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외전 1―19 메모리 오브 위치 (19)
무수한 학살을 자행하며 그들은 빽빽한 인간의 숲을 빠져나왔다.
마침내 폐허 속에서도 굳건히 서있는 백검의 성당 외벽을 넘어, 대성당 앞의 널따란 정원까지 도달했고, 거기에서 한수호는 다시 한번 기가 찬 웃음을 흘렸다.
“하하, ×발. 가지가지 한다, 아주.”
그들의 앞을 빽빽하게 막아선 것은 슈엘츠의 마지막 자존심. 발키레아 기사단이었다.
한수호는 갑옷에 묻은 피와 살점을 대충 털어냈다. 이내 바닥에 질질 끌고 오던 대검을 어깨 위로 걸쳤다.
후드득. 아직 덜 마른 핏줄기가 붉은 대검 끝으로 쏟아진다.
“어디 이유나 들어보자.”
희번덕거리는 시선이 정원에 빽빽하게 들어찬 기사단원들에게 향한다.
발키레아 기사단은 신생 슈엘츠 성국 군사정부의 핵심 세력. 그 때문에 그들은 한수호가 전 세계를 떠돌며 무슨 짓을 하는지 대충은 알고 있다.
“왜 내 앞을 막냐?”
그래서 한수호는 그런 질문을 했다.
다른 이들은 오해할 수 있어도, 이들이 한수호를 배신자로 오해를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앞뒤가 안 맞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의 의지를 집행하는 슈엘츠의 검이다. 마녀의 기사.”
아니나 다를까. 대열 선두에 서있던 기사단장이 투구 속에서 굵직한 목소리를 냈다.
“비록 지금껏 이미 죽은 여신의 허상을 좇았다곤 하나… 우리는 여신의 마지막 의지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한수호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발언이었다.
그 여신의 의지가 이 땅의 모든 인간 몰살이었다. 재앙에 침묵하는 교황청에 불만을 품은 나머지 정권을 찬탈한 것이 지금의 발키레아 기사단 아니었던가.
이제 와서 말이 바뀌니 한수호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졷간 새끼들은 전부 뒈지는 게 싼 거 같으니, 여신 년 시체 방귀 뀌는 소리 따라서 다 같이 뒈지자고?”
“그게 아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살길을 모색한 것이다.”
“뭔 개소리야, ×발년들아. 알아듣게 말을 해.”
“새로운 계시가 내려왔다.”
한수호는 재차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이번엔 정확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본인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뭐라고?”
“여신 프로피샤가 아닌, 또 다른 신의 계시가 새롭게 내려왔다.”
“또 다른… 신이라니?”
“그들은 본인을 프로피샤 여신의 종복, 아신(亞神)이라 칭했다. 성녀 따위를 통한 불완전한 예언이 아니라, 영광스럽게도 직접 우리에게 그 목소리를 들려주었지.”
여기서 바로 그 아신이 등장한다.
미네르바. 그리고 사신 자매 같은 아신들. 진퉁 신 미만, 인간 초과의 초월적 존재 언저리.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인류의 개체 수 급감과 관련이 있다.
인간의 개체 수가 현격히 줄어들어 중간계 개입 제약이 느슨해졌기 때문이라던가. 미네르바 본인이 옛날에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어쨌든 발키레아 기사단장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 아신들께서 말씀하셨다. 재앙을 일으키는 것은 여신이 아니라고 하셨다.”
“허, 그럼 누군데.”
“지옥에서 기어 올라와 인간의 목숨을 모독하고, 이 땅의 생명과 진리를 오염시킨 더러운 시체술사의 핏줄, 디아나 에스파다.”
“…….”
“그 역겨운 시체술사 년의 피와 목숨만이 이 재앙을 멈춰줄 것이다. 아신께서는 그리 말씀하셨다.”
한수호는 입을 꾹 닫았다.
그들은 한수호가 아닌 디아나를 지목했다. 현재 세간의 비난을 한 몸에 짊어진 것은 한수호인데도.
내가 봐도 확실히 무언가 계시 비슷한 게 있었구나 싶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급격한 태도 변화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여기서 한수호는 무언가 깨달았는지, 잠깐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야, 그건…….”
아신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분명히 거짓말이지.
디아나는 도저히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했지만, 한수호는 단박에 그 아신이라는 연놈들이 구라 치는 이유를 간파한 듯했다.
진심으로 한심하다는 표정. 그리고 경멸이 담긴 어조로 한수호는 말했다.
“너희는 그런 형편 좋은 얘기를… 진짜로 믿는 거냐?”
“믿는다.”
“그냥 자기 자신한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고? 그딴 게 진짜 사실일 거라 생각하냐?”
미네르바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신은, 여신의 의지에 찬동했다고 그랬다.
일단 한번 멸망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처음부터 구축할 계획이라고 했지, 아마.
“너희는 속고 있는 거야. 왜 그걸 모르냐, 병신 새끼들.”
그 계략의 일환인 것이다.
파라이소 대륙을 이대로 존속시키려 하는 한수호와 디아나에게 견제를 쑤신다. 눈앞의 꼭두각시들은 그런 아신의 계략에 제대로 놀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한수호는 그것을 일일이 기사단에 설명하지 않았다.
“…아니다, 됐어. 어차피 아무리 거짓말이라 해도. 안 믿을 거잖아?”
설득 따위 소용없다. 어느 세상의 인간이든 단 하나의 법칙만은 불변한다.
사람은 원래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결국 한수호는 멸망의 대검을 들어 올렸다.
“이래서 난 이 말이 좋아.”
그저 광기 어린 웃음을 실실 흘리며, 천천히 전투태세에 들어간다.
한수호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패 죽여도 말이 안 통하면, 이제 패 죽이는 것뿐이지.”
그의 신형이 적진으로 빨려 들어간다.
콰앙! 콰콰쾅! 연신 폭음이 울리고, 반으로 갈라진 기사단의 육신이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하하하! 흐하하하하!!”
광소와 함께 기사단을 갑옷째로 도륙 내는 한수호. 그의 귀신처럼 일렁이는 신형이 연신 기사단의 틈바구니에서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럴 때마다 비명이 울린다. 새빨간 대검이 예광을 발하고 피 보라와 새빨간 불티가 분수처럼 흩날렸다.
“크아아악!”
“아악! 끄아악!”
“아, 악마! 악마다!!”
일방적인 살육이 계속되었다. 그곳에 살아남은 이가 한수호와 디아나, 둘만이 될 때까지.
한수호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 * *
“하아… 후우, 후읍!!”
푸직! 한수호는 격한 숨을 내쉬며 마지막으로 검을 휘둘렀다.
한 기사의 뜯겨 나간 목이 하늘로 치솟는다. 그것으로 대성당 앞의 정원을 지키던 발키레아 기사단은 전멸했다.
“…끝났네.”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든 기사단원이 죽었다.
이 세계에서 최초로 여신을 등지고, 아신을 따르는 무리였던 발키레아 기사단. 그들은 단 세 시간 만에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가자, 디아나. 루나를… 찾아봐야지.”
한수호는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디아나를 불렀고, 디아나는 반쯤 나가있던 정신이 그제야 돌아왔다.
디아나가 퍼뜩 한수호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빠르게 성당으로 진입하는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아빠.”
널찍한 회랑을 가로지르던 와중, 문득 디아나가 한수호를 불렀다.
한수호는 온몸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내며 디아나를 쳐다봤고, 디아나는 그 태연한 행색에 한층 더 시무룩한 기분이 되었다.
천천히 흘러나오는 디아나의 목소리는 풀이 잔뜩 죽어있었다.
“아빠가 전에 그랬잖아. 나랑 루스티카랑, 아빠만 빼고 다 죽어버린 세상 같은 건… 지옥이나 다를 게 없다고.”
“그랬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 근데 왜.”
“근데 아빠. 지금 아빠는,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싶은 거야?”
“그럴 리가 있냐. 나는 그냥…….”
“아냐, 아빠. 지금 아빠는 좀… 이상해.”
두 사람 다 뜀박질을 멈추지는 않았다. 지금 상황의 급박함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디아나의 속도는 확실히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과 신경은 온통 한수호의 뒤통수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아빠가 행복해지길 바라서, 그래서… 내가 여신님을 대신하기로 마음먹은 거였어.”
“…….”
“근데… 아빠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지금 아빠는 있잖아. 내가 보기에도 좀… 무서워. 변했어. 사람들을 죽이려던 나를 말려주는… 옛날의 아빠가 아니게 돼버렸어.”
“…….”
“아빠, 내가… 정말로 옳은 일을 한 걸까?”
대성당의 여기저기를 돌며 루나를 찾는 그사이. 디아나는 울먹이며 넋두리를 늘어놨다.
디아나의 시야가 온통 눈물 때문에 흐리다. 그녀의 기억을 읽어 들이는 나 역시, 흐린 시선 너머로 비치는 한수호를 봐야 했다.
“…….”
문제의 그 한수호는… 한없이 무표정이었다.
디아나의 앞에서 무릎 꿇고 맹세한 그 순간부터, 한수호는 절대 슬픔이나 분노 따위의 마이너스 감정을 표출하는 법이 없었다. 시종일관 억지로 꾸민 유쾌함을 연기했다.
혹시나 그럴 상황이 오면, 무조건 저 얼음장 같은 무표정과 침묵이 나왔다.
“사람은 원래 변해, 디아나.”
한참을 침묵하던 한수호가 가까스로 대화에 응했다.
“어, 응?”
“원래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변하는 게 당연하다고. 나는 네가 아니더라도… 언젠간 이렇게 못돼 처먹어질 팔자였던 것뿐이야.”
“그, 그런……!”
“그러니까 너는 나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굉장히 원론적이고, 농담기도 전혀 없는 대답. 긴 침묵을 고수하던 것치곤 싱거웠다.
그것은 일종의 의지 표현이었다. 딱히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 그리고 더 이상 이 주제로 말도 꺼내지 말라는 의지.
“…응, 알았어, 아빠. 미안해.”
디아나는 그것을 단박에 간파했다.
그래서 디아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수호의 뒤에서 소리를 죽여 하염없이 울었다.
역시 한없이 어린애 같다가도, 눈치 하나는 귀신같은 그녀였다.
“…….”
한수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고, 잠깐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바쁘게 놀렸다.
그들이 백검의 성당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결국 루나는커녕 헥터와 알테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남은 장소는 하나뿐이다. 결국 마지막으로 흑검의 성소를 지나, 중앙의 기둥을 타고 비밀의 화원에 발을 들였다.
“…이건 뭐야.”
거기에 있는 것은, 못 본 사이 완전히 시들고 썩은 꽃만 가득한 공중정원의 풍경. 썩은 내와 악취가 진동하는 끔찍한 참상이었다.
그리고 정원의 한가운데 둥둥 떠있는 반투명한 패널. 거기에 새겨진 몇 줄의 문장이 그들을 반겼다.
―거듭된 재앙과의 교전에 중앙군이 지친 틈을 타, 반란군이 성도를 습격했다. 잠깐 타국으로 몸을 피신하겠다. 이 전갈을 본다면 마르크트레스로 찾아와라, 한수호.
―루나 님은 저희가 보호하고 있겠습니다. 모쪼록 조심하세요, 수호 씨.
각각 헥터와 알테어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문장. 그리고 그 문장을 담은 사각형의 패널. 아마 헥터가 한수호에게 메모를 남길 방법으로 마법을 쓴 것일 테다.
“흐음.”
한수호는 그 패널을 신기하다는 듯이 만지작거리다가 피식, 낮은 웃음을 흘렸다.
“재밌네, 이거. 게임 스테이터스 창처럼 생겼잖아.”
“으응? 스, 스테이터스? 그게 뭐야?”
“그런 게 있어. 웹소설 주인공이 ‘상태 창’을 외치면 이런 패널이 나오는 게 원래 국룰이거든.”
“으으응?”
디아나는 지금 한수호의 발언을 손톱만치도 이해하지 못했다만, 미래에서 온 나한테는 꽤 중요한 발언과 상황이었다.
“이야, 이런 거 내 고삐리 때 로망이었는데, 옛날 생각이 무럭무럭 나네, ×발.”
한수호의 눈가에 서린 이채와 내뱉는 말들을 미루어 봤을 때, 바로 이 메시지 창을 모티브로 용사 지원 시스템이 탄생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수호의 추억팔이 잡담은 딱 거기까지였다. 단박에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 한수호가 디아나에게 물었다.
“디아나, 계승 의식을 시작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어? 으음, 잠깐만.”
그러자 디아나도 덩달아 조금 비장하게 얼굴을 굳혔고, 이내 손가락을 바쁘게 접어가며 계산에 들어갔다.
‘사냥한 괴물들의 핵에 담긴 마력이랑 에테르도 추출해야 하고, 그걸 다시 정제해야 하고, 마법진도 그려야 하고, 세상 전체를 둘러야 하니까 분명 엄청난 게 필요할 거야. 그러면…….’
그리고 꽤 아득한 계산 결과를 도출했다.
디아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시, 십 년. 나이를 열 살 정도 먹으면… 가능할 것 같아.”
역시나 한수호도 그 정도로 오래 걸릴 것은 예상을 못 했는지,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흐음.”
오랜만에 표정으로 보여준 부정적인 감정. 그만큼 당황했다는 소리다.
하지만 이내 구겨진 인상을 활짝 펴고, 억지로 여유로운 행세를 했다. 괜히 고개를 연신 끄덕거린다.
“뭐 그래. 괜찮아. 천천히 해. 10년이라는 시간만 있으면… 일단 계승 의식 자체는 확실히 가능하다는 거지?”
“으, 응. 재료라면 이미 아빠가 열심히 모아줬으니까. 분명히 할 수 있어.”
“여기서 안 나가도 돼?”
“응, 한 발짝도 안 나가도 돼! 히히.”
“그래, 다행이네.”
다행이라니, 뭐가? 그런 물음을 하려다가 디아나는 그만뒀다.
그리고 스르륵, 한수호가 건조하게 노려보는 어딘가를 향해 덩달아 시선을 옮겼다.
승강기였다. 승강기가 작동하며 누군가 화원으로 올라오고 있다.
“안 그래도 이제부터…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갈 거 같거든.”
철컹! 한수호는 아직 피도 다 안 마른 대검을 다시 치켜들었고.
스르륵. 올라온 승강기에서는 증오에 찬 눈을 한 기사 두 명이 내렸다. 그들은 디아나와 한수호를 보자마자 고래고래 소리쳤다.
“배신자 용사와 불사의 마녀! 아신님들의 말대로 이곳에 숨어있었군!”
그 고함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아신들의 거짓 예언 작전은 신생 슈엘츠 성국뿐 아니라, 그들과 싸우던 반란군 쪽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
“저 더러운 시체술사 년을 죽이고 여신의 분노를 풀겠다! 파라이소 대륙에 평화를!!”
그리고 발키레아 기사단이 몰살당한 지금. 그 반란군들이 백검의 성당까지 완전히 점령했고, 디아나를 죽이기 위해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엘리베이터의 정원인 두 명씩. 우후죽순, 꼬박꼬박 올라오겠지. 그들이 죽을 때까지.
“하하, WWE 좋아하냐, 얘들아?”
키이잉! 한수호는 문득 검을 낮게 기울이며 그렇게 물었고.
디아나가 눈치챘을 땐 이미 한수호가 있던 자리에 붉은 잔영밖에 남지 않았다.
“로얄 럼블 재밌지. 나도 좋아해.”
푸화악! 두 기사의 목이 동시에 하늘을 날았다.
목이 잘린 두 구의 시체 위. 다시 나타난 한수호가 킬킬거린다.
“어디 한번 해보자. 너희가 먼저 전멸하나. 내가 먼저 지쳐 뒈지나.”
우우우웅.
붉은 귀기가 번들거리는 한수호의 눈.
그것은 새로운 희생자를 끌어 올리는 승강기 쪽으로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