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296화 (272/280)

296화. 외전 1―18. 메모리 오브 위치 (18)

케나인 제국을 지나치면서, 한수호는 수도 케나인에서 떠도는 한 가지 뜨거운 이슈를 접했다.

“다음 케나인의 황위는 용인이 받는다고 하더라.”

“으에? 황위가 뭔데, 아빠?”

“이 나라의 대가리가 용가리 인간이 된다고. 나라 이름도 ‘용제국’ 케나인으로 바꾼다나 뭐라나.”

네 나라의 건국공신인 마왕군 군단장들은 모두 드래곤에게 참살당했다.

애초에 그들은 피난민들이 신성국을 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도록 옆에서 부추겼을 뿐, 그들이 직접 인간들의 왕을 자처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군단장들이 죽어도 네 국가에는 약간의 비통함과 혼란이 왔을 뿐, 국가 기반에 큰 타격은 없었다.

“흐응, 그렇구나.”

“그렇대.”

“근데 신기하다. 파라이소 사람들은 마계 사람들을 엄청 싫어했잖아. 그 황제라는 걸 하는데 사람들이 용케 허락해 줬네?”

“뭐, 그 용인 놈이 이스그라드랑 말이 통하는 건 사실이었거든. 자기가 드래곤 백 있다고 구슬려서 권력을 휘어잡았다나.”

“으음, 그렇구나.”

“그렇대.”

물론 마족의 제위 찬탈에 대한 반발로, 수많은 케나인의 인간들이 다른 나라로 이탈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500년이 지나자, 용인들과 용사들의 용병 부대로만 이루어진 용제국 케나인이 완성된 거지.

하지만 그 뒤를 인간이 잇든 마족이 잇든, 정치형태가 어떻게 바뀌든, 디아나와 한수호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였다.

“밥이나 마저 먹자, 디아나.”

“으응.”

“야, 이거 맛있다, 디아나. 함 무바라. 디진다, 아이가.”

“으응, 어디?”

그래서인지 이 기억은 오히려 디아나에게 굉장히 옅게 남아있었다.

이 짤막한 대화조차도 케나인 수도에서 먹은 최후의 만찬이라 남은 거지. 대화의 내용 자체가 중요하게 남은 게 아니다.

그렇게 그들은 케나인 제국의 수도를 거쳐, 이스그라드가 머무는 황량한 땅에 발을 디뎠다.

―…하찮은 불사자여, 질리지도 않고 다시 찾아왔군.

그래서 디아나는 그날 처음으로 살아있는 드래곤을 마주했다.

공교롭게도 네 번째 괴물, 펜니르는 이스그라드의 레어를 지나쳐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에 존재했다.

―나는 분명히 말했노라. 이 세상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아니면 다시 한번, 내 손에 노리개처럼 놀아나고 싶은 게냐?

아득히 높은 거체. 그 위에서 빛나는 형형한 시선.

크기 자체야 지옥의 용용이와 똑같았지만… 위압감과 휘몰아치는 마력 때문에 숨도 쉬기 힘들다.

‘와… 이건… 모, 못 이기겠다.’

디아나의 첫 감상은 그것이었다.

말인즉슨, 일단 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소리다.

당연하다. 소중한 아빠를 3천 번 넘게 죽인 원수 중의 철천지원수니까. 디아나에게 있어선 적대감이 없는 게 이상할 정도로 증오스러운 존재였다.

‘무, 무서워.’

하지만 화가 나는 건 화가 나는 거고, 디아나는 저 무지막지한 존재와의 힘의 차이를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완전히 기가 죽어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다.

하지만 내리깐 눈에서는 형형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언젠가… 저놈이 용용이가 되면, 혼쭐을 내주고 말 거야.’

용용이. 즉 시룡이 되었을 때를 노린다. 시체라도 영면에 들지 못하게 만들어주겠다.

그런 각오를 남몰래 하는 디아나였다.

500년 후에서 온 박정용피셜에 따르면,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 * *

…뭐 우선 결과부터 말해주자면, 결국 1년 안에 펜니르를 사냥하는 것 자체는 성공했다.

“…봉인이 풀렸군.”

펜니르는 인간 여성을 닮은 괴물이었다.

아니, 사실상 말만 ‘봉인된 괴물’이지, 외관은 평범한 인간… 오히려 성스러운 여신에 가까운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왜 나를 깨운 것이냐, 불사자.”

펜니르는 눈을 뜨자마자 한수호에게 그것을 물었다.

한수호는 나와 다르게 외관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않았다. 그저 전과 같이 단호하게 대검을 치켜들어 펜니르의 미간에 겨눌 뿐이다.

“세계평화를 위해 널 용서하지 않으려고 그런다.”

그 짤막한 통보만 남기고 한수호와 펜니르는 격돌했다.

쩌어엉! 거대한 폭발 소리. 그리고 한수호의 사지는 갈가리 찢어져 바닥에 잘게 흩어졌다.

“…어?”

너무 압도적인 광경이라 디아나조차 어이없는 탄성을 흘릴 정도였다.

키이잉! 펜니르는 어느새 날카롭게 솟아난 양손의 흑백 손톱을 갈아대고 있었고, 천천히 한수호의 시신 쪼가리로 다가갔다.

“나는 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닥쳐오는 분쟁을 피하지도 않는다.”

푸확! 콰자작! 싸움이라고 하기도 뭐한 무차별 무한 살육이 시작되었다.

괴물 사냥은 의외로 크기만 거대했던 앞의 두 놈이 더 수월했고, 지성을 가진 데다 크기까지 컸던 레비아탄을 제일 고전했다.

“구하악! 크악! 끼야아아악!”

그리고 펜니르는 그야말로 이길 방도가 없었다.

한수호는 물론이고 디아나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크아아아아악!!”

멀리서 지켜보는 내가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그대로 계속 싸웠으면 최소 이스그라드의 3천 데스 이상은 거뜬히 찍었다. 이스그라드에게 3천 데스 찍는 데 1년 정도 걸렸으니, 사냥하는 데는 최소 2년은 걸렸겠지.

그럼에도 펜니르를 1년 내에 굴복시킨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그래, 나는, 네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인간.”

바로 풍둔 아가리술.

한수호도 이대론 솟아날 구멍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솟아날 방도를 필사적으로 찾던 와중, 펜니르가 인간에게 우호적인 스탠스를 은근슬쩍 내비치는 것을 포착했다.

“자, 잠깐! 내 말을 좀 들어봐!”

“…으음?”

한수호는 그곳을 파고들었다.

지리멸렬한 전쟁 속에서 언쟁의 칼날도 같이 날아다녔다.

“네가 지금 보여준 그 절박함을… 한번 믿어보겠다, 불사자.”

펜니르는 목숨까지 줄기차게 버려가며, 세계평화와 인류애를 호소하는 한수호에게 흔들렸고, 끝내 생의 미련을 꺾고 대의를 위해 자결을 택했다.

무력 승리가 아니라 외교 승리를 해버린 것이다.

“그, 그래… 잘… 생각했다.”

운터란트에서 여행한 기간까지 합치면 무려 9개월. 그리고 순수하게 전투 시간만 따지면 장장 6개월간의 혈투. 그것이 드디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털썩. 한수호는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전처럼 육체 피로를 강제로 무시한 반동이 복리까지 쳐서 뒤늦게 몰려온 것이다.

“아빠아… 정말, 정말로 고생했어어……. 푹 쉬어.”

디아나는 그런 한수호를 안아 들고 울먹거렸다.

솔직히 같은 불사신으로서, 6개월간 쉬지 않고 죽어대고도 미치지 않았다는 게 존경스러웠다.

이 새낀 나한테 꼰대질 할 자격이 있는 놈이었다. 기억을 여기까지 읽었을 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흐, 우스운 신파극이구나. 하얀 머리의 불사자.”

푸확! 펜니르는 자신의 손톱을 거침없이 자기 심부(心府)에 박아 넣었다. 상처를 비집고 시커멓고 꾸덕꾸덕한 무언가가 피 대신 질질 쏟아진다.

펜니르가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더니, 피식 웃으며 한마디 한다.

“나의 역할을 완수했다. 그러니… 너희는 반드시 너희가 약속한 사명을 완수해라.”

펜니르의 신형이 천천히 땅속으로 녹아드는 와중, 끝까지 빛나는 형형한 붉은 시선이 한수호와 디아나를 향해있었다.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사명감이 들어차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걱정 마. 내가… 전부, 다 고쳐놓을 거야.”

펜니르의 마지막 표정에 희미한 만족감이 어렸다. 그리고 잠시 후 완전히 신체가 무너지며 새빨간 마력 핵만이 바닥에 떨어졌다.

전투로 너덜너덜해진 널찍한 공동엔 디아나와 쓰러진 한수호만이 남았다.

“이번엔 언제 깨어나려나.”

디아나는 세상모르게 뻗어있는 한수호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저번 3개월간의 혈투가 끝난 뒤 한 달 정도를 꼬박 잤다. 그러니 단순히 계산하면 이번엔 두 배인 2개월 정도를 자지 않을까. 디아나는 그렇게 추측했다.

“심심하다아…….”

디아나가 한수호 앞에 쭈그려 앉아 괜히 그의 팔다리를 툭툭 쳐봤다.

평소처럼 유쾌한 목소리로 타박이 들어오지 않는다. 반응이 없으니 영 재미가 없다.

아빠가 없었던 20년 전엔 재미없어서 어떻게 살았지. 한수호에 대한 의존이 높아진 것을 실감하는 디아나였다.

‘사실 자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이미 서신이 온 시점에서 약 9개월 정도가 지났다.

헥터는 1년 안에 한계가 온다고 말했다. 그 말인즉슨 리미트를 최대치로 설정해도 앞으로 3개월이 남았다는 소리.

성도까지 돌아가는 시간을 계산하면 굉장히 빡빡해진다.

“공간 이동 마법 같은 거… 만들어볼까.”

디아나가 나뭇가지로 땅을 긁다가 중얼거렸다.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건, 흑마법에서도 한 차원이 다른 신의 영역이다. 그곳에 발을 들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다.

‘차원 게이트도 성공했으니까… 어떻게 잘하면 되지 않을까.’

이미 전에도 공간 이동 비슷한 마법을 완성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꼭 불가능한 얘기만은 아니었다.

‘공간 이동 마법을 만들고 나면, 나중엔 시간 이동 같은 것도 만들어보면 좋겠다.’

그런 발칙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디아나였다.

불사의 몸이라서 먹고 자고 쌀 걱정도 안 해도 된다. 디아나는 그야말로 죽은 사람처럼 한수호와 나란히 누워 한참을 마법 구상에 몰두했다.

“으아아아나스타샤!”

그리고 디아나의 예상과 달리 한수호는 꽤 금방 깨어났다. 한 달이 좀 덜 되었으니 저번 레비아탄 때보다도 일찍 일어난 셈이다.

디아나는 마법 연구 삼매경에서 단숨에 빠져나왔다. 그리고 만면에 화색을 띠며 한수호를 맞이해 줬다.

“히히, 잘 잤어, 아빠?”

“어… 그, 네가 꿈속에서 전기톱 들고 날 따라온 것만 빼면. 대체로 잘 잤어.”

“…으잉? 전기톱이 뭐야?”

“그런 게 있어.”

그렇게 잠깐의 해후를 마친 뒤, 두 사람은 서둘러 성도를 향해 돌아갔다.

먹고 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한 달 만에 대륙의 동쪽 끝에서 중앙부의 성도까지 도착한 그들. 그들의 앞에 펼쳐진 성도의 광경은…….

“자, 장난 아니네, ×발.”

불타고 폐허가 된 광장. 쓰러진 여신상. 그리고 피로 물든 거리.

반란군과 재앙의 피해로 쑥대밭이 되어버린 참상의 현장이었다.

“아, 아빠! 언니는……!”

디아나는 한수호를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한수호도 곧장 알아듣고는 백검의 성당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그 순간에도 한수호는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이었다. 슈엘츠의 변해버린 꼬락서니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는 행색. 디아나에겐 그렇게 보였다.

내가 볼 땐, 사실 뇌리 한구석엔 이렇게 될 줄 예상했던 표정에 가까워 보인다.

“있다! 여기 있다!”

“배신자 용사! 마녀의 기사가 한이 나타났다!!”

그리고 디아나와 한수호의 대성당을 향한 발걸음은 금방 멈춰버렸는데, 이미 성도의 주요 시설을 모두 점거한 반란군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놈을 잡아라!”

“잡아 죽여라! 여신의 분노를 잠재워라!!”

갖은 복식의 일반인. 다시 한번 바뀐 성도의 주인에게 따르는 성당기사단과 사제들.

무수한 신분과 행색의 인간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성도의 대광장에 모였다. 그리고 하나같이 한수호에게 증오를 쏘아 보내고 있다.

“…흐, 하하.”

한수호는 자신을 둘러싼 수천, 수만의 인파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낮게 웃으며 비척비척 전진할 뿐이다.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자초지종을 해명할 의지도 없어 보였다. 광기에 휩싸인 군중에게 필요한 건, 세 치 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빠.”

디아나는 안타까운 목소리를 한수호를 나직이 불렀고.

스르릉. 결국 한수호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린다.

“백검의 성당까지 직선으로 뚫는다. 엄호해 줘, 디아나.”

한수호는 디아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푸화아악! 붉은 섬광과 함께 잔상이 일렁거린다. 궤적이 훑고 간 자리로 인간이었던 고깃덩어리가 하늘을 날아다녔다.

“끄아아악!”

“아아악! 사, 살려줘!!”

새빨간 피 보라가 일어난다. 찢어지는 비명이 하늘을 메웠다.

그날 슈엘츠 성도 대광장에선 남녀노소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약 5천 명의 인간이 한수호의 칼날에 잘려 나갔다.

두 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