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2019년 6월 15일 16:00 (에티오피아시각 10:00),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빈민촌 외곽.
아디스아바바 외곽 공터엔 5만여 명의 에티오피아 국민과 정부 관계자가 단상을 향해 앉아있었고 단상 위엔 에티오피아와 대한민국 소년·소녀로 구성된 평화 합창단이 가냘픈 목소리로 ‘아리랑’ 노래를 합창하고 있었다.
잔잔한 노래가 울려 퍼질 때 단상 바로 앞에는 거동도 힘들어 보이는 노인 30여 명이 ‘아리랑’이라는 노래를 지난 6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기억을 더듬어 따라 부르며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고국인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를 떠나 머나먼 아시아의 동쪽 끝 대한민국에 목숨을 걸고 참전한 에티오피아 6·25 참전 용사였다.
에티오피아는 6·25 전쟁 당시 3차례에 걸쳐 6,037명을 파견하였다. 그중 123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을 보았다. 이후 1974년 에티오피아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며 6·25 전쟁 참전 용사들에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영웅이 아닌 공산정권의 반란군으로 몰리며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참전 사실을 숨긴 채, 고향을 떠나 빈민촌으로 모여 살게 되었다. 1991년 과도 정부가 수립되면서 참전 용사에게 연금이 다시 지급되었지만 매달 지급된 연금은 우리 돈 4,400원이었다. 최하위층으로 전락한 후 연금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었다.
에티오피아 참전 용사들의 용기와 희생으로 대한민국은 오늘날 세계 5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지만, 정작 에티오피아 참전 용사들과 그 후손들은 고국에서 최하위 빈민층으로 전락하였고 후손까지 그 삶이 이어온 것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6·25 참전국 보은지원단’을 설립 이후 첫 국가로 에티오피아에 방문한 것이다.
합창이 끝나고 소년소녀 합창단이 좌우로 갈라져 무대 뒤편으로 퇴장하자 중년 남성이 단상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잠시 중앙에 서서 5만여 명의 에티오피아 국민을 보고는 큰절을 올렸다. 처음 보는 인사법에 여기저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큰절에 대한 의미를 아는지 박수 소리와 환호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큰절을 마치고 일어선 중년 남성은 마이크를 들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국민대표로 오게 된 윤현진입니다.”
대통령 직속으로 ‘6·25 참전국 보은지원단’이 설립되면서 단장으로 윤현진 전 복지부 장관이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먼저 69년 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참전하신 참전 용사분들과 파견에 지지해주신 에티오피아 국민,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께 진심의 감사를 드립니다.”
이에 단상을 향해 앉아있던 수많은 에티오피아 국민이 환호의 손뼉을 치며 감사하다는 말에 응해줬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경제 대국이 되어 이렇게 은혜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여기 계신 참전 용사와 고인이 되신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및 에티오피아 국민 여러분이 있기에 가능한 것임을 저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알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늦게 왔다는 죄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살아계실 때 참전 용사분들 한분 한분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전했어야 했는데, 이제는 30여 분밖에 안 계셔서 너무나 죄송스럽고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인사말 중에 목멨는지 윤현진 단장은 잠시 마이크에서 입을 때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제 대한민국은 에티오피아와 함께할 것입니다. 69년 전 목숨으로 지켜준 대한민국은 에티오피아의 혈맹국으로서 대대적인 국가 지원을 약속드리며 그 어느 나라보다 행복하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윤현진 단장의 인사말이 끝나자 앞에 앉아있던 30여 명의 참전 용사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흘렀고 그 중엔 18살이라는 나이에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땅에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혹한의 날씨를 이겨내며 하루하루 죽어가는 동료를 뒤로하며 생사의 갈림길에서 싸웠던 한 노병이 총상으로 잃은 오른손을 대신해 왼손으로 쥐고 있는 태극기를 하늘 높이 들어 힘차게 흔들며 외쳤다.
“먼저 간 전우들이여. 너희들은 죽음은 결코, 절대 헛되지 않았다.”
이날 행사가 끝나고 5일간 ‘6·25 참전국 보은지원단’은 에티오피아 정부를 비롯한 투자청과 양국 투자 협력 및 촉진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는 6·25 참전 용사에 대한 보은의 목적으로 한국과 에티오피아가 비즈니스 동반관계가 되었다.
첫 번째 6·25 참전 용사와 그 후손들을 위한 지원정책은,
1. 참전 용사에겐 보은지원금 인당 2만 달러 지급(전쟁 당시 사망한 참전 용사 1만 달러, 부상자에게 5,000달러 추가 지급, 생존한 참전 용사에게는 매월 100달러 참전연금 지급)
2. 참전 용사 주택 제공
3. 참전 용사 3대 후손까지 교육비와 한국 유학비 무상 제공 및 원하는 경우 한국에서 취업 활동 지원
4. 참전 용사 가족은 언제든 대한민국 민항기 무료 이용
5. 6·25 참전기념회관 건설
에티오피아 정부를 지원하는 정책은,
1. 투자촉진을 위한 경제, 투자 정보를 교환 및 공동 연구 수행(1차, 2차산업에 관한 기술 및 생산 공장 설비 구축과 3차산업에 대한 공동 법인 설립)
2. 투자 관련 제반 협력사업 공동 추진 및 투자진흥
(전국 5곳에 대규모 종합병원 건설- 각 광역시를 연결하는 도로 건설- 전국 100여 곳에 초등학교 건설과 전국 200여 곳에 생활용수 담화 시설 건설)
3. 투자유치 경험 공유 및 전문가 교환 파견- 국내 기업의 에티오피아 법인 설립 및 자동차, 반도체, 전자제품 등 생산 공장 건설(에티오피아 지하자원에 대한 개발 공동 투자 및 기술자와 의학, 법조 전문 지식인 파견)
사실, 국가비전전략위원회에서 6‧25 참전국 중 가장 먼저 에티오피아를 선택한 이유는 에티오피아는 9,663만 명의 아프리카 2위 인구 대국이며 최근 각종 인프라 투자 및 해외 기업 유치로 투자 매력도가 높은 국가였다.
아울러 한국의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벤치마킹한 ‘성장과 구조변환 계획을(GTP 1, Growth Transformation Plan)’을 2015년 완료한 바 있으며 한국전쟁 위기로 잠시 중단되었던 GTP 2, 프로그램을 다시 실행시키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밝힐 수 없는 이유도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에티오피아에서만 채굴할 수 있는 몇 가지 특수한 광물이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에티오피아에 대대적인 투자 및 지원 대가로 지하자원 개발권을 선점하여 필요로 하는 광물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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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7일 19:30 (에티오피아시각 13:30),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빈민촌 공터.
200여 명의 어린아이가 ‘6·25 참전국 보은지원단’에서 나눠준 축구공을 가지고 여기저기 즐겁게 축구를 하고 있었다. 거친 맨땅에 그것도 보잘것없는 신발을 신거나 맨발로 축구 경기를 하는 어린이들 표정에는 그 어떠한 슬픔 표정은 없었다. 다들 해맑게 웃는 얼굴일 뿐이었다. 이유는 조만간 1,500채에 이르는 판잣집은 사라지고 옆 공터에 대규모 주택단지가 건설되어 그곳으로 이주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들은 바로 6·25 참전 용사의 후손들이었다.
한참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6·25 참전국 보은지원단’ 직원들이 양손에 가득 들고 나타났다. 이번에 에티오피아에 오면서 보은지원단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준비한 과자와 사탕들이었다. 한 직원이 모이라는 소리와 함께 손뼉을 치자, 한참 축구 놀이에 빠져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 나눠주는 과자와 사탕을 받고는 그렇게 신난 표정을 짓는지. 어떤 아이는 아프리카 특유의 리듬을 타면서 춤을 추는 아이도 있었고 바로 허겁지겁 과자를 먹는 아이도 있었다.
그중에 과자를 콱 지고 먹지도 않고 앉아있는 여자아이를 본 보은지원단 직원인 오은아 주임이 다가갔다.
“왜 먹지 않고?”
커다란 눈망울로 말을 거는 오은아 주임을 보면서 아이는 과자를 땅에 내려놓고는 말대신 수화로 말했다. 이에 수화를 모르는 오은아 주임이 순간 당황하자 옆에 있던 사내아이가 대신 대답해줬다.
“집에 있는 동생 주려고 안 먹는대요.”
“어머나, 착하기도 해라. 언니가 동생 줄 것도 챙겨줄 테니까 그건 지금 먹어도 돼.”
옆에 있는 사내아이가 수화로 대신 말을 전하자, 그때야 조심스럽게 과자 포장지를 벗기고는 먹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를 보는 오은아 주임이 사내아이에게 물었다.
“이 아이는 왜 말을 못 하는 거니?”
“어렸을 때 영양실조에 걸려서 그때부터 말을 못 해요. 동생도 몸이 허약해서 집에서 나오지도 못해요.”
순간 오은아 주임은 울컥했는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자 이내 안 보이게 눈물을 훔치고는 웃는 얼굴로 물어봤다.
“너 집이 어디니?”
사내아이에게 수화로 전해 들은 여자아이는 손으로 자기 집을 가리켰다. 이에 오은아 주임은 같이 온 직원 이름을 불렀다.
“강현호 씨?”
“네, 오 주임님.”
“가져갈 수 있게 과자 좀 종류별로 챙겨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봉지에 가득 담은 과자를 강현호 직원이 여자아이에게 건네자,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는 표현을 했다.
지금 이 시각이 아이들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자랑스러워할 할아버지의 참전은 한때 공산정권이 들어서며 반란군인의 죄인으로 빈민층으로 전락하며 그 고통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아이들이 이제는 행복한 일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날 저녁까지 아이들과 즐겁게 보내고 보은지원단은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날 오은아 주임은 보은지원단 상부에 정식으로 보고하여 어제 만났던 여자아이 집에 방문하였다. 판잣집답게 안은 비위생적으로 파리들과 벌레들이 날아다녔고 판자로 만든 침대에는 오랫동안 빨지도 않은 이불이 깔아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6살 먹은 여자아이가 삐쩍 마른 몸으로 누워 있었다.
여자아이를 돌보고 있던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는 당시 증조할아버지는 황실근위대 장교 출신으로 1951년에 한국으로 참전하여 동부전선인 적근산 전투에서 돌아가셨고 지금의 남편이 그 당시 나이가 2살이었다고 했다. 1971년 에티오피아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며 남편은 아버지가 공산국가와 싸운 반란군의 장교 출신이라는 오명으로 원하는 직장을 구할 수가 없어서 이곳 빈민촌에서 막일하면서 지금의 자기를 만나서 살았지만, 빈곤한 형편 때문에 이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첫째 아들은 병으로 죽고 둘째 딸은 두 아이를 남겨놓고 도시로 일하러 떠나 할머니가 애들을 지금 키우고 있는데 첫째는 어렸을 때 영양실조로 말을 잃었고, 둘째 또한 현재 영양실조로 몸이 많이 쇠약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런 이야기를 듣던 오은아 주임과 함께 온 보은지원단 직원들의 눈가에 또다시 굵은 눈물이 흘렀고, 가슴 한편에는 뭔가가 꽉 죄는 느낌이 들면서 시려 왔다.
1시간 후 여자아이의 할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자 보은지원단은 지원과 관련된 여러 얘기를 해줬고 6살 손녀는 바로 병원으로 데리고 가기로 했다. 그리고 보은지원금이 정식으로 나오기 전까지 필요한 돈과 식량 그리고 여러 가지 생활필수품을 제공하기로 했다.
‘6·25 참전국 보은지원단’은 1단계 지원정책에 따라 에티오피아를 시작으로 콜롬비아, 필리핀, 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순으로 확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