인했습니다. 현재 2개 대대급 이상의 규모이며 전차들이······.
“전차들이 뭐? 빨리빨리 말해!”
- 네, 전차 기종은 러시아 T-14 아르마타 전차로 확인됨!
T-14 아르마타라는 말에 문기철 중령은 주먹을 콘솔에 내려쳤다. 6시나 9시 방향의 기갑전력은 문제 될 게 없었다. 하지만 12시에서 밀려오는 T-14 아르마타 전차는 달랐다. 4.5세대급으로 분류된 T-14 아르마타 전차는 K-2A1 흑호 전차에 성능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수량이었다. 현재까지 파악한 수량이 2개 대대급이라면 적어도 70대가 넘는다고 봐야 했다.
“대대장님! 3시 방향으로 퇴각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현재 79전차대대가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3시 방향밖에 없었다.
“음, 라할 마을을 그냥 지나치는 게 아니었어······.”
신음이 섞인 대대장의 말에 작전과장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아니야. 결정은 내가 했네. 책임은 내가 져야지. 일단 후속 부대 위치는 어디쯤인가?”
“네, 현재 301수비대는 라할 동단 15km 지점에서 기동 중입니다.”
301수비대는 공화국 수비대로 이뤄진 차량화보병대대였다. 하지만 이름만 차량화보병대대였지 장갑차도 아닌 일반 수송 트럭으로 이동하는 보병이나 다름없었다.
“통신병!”
“네! 대대장님!”
“301 수비대에게 전하게. 기동 중지하고 현 위치 고수하며 경계하라고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강 소령!”
“네, 대대장님!”
“정면돌파하는 건 어떤가?”
“우리 쪽 피해가 상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럴 수 있겠지, 그런데 말이야. 난 왠지 3시 쪽 퇴각로를 남겨둔 것이 의심이 가는군, 불길한 예감이 들어”
원래 포위섬멸 작전은 사방 모든 곳에서 조여와야 한다. 하지만 지금 이란군은 3시 방향으로 퇴각할 수 있게 일부로 열어준 듯한 형국이었다. 뭔가 함정을 파고 몰아넣으려는 듯한 그런 강한 느낌을 받은 문기철 중령은 퇴각보다 정면돌파라는 카드를 꺼냈다.
사실 그랬다. 3시 방향 지대에는 엄청난 수의 대전차지뢰가 매설되어 있었다. 만에 하나 3시 방향으로 퇴각을 했다면 대전차지뢰에 피해를 본 후 오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면서 더 큰 피해를 볼수 있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마음 굳히신 겁니까? 대대장님?”
“그래! 정면돌파! 여단본부에 연락하게, 공중지원이든 포격지원이든 뭐라도 부탁한다고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강호준 소령이 여단본부와 통신을 하는 동안 문기철 중령은 영상 모니터를 확인했다. 스파이더 드론으로부터 전송된 영상을 보여주는 모니터였다.
‘좋아! 6시, 9시는 무시하고 12시 놈들과 정면 승부다.’
결심을 굳힌 문기철 중령은 대대통신망을 개방하고 당찬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1중대, 3중대는 전방 12시 기갑전력과 우선 교전에 들어간다. 3중대는 2개 소대만 후방 엄호하고 나머진 소대는 본부중대와 함께 움직인다.”
대대장의 명령에 각 중대 전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 대열 고수하며 기동 시작! 중대장들은 각자 중대전술로 교전 시작하라! 이상”
- 1중대 확인 이상!
- 2중대 확인 이상!
- 3중대 확인 이상!
- 본부중대 확인 이상!
한편 코이 외곽에서 모습을 드러낸 T-14 아르마타 전차 70여 대가 기다란 횡대 대형을 구축하고 저속 기동하는 상공에는 정찰 임무를 맡았던 이글-I 드론이 날아왔다.
쭈우우우우우~ 쭈우우우우우~
이글-I 드론이 먼저 고도를 낮추며 8mm 레이저를 뿌렸다. 소나기 떨어지듯 쏟아지는 빛줄기가 선두에서 기동하던 T-14 아르마타 전차를 훑고 지나가자 크고 작은 불꽃이 튀겼다. 8mm 레이저로는 방호력을 뚫기는 역부족이나 포탑에 장착된 각종 광학장비는 박살 낼 수 있었다.
광학장비가 박살 난 여러 대의 T-14 아르마타 전차가 속도를 줄이며 대열에서 이탈하는 기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나머지 전차들은 더욱 속도를 높이며 본격적인 교전에 들어갔다.
T-14 아르마타 전차의 무인포탑 양쪽에 장착된 발사관에서 11.4km 거리의 목표물도 타격할 수 있는 3UBK21 스프린터 대전차유도탄을 발사했다. 이에 K-2A1 흑호 전차에서도 GTGS-60 지룡 대전차유도탄으로 대응했다.
4.5세급 전차답게 양측 전차 모두 능동파괴체계를 갖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대전차유도탄을 탐지 후 파괴했다. 하지만 운이 없게도 대전차유도탄을 요격하지 못한 T-14 아르마타 전차 1대가 포탑이 날아갈 정도의 거대한 폭발과 함께 유명을 달리했다.
몇 차례 대전차유도탄을 주고받은 양 진형의 전차들은 급기야 유효사거리에 들어온 적 전차를 향해 자신의 주포를 발사했다.
퍼엉! 퍼어어엉! 퍼엉!
수십 개의 붉은 광점이 서로를 향해 날아갔다.
쾅앙! 콰앙! 쾅아앙! 쾅!
허공을 찢을듯한 파공음과 함께 잇단 폭발음은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들릴 정도로 양 국가 간 기갑전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대공방전으로 흘러갔다.
★ ★ ★
2023년 11월 06일 00:20,
북부 평양특별자치시 용성구 중이동 어느 건물(대외1공작대 은신처).
22시가 되어서야 회의를 마친 대외1공작대 대원들은 간단한 야식을 먹은 후 모두 잠이 들었다. 하지만 두 시간 지난 지금, 어두운 방에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남 부조장 동지 잠메까?”
깜깜한 방에서 구상식이 엉금엉금 기어와 남상원을 깨웠다.
“뭐네?”
“크크, 우리 선수금도 받았는데 잠시 나가서 술 한잔 어떻습네까?”
남상원이 한쪽 눈을 치켜뜨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니들 미쳤네? 임무 완수 전까지 여서 한 발자국도 나가디 말라 하디 않았네?”
“잠깐 몰래 갔다 오면 되지 않습네까? 같이 가시디요? 밖에 동무들 기다립네다.”
“오 대장 동지나 강 조장 동지 알면 니들 다 뒈져야. 좋은 말 할 때 개소리 말고 어서 가서 자라우. 알았네?”
“아, 이거이, 까딱 잘못하면 선수금도 못 써보고 뒈질 수 있디 않습네까?”
“확! 안가네? 자라우.”
남상원은 귀찮다는 돌아눕고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 알갔습네다.”
인상이 구겨진 구상식이 방에서 나왔다. 이에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길수와 남구태가 다가왔다.
“뭐라네?”
남구태의 물음에 구상식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욕만 득실나게 먹었시야 샹!”
“거이, 남 부조장 동지 고지식해서 안 될 거라 하지 않았네?”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던 오길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어쨌네?”
또다시 남구태가 물었다.
“뭘 어쨌네? 그냥 가믄 되는거디”
“별 탈 없갔어?”
“오길수이! 그리 겁나믄 넌 그냥 있으라우, 우리만 갔다 오갔어!”
“간나 새끼 뭔 그리 섭섭한 소리하네?”
“그럼 가자우.”
구상식이 두 사내를 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