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외전 1―22. 메모리 오브 위치 (22)
디아나와 한수호는 20년 만에 만나서 여러 얘기들을 했다.
디아나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20년을 지냈기에, 대부분의 대화는 한수호의 일방적인 근황 토크로 진행되었다.
“망한 슈엘츠가 지금은 멸망의 성흔이라고 불리더라, 디아나.”
“흐음, 그렇구나. 근데 그게 무슨 뜻이야?”
“…어, 뭐, 그런 게 있어. 대충 좋은 뜻이니까 몰라도 돼.”
“그래? 히히, 알았어. 아빠가 몰라도 된다면 그런 거겠지.”
디아나는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한수호가 두서없이 주절대는 모습을 보며 전에 없이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나는 이렇게나 아빠에게 의지하고 있었구나. 그것을 새삼 느끼는 디아나였다.
“20년 동안 나는… 헥터랑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었어.”
“여러 가지? 무슨 일을 했는데?”
“내가 그래도 꼴에 용사잖냐. 멸망 직전까지 간 세상 다시 일으킨다고 고생 좀 하고 있다. 새마을운동 빡세게 돌리는 중이야.”
한수호는 허공에 대고 삽질하는 시늉을 한다. 새마을운동이 뭔지도 모를 이세계 지옥 소녀한테 저런 소리는 왜 하나 모르겠다.
역시나 디아나는 뭔 소린지 1할도 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냥 좋아서 헤벌쭉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와아… 히히, 역시 아빠야. 대단해!”
“뭐, 정체를 숨겨야 하는 게 좀 힘들긴 하지만, 나름의 보람은 있어서 할 만해.”
“응? 정체를 숨겨? 왜?”
“디아나, 너랑 내가 지금 세간에 어떻게 소문이 도는지 알아?”
당연히 알 턱이 없다.
디아나는 30년 전부터 여기 공중정원에 틀어박혀 있었고, 그나마 최근 20년 동안은 근황을 전해주던 한수호조차 없었으니까.
아리송한 표정의 디아나에게, 한수호의 시니컬한 웃음이 날아왔다.
“세상을 멸망시키려 한 불사의 마녀 디아나. 그리고 그 하수인, 배신자 용사 한. 그게 지금 우리 입장이야, 디아나.”
“불사의… 마녀?”
“그래, 멋진 타이틀 축하한다. WWE 우먼 매치 나가면 되겠다, 야.”
대폭발 이전에 타국으로 이주해 살아남은 슈엘츠 난민들이 내는 소문. 거기에 원래 두 사람이 가지고 있던 악명이 더해진 결과였다.
20년 전 대폭발은 디아나가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일으킨 것. 그리고 한수호는 디아나의 야욕을 돕기 위해 그녀를 지킨, 희대의 배신자 용사가 된 상태였다.
“지금 사람들은 옛날처럼 맹목적으로 여신을 믿지 않아. 그 자리는 아신이라는 놈들이 꿰찼어.”
“아신? 아신이라면…….”
“그래, 전에 우리한테도 한번 찾아왔지, 그 개띠꺼운 똥색 머리 년.”
그 아신들이 한수호와 디아나에게 악당 프레임을 일부러 씌운 것도 있다.
그리고 사실 한수호는… 암묵적으로 그 판단에 동의했다. 배신자 칭호는 상호 합의하에 씌워진 프레임에 가깝다.
“너랑 떨어져 있는 사이. 그년이 나를 한번 더 찾아왔거든.”
아니, 사실 암묵적이라는 것도 어폐다.
한수호는 디아나와 떨어져 있던 20년 사이 미네르바와 다시 만났고, 직접 담판을 맺었다.
한수호는 그것에 관련한 얘기도 천천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일단 여신이 죽었다는 건 철저히 비밀에 부치기로 했어.”
한때 프로피샤 여신은 이 세계 모든 인간들의 사고 근간이었다.
아무리 끔찍한 재앙이 있었다 한들, 사람들의 인식 기저에서 여신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천동설 믿는 사람들한테, 다짜고짜 지동설 뿌려봐야 의미가 없다, 이거야.”
그러니 여신 따윈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고 밝혀봤자 역효과다. 혼란한 군중들이 믿을지 아닐지도 미지수일뿐더러. 멸절 직전까지 몰린 인류에게 혼란만 부추길 뿐이다.
이상한 세기말 사이비 종교 같은 거나 횡행하겠지. 내가 운터란트에서 박살 냈던 구원천사교인가 그것처럼.
“대신에 사람들의 원망을 짊어질 대상을 만든다. 그게 계획의 핵심이거든?”
회사 생활, 군 생활 해봤으면 안다.
자고로 인간이란 공공의 적이 있을 때 가장 잘 뭉치도록 설계된 족속이다. 뒷담화로 씹을 만한 개새끼를 하나 심어놓으면, 그 집단의 결속력이 극대화가 된다.
도의적으로는 몰라도 성능은 확실하지.
“실제로 그 덕에 재미 좀 봤어. 살아남은 네 나라 사람들이 훨씬 빨리 결속됐거든.”
하지만 아무리 결속해 봐야, 그들의 힘만으로는 국가 재건에 한계가 있었다. 불과 수십 년 전의 슈엘츠 성국 수준까지 구축하는데도 수백 년은 걸릴 정도다.
계승 의식에 따른 대폭발로 확실히 인류는 쇠퇴했다. 미국의 모 국방장관 말마따나 석기시대 수준으로 괴멸당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소리다.
“그래서 그 부분은… 아신들이 또 다른 방침을 냈어.”
현재 아신들은 세계 곳곳에서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인류 구제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금도 수많은 이세계인들이 용사랍시고 계속 소환되고 있어.”
그리고 그들이 내놓은 상황의 타개책은 바로 용병 전략. 인류의 숫자 자체를 충원하는 것.
어디에서? 이세계에서.
“헤에, 용사님? 다른 세계에서? 아빠처럼 말이야?”
“그래, 아신들이 네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대량으로 소환하고 있지. 다름 아닌 네 소환진을 참고한 모양이야, 디아나.”
“와아, 그래? 헤헤.”
“출세했구만, 이 녀석.”
물론 그들의 소환 목적이 단순히 부족한 머릿수 채우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용사들이 우후죽순 소환되기 시작한 이유는 굉장히 복합적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선 한수호는 말을 좀 아꼈다.
“그… 좀, 안 그래도 힘센 사람이 많이 필요할 일이 생기고 있거든. 자연재해 같은 게 자꾸 일어나서.”
“자연재해……?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응? 심각한 거야?”
“아냐, 그건 알 거 없고. 괜찮으니까 넌 신경 쓸 거 없어.”
한수호는 ‘자연재해’의 정체를 노골적으로 디아나에게 숨겼다.
디아나는 그 행색에서 원인 모를 꺼림칙함을 느꼈지만, 일단 지금은 넘어가기로 했다.
“으응……? 아, 알았어. 아빠가 그렇다면야.”
그런 직감 따위로 한수호와의 재회를 망치긴 싫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수호의 목소리가 한층 진지하게 잠겼다. 신난 디아나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디아나, 너한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 들어줄래?”
“응? 부탁할 거? 말해 봐봐.”
디아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믿음직한 눈빛을 한수호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한수호는 유난히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천천히 용건을 말했다.
“시스템을 구축하는 거야. 소환된 이세계 사람들… 용사들이 좀 더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용사를 지원하고 육성하는 시스템을 말이야. 이름하여…….”
용사 지원 시스템.
내가 미미르의 눈으로 주야장천 봐왔던 바로 그 패널. 그 근본이 되는 시스템의 등장이다.
“용사를 지원하는… 헤에, 그거 좋네!”
디아나는 한수호의 그 말에 섞인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했다.
용사들이 좀 더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말인즉슨, 지금 소환된 용사들은 엄청나게 죽어 나가고 있다는 소리다.
‘역시 아빠야. 아빠는 진짜 용사님이야!!’
눈치가 빠른 디아나지만 간파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한수호와 재회한 기쁨 때문이다. 그 들뜨고 신난 기분이 디아나의 날카로운 감각도 이성도 전부 무뎌지게 했다.
“어떻게 만들 건지, 같이 구상해 보자. 우선 가시성 면에서 말인데…….”
“응, 으응.”
디아나는 그 뒤로도 한수호의 설명을 진득하니 들었고, 이내 설명이 끝난 뒤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맡겨줘, 아빠! 아빠 부탁이면 뭐든 들어줄 거야! 히히.”
그렇게 용사 지원 시스템은 디아나의 손에 구축되었다.
한수호는 그것을 아신 미네르바를 불러들여, 그대로 넘겨줬다. 미네르바는 새삼 놀랍다는 얼굴로 한수호를 쳐다봤다.
“오호, 이건 제법… 체계적이군요. 당신이 전부 구상한 건가요?”
“그럴 리가. 내 원래 세계에 있던 것들을 최대한 따라 해본 것뿐이다.”
“흐음, 뭐, 어쨌든 좋아요. 충분히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으니, 이번 한 번만은 서로 협력하죠.”
“그래, 그렇게 하자고.”
미네르바는 사신 자매들을 불러왔다. 그리고 며칠에 걸쳐 허공에 손을 몇 번 휘둘렀다. 그것만으로도 용사 지원 시스템 관련한 마법을 전 대륙에 걸쳐 구축했다.
디아나가 세계급 마법을 구축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그것을 생각하면 허탈해질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라는 것이 실감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파라이소 대륙은, 게임 같은 시스템이 지배하는… 이세계인들의 사육장이 되었다.
* * *
그렇게 수많은 시간이 또 흘렀다.
10년, 50년… 어쩌면 100년 이상.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네.’
아득한 시간을 하릴없이 새기는 와중, 아직까지 디아나의 육체에 별다른 이상은 찾아오지 않았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고통 때문에 찾아오는 심리적인 고통이라면 모를까.
한수호는 그런 디아나를 내버려 둔 채 가끔 멸망의 성흔 바깥을 어슬렁거렸다.
“잠깐 나갔다 올게, 디아나.”
화원을 이탈하지 못하는 디아나와 달리, 언데드 하수인에 불과한 한수호는 그런 제약이 없다.
물론 그것은 나와 루시의 케이스도 마찬가지다. 디아나의 계승자인 루시는 공중정원을 이탈하지 못해도, 일개 수호자인 나는 그런 제약이 없다.
“아… 응. 잘 갔다 와, 아빠.”
“문단속 잘해. 헥터 같은 이상한 아저씨가 비밀 친구 하자 그래도 따라가지 말고.”
“히히히, 아빠도 참.”
한수호의 공백 기간은 짧으면 며칠, 길면 몇 달이 될 때도 있었다.
그동안 디아나는 진토(塵土) 된 해골 속에 파묻혀 검은 하늘만 쳐다봐야 했다. 언제나 외로움이 사무쳤지만, 꾹 참고 겉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한수호가 돌아올 때마다 가지고 오는 여러 장난감들 덕분이었다.
“하핫! 디아나! 이거 봐라! 이번에 가져온 건 진짜 놀랄걸?”
한수호는 디아나의 즐거움을 위해 여러 가지를 했다. 정말 셀 수도 없을 만큼 여러 가지다.
수백 년에 걸쳐서 사람 하나를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일이다. 별의별 똥꼬 쇼를 다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에도 드디어 불꽃놀이가 발명됐다 그래서, 내가 바로 가져와 봤어!”
그중에서도 디아나가 가장 인상적으로 봤던 것은, 바로 불꽃놀이였다.
피잉― 하는 높은 소리와 함께 올라간 작은 불꽃이 하늘에서 연신 폭발한다.
사방이 어두운 공중정원이기에, 그 아름다운 불꽃의 폭발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인다.
“와아… 와아아!!”
아빠와 함께 최초로 불꽃놀이를 봤던 기억. 디아나의 기억 속 인상 깊은 장면을 꼽으라면 순위권을 다룰 기억이다.
한수호는 그 사실까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디아나가 유난히 좋아했다는 건 알았으니, 그 뒤로도 각양각색의 불꽃놀이 기구를 가져와 디아나에게 보여주곤 했다.
…….
…그리고 또 몇 년, 몇십 년이 지난 후.
드디어 디아나의 몸에 고통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 윽.”
검은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른다.
그리고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격렬한 고통이 전신을 치달았다.
내장이 뒤집히고, 머릿속이 펄펄 끓고, 온몸의 뼈가 일거에 박살 나는 듯한. 그런 정신 나간 고통이 말이다.
“…디아나, 왜 그래?”
디아나는 한수호 앞에서는 최대한 내색을 안 하려 했다. 하지만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건 도저히 참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발각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디아나는 한수호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러자 한수호는…….
“그래, 알겠어.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을 정도로 힘들어지면, 언제든 말해.”
그런 말을 하더니. 괜히 어깨 뒤로 멸망의 대검을 만지작거렸다.
디아나는 그 무의식적인 행동에 담긴 의미를 알아채고 흠칫, 숨을 삼켰다.
“내가, 전부 해결해 줄게.”
단호한 말투. 한수호답지 않게 농담이 전혀 안 섞인 언사였다. 그가 말한 ‘해결’의 방식은 디아나라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또 그 계승식 때의 참상을 반복할 생각이다. 디아나는 절대 아빠 앞에서 투정 부리면 안 되겠다고, 뼛속 깊이 다짐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돼.’
마법진 유지에 고통이 느껴진다는 것은, 자신이 이 세계를 감당하는 데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자신의 육체는 곧 부서진다. 대신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죽은 여신의 시체를 자신이 대신했던 것처럼, 이젠 자기의 후계자를 만들 차례다.
‘계획은 이미 있어.’
디아나는 이 자리를 떠안을 때부터… 언젠가 육체의 한계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계획을 준비해 뒀다. 대륙의 네 방향에 봉인되어 있던 고대의 괴물들. 그것들의 사체를 이용해서 좀 더 완벽한 계승자를 탄생시킬 계획.
“저기, 아빠.”
“응? 왜. 역시 내가 해결해 줄까?”
“아니. 그게 아니고…….”
그래서 디아나는 한수호를 불러 천천히 자기 계획을 한수호에게 말해줬다.
그것을 듣던 한수호는 점점 무표정해지고, 움직임이 없어지고, 무기물처럼 변해갔다.
어느 순간 피식,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야. 그렇게 하면 돼.”
“아… 어, 응.”
이번에도 너무 쉽게 납득하는 한수호. 디아나는 전과 같은 의문과 불안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한수호와 최후의 전투 직전에 본인의 입으로 그 이유를 직접 들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었다.
―내 마누라가 이 세계 최후의 예언자였다고. 루나의 예언은 절대로 틀리지 않는단 말이야.
이 당시 한수호는… 이미 디아나가 그런 결정을 내릴 줄 알고 있었다. 살아생전의 루나 루에바가 남긴 예언을 알테어에게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별다른 감흥은 들지 않았을 수밖에. 시나리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에 씁쓸함을 느꼈으면 모를까.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무슨 일이든 해줄 테니까.”
“이, 이번에는 아빠가 그렇게 활약할 일은 없을 거야… 아마.”
그렇게 디아나는 새로운 계승자를 만들기 위한, 계승식을 준비했다.
‘핵이 없어졌어도. 그 괴물들의 시체엔 아직 엄청난 마력이 깃들어 있어.’
여신의 육체를 멸할 정도인 엄청난 힘. 그것을 이용할 것이다.
우선 괴물의 육체를 매개로 새로운 계승식의 제물들을 만든다. 그리고 한 개체가 나머지 세 제물을 죽이는 형태로 모두 흡수한다.
‘그러면 네 마리 괴물의 힘을 모조리 물려받은, 완벽한 하나의 그릇이 나오는 거야!’
그것이 디아나의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계승자가 될 것이다.
지금 디아나처럼 임시로 자리를 맡은 게 아니라. 진짜 여신님처럼 아름답고, 고결하고, 우아하고 멋진, 진정한 의미의 계승자 말이다.
‘그러면 음… 이름은 뭐로 지을까?’
그것을 고민하던 와중. 디아나는 옛날에 한수호가 들려줬던 ‘천사와 악마의 전쟁’에 관한 얘기를 떠올렸다.
한수호는 디아나의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지구에서 본 만화나 소설을 대충 짜깁기해 씨불였던 거지만. 디아나는 그 얘기를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응. 이게 좋겠다.”
아스모데우스, 아스타르트, 그리고 샤키엘, 자드키엘.
한수호가 말해줬던 악마 진영과 천사 진영의 두 인물을 그대로 따서 지었다.
“…으음.”
하지만 짓고 보니 뭔가 좀 불만스럽다.
모든 화신체를 흡수해서 인조 여신이 될 하얀 그릇, 아스모데우스. 적어도 얘만큼은 뭔가 좀 더 특별한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다른 희생 제물과는 다른… 뚜렷하게 구별되는 이름, 그런 게 어디 없을까.
“아.”
거기서 디아나는 떠올려냈다.
아득히 옛날, 지옥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상처를 핥아주며 살던… 또 다른 아빠의 이름을 말이다.
―부디 나를 잊지 말아 주렴, 디아나.
디아나는 그녀가 남겼던 마지막 한마디를 기억해냈고, 이내 결심했다.
그래, 나뿐만이 아니다. 앞으로 전세계가 그 이름을 잊지 못하게 만들어야겠다.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 새로운 계승자의 이름은… 이걸로 하자.”
그렇게 악마의 이름을 가진 두 개체.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와, 아스타르트가 대륙의 북쪽과 서쪽에 먼저 소환되었다.
‘히히. 시간 마법을 연구하길 잘했네.’
디아나는 이 대륙의 중심에 갇힌 채 수백 년을 보냈고. 그 동안 시간 마법의 비의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장 소중한 개체인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에게, 자신의 모든 여력을 쏟아 특별한 마법을 하나 각인했다.
‘불사의 각인이랑 별개로. 수호자 계약을 만들어 주자.’
디아나는 아직도 공주님을 지켜주는 기사님의 이야기를 동경한다.
본인이 한수호와 살면서 느꼈던 감동의 순간을 자기 피조물도 느껴주길 바랐다.
그래서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에게 특별한 권능을 부여했다. 루스티카를 지켜줄 수호자에 대한 계약을 말이다.
루스티카와 계약한 불사의 수호자는, 이제 시간을 거슬러 불멸할 것이다.
‘이제 나도 남은 힘이 얼마 없어. 이 정도밖엔 못 해주겠네…….’
새로운 계승 의식을 구축하는 와중에, 젖 먹던 마력(?)까지 짜내어 각인한 마법이다. 이건 아신들조차 쉽게 거스를 수 없는 특별한 기적이었다.
이제 어떤 고통과 역경과 고난도, 루스티카와 수호자를 갈라놓을 수는 없다. 수호자 본인이 포기하지 않는 한 말이다.
“너도 우리 아빠처럼… 좋은 아빠를 만났으면 좋겠네, 루스티카.”
그렇게 탄생한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는, 눈처럼 하얀 머리칼과 피처럼 붉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디아나의 전 아빠, 루스티카가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