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605)

거대한 음모

2020년 12월 01일 12:00 (싱가포르시각 11:00),

싱가포르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512호.

싱가포르 5성 호텔인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512호실에는 낯선 사내 여러 명이 모여 있었고 중앙 탁자에는 두 명의 사내가 마주 앉아 뭔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 정도 조건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작은 키에 피곤함에 찌들어 있는 듯한 얼굴 행색을 한 이 사내는 서류 몇 장을 읽어보고는 그대로 탁자 위로 집어 던지고는 단호히 말했다. 이에 반대편에 앉아있던 사내는 처음엔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가 이내 평정심을 찾고는 다시 한번 서툰 일본말로 물었다.

“그럼 그쪽에서 원하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서류를 던진 후 팔짱을 끼고 거만한 자세로 한 키 작은 사내가 실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다시 뵙죠. 그때도 만족스러운 조건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오늘도 똑같을 것이오.”

말을 마친 키 작은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양손으로 출입문을 가리켰다. 이에 반대편에 앉아있던 사내는 끌어오는 분노를 억누르며 출입문으로 향했다. 이때 창문을 바라보던 키 작은 사내가 넌지시 말했다.

“내일도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저는 바로 본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막 출입문을 열고 나가려던 사내는 그 말에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경호원 3명과 함께 대답도 없이 나가버렸다.

“감히 이 정도 조건으로 나와 협상을 하려 하다니, 건방진 놈.”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던 키 작은 사내는 이내 핸드폰을 꺼내 들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 키 작은 사내는 바로 일본 방위성에서 총리실로 자리를 옮긴 전략비서관 야구마치 겐조였다. 능력을 인정받아 아베 총리의 신임을 받게 된 야구마치 켄조는 2일 전 아베 총리의 특명을 받고 어젯밤 이곳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늘 낯선 사내와 짧은 미팅을 가진 것이었다. 협상의 귀재답게 자기 패는 끝까지 숨기고 상대방 패만 확인한 야구마치 켄조는 아베 총리와 짧게 통화를 마친 후 소파에 몸을 의지하며 탁자에 다리를 올린 후 평소 좋아하는 테킬라 한잔을 따르고는 바로 원샷을 했다.

★ ★ ★

2020년 12월 01일 15:30 (러시아시각 09:30),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 SVR 건물.

어젯밤 SVR 건물에 도착한 동양 사내 3명은 이곳에서 하룻밤 보내고 오후 들어 러시아 대외정보국 요원의 안내에 따라 밀실 같은 곳으로 들어왔다. 밀실이라지만 고급스러운 러시아풍 실내 장식으로 치장된 넓은 실내 한가운데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고 그 뒤에는 험상궂은 경호원 4명이 버티고 서있었다.

“가서 앉으세요.”

안내를 맡았던 대외정보국 요원의 말에 동양 사내 3명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앉아있던 남자를 보자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웠다. 바로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었다.

순간 당황하는 동양 사내 3명을 쳐다본 푸틴 대통령은 덩치 큰 동양 사내의 007가방을 가리켰다. 그러자 가운데에 앉아있던 사내가 007 가방을 열고 문서 몇 장을 꺼내어 푸틴 대통령에게 정중히 내밀었다.

총 5장으로 된 문서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고 중간쯤 읽어가던 푸틴 대통령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러잖아도 푸틴 대통령의 카리스마에 눌려있던 동양 사내 3명은 갑자기 웃는 푸틴 대통령의 행동에 어리둥절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기서 책임자가 누구입니까.”

큰 소리로 웃던 푸틴 대통령은 웃음을 그치고는 갑자기 물었다.

“접니다. 저는 총참모부 소속 두웨이 소장입니다.”

“다른 두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푸틴 대통령은 두웨이 소장 양옆에 앉아있는 사내 두 명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이에 두웨이 소장 왼쪽에 앉아있던 안경을 쓴 사내가 말했다.

“저는 국가안전부 부부장 장 위엔입니다.”

장 위엔 부부장의 소개가 끝나자 덩치 큰 오른편 사내가 이어 말했다.

“저는 국가안전부 요원 피아오 쳉입니다.”

두 명의 소개가 끝나자 푸틴 대통령은 몸을 뒤로 저치며 다리를 꼬고는 고풍스러운 상자에서 시가렛 하나를 꺼낸 후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푸틴 대통령은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두웨이 소장.”

“네, 대통령님.”

“이런 중대한 안건을 가지고 어떻게 소장계급을 달고 이곳에 올 수 있단 말이오? 러시아가 우습습니까.”

예상하지 못한 푸틴 대통령의 질문에 두웨이 소장은 당황하며 대답을 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국가안전부 장 위엔 부부장이 대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푸틴 대통령님! 그건 오해이십니다. 현재 우리는 한국과 전쟁 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위급 각료가 움직이면 분명 한국에서 눈치를 챌 수 있기에 이런 중대한 사안이면서도 저희가 온 것입니다. 부디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국가안전부의 이인자답게 장 위엔 부부장은 응기 웅변으로 대답했다. 이에 연기만 내뿜던 푸틴 대통령은 시가렛을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지금부터는 저기 저분들과 얘기하세요.”

푸틴 대통령은 뒤에서 서 있는 두 명을 가리킨 후 경호원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반갑습니다. 저는 국방부 미하일 이바노프 장관입니다.”

“저는 대외정보국 예브게니 레베데프 국장입니다.

각자 소개를 마친 두 명의 러시아 각료는 중국 손님들과 악수를 한 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날 미팅은 2시간 정도 지나서야 끝이 났다.

★ ★ ★

2020년 12월 02일 10:00,

서울시 종로구 청와대 국가위기상황센터 지하 벙커(대통령 집무실).

서현우 대통령은 탁자 회의 위에 놓인 문서를 확인하고는 매우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런 대통령의 모습을 지켜보며 국방부 장관과 국가정보원장 그리고 합참의장은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 탁자 위에 놓인 문서 내용은 얼마 전 기무사령부 대외정보수집과에서 조사를 마친 지린 사린가스 보고 문건이었다. 지난 11월 18일 지린 사린가스 범인이 일본과 연관되었다는 정황을 포착하고 국가정보원과 공조하여 전격 수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12일 만에 증거자료를 확보하여 보고서를 올린 것이었다.

보고 문건에 담긴 증거자료들은 암호문을 판독하여 알아낸 일본 전화번호 단서를 가지고 끈질기게 추적한 끝에 일본 내각정보실 요원들이 비밀 안가에서 사용했던 번호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에 동남아 용병단체에 접촉했던 기무사 요원들은 용병단체 중간 관리자로부터 1개월 전 일본인으로 보이는 의뢰자가 있었고 12명의 용병을 사 갔다는 증언과 계약문서 복사본을 확보해 왔다.

“여기 계신 3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생각에서 빠져나온 서현우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던 3명의 관료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에 기무사령부 사령관으로부터 제일 먼저 보고서를 받은 강현수 국방부 장관이 입을 열었다.

“현재 일본 정부 짓이라는 증거는 확보하였지만, 왜 일본이 정보기관을 통해 이런 짓을 했는지에 대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먼저 의도를 확실히 파악하고 그다음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항의 및 관계자 처벌과 배상 신청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대통령님.”

살짝 분노가 섞인 음성으로 국가정보원 나봉일 원장도 국방부 장관의 말에 동의했다.

“젠장맞을 쪽발이 새끼들. 무슨 다른 의도가 있겠습니까? 이번 한중전을 기회로 뭔가 크게 한번 해 먹으려고 했다가 예상과는 다르게 한국이 중국을 밀어붙이니 조금이라도 늦춰보려고 중국 놈들인 척하면서 교전 중인 지린 시내에 사린가스를 살포한 거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지린에서 걸리지 않았다면 모든 도시에서 사린가스 공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강이식 합참의장은 뻔한 일본의 의도에 대해서 정확히 짚어내며 말했다. 평소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합참의장은 이런 일까지 일본이 관여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있었다.

“강 의장 말대로 그게 사실이래도 그건 우리의 추측이잖나? 확실한 의도를 파악한 후 일본 놈들을 까도 늦지 않다고 보네.”

육군사관학교 선배이면서도 실제로 직속 상관인 강현수 장관이 합참의장의 등을 몇 번 두드리곤 말했다. 그러자 의견을 듣고 있던 대통령이 말했다.

“강 장관! 그럼 일본의 의도를 밝혀낼 수 있겠습니까.”

“네, 대통령님, 기무사는 물론 정보사와 그리고 국정원과 공조하면 충분히 밝혀낼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기간은 1개월 드리겠습니다. 이 기간에 일본의 의도라든지 야욕이라 던지 무엇이든 좋습니다. 확실히 알아내세요. 가능합니까.”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2020년 12월 02일 11:30 (싱가포르시각 10:30),

싱가포르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512호.

어제에 이어 오늘도 야구마치 겐조 전략비서관은 낯선 사내로부터 전달받은 서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어제와는 다르게 천천히 읽어가던 야구마치 겐조는 표나지 않을 정도의 미소를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다 좋은데 한 가지 더 추가 좀 했으면 합니다.”

“어떤 걸 말입니까.”

“현재 남중국해에 중국이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여러 군도에 있지 않습니까.”

“그건 주장이 아니라 중국 영토가 맞습니다.”

“하하, 아무튼요. 그 영토에 대해서 우리 일본과 공동 지분으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문서에 있는 조건이면 충분한 거 아닙니까.”

“허허, 여보세요. 그쪽 중국에서나 충분하지 우리 일본 쪽에서 충분한 겁니까?”

“욕심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착각하시는군요. 이 자리는 그쪽에서 만든 자리 아닙니까? 우리가 언제 욕심부리면서 이런 자리를 원했습니까?”

일본 최고의 협상관답게 상대의 말문을 닫게 하는 야구마치 겐조는 승기를 완전히 잡았다 생각이 들자 좀 더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비꼬듯이 말을 이어갔다.

“총참모부 소속 장 스창 소장이라고 했나요.”

“네, 그렇습니다.”

“그럼 직속 상관은 총참모부장인 퍼펑이후 상장이죠.”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다음에 이런 자리가 또 만들어진다면 그때는 퍼펑이후 상장이 직접 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 싱가포르가 아닌 일본으로요.”

“반가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본국으로 가보겠습니다.”

할 말만 하고 일어선 야구마치 겐조는 코트를 입고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자 장 스창 소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야구마치 겐조 전략비서관님.”

못 들은 척 호텔 출입문으로 할 걸음 더 나아가자 이번엔 다가와 팔을 잡으며 불렀다.

“전략비서관님!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잖습니까.”

“무슨 얘기요? 전 끝났는데요.”

“일단 앉아서 다시 얘기해봅시다.”

장 스창 소장은 억지로 팔을 끌어내며 야구마치 겐조 전략비서관을 의자에 앉혔다.

“장 스창 소장님.”

“네.”

“저는 방금 말한 것이 수용되지 않는다면 더는 얘기할 마음 없습니다.”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그럼 조건은 성사된 것으로 하고 앞으로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 좀 더 얘기해볼까요.”

원하던 걸 얻은 야구마치 겐조는 이번엔 반대로 적극적인 자세로 돌변하더니 조건에 따른 세부 사항에 관한 대화를 이어가려 했다.

★ ★ ★

2020년 12월 5일 11:00 (중국시각 10:00),

중국 베이징시 일대 X-2 벙커.

시진핑 주석은 두 가지 서류를 손에 움켜쥔 채로 벌벌 떨고 있었다. 이 서류는 며칠 전 비밀 밀사가 모스크바와 싱가포르를 방문하여 체결해 온 특1급으로 분류된 국가체결 문서였다.

“이 두 나라 놈들이 아주 우리 중국을 개돼지로 보는구먼.”

이에 모든 걸 계획했던 취지량지 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석님! 지금은 이이제일 뿐입니다.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러시아는 몰라도 일본은 향후 언제든 그 버릇을 고칠 수 있습니다.”

이때 리위안차오 부주석 또한 체결된 문서로 인해 분노를 표출하며 취지량지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그 말 책임지시오. 목을 걸고 책임지란 말입니다.”

“네, 책임지겠습니다.”

취지량지의 대답에도 화를 풀리지 않았는지 리위안차오 부주석은 한 번 더 소리치며 취지량지 대장을 밀어붙였다.

“취지량지 대장! 지금 이 수모는 빵즈놈들한테 전쟁에 진 것보다 더한 치욕이오. 이 치욕은 시진핑 주석님의 재임 기간 안에 갚아야 할 것이오.”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주석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움켜쥐고 있는 서류를 내던진 시진핑 주석은 그대로 앞에 있던 탁자를 발로 차면서 소리쳤다.

“그만 나가보시오. 취지량지 대장.”

“네, 주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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