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외전 1―21. 메모리 오브 위치 (21)
수십만 구의 뼈와 시체가 산처럼 쌓인 백검의 성당 공중정원.
이곳에서 결국, 세계의 새로운 시작을 알릴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아빠, 준비 다 됐어.”
정원의 중앙. 뼈로 쌓아 올려 기괴한 외형을 가진 웅장한 옥좌가 하나 있었다. 백골색의 옥좌는 뼈로 수북한 정원의 풍경과 소름 돋도록 어우러졌다.
“내가 여기에 앉으면… 그때부터 의식이 시작될 거야.”
어마어마한 검은 마력이 실체를 갖고 허공을 유영하고, 검은 스파크가 정원 전역에 벚꽃처럼 흩날리는 가운데.
디아나는 옥좌를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아빠, 있잖아.”
디아나는 옥좌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고심 끝에 한수호에게 말했다.
“나. 견뎌볼게. 아무리 힘들어도 꼭 이겨낼 테니까… 나를 믿어줄래?”
인간의 목숨을 하나도 희생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이 고통을 감내하여 계승 의식을 견뎌내겠다.
그런 소리였다.
“…….”
디아나는 당연히 한수호가 격렬하게 반대할 줄 알았다. 그래서 어떻게 그를 설득할지도 며칠에 걸쳐서 대화 시뮬레이션을 끝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의외로 한수호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해.”
“어, 어?”
“네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 디아나.”
뭐지. 왜 저렇게 쉽게 수긍하는 거지. 예상과 전혀 다른 반응에 디아나는 뜻 모를 불안까지 느꼈다.
‘하, 하지만! 오히려 좋아.’
인간 마음이 참 간사하다. 정작 한수호가 말려주지 않으니 디아나는 섭섭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한수호가 이렇게 협조적이라니. 이건 디아나가 가장 바라는 시나리오기도 했다.
“그럼, 아빠… 나한테 힘을 줘. 내가 망가지지 않도록.”
디아나는 한수호에게 말했고, 한수호는 여느 때처럼 거친 손으로 디아나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줬다.
“…그래, 아무 걱정 하지 마. 넌 잘하고 있으니까.”
“응, 히히.”
디아나는 그 손길을 잠시 음미했고, 이내 한 걸음씩 뼈로 쌓은 옥좌에 다가갔다.
그리고 털썩, 잡생각이 생기기 전에 냉큼 그 위로 앉아버렸다.
“으……!”
순간 온몸에 수천 마리의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감각. 상상 이상으로 혐오스러운 감각에 디아나가 낮은 신음을 흘렸고.
콰아아아앙! 엄청난 검은 마력이 옥좌를 중심으로 폭주했다.
“꺄아아아아악!!”
머리부터 발끝, 영혼까지 누군가에게 우악스럽게 쥐어뜯기는 고통이 강타한다.
쿠구구구구! 화원 전체가 격렬하게 진동한다. 지반뿐만 아니라 공기 전체, 이 대륙 전체가 요동치는 듯한 묵직한 울림이었다.
‘이, 이제 시작이야……!’
버텨라. 그렇게 큰소리를 쳤잖아.
반드시 버텨야 한다! 버티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끄우욱……!”
잠깐만 방심하면 그대로 미쳐버릴 듯한 격렬한 감정. 뇌를 뒤집어엎는 자극적인 전기신호의 향연.
디아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마력의 격류 속에서 고고하게 서있는 한수호를 쳐다봤다.
‘아… 아빠……!’
디아나가 한수호를 향해 절박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우뚝, 금세 멈춰버렸다.
한수호는 웃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뒤틀린 얼굴로 웃고 있다.
디아나는 그 순간, 아빠가 순순히 이 자리에 앉도록 허락한 것이 떠올랐다.
“…아빠?”
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떠오른 순간, 격렬한 불안감이 디아나의 온몸을 후려쳤다.
그녀는 다시금 한수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 아빠. 아빠……!”
디아나는 의미도 없이 한수호를 미친 듯이 불렀다.
그러자 한수호가 휘몰아치는 검은 마력의 폭풍을 뚫고, 디아나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너는 나한테 부탁했지. 너를 희생해서 이 세상을 구해달라고.”
한수호는 중얼거린다.
디아나의 불안을 현실로 만드는 소리를 연신 중얼거렸다.
“그러니 나는 그걸 이룬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말하는 한수호의 눈은 듬직한 영웅의 그것이 아니었다.
광기와 집착, 그리고 찐득한 망집에 사로잡힌 대악당의 그것이었다.
“그걸 이루기 위해서라면, 너를 제외한 모든 것을 희생해도 상관없어.”
쿠오오오오! 디아나의 머리 위로 거대한 칠흑의 섬광이 쏘아져 나갔다.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꾸덕꾸덕 뭉쳐, 북극성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하는 검은 마력의 덩어리.
그것이 이내 쿠구구구, 육중한 굉음과 함께 천천히 팽창한다.
“아…아아!”
더 이상 디아나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없었다.
고통이 없다. 그 사실 자체가 디아나에게 까마득한 절망감을 선사했다.
한수호의 넋두리는 이어졌다.
“헥터랑 알테어에겐 정말 큰 빚을 졌어. 나는 마법의 ㅁ 자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제야 디아나의 뇌리에는 한수호와 밀담을 속삭이던 알테어의 모습이 떠올랐다.
속였다. 한수호가 디아나를 속인 것이다.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술식의 내용을 교묘하게 바꿔놓았다!
“이건… 이, 이런……!”
마법진의 유지자인 디아나가 모든 고통을 떠안는 것이 아니라, 마력 파동을 발생시켜 인간의 목숨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변해있었다.
불찰이었다. 아무도 건드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마법진의 역산이나 검산 과정을 생략했다.
그것이 이런 결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 안 돼……!”
마법진은 이미 발동되었다. 돌이킬 수 없다. 이제 와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때늦은 후회를 뼛속 깊이 새기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내가,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 뼈저린 후회가, 디아나로 하여금 시간 마법에 필사적으로 몰두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지만, 일단 지금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머, 멈춰줘! 아빠! 아빠아아!!”
디아나는 다음에 일어날 일을 직감하고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머리 위의 거대한 마력 덩어리의 팽창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이내 디아나와 한수호를 거쳐 화원 전역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걸로 모자라서, 신성국 전체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안 돼애애애!!”
그야말로 거대한 흑점의 폭발이었다.
눈부신 빛이 세상을 뒤덮는다.
…….
…세상을 뒤덮은 어둠의 폭발은 무려 하루 온종일 지속되었다.
그 결과 폭심지에 가까웠던 슈엘츠 성국의 인간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한때 전 대륙을 제패했던 신성국의 수백 수천만 목숨이 그날 하루아침에 몰살당한 것이다.
“꺄아아아악!”
“우아아악! 아아아악!”
“살려줘! 아무것도 안 보여! 아아아아악!!”
마력 폭발의 여파는 전 대륙을 뒤덮었다. 슈엘츠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에서도 그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비록 슈엘츠처럼 모든 사람이 일거에 몰살당하진 않았다지만, 네 나라 모두 국가 기반이 휘청거릴 정도의 대학살과 대공황이 온 것은 확실했다.
이 당시의 피해는 추산조차 불가능하다. 문헌이나 기록조차 남지 않았다.
추산할 사람들도, 기록할 사람들도, 죄다 뒈져버렸기 때문이다.
“아빠… 어째서. 어째서……! 왜! 왜애애애!!”
그리고 인간의 목숨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인 검은 마력의 폭주가 끝난 뒤, 디아나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옥좌의 팔걸이를 부서질 듯이 쥐었다.
눈물로 번들거리는 증오에 찬 시선. 그 앞에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한수호가 있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대체 왜!”
“딱히 이해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야. 날 죽이려면 죽여도 된다, 디아나.”
한수호는 대검을 바닥에 팽개쳤다. 그리고 디아나 앞에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목을 내밀었다.
완전한 항복의 표시다.
“뭐, 뭐?”
디아나는 그 순간에도 당당하고, 올곧게 빛나는 한수호의 눈을 바라봤다.
그 직선적인 광기를 직면하고 숨을 삼켰다.
“나는 너를 속였지. 그건 나도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나로선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아빠.”
“이 계승 의식의 성공에 내 모든 것을 바쳤어. 네가 엄청난 고통으로 망가지는 것도, 계승 의식이 실패해 버리는 것도, 절대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그것만큼은 나도 참을 수 없어.”
흠칫 숨을 삼켰다. 이내 디아나의 마음속에 불같은 억하심정이 차올랐다.
믿었는데, 내가 믿었던 아빠가 나를 배신했다. 아빠가 나를 속였다. 그 사실만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쳇바퀴처럼 계속 굴러다녔다.
“아빠 따위… 아빠 따윈 정말 싫어! 저리 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푸화악! 디아나를 중심으로 칠흑의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것은 이내 공중정원 전체를 뒤덮고, 그걸로 모자라 슈엘츠 성국 전역으로 역병처럼 퍼져나갔다.
절멸의 안개. 앞으로 500년 뒤까지 슈엘츠를 뒤덮을 무차별 살상의 저주가 발동되었다.
“크헉! 쿨럭, 커헉!”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한수호 역시 그 절멸의 안개 효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지. 애초에 정확히 말하면, 이 절멸의 안개는… 딱 한수호 하나만을 얼씬도 못 하게 하려고 설치된 저주에 가까웠다.
“…그래, 알겠다. 그동안 네 덕에 정말 즐거웠다, 디아나.”
온몸이 뒤틀리고 육신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는 와중, 한수호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런 말을 했다.
한수호는 끊임없이 재생과 죽음을 반복하며 승강기를 향해 걸어갔고, 이내 승강기가 내려가며 정원에서 모습을 감췄다.
“또 내가 필요해지면… 언제든 나를 불러. 곧장 튀어올 테니까.”
승강기가 내려가기 직전. 한수호는 그런 말을 남겼다.
디아나는 흠칫 놀라며 시선을 팩 돌렸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렸다.
“누가… 아빠 따위, 다시 부를 줄 알아. 절대 그럴 일 없어. 절대로!”
디아나는 화원의 옥좌 위에 홀로 남아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렇게 절치부심하고, 20년이 하릴없이 흘러버렸다.
* * *
디아나의 굳센 결심은 정확히 20년째 되는 해에 속절없이 흔들렸다.
한없이 하찮은 이유지만, 당사자에겐 굉장히 심각한 이유 때문이다.
“…너무 심심하다.”
디아나는 이 백검의 성당 공중정원을 벗어날 수 없었다. 계승의 마법진이 설치된 범위가 이 공중정원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마법진에서 디아나가 사라지는 순간, 억제되어 있던 세계의 붕괴가 속행된다. 술식의 중심 매개체인 옥좌에서도 오래 떨어지면 안 될 정도니 말 다 했다.
“루나 언니, 헥터 아저씨랑 알테어 언니, 마왕 아저씨도… 보고 싶어.”
그래서 정확히 말하자면, 심심해서 마음이 흔들린 건 아니다.
본인은 ‘심심하다.’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그녀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아빠도, 이제 보고 싶다.”
지옥에서 살 땐 언제나 루스티카 하나만 보고 살았다. 하지만 디아나는 파라이소 대륙에 발을 딛고 루스티카 외의 많은 사람과 교류를 했다.
그 결과 디아나는 처음으로 외롭지 않은 생활을 했다. 그 경험 때문에 다시 옛날처럼 혼자가 됐을 뿐인데,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친해지지 말 걸 그랬나.’
디아나는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가, 이내 진저리를 쳤다. 그것은 행복했던 자기 추억까지 부정해 버리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그들과의 파라이소 대륙 생활은 즐거웠다. 후회는 없다. 그래서 그것들을 지키고 싶었기에 이런 선택까지 한 것이다.
“그래도… 너무, 심심하다.”
디아나는 옥좌 위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무릎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압도적인 적막. 그리고 안개로 둘러싸인 어둠. 태양빛조차 검게 물들어 그녀를 내리쬔다.
이러고 있으면 세상에 혼자만 남은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으으.”
그러면 곧 가슴이 욱신거릴 정도의 고독감이 들이닥친다.
진짜 혼자 남은 게 아닐까. 그때의 마력 폭발로 정말 다 죽어버린 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계속 든다.
누구라도 좋으니 대화가 하고 싶다. 지금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느끼고 싶다.
“…아빠.”
언제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한수호의 얼굴이었다.
유쾌한 웃음. 터무니없는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리고, 깐죽거리는 말 한마디로도 그녀의 불안감을 깨끗하게 정리해 주던 그가 필요하다.
“미안해, 아빠.”
사실 디아나도 이젠 알고 있다.
20년 전, 그때 아빠의 판단은 옳았다. 그녀는 그저 떼를 썼을 뿐이다.
그리고 디아나는 이제 아빠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 그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아빠… 돌아와줘. 제발.”
디아나는 어느새 절멸의 안개 발동 조건을 조금 고쳤다.
여전히 모든 인간의 접근을 부정하되, 그녀가 아는 얼굴들만은 그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 대상은 한수호를 비롯한 루나 루에바, 헥터 카사스, 그리고 알테어 바토리, 이미 죽어버린 마왕 헬릭스와 마왕군 군단장들까지 있었다.
“으으…으으.”
디아나는 외로움이 몰려올수록 더욱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리고 한없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신음을 흘려댔다.
그리고 그 순간, 디아나는 환청을 들었다.
“내가 너무 늦었나? 아니면 제때 맞춰서 온 건가?”
그것은 디아나가 지금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
디아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너머에 검은 더벅머리와, 용을 닮은 검은 갑옷이 인상적인 남자가 서있었다.
“아…빠?”
디아나는 얼이 빠져서 중얼거렸다.
말하면서도 자기가 환각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환각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힌 타이밍에, 어떻게 진짜 용사님처럼 등장할 수가 있는 것인가.
“슬슬 내 면상이 보고 싶지 않을까 싶어서. 염치 불고하고 찾아와 봤다.”
디아나가 오매불망 기대하던 그 한없이 가벼운 목소리.
그리고 디아나가 보고 싶었던 특유의 비릿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저주도 발동 안 하는 걸 보니, 일단 화는 좀 풀렸나 보구만?”
그리고 이어지는 한수호의 말에 디아나는 새삼 깨달았다.
“아…아아!”
한수호는 원래부터 진짜배기 용사였다. 디아나 본인이 소환한 이 세계 최초의 용사.
오직 디아나를 구원해 주기 위해 루스티카가 선발한, 그녀만의 용사님이었다.
“아빠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