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2016년 1월 28일 02:30,
인천시 인천항 어느 외진 부둣가.
시베리아 북서풍의 기승으로 한파가 연일 이어지는 가운데 채찍으로 때리는 듯한 매서운 느낌의 거센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야심한 새벽, 외진 부둣가에 3명의 그림자가 각자 두세 개의 가방을 둘러메고는 어디론가 서둘러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의 정체는 바로 해군 방산비리에 연루된 남태규 전 방위사업청장 일행이었다. 방산비리 발표 후 출국금지조치를 당한 남태규는 수행원 2명과 함께 도피 행각을 벌이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끝내 중국으로 밀항하려는 중이었다.
저벅! 저벅!
어둠이 깔린 부둣가에 정박해있는 조그마한 크기의 고깃배에서 선주로 보이는 사내가 플래시 불빛이 켰다 끄기를 반복하며 신호를 보내자 그림자 일행은 그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려 다급히 걸어왔다.
그림자 일행이 고깃배 근처까지 걸어오자 플래시 불빛을 비취며 신호를 보냈던 선주가 배에서 내렸다. 이에 그림자 일행 중 가장 앞에 걸어가던 사내가 말을 건넸다.
“선주요? 배는 문제 없이 준비되어 있겠죠?”
“아따 저거 안보이요?”
짧은 대답을 한 선주가 뒤쪽을 가리켰다. 이에 3명의 그림자 시선은 일제히 고깃배로 향했다. 생각보다 작은 배였다. 이에 말을 걸었던 사내가 다시 물었다.
“저 배입니까? 배가 너무 작지 않소?”
“허메! 걱정 마랑께요. 서해 건너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소잉.”
선주라는 사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에 말을 걸었던 사내와 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내 2명 역시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아니었기에 바로 배에 타려는 그때, 선주가 왼손을 뻗어 가로막으며 말을 했다.
“그런데 말이오. 거시기, 돈 먼저 줘야지 안캈소?”
선주의 돌발 행동에 배에 타려던 3명은 움칫하며 멈춰섰고 깡마른 한 사내가 들고 있던 가방 중에서 작은 가방을 선주에게 건넸다. 이에 넘겨받은 돈 가방을 열고는 금액을 확인하려던 선주에게 가방을 건네 사내가 초조한 어조로 말했다.
“받으시오. 급하니 금액은 일단 배에 탄 후에 확인하시오. 틀림없이 약속한 현금 1억입니다.”
사정하듯 말하는 사내의 얼굴은 초조함을 넘어 불안감에 안색이 너무나 안 좋아 보였다. 하지만 선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저 금액을 확인하고는 다시금 퉁명스럽게 말했다.
“근디 쪼까 미안한데······. 약속한 금액, 두 개 더 받아야 쓰건는디?”
“뭐요? 갑자기 금액을 세 배로 달라니요? 약속한 금액과 다르잖소?
가장 먼저 말을 걸었던 사내가 배에 가방을 싣다 말고는 선주에게 다가가 따지듯 말을 했다. 그런 사내를 보며 보이지 않게 살짝 입꼬리를 올린 선주가 대답했다.
“내도 처음엔 일반인 밀항으로 알았는데 말이시. 알아보니 이건 뭐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방산비리 사건의 주인공분들이 아니오? 내도 목숨 걸고 하는 건디, 1억은 쪼까 적다고 생각이 들지 않소잉? 긍게 인당 1억씩 합이 3억은 주셔야지 않컸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약속한 금액의 3배를 달라니요.”
황당한 선주의 말에 당황한 사내는 치밀어오는 분노를 애써 참으며 주먹만 콱 지고서는 노려보기만 했다. 이때 뒤에서 듣기만 하고 있던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중년의 사내가 불렀다. 그는 바로 남태규 전 방위사업청장이었다.
“김 담당관, 잠깐만 이리 오게.”
“네, 청장님.”
청장이라는 사내의 부름에 바로 달려간 사내는 귓속말로 몇 마디 오갔고 청장으로부터 뭔가를 받고 난 후 다시 선주에게 다가와 말을 했다.
“현금은 현재 준비한 1억밖에 없고, 나머진 이걸로 대신합시다.”
선주에게 내민 사내의 손에는 1캐럿 다이아몬드 20여 개가 있었다. 적어도 개당 천만 원을 호가하는 1등급 다이아몬드였다.
“어메, 이게 개당 얼마 짜리오?”
“암시장에 팔아도 개당 천만 원은 넘을 것이오.”
“어쩔 수 없지요.”
다이아몬드를 건네받은 선주는 그대로 호주머니에 넣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뒤에 서 있는 청장이라 불리는 사내를 잠시 주시하고는 이내 오른손을 뒤로 가져갔다.
“연극은 이제 막을 내립시다.”
“무슨 소리요?”
알아듣지 못할 말에 반문하는 사내에게 선주는 권총을 꺼내 들며 소리쳤다.
“손들어! 나는 국암원의 주진일 팀장이다. 남태규 전 방위사업청장, 지금부터 당신을 포함! 여기 있는 3명은 방산비리 뇌물수수 혐의로 긴급 체포한다. 손들고 모두 무릎 꿇어!”
순간 당황한 3명의 사내는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다이아몬드를 건넨 담당관이라는 사내는 포기했는지 그대로 손을 올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청장이라는 남자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는 흐느끼며 울었다. 마지막으로 처음에 돈 가방을 넘겼던 깡마른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 주임! 저놈 잡아!”
컨테이너 방향으로 도망가는 사내 옆으로 갑자기 나타난 한명주 주임은 도망가는 사내의 옷깃을 잡고는 그대로 엎어치기 하듯 집어 던져버렸다. 피할 틈도 없이 내동댕이쳐진 사내는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고는 그대로 대자로 뻗어버렸다.
“정오경 비서관, 도망가 봤자 부처님 손바닥이야.”
국가비리암행원의 국가 비리수사국 1과 주진일 과장은 중국으로 밀항하려는 방산비리의 주요인물 남태규 전 방위사업청장, 정오경 전 비서관, 김현필 전 구매사업담당관을 모두 체포했고, 모든 재산을 처분해 암시장에서 마련한 수백 개의 다이아몬드와 200만 달러 현금을 압수하는 데 성공했다.
★ ★ ★
2016년 1월 29일 16:20 (필리핀시각 15:20),
필리핀 세부.
푸른 선글라스에 주황색 꽃무늬 반소매를 입은 남자가 호화스러운 보트에서 내렸다. 옆구리엔 키 작은 필리핀 여자를 끼고 거만한 웃음을 보이며 거들먹거리는 행태가 꼭 세부의 황제처럼 보이려는 듯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는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우리 귀여운 세리! 오늘 밤도 화끈하게, 알았지?”
키 작은 여자의 엉덩이를 한 움큼 쥐며 변태적인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아이, 참. 리는 짓궂어.”
사내의 행동이 싫지만은 않은지 키 작은 필리핀 여자는 사내의 팔짱을 끼고는 한 것 애교를 부렸다. 한편 낡은 건물 3층 옥상에서는 찰스 리라는 사내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한 사내가 소형 헤드셋을 통해 말했다.
“팀장님, 표적 확인했습니다. 이상.”
- 이 주임, 최종 목적지까지 확인한다. 이상.
“알겠습니다. 이상.”
주차장에 들어선 찰스 리라는 사내는 빨간 컨버터블 스포츠카에 여자를 태운 후 묵직한 배기음을 몇 번 내고는 이내 해안가 도로로 들어서며 달리기 시작했고, 이 주임이라는 사내 또한 검은 밴에 승차한 후 눈치채지 않도록 조용히 따라갔다.
10여 분을 달린 빨간 컨버터블 스포츠카는 세부에서도 유명한 6성 호텔인 에디슨 블루 호텔의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섰고, 검은 밴 또한 조용히 따라 들어갔다.
“새끼! 아주 국민의 세금으로 호화찬란하게 사는군요.”
“그러게 말이다. 잡고 나서 손 좀 봐야겠다.”
이영규 주임의 말에 짧게 대답한 나경준 팀장은 주차 후 로비로 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로 향하는 찰스 리의 모습을 확인한 후 검은 밴의 운전석에 있는 윤영길 주임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이 주임과 나는 저놈 따라갈 테니, 윤 주임은 이곳에서 대기해, 혹시 모를 자동차 도주를 차단해야 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나경준 팀장은 윤영길 요원의 대답을 들으며 차 문을 열고 신속하게 찰스 리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이번 방산비리 사건의 브로커 찰스 리, 한국 이름은 이태운이었다. 4년 전 해외로 잠적하여 찰스 리의 행방이 묘연했던 상황에서 며칠 전 국정원의 남궁원 요원이 해외 계좌의 인출 경로 분석과 해외 금융기관의 해킹으로 찰스 리가 필리핀 세부에 있다는 정보를 전달받았다. 이에 국가비리암행원의 국가비리수사 1과 2팀은 찰스 리를 긴급 체포하기 위해 이곳 세부로 날아왔다.
로비에 들어선 찰스 리는 바로 키를 받고서는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누군가의 전화를 받았다. 잠시 후 전화를 마친 찰스 리의 표정이 잠시 인상을 쓰는가 싶더니 다시 평상시처럼 거만한 표정으로 바뀌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쯤 급하게 타는 관광객 연기를 하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찰스 리가 누른 16층을 확인한 이영규 주임은 17층 버튼을 눌렀다. 16층을 향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은 뭔가 모를 긴장감의 분위기가 흘렀고 몇 초 만에 16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찰스 리는 팔짱을 끼고 있던 필리핀 여자를 이영규 주임에게 떠밀고는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
“팀장님! 눈치챘습니다. 16층입니다.”
- 잡아! 바로 올라간다.
순간 방심으로 필리핀 여자의 몸을 떠안으면 넘어진 이영규 주임은 바로 일어나 로비에서 기다리는 나경준 팀장에게 헤드셋으로 알렸고, 도망가는 찰스 리를 잡기 위해 복도를 가로질러 달렸다.
T자로 갈라지는 복도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려는 순간, 왼쪽 복도에서 작은 칼을 든 검은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와 이영규 주임을 덮쳤다. 하지만 이영규 주임은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옆으로 굴러 피하며 권총을 꺼내 즉시 무릎 앉자 자세를 취하고는 검은 그림자의 허벅지에 한 방을 쐈다.
탕!
허벅지를 감싸며 쓰러지는 검은 그림자의 얼굴을 확인할 틈도 없이 이영규 주임은 즉시 일어나 찰스 리가 도망간 복도를 향해 내달렸다. 복도 끝 비상계단으로 들어가는 찰스 리를 확인하는 순간, 비상계단 반대편 방문이 열리며 두 개의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앞을 막으며 권총을 쏘기 시작했다.
탕! 탕! 탕!
탕! 탕! 탕!
순간 이영규 주임도 그대로 몸을 날리며, 몇 발의 총을 쏘고는 생각했던 착지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굴러떨어졌다.
여섯 발의 총성이 울린 복도에 쓰러진 사내는 2명이었고, 복도 벽에 기대어 버티고 있는 사내는 1명이었다. 불행하게도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사내는 방금 호텔 방에서 튀어나온 찰스 리의 경호원이었고, 쓰러진 2명 중 한 명은 어깨에 총상을 맞은 이영규 주임이었다.
한 손으로 복도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다가온 찰스 리의 경호원은 엎어져 있는 이영규 주임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었다.
탕!
복도에서 또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영규 주임에게 권총을 겨누었던 찰스 리의 경호원은 왼쪽 가슴을 움켜쥐며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그리고 반대편 복도 끝에서 총을 쏜 자세를 취하고 있던 나경준 팀장이 황급히 달려와 이영규 주임의 부상을 확인했다.
“괜찮아? 이 주임?”
“네, 괜찮습니다. 찰스 그놈은 저기 비상계단으로······.”
“이 주임! 조금만 기다려.”
“윤 주임! 16층 복도다. 이 주임이 다쳤다.”
- 네, 알겠습니다!
헤드셋을 통해 지시를 내린 나경준 팀장은 비상계단 문을 열고 위아래를 살펴봤다. 아래쪽 계단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이에 나경준 팀장은 곧바로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5층까지 쉬지 않고 뛰어 내려온 나경준 팀장은 거친 호흡을 하며 윤영길 주임에게 다시 한번 무전을 보냈다.
“윤 주임! 허억, 허억.”
- 네, 팀장님. 제가 16층으로 올라갈까요?
“아냐! 지금 이놈 지하주차장으로, 허억, 가고 있어. 거기서 대기하다가 덮쳐~”
- 네, 알겠습니다.
검은 밴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윤영길 주임은 비상계단을 타고 내려온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 된 찰스 리를 봤다. 바로 차에서 내려 찰스 리를 덮치려던 윤영길 주임은 찰스 리의 오른손에 쥐고 있는 권총을 보고는 잠시 생각을 한 후 안전띠를 매고 자동차 키에 손을 갔다 댔다.
빨간 컨버터블 스포츠카에 도달한 찰스 리는 그대로 몸을 날려 운전석에 앉은 후 시동을 켰고 이내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있는 힘껏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주차장 출구 쪽으로 그대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콰앙!
배기음을 내며 출구를 향하던 스포츠카는 갑자기 오른쪽 측면에서 밀고 들어온 검은 밴과 충돌했다. 그 충격에 스포츠카는 왼편에 주차된 차 쪽으로 미끄러지며 연달아 처박히고는 찌그러진 보닛 사이로 연기를 뿜으며 그대로 멈춰버렸다.
충돌 당시 충격에 보조석까지 퉁겨 나간 찰스 리는 의식을 잃은 채 너부러졌다. 이에 검은 밴에서 내린 윤영길 주임은 벗겨진 헤드셋을 고정한 후 걸어가며 나경준 팀장에게 무전을 보냈다.
“찰스 리 신병 확보했습니다.”
- 오케이, 잘했어.
그제야 비상계단 문 앞에서 모습을 보인 나경준 팀장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윤영길 주임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