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외전 1―23 메모리 오브 위치 (完)
한수호가 자리를 비우는 시간은 점점 더 많아졌고. 길어졌다.
디아나는 갈수록 극심해져 가는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느라, 한수호의 사정을 헤아릴 수 없었다.
“…….”
그저 원망스러웠다.
자기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태평하게 밖으로 놀러 다니는 그가 밉고 증오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좋아했던 불꽃놀이도 더 이상 그녀의 고통을 중화해 주지 못했다.
“아빠, 요즘 밖에서… 대체 뭐 하길래 이렇게 늦어?”
그래서 결국 그런 말을 해버렸다. 뱉은 직후에 후회했다.
아빠가 나한테 안 좋은 일을 하고 있을 리도 없는데. 내가 힘들다고 아빠를 원망하는 말을 해버렸다. 그런 자괴감이 디아나를 괴롭혔다.
“…그래. 슬슬 알려줄 때가 오긴 했지.”
“어, 뭐?”
“뭐 좋아. 이제 점점 숨기기도 힘들어지던 참이었으니. 마침 잘됐어.”
그런데 한수호는 그런 말로 서두를 끊더니. 체념의 한숨을 길게 흘렸다.
그리고 점점 잦아지던 외출의 진상을 밝히기 시작했다.
“내가 옛날에 했던 말 혹시 기억해? 이 세상에…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있다고.”
“응… 그, 그랬던 것 같기도 해.”
“그 자연재해가 뭐냐 하면. 이상한 괴물 같은 것들이 소환되고 있다는 거야. 사실 지금까지도 그것들을 대처하느라 밖에 나갔던 거고.”
“괴, 괴물? 그, 재앙의 괴물 같은 거?”
“그래, 그런 거.”
갑자기 괴물이라니. 전혀 예상도 못 한 진상이었다.
디아나는 당연히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가, 갑자기 괴물이라니. 무슨 괴물?”
하지만 한수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다.
“글쎄… 무슨 괴물일까.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그리고 조금 아리송한 말을 내뱉었다.
게슴츠레하게 뜬 한수호의 눈. 그 눈동자 안에는 디아나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 괴물은 아무 전조도 없이… 갑자기 허공에서 태어나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박살 내버려. 생긴 것도, 가진 힘도 천차만별인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
“고, 공통점?”
디아나는 한수호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숨을 삼켰고.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애써 잠재웠다.
그리고 한수호는 계속 말했다.
“디아나, 그 괴물들은 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인간들의 형상을 띠고 있어.”
“…아?”
“얼마 전에 말이야. 옛날에 분명 내 손으로 죽였던 발키레아 기사단장 놈을 만났다. 괴물로 다시 태어난 그놈을 내 손으로 다시 죽였는데. 인생사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야.”
“아, 아빠. 그게 대체 무슨?”
디아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얼빠진 탄성을 흘렸다.
그러자 한수호는 낮은 한숨을 삼키더니. 그녀가 이해하지 못한 현실을 알기 쉽게 풀어줬다.
“아신들에게도 몇 번 괴물의 정체에 대해 물어봤는데, 걔네가 추측하기론 네 육체가 계승 마법을 완벽하게 견디지 못하니까… 그 여파로 생겨나는 괴물들이래.”
다시 말해, 지금 바깥세상에서 무차별적 파괴를 일삼는 괴물은… 다름 아닌 디아나가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소리다.
“…그, 그… 그렇, 구나.”
디아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이해했지만 자기가 이해한 것이 거짓말이길 바랐다.
“사람들은 그 괴물들을 보고 ‘마왕’이라고 부르더라.”
그녀의 기대와 달리 한수호는 농담 선언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담담하게 진실을 주워섬겼다.
“소환된 이세계인들을 용사라고 부르고 있었으니까. 비슷한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그것들을 마왕이라고 부르는 거겠지.”
이계인들은 인간 편이니까 용사. 그런 그들과 적대하는 괴물들은 마왕.
그런 단순한 공식으로 붙은 명칭이었다.
“뭐, 우스운 일이야.”
디아나와 한수호에겐 좀 웃긴 소리였다. 그들에겐 ‘마왕’이란 단어에 나쁜 이미지보다 좋은 이미지가 훨씬 많이 박혀있으니까.
게다가 지금 대륙을 차지한 네 나라의 근간을 만든 건, 다름 아닌 최초의 마왕과 그 부하들이다. 아이러니한 상황에 디아나도 헛웃음을 질질 흘렸다.
“그런데 그 괴물들이 최근 들어서 점점 강해지고… 또,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어. 그래서 용사 지원 시스템 같은 것도 만들게 된 거지.”
“…아.”
그 이유는 디아나 본인이 가장 잘 안다.
본인의 문제였다. 점점 힘이 빠지고 쇠락해가는 육체. 그 때문에 마법진의 부하가 점점 더 견딜 수 없게 된 것.
아무리 봐도 그것 때문이었다. 시기가 너무 적절해서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헥터랑 따까리 새끼들이 용사들과 연합해서 잘 막아주고 있었어. 그래서 내가 밖으로 나갈 일도 적었거든.”
“아아. 아아아…….”
디아나는 뒤늦은 깨달음의 탄성만 계속 흘렸다. 멍한 눈으로 한수호를 빤히 주시했다.
거기서 한수호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헥터 이 십새끼가 별안간 회까닥 흑화해 버렸어. 마왕 사냥은커녕… 네가 소환했던 루스티카나 아스타르트를 이상하게 개조시켜서, 사람들을 학살하도록 만들기까지 했다고.”
“그, 그럴… 수가.”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디아나는 무릎을 둥글게 말고 거기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끝으로 연신 훔쳤다.
한수호는 풀죽은 디아나의 모습에 인상을 바짝 찌푸렸지만 이내 침잠한 목소리를 계속 냈다.
“세간에는 이미 루스티카와 아스타르트도 다른 마왕들과 똑같은 괴물 놈들로 알려졌어. 네가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든 세계 멸망의 첨병이라나 뭐라나. 불사의 마왕이니, 청염의 마왕이니 하는 이명까지 생겼더라.”
마왕의 유래까지 왜곡시키는 건 아신과의 거래 내용에 없었다.
그러니 이건 아신들이 조작한 소문이 아니다. 자연적으로 인간들 사이에 그런 소문이 발생한 거다.
이미 세간에선 절대 악이 되어버린 마녀 디아나다. 그 때문에 마왕 발생에 대한 무수한 썰이 오가는 와중. 가장 신빙성 있는 가설로 그것이 채택된 것뿐이다.
“아닌데… 그, 그런 거 아닌데. 너무해……!”
하지만 이 모든 비난들은 디아나 본인이 감수하기로 각오한 것들이다. 그러니 괜찮다. 괜찮아야 한다.
디아나는 이를 악물고 자기최면을 걸었고. 억지로 눈물을 멈췄다.
“…….”
그리고 그런 디아나를 무섭도록 무표정하게 쳐다보던 한수호.
이내 특유의 억지로 지은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뭐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다 수습하고 있어.”
한수호가 태연자약하게 말을 이었다.
어깨를 연신 으쓱이고, 입가에는 시니컬한 미소가 걸려 있다.
“나타난 마왕들도 전부 순조롭게 사냥하고 있고. 아스타르트는 희생이 좀 컸지만 일단 제압됐고.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에게 걸린 정신 지배 마법은… 아신들도 좀 풀기 어렵다 하던데. 내가 아신들이랑 계속 대책을 강구하고 있으니 조만간 어떻게든 될 거다.”
혹자는 병 주고 약 주는 거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만. 어쨌든 한수호는 모든 사실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디아나 앞에서 말해주고 있었다.
다만 처참한 거짓말 실력 때문에 보는 디아나가 괴로운 것이 문제다.
“헥터 이 십새가 워낙 교묘하게 움직여서 좀 힘들지만. 그 새끼 꼬리도… 언젠간 잡을 수 있을 거야.”
바깥의 상황이 생각보다 처참하구나. 디아나는 한수호의 표정에서 그걸 읽어버렸다.
한수호가 나름 숨긴다고 숨긴 감정이 디아나에겐 훤히 읽혔다. 이 정도로 디아나가 읽어낼 정도면, 어지간히 연기를 못 하는 거다 한수호.
“이해가 안 돼……. 헤, 헥터 아저씨가 왜? 말이 안 되잖아. 착한 헥터 아저씨가 왜 그런 짓을… 한다는 거야?”
디아나가 벌벌 떨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든 한수호의 얘기를 부정하고 싶다는 듯이.
하지만 한수호는 평소처럼 실실 웃으며 맞장구쳐 주지 않았다.
“그 개새끼는 네가 후계자 없이 죽어버리길 바라고 있다, 디아나.”
순간 디아나는 발밑이 아득하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허우적댔다.
“…내가, 죽기를?”
“그래. 세계의 유지자인 네가 이대로 죽어서 사람들이 죄다 뒤져버렸으면 좋겠대. 옛날… 계승식 때를 재현하고 싶은 거지.”
디아나는 잠깐 동안 입을 콱 다물고,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내 중얼거리는 디아나의 목소리에는 깊은 증오와 원망이 서려있었다.
“왜, 왜! 우리가… 내가 어떻게,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해서 살려낸… 소중한 사람들인데…!”
“전쟁, 폭력, 살육, 약탈. 힘든 시기면 당연히 일어나는 일들인데, 멸망 직전까지 간 이후로도 발전이 없는 사람들 꼬라지에 환멸을 느꼈대.”
“……!!”
“옛날에 너도 그랬잖아. 루스티카 하나 때문에 신성국을 멸망시키려 했었잖아. 그러니까 뭐, 대충 기분은 이해하지?”
한수호는 디아나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지막 한마디를 붙였지만 역효과였다. 디아나는 격렬하게 밀어닥치는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것을 한수호도 뒤늦게 깨달았는지, 애써 뒤늦은 수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 새낀 사실 계승식 때 이미 노망이 난 거야. 그런 정신병자 새끼 깊게 신경 쓸 필요 없어.”
사실 ‘노망’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좀 어폐가 있다.
한수호는 계승식 당시 사람들이 떼죽음당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다. 게다가 이미 흉마 중독으로 감정이 마멸될 대로 마멸되었기에, 봤어도 큰 감흥은 없었을 거다.
하지만 헥터는 세계 인구의 9할가량이 일거에 폐사당하는 지옥도를 눈앞에서 체험했다. 그러니 그때 이미 미쳐버렸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좀 늦게 벽에 똥칠하는 거지. 병신 같은 새끼. 언젠가 내가 죽여버리고 만다.”
물론 그런 자잘한 사실은, 한수호에게 일말의 고려 대상도 아니다.
“내 손으로 안 되면 불사의 마왕 수호자… 까마귀의 손을 빌려서라도. 반드시 요절을 내버리겠어.”
인간 1억 명을 학살한 괴물이라도 디아나에게 우호적이면 절친이고. 1억 명을 살린 대천사라도 디아나에게 적대적이면 개새끼에 불과하다.
그러니 헥터 카사스는 한수호에게 있어서 이미 철천지원수일 뿐이었다.
“아빠, 우리가… 내가, 잘못된 거야?”
디아나는 한수호에게 지금과 똑같은 질문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사실 한수호가 어떤 대답을 할지 이미 알고 있다. 그는 언제나 디아나의 편이니까. 디아나가 듣고 싶은 그 말을 해줄 것이다.
하지만 알아도 듣고 싶다. 한수호의 입으로, 지금 그 말을 듣고 싶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디아나.”
역시나 한수호는 디아나의 기대대로 말해줬다.
디아나는 그 말 한마디로 안심했다. 온몸을 쥐어짜던 불안과 공포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네가 잘못됐다고 말하는 새끼가 있으면 내가 전부 죽여버릴 거다. 세상 모두가 너한테 손가락질해도 나는 너를 지킬 거야.”
하지만 이어진 그 말에서는 다시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한수호의 눈에서 얼핏 비치는 끈적한 광기. 그것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디아나. 아직 소환되지 않은 나머지… 샤키엘과 자드키엘은 말이야. 좀 더 방비를 철저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또 헥터 새끼가 무슨 개짓거리를 벌일지 몰라.”
“응… 알았어. 아빠.”
한수호의 진지한 표정에 디아나는 퍼뜩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워낙 가벼운 사람이다 보니 그답지 않게 진지해지자 심각성이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다른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면 되겠지?’
그래서 디아나는 샤키엘과 자드키엘에겐 각기 다른 방식의 안전장치를 걸어 탄생시켰다.
샤키엘 쪽은 개체 수를 왕창 늘려서 군체 생물을 만들어 버린 뒤, 다른 생명체에 기생하는 방식으로 존재 자체를 은닉시켰다.
반대로 자드키엘은 단순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 결계를 두르는 것으로 대처했다.
‘제발 무사히, 의식이 완성되길.’
그리고 디아나가 먼저 샤키엘을 세상에 탄생시킬 때쯤.
한수호는 이미 디아나의 옆에 없었다.
“아빠… 보고 싶다.”
파지지직!
디아나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면서도, 자기 팔뚝보다 굵직한 흑색 창을 소환했고. 그것을 자기 몸에 힘껏 박아 넣었다.
우지직. 디아나의 온몸에 엄청난 격통이 치달리며 검은 눈물이 쏟아진다. 아찔한 신음이 퍼석하게 갈라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크, 아흣……!”
고통이 쏟아지자, 불안정하게 미쳐 날뛰던 마법진의 마력은 오히려 안정화되었다.
이젠 이런 식으로 물리적 고통을 직접 주지 않으면. 마법진의 유지조차 불가능한 지경이다.
어느새 그녀의 육체는 그 정도로 한계에 이르렀다.
‘나도 곧, 죽는구나. 이제야 죽을 수… 있겠구나.’
임계가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앞으로 오래 버텨봐야 100년. 그러니까 그 안에는 반드시… 나머지 자드키엘 소환까지 끝내고 계승 의식을 완성해야 한다.
‘아빠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빠. 한수호는 얼마 전, 자기 의지로 베스타크에 의식을 봉인시켰고. 육체를 버렸다.
자기 육체를 유지하는 데에도 디아나의 마력이 상당히 드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디아나, 나한테 쏟는 마력을 전부 거둬. 그리고 나를 이 검에 봉인시켜줘. 네 아빠로서, 마지막으로 부탁한다.”
조금이라도 디아나가 오래 살았으면 한다.
그래서 한수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죽음을 택했다.
“반드시 나는 여기로 돌아올 거야. 계승 준비를 끝낸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랑. 그녀의 수호자 놈팽이를 데리고 꼭… 다시 여기로 돌아올게.”
한수호는 베스타크에 봉인되기 전, 자신이 전해 들었던 루나의 예언을 디아나에게도 말해줬다.
루나가 이미 계승의 성공을 예언했다. 그러니 반드시 해낼 수 있다. 걱정할 것은 전혀 없다. 공허한 호언장담을 줄기차게 늘어놓았다.
“나는 불사신이야. 너의 용사님이다. 내가 정의고 불가능은 없어.”
그 뒤엔 이런 말을 같이 남겼다.
“그러니까… 나를 믿고 기다려줘, 디아나.”
믿는다. 전적으로 믿는다.
아무런 장담도 필요 없었다. 한수호의, 용사님의 믿어달라는 부탁 하나에 디아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드키엘을 탄생시켰을 때쯤. 이미 디아나에게선 사람의 형체조차 거의 남지 않았다.
퍼석.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피부가 부서진다. 시체에 가까워진 육체에선 끊임없이 썩은 내가 풍겼고. 그것에 꼬인 수많은 벌레가 살갗의 안팎을 스멀스멀 기어 다녔다.
“새액. 색…….”
아빠를 부르고 싶은데. 목소리조차 안 나온다.
가까스로 입을 벌리면 무수한 벌레 사체들만이 우수수 쏟아진다.
‘아빠…….’
눈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백내장 환자처럼, 어딜 봐도 흐릿하게 어두운 세상만이 가득하다. 가끔 각막 안팎으로 기어 다니는 벌레들의 형상만 얼핏 보인다.
그것은 까마득한 미지와 공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빠, 기다릴게… 무슨 일이 있어도. 아빠가 다시 올 때까지 나, 버티고 있을게.’
그저 아빠가… 그리고 불사의 마왕과 함께 온 수호자가 자신을 죽여주기만 바라면서.
미치도록 보고 싶은 사신의 행차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 * *
시간 개념마저 아득해지는 고통의 굴레.
숨쉬기조차 힘든 무거운 적막 속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디아나. 정말 오랜만이다.”
이미 청각조차 거의 퇴화해 버린 육체였건만 그 목소리만큼은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빠. 아빠다. 아빠의 목소리다.
“아… 아아.”
디아나의 눈앞으로 두 사람의 신형이 어른거렸다. 디아나는 참을 수 없는 격정에 차서, 고통도 잊은 채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아빠에게 반갑다고, 어서 오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서걱. 직후에 디아나의 목으로 섬찟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불사의 마왕 수호자 박정용이, 베스타크로 디아나의 목을 잘라버린 것이다.
“아아아아아아!!”
디아나는 그 순간. 격렬하게 쏟아지는 고통 속에서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다.
얼굴조차 보지 못한 누군가. 아마도 루스티카의 수호자. 이 지옥에서 해방시켜 준 그에게 속으로 한없는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디아나는 재차 선명한 목소리를 들었다.
“이젠… 편히 쉬어라. 뒤는 전부 나한테 맡겨.”
왜일까. 평소처럼 듬직하고, 장난기가 어린 한수호의 목소리인데.
거기서 디아나는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오는 광기를 느꼈다.
“내가 끝내줄게. 전부 다.”
안 돼, 아빠. 나는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그러니까 제발.
‘슬퍼하지 마. 응?’
아빠는 충분히 노력했어. 이제 나랑 같이 쉬자, 제발.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필사적으로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하지만 잘린 목 위로는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까마득한 추락감이 최후로 닥친다.
마녀 디아나의 길었던 여정은, 그렇게 암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