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303화 (279/280)

303화. 외전 2―2. 엔딩 이후의 세계 [찬탈편]

이곳은 백검의 성당 공중정원.

까마득한 어둠이 사시사철 드리운 적막의 공간.

나. 박정용은 옥좌에 삐딱하게 앉은 채, 팔걸이 위로 턱을 괴고 가만히 침음을 삼켰다.

“으음.”

내가 루시를 죽여버리고. 그녀를 대신해서 계승의 옥좌에 앉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흐으음.”

정확히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시험의 장막에서도 그랬듯이, 이런 폐쇄된 곳에 오래 있으면 시간 감각이 애매해진다.

대충 한 수십 년 지나지 않았나. 그렇게 추측이나 할 뿐이다.

“으흐으으음.”

입술을 비집고 침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나는 지금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자니 옆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세요, 정용 님? 한숨 때문에 바닥이 꺼지겠어요. 후후.”

목소리의 주인공은 세스나였다.

나는 그녀를 향해 시선을 슬쩍 돌렸고. 입을 콱 다물었다.

“…….”

나 스스로도 못 믿겠어서 다시 한번 말하겠다.

세스나다. 나와 함께 여행을 했던 물색 머리칼의 메이드 로봇. 그녀가 맞다. 그녀가 지금 내가 앉은 옥좌 옆에서 알짱거리고 있다.

나는 세스나의 방실거리는 얼굴을 한동안 지그시 쳐다보다가 툭 내뱉었다.

“별건 아니고. 네 생각 좀 하던 중이었어.”

“어, 어머! 어머어머어머! 제, 제 생각이라니. 으흐, 아이 진짜! 낯 뜨겁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안 그래도 방실거리던 세스나의 입꼬리가 귀 끝까지 걸렸다. 혼자 헤죽대기 시작한 그녀를 놔두고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 나는 지금 세스나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고민하고 있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냐.’

근데 사실 세스나가 이곳에 찾아온 경위를 말하라면 대단한 건 없다.

몇 년 전쯤에 그냥 제 발로 걸어서 왔다. 발에 달린 부스터로 날아서 온 것도 아니고. 진짜 두 발로 걸어서, 승강기 타고 올라오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봤다.

―아아… 정용 님! 드디어! 드디어 찾았어요!!

승강기를 타고 올라와서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더니, 상상도 못 한 상황에 얼이 빠져있던 내게 달려들어 안겼다.

―세상 어딜 뒤져도 안 나오시길래,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설마 진짜 이런 곳에 숨어 계셨을 줄은 몰랐어요!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껴안고서. 격정에 찬 몸짓으로 내 가슴에 얼굴을 마구 비벼댔던 기억이 난다.

‘존나게 놀랐지. 그때는.’

디아나가 죽으면서 사라졌던 절멸의 안개는 내가 옥좌를 찬탈하면서 다시 둘러쳤다.

그러니 원래 평범한 생물이라면, 멸망의 성흔에 발만 들여도 온몸에서 피를 쏟고 죽는다. 하지만 세스나는 그것을 개무시하고 이곳에 도달했다.

그것이 어째서 가능했느냐?

‘로봇인 게 치트키야 아주. ×발.’

불사의 마왕… 루시조차 이젠 내 허락 없이 여기로 들어오지 못한다. 하지만 세스나만큼은 가능했다. 왜? 로봇이라서.

용사 지원 시스템도 캐치하지 못했던 상정 외 존재. 세스나는 절멸의 안개조차 ‘생물’로서 취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주가 발동하지 않는다. 공중정원 전역에 둘러쳐진 고대의 결계조차 이 여자는 하이패스다.

“호, 혹시 정용 님? 제가 여기 있는 게… 싫으세요?”

이내 세스나는 심각하게 굳어있던 내 표정과, ‘네 생각 하고 있었다’라는 말을 결부한 듯하다.

그녀는 곧바로 버려진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런 건가요? 정말로?”

그리고 웨에에엥! 양손을 망설임 없이 전기톱으로 변형시켰다.

어느새 총명하게 빛나던 은색 눈동자는 어디 갔는지 시커멓게 죽은 시선이 내게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제가 요 수십 년간…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면서. 어떤, 어떤 마음으로 정용 님을 찾아다녔는데… 그런데 그런… 그런! 저는 역시, 정용 님한테 쓸모없는 존재일 뿐이었군요!”

×발, 미친년 널뛰기하듯 감정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곧장 손사래를 치며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 그게 아니고. 앞으로 너를 어떻게 써먹을지를 고민하는 것뿐이야! 급발진을 멈춰 제발!”

우선 양심 고백부터 하고 들어가겠다. 나 사실 쟤 이름도 까먹고 있었다.

한수호와의 전투로 수백 번의 전생을 거듭했고. 그 과정에서 꽤 많은 기억에 펑크가 났다. 잃어버린 기억 중에는 세스나의 이름도 포함이다.

내가 세스나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내게 다시 알려줬기 때문이다.

‘사실 내 기억이 펑크 난 건 세스나뿐만이 아니긴 한데.’

대표적으로 제논과 제나도 있지. 그들의 경우엔 이름과 죽을 때의 순간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가 그들과 함께 생활했던 기억은 일절 없었다. 그래서 내가 왜 그들의 죽음에 이렇게까지 가슴이 아픈 건지. 그것조차 어렴풋한 느낌으로밖에 안 남아있다.

‘또 누가 있더라.’

그 외에 할센베르크 변경백과 세트 메뉴였던… 하수도의 주인, 밤색 머리 메이드의 이름도 기억 안 나고.

나를 한 번 죽였던 하얀 머리 중년 남자와의 기억도 그렇고, 그녀의 딸인 카르할라스도 굉장히 어렴풋하게만 남아있다.

‘그나마도 그 사람들은 많이 남은 편이지.’

기억의 삭제는 대체적으로 최근의 것들부터 진행됐었다. 그래서 운터란트와 용제국의 기억은 정말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붉은 머리의 방독면 여자.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그녀의 기억이 좀 인상 깊게 남아있다.

거대한 대포 같은 걸 들고 싸우던 장면이 지금도 간간이 플래시백 된다.

‘아. 시체가 된 용가리와 싸웠던 것도 좀 기억난다.’

거기까지 상념을 마치고 다시 세스나를 흘깃 쳐다봤다.

여전히 무서운 눈초리. 날이 바짝 선 전기톱이 쉴 새 없이 윙윙 돌아가고 있다. 나도 모르게 식겁한 나머지 옥좌에 등을 바짝 붙였다.

‘쟤는 이름 다시 물어봤을 때도… 저런 반응이었던 거 같은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몇 년 전, 세스나가 나를 다시 찾아왔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세스나는 내가 이름을 기억 못 하는 걸 듣자마자 일단 충격먹은 얼굴을 했다. 털썩. 그 자리에 힘 풀린 듯 쓰러져 버렸다.

“역시, 저는… 그냥 짐짝에 불과했던 거군요. 제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시다니……!”

“응?”

“그렇게 떠나버리실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제가, 제가 그런 줄도 모르고, 이렇게… 수십 년이나 찾아 헤맸던 거였어요. 제가, 정말… 눈치도 없이. 바보같이!”

“어? 아니 잠깐만.”

그녀는 그때도 지금처럼 처연한 표정을 지었고. 곧장 전기톱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연신 외쳤다.

“아아, 그래요. 저는 이제 살아갈 이유를 완전히 잃었어요. 끈 떨어진 연이에요. 사랑과 인연의 종말이에요!”

“아니 세스나. 그런 말은 어디서 주워들었니?”

“그러면 정용 님. 최소한 저의 마지막 임종의 순간이라도, 당신의 기억 한편에 남는 것만은 허락해 주세요……! 맹독 수프를 마셔도 죽지 않도록! 으아아아!!!”

“아니 잠깐만 좀! 그게 아니라고 ×발!!”

그때 전기톱으로 자살하려는 세스나를 말리느라 굉장한 진땀을 뺐다.

내 기억상 세스나는 저런 막장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대체 무엇이 그녀를 시도 때도 없이 ‘훌륭한 대화수단’부터 꺼내는 체인소우 걸로 변신시킨 걸까.

“못 믿겠어요! 정용 님의 말도… 이제 정말 하나도 못 믿겠다구요! 흐흑!”

지금도 그렇다. 연신 전기톱을 위험천만하게 내 쪽으로 휘둘러 대며, 그런 말을 한다.

분명 내가 없는 사이… 어디서 쓰레기 같은 놈팽이한테 뒤통수를 많이 맞았던 것 같다.

‘쓰읍. 못돼 처먹은 새끼들.’

아무리 지금 바깥세상이 많이 흉흉하다곤 하지만 저런 착한 애를 속여먹다니. 개 같은 새끼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놈들은 혼쭐을 내줘야 해 아주.

…….

…….

왜.

뭐.

“오늘도 아주 시끌벅적하니 좋네요. 주변 배경이랑 안 어울리게.”

그리고 그 순간. 또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좀 멀찍이서 들려왔다. 실랑이를 벌이던 나와 세스나는 동시에 그쪽을 쳐다봤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반짝이는 어두운 금발이 눈에 밟혔다.

“최종 보스로서 체통을 좀 지켜보시죠?”

미네르바다. 그녀가 멀찍이서 별안간 나타나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곧장 반가운 체를 했다.

“똥털 어서 오고.”

내 인사에 미네르바는 곧장 똥 씹은 표정을 했다. 내가 그녀를 부를 때면 항상 저러더라.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기껏 이름도 다시 알려줬는데, 이쯤 되면 좀 이름으로 불러줄 때도 되지 않았어요?”

“이쯤 되면 그냥 애칭으로 받아들일 때도 되지 않았나?”

“…후우. 마음대로 하세요.”

그렇게 수십 년은 반복된 지겨운 대화를 끝내고, 나는 가까이 다가온 미네르바에게 곧장 본론을 꺼냈다.

아마 미네르바도 경과보고를 하러 온 것일 테니까. 서로 시간 낭비할 필요 있나.

“어때. 작업은 순조롭게 되고 있냐?”

작업. 다름 아닌… 내 옥좌의 다음 계승자를 선별하는 작업을 말하는 것이다.

미네르바는 여전히 불만 어린 얼굴을 하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대로 제법 성과가 나타나고 있어요. 일단은 베타 버전을 뿌려봤는데… 인기 면에서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네요.”

이 세계를 그대로 복사한 게임을 만들어 이세계에 배포한다.

그것으로써 전처럼 무식하게 용사 후보생을 마구잡이로 소환하지 않아도 되고. 각종 테스트를 통해 계승자의 적합성을 미리 알아볼 수도 있다.

그 계획에 따라서, 나와 미네르바는 그 게임을 내 고향… 대한민국에 배포했다.

“성능 확실하던데요? 당신이 만든 그 게임.”

미네르바는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대답해 줬다.

“당연하지. 누가 구상한 건데.”

“이제 곧 본격적으로 용사 후보생을 추려내는 작업을 할 생각인데… 게임이 정식 출시되고 어느 정도 추려지면. 그때 다시 알려드리죠.”

“그래, 그렇게 알고 있을게.”

문득 미네르바가 시선을 좀 멀리 던졌다. 나도 그녀를 따라 시선을 멀리 보냈다.

까마득한 어둠 너머. 폐허가 된 신성국 슈엘츠의 풍경이 어렴풋이 보이고 있었다. 시신의 악취가 여기까지 진동하는 듯하다.

“…당신은 보지 못하겠지만. 이 세상도 정말 빠르게,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어요.”

“그래, 세스나한테 대강은 들었어. 난리도 아니라지?”

“네, 그러니 게임이 정식 출시가 될 때면… 지금 베타 버전과는, 또 많은 것들이 변한 모습이 될 거예요.”

“그래. 그게 맞지. 최대한 비슷한 환경을 제공하는 게 계획의 핵심이니까.”

옥좌를 내가 찬탈한 이후, 파라이소 대륙은 격동의 시기를 맞이했다.

계승식 때의 마력 파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폐사한 건 그렇다 치는데. 그 폭주한 마력의 뒤틀림으로 온 대륙에서 기괴한 마수와 마족이 창조되고, 그들과의 전쟁으로 잔존 인류의 처절한 유년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용제국 케나인만 남고 나머지 국가는 다 망했다 그랬던가.”

“네, 당신이 이곳에 틀어박히기 전을 기준으로 하면… 남은 국가는 그것뿐이네요.”

“말세구만. 말세야.”

운터란트가 자랑하던 공중 요새, 레비아탄은 이미 추락해 버린 지 오래다.

미텔란트의 수도였던 마도 헬릭스가 마수들에게 거짓말처럼 함락되고. 칠마존은 모두 죽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마르크트레스는 기사의 나라답게, 끝까지 항전하다 수많은 카발리어들과 함께 조용히 멸망을 맞았다.

‘지금 사실상 대륙의 주인은 인간들이 아니라지?’

인간의 국가 중, 마수들에게 굴종한 용제국만이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 외에는 마수들이 제들끼리 세운 8개의 부족 국가. 그들이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 마수들의 억압을 물리치고. 이 대륙의 주인을 다시 인간으로 만든다. 게임 배경 시나리오로 꽤 괜찮지 않냐?”

그리고 그걸 위해 마수들을 물리쳐 그들의 힘을 흡수하고. 그들을 탄생시킨 만악의 근원… 최종 보스인 나를 죽인다.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이세계에서 소환된 주인공들이 모험을 떠난다.

지금 만들어지는 게임의 시나리오는 바로 그것이고. 이 파라이소 대륙이 앞으로 걸어갈 시나리오도… 곧 그렇게 되도록 만들 것이다.

‘다들 어떻게 됐을까.’

오랜만에 잠깐 감상에 잠겼다. 여러 얼굴들이 뇌리를 스친다.

할센베르크 변경백, 밤색 머리 메이드, 제논과 제나, 알드콘, 크라네이드, 그리고 스칼로까지. 이름만 기억나는 이도 있고. 얼굴만 기억나는 이도 있다.

‘누군가는 아직 살아있고. 누구는 이미 죽었고. 누군가는 마수들한테 죽었겠지. 그리고 누군가는 수명이 다 돼서 죽었을 거고.’

그리고 이런 생각을 뭉게뭉게 떠올릴 때면… 언제나 마지막엔, 하얀 머리칼을 늘어뜨린 붉은 눈의 여자 하나가 떠오른다.

수명이 다하든 마수한테 당하든 죽었을 리가 절대 없는. 절대로 잊지 못할 당당한 표정의 그녀가.

“…흐.”

이내 비릿한 조소가 흘러나왔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상념을 물렸다.

다시는 떠올리지 말자. 이젠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 그리고 상관이 없어야 할 사람들이다.

그렇게 결심했으니까… 지금 나는 이 옥좌에 앉아있는 것이다.

“실시간 업데이트 부분은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네. 전적으로 맡길게. 고맙다, 똥털.”

내가 솔직하게 감사를 표하자, 미네르바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이내 그녀가 고개를 픽 돌렸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린다.

“가, 갑자기 뭔. 저도 제가 편하고 싶어서 하는 짓일 뿐이니까… 김칫국 처먹지 마세요. 기분 엄청 나쁘네요.”

“그러십니까. 그런 걸로 합시다.”

나는 히죽거리며 미네르바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이내 손사래를 쳐 축객령을 내렸다. 미네르바는 여느 때처럼 슬쩍 고개를 숙이고 멀어져갔다.

그러다 덜컥. 어느 순간 미네르바의 발소리가 멎었다. 나는 슬쩍 시선을 들었다.

“왜. 뭐 할 말 남았냐?”

“음… 아뇨. 그게…….”

미네르바가 답지 않게 머뭇거린다.

뭔가 중요한 말이라도 하려나 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네르바를 주시했다.

그녀가 뭔가 결심한 듯 입을 다물더니, 이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 게임의 최종 보스 이름 말이에요. 진짜 그대로 할 거예요?”

“왜. ‘피에 젖은 달그림자’가 어때서?”

나는 순진무구하게 되물었고 미네르바는 굉장히 딱밤이 마려운 표정을 지었다.

이내 체념의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짜 미치겠네. 뭐 일단 알겠어요. 내가 나중에 알아서 바꾸든가 할게요.”

“바꾸지 마! 그거 내 아이덴티티야! 무조건 그걸로 해! 이미 대사도 다 구상해 놨다고!”

“네네. 개소리 수고하시고요.”

미네르바가 피곤한 얼굴로 피식 웃었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쏘아본 뒤, 다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이번엔 내 쪽에서 그녀를 잡아 세웠다.

“잠깐만 똥털. 다시 이리 와봐.”

“음? 왜 그러죠?”

“좀 시켜볼 게 있어서 그래.”

“주, 중요한 건가요?”

“어. 진짜 중요한 거야.”

미네르바는 의아한 탄성을 내지르면서도, 순순히 내 옆으로 쫄래쫄래 다시 날아왔다. 내가 워낙 진지한 얼굴이라 그랬을 것이다.

나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그녀에게 손짓했다.

“잠깐만 여기로. 세스나 반대편에 서봐.”

“어… 응? 이렇게요?”

“어어. 그래, 거기. 이제 옥좌에 손을 좀 기대봐. 자, 세스나. 시범을 보여줘.”

나는 옥좌에 이미 기대고 서있는 세스나를 가리켰다.

세스나는 내게 명령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기쁜지 연신 실실거렸다. 그녀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고. 내가 미리 주입시켜 놨던 자세를 실행했다.

“읏차. 전에 말씀하신 이거 말씀하시는 거죠, 정용 님?”

다리를 꼬고, 상체를 늘어뜨린다. 비스듬히 서서 옥좌 옆으로 팔을 살며시 얹는 세스나.

미네르바는 의아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세스나를 커닝하며 자세를 똑같이 따라 했다.

“이, 이렇게요?”

“음, 좋아. 지금 아주 좋은 느낌이야.”

아리따운 이세계의 두 여인네가 옥좌 양옆에서 기대고 서있다, 굉장히 뇌쇄적인 포즈로. 그리고 그 중앙엔 내가 앉아있다.

그래, 바로 이거야. 하렘 마스터이자 최종 보스만이 누릴 수 있는 이 구도. 이걸 원했다!

“이제 좀 최종 보스가 됐다는 실감이 나네.”

“……?”

미네르바는 연신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그런 주제에 여전히 최선을 다해서 포즈는 잡아준다. 얘는 진짜 나를 싫어하는 건가 좋아하는 건가. 이 아신의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무튼 똥털에게 이 자세를 잡게 만든 이유는 절대 비밀이다. 그녀가 알면 한동안 경멸의 눈초리로 업계 포상을 빡세게 받을 테니까.

…….

…….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와우. 오히려 좋아.

IF엔딩 (2) ― 최종 보스로 산다는 것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