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외전 1―20. 메모리 오브 위치 (20)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한수호에겐 1년처럼 짧았을 거고, 디아나에겐 100년처럼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발악한 것은 같았다.
“크하아악!”
“아아악! 괴, 괴물이다! 저놈은 괴물이야!!”
한수호는 디아나를 죽이러 끊임없이 몰려오는 아래 세계 ‘용사’들을 막느라 바빴고, 반면 디아나는 한수호가 사람을 조금이라도 덜 죽이도록, 필사적으로 마법진을 구축하느라 바빴다.
“끄…윽… 마, 마녀… 저주받을 마녀!!”
“내 죽어서도 네놈들을 저주할 것이다! 이 대륙과 아신들에게 영광을!!”
어쩌다 한수호가 지친 나머지 단칼에 놈들을 죽이지 못하면, 두 명씩 짝지어 올라온 용사 듀오는 기분 나빠지는 유언을 한마디씩 박고 간다.
그럴 때마다 디아나의 멘탈은 크게 흔들렸다. 그 동요가 도저히 숨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빠, 역시 내가… 잘못된 걸까?”
한 5년쯤 지났을 시절의 일이었다. 디아나는 하루 종일 풀이 죽어서 울먹거렸다.
한수호는 방금 따끈따끈하게 죽인 두 인간의 시체를 치우다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디아나 쪽으로 지친 눈을 돌렸다.
디아나는 괴물의 핵에 저장된 막대한 힘을 재구축하며, 혼자 자포자기식의 말들을 주워섬겼다.
“사람들이 전부 내가 나쁘대. 하루에도 몇십, 몇백, 몇천 명이나… 계속, 계속, 계속 나를 죽이러 올라오잖아.”
“뭐 그렇지. 오늘은 1088명까지 세고 그 뒤론 까먹었네. 몇 년째인데 질리지도 않아 아주.”
한수호는 대수롭잖게 대답했고, 둘러업은 시체를 화원 한구석에 냅다 던져버렸다.
털퍼덕. 쿠당탕. 이미 산처럼 쌓여있는 썩은 시체 위로 두 구의 시체가 더 적립된다.
디아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 비참함이 가득 담긴 어조로 쥐어짜 내듯 말했다.
“아빠, 이렇게 아빠가 계속 힘들 바에는… 그냥, 이대로 세상이 끝나게 두는 게 좋지 않았을까?”
화원의 전역엔 적게 잡아도 십만에 달하는 인간의 시신이 쌓여있었다.
5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시체를 쌓아 올린 결과물이다. 이미 화원의 어디에도 꽃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옛날엔 그렇게나… 예쁜 곳이었는데.’
그곳엔 발 디딜 곳조차 없는 시체의 산과, 죽음의 악취만이 가득했다.
디아나는 고개를 푹 떨구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아빠, 미안해. 나 때문에. 아빠, 정말 미안해…….”
이제 다 싫다. 지긋지긋하다.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아무 생각도 없이 발 닿는 데로 다니고,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고. 같이 아빠와 사과를 나눠 먹던 그때로 돌아갔으면.
그런 생각만이 디아나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도망치지 마, 디아나.”
그런 디아나의 머릿속을 꿰뚫기라도 한 듯, 한수호가 단호하게 내뱉었다.
디아나는 화들짝 놀라서 한수호를 쳐다봤다.
“이미 여기까지 왔다. 도망칠 곳은 아무 데도 없어.”
한수호는 그사이 한 팀 더 올라온 반란군… 아니, 슈엘츠 제3교황국의 두 용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옳았는지 틀렸는지, 그런 쓸데없는 건 걱정하지 마.”
“하, 하지만!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내가, 아빠가… 이렇게나!”
“나는 용사라고. 네가 소환한 이 세상의 첫 번째 용사.”
푸직, 우두둑!
한수호는 압도적인 전력 차로 올라온 놈들의 사지를 동강 냈고, 두 사람의 모가지를 산 채로 뽑아버렸다.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입술을 한수호가 달싹였다.
“옳은 일을 해서 용사가 아니야. 내가 하는 일이니까 정의로운 거지.”
한수호는 언젠가 디아나를 구워삶을 때 말했던 뒤틀린 철학을 그대로 내뱉었다.
희미한 웃음. 필사적인 다정함이 담긴 미소. 한수호의 피 칠갑 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너는 옳아. 다른 모든 사람이 너를 부정해도 용사인 내가 보장해 줄게. 나는 무조건 네가 옳았다고 말할 거다, 디아나.”
터무니없는 궤변이다. 이젠 머리가 좀 굵어진 디아나도 그것쯤은 아주 잘 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디아나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다.
“아… 으, 흐흑……!”
한수호는 존나 신기한 새끼였다. 그는 언제나 디아나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가장 절박한 순간에 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이 정도는 눈치는 돼야 성녀님이랑 연애하는 건가 보다, ×발.
“응… 응. 미안해. 고마워… 아빠.”
디아나는 펑펑 울며 하던 작업을 계속했다.
한수호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다시 작동되는 승강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별걸.”
디아나와 한수호를 쳐 죽이기 위해 올라오는 제3슈엘츠의 기사단은 나날이 강해졌다.
이미 인간을 초월하고, 디아나조차 감당하지 못할 괴물이 되어버린 한수호였지만, 가끔은 연달아 몰아치는 역전의 용사들의 맹공에 몇 번이고 죽어버릴 때도 있었다.
“이, 이런 괴물 같은 놈…….”
“하얀 머리 계집을 노려라! 저년을 죽여야 이 악마가 멈춘다!”
도전자들은 저희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전략을 짜며, 개발악을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몇 번이고 되살아난 한수호가 디아나의 앞을 막아섰다.
“노리긴 누굴 노려. 후장이나 벌려, ×발련들아. 대검 들어간다.”
결국의 결국엔 모든 기사님들이 한수호의 손에 참살당한다.
나름대로 저마다 깊은 사명을 안고 찾아왔던 그들은, 전에 왔던 다른 이들과 똑같은 엔딩을 맞이한다. 화원 한구석에 지분 차지하고 천천히 썩어드는 해골이 된다.
“한수호! 그~ 상대는! 엑스트라 109, 110!”
한수호는 오늘도 올라오는 사람을 습관처럼 쳐 죽였다.
승강기를 타고 올라온 사람에게 유쾌하게 외치고, 그대로 목과 몸을 썰어 죽인다.
그렇게 그들의 일과는 쳇바퀴처럼 돌아, 끝내 기나긴 10년의 종지부를 찍었다.
* * *
디아나의 계승 의식 준비가 거의 막바지에 달할 때쯤, 그들을 죽이는 것 외의 목적으로 화원을 찾아온 이들이 딱 둘 있었다.
우선 첫 번째는 아신이었다.
그 아신 중에서도 굉장히 내 눈에 익고, 어두운 금발이 인상적인 여자.
똥털, 미네르바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군요. 저희의 계획을 방해하는… 빌어먹을 인간들.”
그런 말을 하며 별안간 화원 한가운데 등장한 미네르바.
한수호는 당연히 처음 보는 여자의 등장에 잔뜩 경계했고, 미네르바의 적의를 읽은 그는 곧장 싸움을 걸어버렸다.
그리고 격렬한 싸움 끝에 온몸을 잘게 갈리고 패배. 어느새 부활한 몸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버렸다.
“어…….”
“아빠!!”
얼이 빠진 채 드러누운 한수호와, 그런 한수호에게 달려온 디아나.
미네르바는 그런 두 사람을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봤다. 내리뜬 시선에 경멸이 가득했다.
“제가 당신들을 소멸시킬 수 없다는 것에 감사하세요. 제약만 없었다면 당신들 같은 건 진작에 지옥 밑바닥에 처넣어 버렸을 텐데. 그럴 수 없다는 게 정말 아쉬울 따름이네요.”
방금 얼핏 보여줬던 막강한 무력을 생각하면 절대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는 발언.
디아나는 아랑곳 않고 덤벼들려는 한수호를 필사적으로 만류했다.
“지금이라도 계승 의식을 당장 중단하세요, 마녀와 하수인.”
그리고 미네르바가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일종의 권유이자 협박을 하러 찾아온 것이다.
“우리는 살해당한 여신 프로피샤 님의 의지를 이을 겁니다.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해 버린 이 저주받은 땅과 생물들을 모조리 멸하고, 새로운 세상과, 그곳에 걸맞은 조화로운 피조물을 저희 손으로 재탄생시킬 겁니다.”
장황하고 초월적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에 대한 한수호의 대답은 아주 간단명료했다.
“병신 쌉소리 하네. 조까, ×발아.”
거절. 그것도 아주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래! 저리 가! 나쁜 여자! 아빠랑 나는 이미 결심했단 말이야!”
디아나도 가세해서 한마디 얹는다.
하지만 여기서 미네르바는 모욕에 기분 나빠하는 대신, 입가의 미소를 짙게 띠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부정할 수 있다니. 당신들… 그 마법진으로 이 세계를 계승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요?”
“…으, 응?”
그렇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디아나와 한수호는 진짜로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계승 의식을 일으키면 그 후폭풍으로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말이다.
당연히 한수호와 디아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띠었다. 그러자 미네르바가 혀를 낮게 찼다.
“거기 마녀, 디아나 에스파다라고 했던가요?”
“어, 나?”
“당신이 다루는 그 시체술사들의 마법. 고룡의 마법과 다르게 이 마법은… 굉장히 정직하다는 것이 특징이지요.”
“저, 정직하다니?”
“작은 힘에는 작은 희생. 그리고 큰 힘에는, 그에 걸맞은 큰 희생이 필요해요.”
“…아.”
디아나는 그 말에 깨달음의 탄성을 흘렸다.
미네르바의 시선은 어느새 경멸에서 동정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녀는 얼이 빠진 디아나에게 천천히 진실을 주입했다.
“세계의 멸망을 저지할 수도 있는 강력한 마법이잖아요. 대체 얼마나 많은 인간의 목숨이 필요할까요?”
그렇다. 희생.
디아나의 세계 유지 마법이 발동되기 위해선 까마득한 인간의 목숨이 희생되어야 한다.
최소가 수백만. 많으면 억 단위를 가볍게 상회할 범세계급의 목숨이 말이다.
“물론 목숨 없이도 가능한 방법이 하나 있긴 하죠. 디아나 에스파다, 그건 사용하는 당신이 더 잘 알겠죠?”
물론이다. 디아나는 그것도 알고 있었다.
시전자의 고통. 흑마법은 원래 자기 깜냥 이상의 강력한 마법을 사용할 땐, 살갗의 내부를 면도칼 수백 개로 박박 긁는 듯한 혐오스러운 고통이 따른다.
이건 아무리 흑마법의 대가인 디아나라도 벗어날 수 없는 규칙이다.
“이 거대한 마법을, 온전히 자기희생만으로 버틸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면 계승 의식이 끝난 후엔… 당신들이 알던 디아나 에스파다는 완전히 망가져 버렸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면 당연히 계승 의식도 실패하게 되겠죠?”
“…….”
“후후, 저희로선 오히려 좋네요. 괜한 걸 가르쳐줬는지도 모르겠어요.”
두 사람 앞에 던져진 잔혹한 현실.
그것을 두 사람은 그때 처음으로 직면하게 되었다.
“…….”
“…….”
“…….”
압도적인 침묵이 내려앉았고, 미네르바는 그런 한수호와 디아나를 놀리듯 홀연히 사라졌다.
* * *
갑자기 떨렁 던져진 무거운 현실. 그 앞에 이도 저도 못 하고 있던 사이 두 번째 방문객이 찾아왔다.
그 두 번째 방문자의 정체는… 신성국 밖으로 피신을 가 있었던 알테어 바토리였다.
“…세상에.”
알테어는 쌓인 인골로 지형지물을 이루는 화원의 모습에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한수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이런 말을 했다.
“못 본 사이 정말, 많이 변했네요.”
그 말은 한수호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공중정원을 향한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한수호는 자기를 향한 것으로 해석한 듯하다. 그의 입에선 짜증 섞인 어조가 튀어나왔다.
“뭐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긴 한데. 무슨 일로 왔냐? 그 반란군 정부가 여기를 그냥 올려보내 주진 않았을 텐데.”
한수호는 그날도 이미 올라오는 사람을 300명 이상 쳐 죽인 상태였고, 몸을 감싼 칠흑의 갑옷에는 살점과 내장, 인간의 눈깔과 뼛조각 같은 게 잔뜩 묻어있었다.
“혹시나 반란군 선동을 믿고 나나 디아나를 죽이러 온 거라면… 모가지 간수는 잘해야 할 거다.”
농담기가 전혀 없는 서슬 퍼런 협박.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건 지난 10년간 언제나 그랬으니 그렇다 치고, 오랜만에 본 알테어에게도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 이유는 얼마 전에 찾아왔던 똥색 머리 아신의 공이 크다만, 그걸 알 턱이 없는 알테어는 적잖이 당황했다.
“수, 수호 씨. 정말로 제가 그딴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할 리가 없잖아요!”
“그건 또 모를 일이지. 세상에 짜잔, 절대라는 건 없는 법이거든.”
나름대로 한때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용사 동료였지만, 한수호에게 그런 과거사는 아무래도 좋은 옛날얘기에 불과했다.
알테어는 마른침을 삼키는 한편, 고개를 세차게 젓고 곧장 본론을 말했다.
“루나 님의 상태가 위독해요. 그것만은 전해줘야겠다 싶어서 찾아온 거예요.”
그 말에는 아무리 한수호라도 무장이 해제되어 버렸다.
더 이상 질 나쁜 농담을 내뱉지 못했다. 무표정으로 잠깐 침묵하고, 이내 조용히 말했다.
“…좀 더 자세히.”
결국 한수호는 알테어와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알테어는 루나와 자신들의 시시콜콜한 근황을 늘어놨다. 한수호는 그 답례로 현재 계승 의식의 진척 상황을 두서없이 풀어놨다.
미네르바에게 들었던 희생과 고통에 대한 것까지. 전부 말이다.
“모, 몰랐어요. 수호 씨와 꼬마 마녀님이… 그런 상황에 처해있었을 줄은.”
알테어는 놀란 얼굴로 한수호와 디아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어느 순간, 한수호는 알테어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한 가지. 너희들이 도와줘야 할 부분이 있어. 나를… 도와주겠어?”
“예, 옛?”
알테어는 양손을 붙잡히자 굉장히 당황했지만, 이내 한수호의 절박한 시선을 마주하자 얼굴이 슬쩍 붉어졌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수호는 그런 알테어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잠깐 귀 좀.”
“아, 귀… 네, 넷.”
이내 한수호가 알테어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간지러운 건지 알테어는 조금씩 몸을 움찔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디아나에겐 들리지 않았다.
“…네, 알겠어요. 헥터에게도… 그렇게 전달해 둘게요.”
알테어는 그런 말과 함께 돌아갈 채비를 했다. 한수호를 향해 머뭇거리다, 마지막에 슬픈 미소를 날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뭐지. 아빠는 생각보다 인기가 많네. 단숨에 알테어의 감정을 파악한 디아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수호 씨, 이제 와선 전부 늦은 말이지만, 선택에 후회는… 없나요?”
문득 알테어는 떠나기 직전 그런 말을 했다.
한수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화원 전역에 가득 쌓인 시체를 가리켰다.
“으흠?”
그것이 의미심장한 질문의 대답이라는 듯이. 디아나로서는 두 사람의 밀담을 못 들었다 보니 좀 답답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알테어는 곧잘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뒤돌아 걸어갔다.
“저는 언젠가, 지금 제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할 날이 올 것 같아요.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아마도 둘이서 귓속말을 속닥였던 문제의 ‘부탁’에 대한 말일 거다.
그 부탁이 무엇인지 디아나가 알게 되는 건 좀 나중의 일이다만, 일단 500년 후의 알테어를 직접 만나본 내가 말하자면.
…적어도 알테어의 직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