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302화 (278/280)

302화. 외전 2―1. 엔딩 이후의 세계 [계승편]

파라이소 대륙의 북쪽 끝. 할센베르크 성.

2년 전에 이미 수도가 함락되어 버린 미텔란트의 최후의 보루. 미텔란트 잔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인 후줄근한 폐성.

그곳이 지금 역사적으로 유례없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기름을 부어라! 절대 올라오게 놔둬선 안 된다!!”

쿠르르르! 펄펄 끓는 기름이 성벽 아래로 쏟아진다. 성벽을 기어오르던 수많은 괴물 무리가 그것을 뒤집어썼다.

치지지직! 생살이 펄펄 끓는 끔찍한 소리와 단백질 타는 냄새가 올라온다.

“케에에에에엑!!”

비명을 지르는 건 인간을 닮은, 그러나 인간이 아닌 괴물들이었다.

전신을 뒤덮은 시커먼 털. 그리고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무정형의 질척한 무언가.

“그룩… 그루루……!”

“케에에엑!”

인간의 모양은 하고 있지만 그저 잠깐 빌린 모습일 뿐이다. 저것들은 원래 어떤 정형화된 모습도 취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이 세계의 선주종이었던 인간의 모습을… 어느 순간부터 흉내 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혐오스러운 괴물 놈들!!”

성벽 위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이 폐성의 성주. 할센베르크 변경백은, 그런 괴물들을 보며 씹어 뱉듯이 중얼거렸다.

콰앙, 콰콰쾅! 그 순간에도 여기저기서 마법의 폭발이 일어난다. 불꽃이 떨어지며 기름에 흠뻑 젖은 괴물들의 육체를 태워나갔다.

“에테르 볼케이노!!”

변경백도 지지 않고 괴물들을 향해 불벼락을 쏟아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발과, 땅에서 솟아나는 불꽃이 섞여 허공으로 치솟는다. 그야말로 불과 얼음의 춤이었다.

“크에에에엑!!”

수많은 괴물들이 성벽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 시체를 넘어, 또 다른 괴물들이 계속해서 성벽을 넘어온다.

괴물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점점 그 높이가 높아졌고, 괴물들이 성벽을 오르는 속도도 그만큼 빨라졌다.

“이런…! 끝이 없구나. 이 괴물놈들……!”

지평선 저 너머까지 바글거리는 괴물들의 군세. 변경백은 그것을 보고 질린 듯이 중얼거렸다.

‘이것이 정녕 여신의… 뜻이란 말인가.’

5년 전, 멸망의 성흔에서 수수께끼의 폭발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전세계의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다. 살아남은 이보다 죽은 이가 많을 정도로 끔찍한 재앙이었다.

동시에 이세계인… 과거 ‘용사’라 불렸던 족속들은, 이 세상에서 받았던 모든 힘들을 한순간에 압류당했다.

용사지원 시스템으로 얻었던 스킬도, 능력치도 없는… 날것 그대로의 이세계인들로 전락했다.

‘정녕 여신이 내리는… 시련이란 말인가!’

그리고 괴물들. 저 끔찍한 괴물들은 대폭발로 죽은 사망자들의 시신에서, 시커먼 마력이 꾸덕꾸덕 뭉치며 등장했다.

처음엔 하나, 그게 둘, 넷, 열여섯… 제곱수로 불어나 점점 세상을 뒤덮었고. 인간 이상으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악몽의 대폭발에서 살아남은 잔존 인류와 용사들을 습격했다.

“아니면 여신이… 정녕 이 세상을 버린 것인가.”

가장 먼저 미텔란트의 수도가 함락됐고. 운터란트가 자랑하던 공중 요새 레비아탄이 하릴없이 추락했다.

용제국과 마르크트레스가 힘겹게 버티고 있지만 그 끝을 누구나 다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 세상이 망하길 바라는 누군가의… 저주인가.”

이 괴물들을 총칭하는 명칭은 블랙타이드(Black tide).

누가 언제 지은 이름인지는 변경백도 모르지만. 이 광경을 보면 저절로 생각나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칠흑으로 꿈틀거리는 괴물의 홍수. 세상을 절망으로 뒤덮는 노도(怒濤)였다.

“케아아악! 크에에에악!”

“캬아아아악!!”

전선이 혼란스럽게 얽히고, 온갖 마법이 검은 파도를 향해 쏟아지던 와중. 블랙타이드의 군대가 어느 순간 찢어지는 괴성을 흘렸다.

끝내 괴물 한 마리가 성벽을 끝까지 기어올랐다. 퍼걱! 연노를 쏘던 병사의 머리를 우적 씹어먹었다.

“으… 어어어!!”

그 한 놈이 시작이었다. 꾸역꾸역, 무너진 방어선으로 괴물들이 우후죽순 올라온다.

우직, 빠드득! 괴물들이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며 전선을 붕괴시킨다. 인간들은… 그들의 앞에서 종잇장인 양 사지를 분해당하며 죽어나갔다.

“뚜, 뚫렸다! 놈들이 올라온다!!”

“으아아아아악!!”

비명, 그리고 또 비명.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조차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저 괴물들이 인간의 생살을 썰고, 씹어 넘기는 소리만이 연신 울린다.

변경백은 속절없이 학살당하는 자기 병사들을 보며 무력감에 떨었고. 이내 뼛속 깊은 절망을 느꼈다.

‘…끝이군.’

변경백은 검날보다 날카롭게 벼린 시선으로, 물밀듯 올라오는 괴물들을 눈에 담았다.

도주는 생각할 가치도 없다. 이 성안에는 미텔란트의 여러 도시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 성이 망하기 직전까지 함께해 줬던 레이라, 그윈.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두려움에 떨며, 변경백의 승전보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오늘 뼈를 묻는다.”

스르릉. 투박한 철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괴물들을 향해 달려들 준비를 했다.

원래는 훨씬 훌륭한 명검을 갖고 있었던 그였지만. 그것은 옛날, 죽어가던 이 할센베르크를 구해줬던 한 영웅에게 줘버렸다. 그 뒤로 영지 부흥에 힘을 쏟느라 아직 제대로 된 검조차 가지지 못했다.

‘자네가 살려줬던 목숨. 이제 다시 반납할 때인 것 같군.’

변경백은 뇌리 한편에 자리한 검은 머리의 이세계 청년을 떠올렸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우우우뤼이이이이!!”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괴성이 가까워진다.

하늘 위였다. 학살당하던 병사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학살하던 블랙타이드 군대조차 순간 하늘 위로 시선을 빼앗겼다.

콰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성벽 위로 무언가 떨어져 내려왔다.

“으, 어?!”

“저, 저, 저건……?!”

하늘에서 검은 유성처럼 추락한 그것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키가 최소 3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인. 얼굴을 비롯한 전신에 시커먼 거적때기를 두르고, 얄팍한 신체의 주요한 부위는 칠흑의 경갑이 감싸고 있다.

“그어어… 모가지 존나게 아프네.”

괴물이 중얼거리며 목을 연신 까딱거렸다.

그러자 훤히 드러나는 이빨. 안면부의 대충 두른 천 쪼가리 너머로 시커멓게 뚫린 거대한 입과, 그 안에 빼곡히 자리한 이빨이 보인다.

“어 ×바. 이렇게 등장하는 것도 못 해먹을 짓이네, 이거.”

기적이라 칭하기엔 좀 방정맞고. 빛보단 어둠에 한없이 가까운 무언가였지만.

적어도 변경백에게 한해서 그것의 등장은… 확실히 기적이었다.

“괴, 괴, 괴물……!”

“놈들의 우두머리인가?!”

병사들은 술렁거렸다. 그리고 숨을 죽인 채 공포에 차서 중얼거렸다.

변경백조차 마찬가지였다. 온몸을 딱딱하게 굳히고 나타난 괴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만 그가 놀란 이유는 괴물의 외형 때문이 아니었다.

“그, 목소리는……!”

일그러지고 뒤틀린 목소리였지만. 그 괴물이 낸 목소리가 자신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변경백의 외마디 중얼거림을 들었음인가. 괴물의 희번덕거리는 붉은 안광이 변경백을 향했다.

“…….”

“…….”

두 사람은 잠시 대치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괴물이 날뛰는 살육 현장 속에서, 마치 두 사람만 별세계에 떨어진 듯이.

이내 씨익, 괴물의 입이 괴기스럽게 비틀려 올라갔다.

“거 유감입니다. 제가 보고 싶었던 건 영지민으로 바글거리는 할센베르크였는데 괴물만 바글거리고 있으니.”

웃음기 어린 목소리. 변경백은 그 말로 확신했다.

외관은 괴물들보다도 더 괴물스러웠지만. 저 괴물의 정체는… 이 할센베르크를 절망에서 구해냈던 그 영웅이었다.

변경백은 먹먹한 마음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고, 이내 가까스로 말을 쥐어짜 냈다.

“자네… 어, 어떻게 이 시기에. 그런 모습으로. 여기까지 다시 찾아왔는가.”

그 말에 허수아비를 닮은 괴물은 변경백을 등졌다.

공허하게 대기를 진동시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책임을 지러 왔습니다.”

“…책임?”

“네, 책임.”

키이잉! 그의 양손에 달린 흑백의 손톱이 높은 금속음을 발한다. 한없이 날카롭고 길게 뻗어 나온다.

붉은 안광도 한껏 광기를 발하며 더욱 짙어졌다.

“사내새끼가 불알 달고 태어났으면. 내 선택에 책임은 지고 살아야죠.”

다음에 벌어진 일은… 변경백이 직접 보면서도 좀처럼 믿기지 않는 풍경이었다.

“키에에에엑!”

“께에에엑!!”

학살을 당하는 것은 오히려 블랙타이드 군대가 되었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검은 번개가 전장을 치달린다.

피처럼 붉은 겁화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 * *

세간에 한 괴물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돌았다.

절멸의 위기에 처한 인류의 보루에 혜성처럼(문자 그대로 하늘에서 추락해)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시커먼 허수아비 괴물.

혹자는 프로피샤 여신이 보내준 인류의 최후의 구원자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동족을 배신한 블랙타이드 군대의 일원이라 추측했다.

사실 그들이 뭐라고 얼마나 씨불이든. 정작 소문의 주인공… 한수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케이. 필요한 재료는 전부 모았고.”

그는 할센베르크 성 블랙타이드를 모두 쓸어준 대가로, 변경백에게 한 물건을 요구했다.

딱히 대단한 보화를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챙겨간 것은 각종 마법을 새길 수 있는 룬스톤들이다.

그것이 있을 만한 곳이 당장 할센베르크 밖에 생각이 안 났기에, 그들도 구해줄 겸 찾아갔던 것이다.

“좋아. 그럼…….”

한수호는 곧장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푸쉬익! 스케어크로우 변신이 풀리고 다크레이븐의 갑주가 둘러싸인다. 그는 곧장 날개의 마력을 분사해 하늘로 치솟았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정확히 남동쪽. 마르크트레스가 있는 방향이었다.

* * *

무신의 성전엔 더 이상 옛날 같은 고풍스러운 우아함이나, 웅장함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무너져버린 건물터와 불타 사라진 초목. 검게 그을린 땅 위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시체. 그것들을 치우기 위해 사제들과 병사들, 카발리어들이 분주하게 움직일 뿐이다.

“저, 저 괴물은… 대체.”

“왜… 우리를 구해준 거지?”

하지만 그 암담한 광경조차도 생존자들은 감사하게 여기는 중이었다.

방금 전 블랙타이드의 침공으로 모두 괴물들의 식사거리가 될 뻔했다. 마르크트레스가 오늘 지도에서 사라질 뻔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괴물들의 침공을 물리치고 살아서 숨 쉬는 이유는 모두 하늘에서 떨어진 새카만 허수아비 덕분이었다.

“오, 오랜만이네. 정용.”

새카맣고 거대한 허수아비… 변신한 박정용 앞에는, 한층 성숙해진 카르할라스가 서있었다.

여전히 길게 치렁거리는 은발. 그리고 자기 아버지를 꼭 닮은 은색 눈동자. 박정용은 그것을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괴물의 뒤틀린 웃음소리가 거적때기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고생이 많구나, 너도.”

카르할라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인 적랑은 마르크트레스의 블랙타이드 저항군의 심벌 같은 존재다.

이스그라드와의 혈전에서 적랑은 분명히 살아남았다. 그래서 딸과 함께 블랙타이드의 침공에서 선봉에 나서서 싸웠다.

하지만 결국 몇 년 전, 적랑은 블랙타이드와 맞서다 엘프리데와 함께 죽어버렸다.

“나는… 그냥 아버지를 열심히 흉내 낼 뿐이야. 대단할 것도 없어.”

카르할라스가 쓴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내 애써 밝은 표정과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아, 오랜만에 설백 씨나 세스나 씨도 보고 갈래? 다들 너를 엄청 보고 싶어 해.”

표정 연기가 옛날에 비해 몰라보게 발전했다.

박정용은 그것을 깨닫고 쓴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됐어, 인마. 걔네가 날 왜 보고 싶어 하는지 알아? 사지를 뽑아서 건강즙 달여 먹으려고 그래.”

“으, 응? 그, 그래?”

“말도 마라. 그리고 지금 이 꼬라지로 찾아가봤자. 걔네가 퍽이나 기뻐하겠다.”

박정용은 그 말과 함께, 일부러 입꼬리를 크게 비틀어 올렸다. 기괴한 허수아비의 면상이 일그러지며 광소를 자아냈다.

본능적인 공포감에 흠칫 몸을 물리는 카르할라스. 이내 격세지감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많이 변해버렸구나, 정용.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나도 몰라봤을 거야.”

“그럼. 존나 훤칠해졌지? 이제 키가 2미터인 여자가 고백해도 안심이다.”

“아… 하하하. 알맹이는 내가 알던 정용이 맞네.”

“당연하지. 내가 어디 가겠냐.”

카르할라스는 이내 거대한 자루를 박정용에게 넘겨줬다. 박정용이 이곳을 지켜준 대가로 요구한 물건들이었다.

뭔가 대단한 금은보화나 생필품이었다면, 아마 카르할라스는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저… 정용. 근데 그것들은 어디다 쓰려고 그래?”

하지만 카르할라스는 결국 의문을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

그가 요구한 물건들이, 그런 대단한 것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

박정용은 다크레이븐 폼으로 하늘로 날아오를 준비를 하던 차에 우뚝 멈췄고. 카르할라스를 멀거니 돌아봤다.

이내 씨익, 특유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세상의 멸망을 막는 데 써야지.”

* * *

그래서 박정용이 가져온 ‘이 세상의 멸망을 막는 데 쓸 물건’의 정체는 무엇인가?

다름이 아니고 폭죽이었다.

“오케이. 이걸 이제, 기폭 마법이 적용된 룬스톤에 연결하면 된다 이거지……?”

마르크트레스의 무신제가 끝나면 항상 화려하게 터뜨리던 그것.

무신제는커녕 국가 존폐 위기에 처한 마르크트레스에겐 이제 아무 짝에 쓸모없는 악성 재고들. 박정용이 받아온 건 그것들이다.

“야, 루시. 나 왔다.”

룬스톤과 결합된 마법 폭죽을 한 아름 들고, 박정용은 다시 멸망의 성흔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박정용이 승강기를 타고 공중 정원에 발을 딛는 순간. 그의 복부로 새하얀 발 두 개가 쏜살같이 꽂혔다.

“기하학!”

불의의 드롭킥이었다.

박정용은 공중정원에 쌓인 해골 더미 위로 한참을 데굴데굴 굴렀다.

“용사아아! 왜 이렇게 늦게 온 게야!”

쿠당탕! 자빠진 박정용 위로 덥석 올라탄 새하얀 신형이 노발대발 외쳐댄다.

루시였다. 전 불사의 마왕이자. 지금은 이 파라이소 대륙의 멸망을 온몸으로 막는 세계의 유지자.

그녀가 박정용의 멱살을 쥐어 잡고 마구마구 뒤흔들었다.

“잠깐이라며! 잠깐만 나갔다 온다 해놓고! 2주일이나 소식도 없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루시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연신 호통을 쳤다.

잔뜩 찌푸린 표정에서 엄청난 분노가 느껴졌고. 그 뒤에 숨은 지독한 외로움도 박정용은 느낄 수 있었다.

“아, 그럼 어쩌냐. 세상이 요지경이라 룬스톤이나 폭죽 구하기도 쉽지가 않아요. 미텔란트랑 마르크트레스를 왕복해서 간신히 구했다니까.”

그래서 평소처럼 볼을 꼬집거나, 뿔을 잡고 머리를 뒤흔들지 않았다.

자연스레 쓴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계승식 여파로 생긴 괴물들이 생각보다 더 거세서 말이야. 그것들도 좀 막아주고 왔어. 어쩔 수 없었으니 이해 좀 해달라고.”

실제로 약속했던 시간보다 훨씬 늦게 온 것은 사실이다. 그는 나가기 전에 1주일 안에 돌아올 것을 약속했었다.

하지만 박정용이 아무리 해명해도 루시의 화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박정용은 결국 능글맞게 웃으며 장난을 쳤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냐? 이제는 박정용 님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어?”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무, 무슨 헛소리냐 그게! 나, 나는 그냥 네놈이 가져올 불꽃놀이가 기대됐을 뿐이다!”

“어 그래. 그런 걸로 하자.”

말로는 실랑이를 벌이면서도. 박정용은 손을 바쁘게 놀려 불꽃놀이를 발사할 준비를 착착 끝마쳤다.

룬스톤을 결합한 불꽃 발사대 수십 개가 뼈 무덤 위에 나란히 정렬했다. 이내 박정용은 룬스톤에 일제히 마력을 주입했다.

“그럼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 마음껏 즐기십쇼, 마님.”

한수호의 나직한 한마디.

동시에 피피핑, 어두운 하늘로 오색의 불꽃이 긴 꼬리를 물고 치솟았다.

그리고 퍼펑! 퍼버벙! 일거에 폭발한다. 어둠으로 잠긴 해골의 숲이 일순간 갖가지 빛으로 알록달록하게 물들었다.

“…와아.”

그리고 루시는 그 모습을 넋 나간 채 지켜봤다. 자신이 화를 내고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몰입한 듯하다.

박정용은 멍하니 풀린 루시의 표정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라면 분명 좋아할 줄 알았어.”

박정용은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루시는 연신 폭발하는 불꽃놀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되물었다.

“…응? 좋아할 줄 알았다니. 무슨 의미냐 그건?”

“아냐. 아무것도.”

“허어. 싱거운 놈 같으니라고.”

박정용이 다음 불꽃의 발사를 준비하던 그 순간, 어떤 기억 하나가 박정용의 뇌리를 스쳤다.

마르크트레스에서 그녀와 함께 봤던 불꽃놀이. 그것에 대한 기억이었다.

‘…아?’

분명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기억이었는데. 아무래도 비슷한 상황이 와서 떠오른 모양이다.

박정용은 피식 웃으며 루시의 뒤통수를 가만히 쳐다봤다.

‘너도 그때… 이런 기분이었냐, 한수호.’

그 기억을 까맣게 잊고 있었음에도 박정용은, 루시가 불꽃놀이를 좋아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은 방을 빼버린, 이 화원의 전 주인도 이걸 가장 좋아했으니까.

IF엔딩 (1) ― 불꽃을 물고오는 까마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