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반역자
1943년 6월 04일 14:00 일제강점기,
일본 규슈 나가사키현 나가사키 항구.
조선 노동자 5,000명을 태운 여객선은 인천 항구를 떠난 지 3일 만에 일본 나가사키 항구에 도착했다. 생전 처음 배를 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지 뱃멀미에 다들 피죽이 되었고 종구 형제 또한 뱃멀미와 씨름하며 지옥 같은 3일을 견디어 냈다.
“형, 배고파!”
일본까지 3일이나 걸릴지 몰랐던 종구는 강냉이 주먹밥 4개만 산 걸 후회하며 종식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이제 도착했으니까. 항구에 내리면 맛있는 거 사줄게.”
30분이 지난 후 여객선은 나가사키 항에 안전하게 정박했고, 종구 형제를 포함한 조선 노동자 5,000여 명이 배에서 내렸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사람들은 저쪽 왼쪽 공터로 집합한다.”
전형적인 일본 얼굴을 한 사내가 서툰 조선말을 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1시간이 지난 후 5,000여 명의 조선 노동자들은 15개 그룹으로 나뉘었고 종구 형제는 300여 명으로 구성된 한 그룹에 포함되어 앞에서 조선말로 소리치고 있는 일본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미쓰비시 기업에서 운영하는 탄광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너희들의 신분을 확인해야 하니, 민족번영회에서 나눠준 신분표, 다들 갖고 있지? 그걸 옆에 있는 사내에게 보여주고 다시 저기 끝에 있는 배 앞으로 집합한다.”
일본 남자의 말에 300여 명의 조선인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왔다 갔다 돌리며 쳐다봤고 각자 민족번영회에서 나눠준 신분 표를 주점 꺼내 들었다.
“그쪽 줄부터 신분표 제출하고 저기로 가서 다시 집합해.”
종식이 나이만큼 어려 보이는 한 소년은 일본 남자가 자기를 가리키자 소심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앞으로 나와 신분표를 내밀었다.
“저유? 여기 신분표 있어유.”
300여 명의 조선 노동자들이 차례대로 신분표를 제출하고 작은 배 앞에서 다시 집합하자, 아까 그 일본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너희는 하시마섬에 있는 탄광으로 갈 것이다.”
“저기 선상님, 물어볼 게 있는디요.”
“뭐야?”
“저기유. 이곳으로 일하러 오면 선금으로 10원을 준다고 혔는디 언제 주는감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조선 사내가 묻자, 일본 남자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소리쳤다.
“조선인 새끼야, 그걸 왜 우리한테 물어? 민족번영회에 말해야지. 니들 몸값은 벌써 민족번영회에 지급했단 말이야. 이 멍청한 조센징 놈들아!”
“그게 뭔 소리래요? 거서는 이곳에 오면 받을 수 있다고 했는디?”
“닥쳐, 너희는 지금 당장 배에 올라타도록 해. 어서!”
“돈 못 받으면 안 갈람니더.”
“저도유. 그게 을마인디, 돈을 줘야 저 배를 타든 말든 하지유.”
“내말이, 이거 사기도 아니고 뭐다냐?”
갑자기 흥분한 조선 노동자들은 주저앉거나 팔짱을 끼며 농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 남자가 다급하게 뒤쪽을 보며 소리쳤다.
“이 조센징새끼! 나모가토상! 이것들 정신 좀 차리게 해.”
일본 남자의 말에 항 부두 창고에서 수십 명의 일본 왈패들이 기다란 몽둥이를 들고 와서는 앞줄부터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퍽! 퍽!
“나죽네! 대체 왜 때리는감요?”
“그냥 맞어! 조센징!”
사정없이 내려치는 몽둥이에 300여 명의 조선 노동자는 피떡이 되어 여기저기 쓰러져 바닥에 나뒹굴었고 종구도 종식이를 껴안은 체 몽둥이질과 발길질을 맞으며 웅크리고 있었다.
“그만.”
뒤에서 뒷짐을 지고 피투성이 되어 나뒹구는 모습을 지켜보던 일본 남자가 오른손을 들며 외쳤다. 이에 일본 왈패들이 몽둥이질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이 시간 이후로 또 난동질하는 조선인 놈이 있다면 그때는 숨통을 끊어주겠다.”
일본 남자는 왈패의 오야붕이 차고 있던 일본도를 꺼내 들고는 쓰러져 있는 조선 노동자들을 향해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알아들었으면 어서 일어나 배에 올라타란 말이야!”
약속과 다른 게 선금도 못 받게 생겨 억울한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사정없는 몽둥이질과 지금은 죽일 듯이 휘두르는 일본도를 보니 더는 군소리 못 하고 다들 몸을 추스르며 일어나 배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종구도 종식이 몸을 만져가며 다친 데는 없는지 확인하곤 겁에 질린 종식이 손을 잡고 배로 가는 조선 노동자 일행 속에 끼어들었다.
“조센징 놈들은 역시 몽둥이가 약이야. 안 그런가?”
일본 남자는 양손으로 잡고 있던 일본도를 왈패 오야붕인 나모가토에게 건네며 누런 이를 보일 정도로 웃으며 말했다.
“하잇, 나카무라 상.”
★ ★ ★
1943년 6월 8일 14:00 일제강점기,
경성 종로구 민족번영회 회사.
“사장님, 오늘 오전에 미쓰비시 기업으로부터 15만 원 입금했다는 전보입니다.”
“그래? 푸하하하.”
사장실 소파에 누워 흥얼거리던 이복덕은 저번 달 파견 노동자에 대한 금액이 일본기업으로부터 입금되었다는 소리에 기분이 좋았는지 입을 크게 벌리며 웃었다
.
“입금되었단 말이지? 그럼 총독부에 가볼까?”
이복덕은 소파에서 바로 일어나더니 모자를 쓰고는 그대로 총독부로 향했다.
“나 총독부 들렸다가 바로 퇴근할 테니 그렇게 알아.”
“알겠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15만 원은 21세기 환율로 보자면 1억 5천만 원 정도였다. 이복덕은 조선인들을 속여 일본이나 만주로 팔아먹은 돈으로 총독부의 연줄을 이용해 시세보다 싼 가격으로 한반도의 노른자란 노른자 땅은 깡그리 사들였다. 자기 부를 축적을 위해 같은 한민족 조선인을 짐승 팔 듯이 일본과 만주로 인간 장사를 한 천인공노할 악행을 저지른 이복덕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그 악행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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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월 11일 14:00 일제강점기,
일본 규슈 나가사키현 하시마(군함도) 탄광.
나가사키 항에서 1시간 배를 타고 이곳 하시마섬에 온 지 1년, 그 1년은 지옥의 시간이었다. 이곳 탄광에서 일하는 일본 내지인인 광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개돼지 같은 대우를 받으며 하루 12시간씩 엎드린 채로 석탄 채굴 노역에 시달렸다. 40도가 넘는 바닷속 깊은 지하 탄갱에서 폐는 진폐증으로 썩어가고 뼈는 고된 노동에 삭아갈 정도로 약해져 부러지기가 다반사인 기막힌 상황에 부닥쳐졌으며 가끔 갱도가 무너져 죽거나 바다로 도주하다 잡혀 죽는 등 그야말로 이곳은 생지옥과 같았다.
오늘도 600여 명의 조선 노동자들은 팬티만 입고 시꺼먼 탄가루가 묻은 수건 한 장만 가지고 지하 1,000m까지 좁은 탄광 갱도를 따라 파내며 내려가고 있었다. 그중에 종식은 조선 노동자 중 몸집이 작은 편이라 항상 맨 앞에서 채굴 일을 했으며 그런 종식이를 곁에 두고자 감독관에게 매일 사정하여 허락받고는 커다란 몸집을 꾸부린 체로 옆에서 같이 일을 했다.
“야! 너, 몸집 큰 조센징.”
머리에 단 조명 불빛을 의지하며 어두운 탄광에서 석탄을 채집하던 종구를 멀리서 감독관이 불렀다.
“저 말입니까?”
“그래 너 말이야. 여기부턴 넌 몸집이 커서 안 되겠으니 저쪽 옆 갱도로 이동해.”
“네? 감독관님, 동생이랑 같이 일할 수 있게 해주세요.”
“뭔 말이 많아? 어서 안 나가?
이런 상황에서 종식이는 감독관에게 또 맞을까 형의 팔을 잡고는 말했다.
“괜찮아. 나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 그러다가 밤에 감독관한테 저번처럼 맞으면 어떻게 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종구를 함께 일하는 아재 한 명이 종구 등을 두드리며 안심시키듯 말했다.
“종구야? 이 아재가 종식이 잘 지켜줄 테니께, 걱정하지 말고 가라잉.”
“호섭 아재, 고맙습니다.”
종구는 손으로 더듬으며 종식이 얼굴을 붙여 잡고는 힘주어 말했다.
“오늘만 그럼 따로 일하자. 몸 다치지 않게 조심히 일해. 알았지?”
“걱정하지 마! 형이나 다치지 말고, 이따가 올라가서 보자고.”
“그래, 그럼 형 간다.”
종구는 엉큼엉큼 기다시피 하며 종식이가 있던 갱도를 벗어나 옆에 있는 조금은 큰 갱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1시간이 지난 시점에 지진이 일어났는지······. 갱도에서 작은 진동을 느끼는가 싶더니 잠시 후 갱도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하며 천장에서 돌과 석탄 가루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진이다! 지진이닷! 다들 나와!”
여기저기에서 조선 노동자들이 소리치며 갱도 출입구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종구도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필사적으로 갱도 출입구 쪽으로 가려 할 때 동생 종식이가 생각났다.
“안 돼!”
종구는 종식이가 있던 좁은 갱도 쪽으로 방향을 돌린 그때 아까 종구에게 다른 갱도로 가라고 했던 감독관이 꼬리에 불붙은 도마뱀처럼 무서운 속도로 기어 올라왔다.
“감독관님, 제 동생은요?”
“비켜 조센징 놈아.”
감독관은 종구의 물음에 대답은커녕 욕지거리하며 종구를 밀치고는 그대로 갱도 출입구 쪽으로 쏜살같이 기어갔다. 이에 종구는 감독관이 빠져나온 갱도 쪽으로 기어 내려가려는 그때 아래쪽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너진 갱도에서 검은 연기가 폭풍처럼 종구를 휩쓸고 지나갔다.
“종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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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월 11일 19:00 일제강점기,
일본 규슈 나가사키현 하시마(군함도) 탄광.
무너져 내린 갱도에서 가까스로 조선 노동자 손에 의해 구출된 종구는 돼지우리 같은 숙소에서 굵은 눈물을 흘리며 천장만 바라만 보고 있었고, 그동안 친하게 지낸 우진 아재가 강냉이죽 한 사발을 가져와 내밀며 말했다.
“종구야! 산 사람은 살아야제, 어서 인나 이거 먹고 힘내그라.”
“종식아··· 내 동생 종식아···.”
“종구야, 종식이도 그렇지만 호섭이도 빠져나오지 못해 죽어부렀다. 그리고 3호 숙소에 있던 진태 아재랑 명구, 그리고 니 또래 태광이도 죽었는가보다.”
낮에 있었던 지진은 가장 깊게 들어갔던 종식이와 호섭 아재가 있던 갱도, 그리고 그 옆의 갱도에서 3명이 죽어 총 5명이 죽고 2명 실종, 6명이 부상한 참사였다.
“우진 아재! 동생 시신이라도 찾아야 해요. 제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거 같아요.”
힘겹게 말하며 일어서려는 종구를 우진 아재는 상체를 잡으며 일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니 지금 탄가루 억수로 마셔가가 상태가 안 좋은 거 모르나? 글고, 지금 무너진 갱도 찾을 길도 없다. 뭔 수로 지하 1,000m에서 무너져버린 갱도를 찾아 동생 시신을 찾는다고 그래 쌌노. 에잇, 빌어먹을.”
현실을 일깨워주는 우진 아재 또한 속상하고 화가 났는지 짧은 욕설을 뱉으며 긴 한숨을 쉬었다. 이때 복도에서 감독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지진으로 동요하지 말고,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정상적으로 일할 테니 다들 일찍 자도록.”
‘집에서 기르던 개가 죽어도 이렇게 하진 않을 것이다. 시신이나 실종된 사람을 찾는다는 얘기는커녕 내일부터 정상적으로 일한다니.’
“이 쪽발이 개새끼들, 내가 기회만 생기면 저 감독관 새끼들 다 죽이고 나도 여서 확 죽어 불란다.”
종구보다 1년 먼저 이곳에 와 2년 동안 노예처럼 노역 생활을 했던 호동 아재가 비쩍 바른 양 주먹을 쥐고는 피눈물 나는 절규를 하며 눈물을 쏟아냈다.
“저기 2호 숙소, 뭐가 그리 시끄러워? 어서 안 자나? 우물에 갇혀보고 싶어?”
“호동 아재, 경을 치려고 그려? 조용히 혀, 감독관이 듣겠어.”
“쪽발이 쉐끼들, 들으라면 들으라지요.”
호동 아재는 2년간 쌓아둔 분노를 내뱉듯 짧게 일갈하고는 다 닳은 포댓자루를 엮어서 만든 이불을 얼굴까지 뒤집어 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