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외전 1―17. 메모리 오브 위치 (17)
세 번째 괴물은 대륙 남단의 거대한 계곡에 봉인되어 있었다.
한때 운터란트에 의해 오랫동안 디스트릭트 10이라 불리고, 500년 뒤 기준으론 망자의 계곡이라 불리는 그 계곡 가장 깊은 곳.
그곳에 잠들어 있던 시룡 레비아탄이 세 번째 괴물의 정체다.
―나는… 나는! 키아아아악!!
이 시룡 레비아탄이 시룡 이스그라드와 다른 점이자, 놀라운 점은 크게 두 가지다.
―용서는 없다… 죽이리라… 여신을……!
첫째, 말을 한다. 둘째, 마법을 쓴다.
그걸 제외하면 시룡이 된 이스그라드와 크게 차이가 없었지만, 이 두 차이가 굉장히 심각한 차이라는 게 문제다.
―여신이 만든 이 세계를! 내가 조각내 주마!!
눈을 뜨자마자 휘몰아치는 분노에 몸을 맡긴 채, 천지가 진동하는 마법을 쏟아내는 좀비 드래곤.
촤자작! 쿠과과과! 놈이 몸을 버둥거릴 때마다 벼락이 하늘을 뒤덮고, 땅이 갈라지며 용암이 솟구쳤다. 공기 중에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폭풍이 몰아쳤다.
―우오오오오!!
콰과과과! 레비아탄이 노성과 함께 브레스를 발사했다.
붉은 브레스는 닿는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증발시켰다. 계곡의 골짜기가 더욱 깊게 파이고, 벽이 무너져 메꿔지길 반복한다.
“우으으……! 이 정도 마법 따윈!!”
하지만 놀랍게도 한수호는 그 모든 마법의 포화 속에서도, 두 다리로 꿋꿋이 서서 버텨냈다.
몇 번이고 죽었지만 다시 일어서서 제정신을 유지했다. 그것 자체가 경이로웠다. 죽음을 버티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아는 나이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오히려 한수호는 웃고 있었다. 그가 나와 싸울 때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다.
“살아있는 용가리에 비하면! 가렵지, ×발!!”
콰콰쾅! 한수호의 붉은 화염이 섬전처럼 쇄도한다. 브레스와 마법의 포화를 뚫고 빠르게 접근한 일격이 레비아탄에게 꽂힌다.
푸직! 멸망의 대검은 레비아탄의 목 중앙에 박히고, 한수호와 레비아탄이 마구 뒤엉키기 시작했다.
―크오오오오!!
그 뒤로는 지금까지의 괴물들과 딱히 다를 게 없었다.
모기가 인간에게 덤벼들다 죽는 듯한 광경의 반복 또 반복. 결말을 정해놓고 반복되는 비대칭 육탄전을 보는 듯하다.
“우아아아아!!”
모기 따위가 인간과 처절한 사투를 벌여봐야 무슨 박진감이 있겠냐마는.
그 모기가 양손으로 내리쳐도, 살충제를 뿌려도, 밟고 찢고 온몸을 짓이겨도 다시 살아나는 말라리아모기라면, 얘기는 좀 달라질 것이다.
푸확! 그리고 마침내 모기의 시뻘건 주둥이가 레비아탄의 눈동자에 직격했다.
―케에에에엑!!
푸화악! 레비아탄의 체액과 피가 분수처럼 솟아나고, 소나기처럼 계곡에 쏟아진다.
콰자자작! 레비아탄의 신체 표면을 타고 푸른 번개 줄기가 치달렸다. 대검을 박아 넣었던 한수호는 온몸이 터져나갔고, 이내 사지가 분해되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시작이 좋은데.”
디아나의 코앞에 처박힌 한수호의 목이 그런 말을 했다.
파지지직! 스파크와 함께 목 아래로 다시 뼈와 근육, 혈관들이 모여들어 한수호의 몸을 구성했고, 갑주까지 완벽하게 부활한 그는 레비아탄의 앞에 대치해 섰다.
―이놈… 감히 하등한… 여신의… 피조물 주제에!!
개인적으로 레비아탄은 아가리를 닫고 싸우는 게 좋았지 싶다.
내뱉는 단어가 너무 철 지난 삼류 악당 같아서 그런가. 노성을 지를 때마다 오히려 처음에 보여줬던 위압감이 점점 사라지는 느낌이어서 말이다.
그리고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닌지, 한수호도 실실거리며 외쳤다.
“그런 삼류 악당 대사나 내뱉으니까! 용사님한테 모가지를 썰리지, 새꺄!!”
다시금 모기가 인간에게 대들었다.
모기는 장장 3개월에 걸친 격전 끝에 자기보다 수만 배 거대한 레비아탄을 쓰러뜨렸다.
중간부턴 나조차도 세는 것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디아나의 육체에는 정확히 그가 몇 번이나 죽음을 경험했는지 기록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번엔 몇 번이나 죽었냐, 디아나.”
푸화악! 죽은 레비아탄의 목을 뚫고 나온 한수호가 그렇게 묻는다.
그러면 디아나는 활짝 웃으며 한수호의 데스 카운트를 말해준다.
“응! 512번 죽었어!”
“…와우, 신기록 갱신이구먼그래.”
두 사람은 일부러 웃는 얼굴로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한 척. 숱한 죽음 따위 신경 쓰지도 않는 척.
“갈수록 더 죽네! 히히.”
“그러게. 괴물이 어째 갈수록 더 세지는 거 같다, 야. 나도 나름대로 그만큼 강해졌는데, 쩝.”
그렇게 의식해서 행동하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나게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지만, 다 알고 있더라도 그렇게 했다.
그래야 좀 덜 슬픈 기분이라도 나기 때문이다.
“…나 좀 쉰다, 디아나.”
“응, 알았어.”
결국 유쾌한 분위기는 소리 소문 없이 끝나버렸고, 한수호는 전에도 그랬듯이, 그 자리에 대자로 뻗어서 한 달 정도를 기절한 듯이 잠들었다.
한수호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한 달. 디아나는 깊이 고민했다. 대부분 자기의 앞날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제 하나 남았네.”
디아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진 한수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여러 생각들이 그녀의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희로애락이 지나치게 뚜렷했던 그녀치곤 처음이다 싶을 정도로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 감정들은 한수호의 평온한 얼굴을 볼 때마다 더욱 격해졌고, 점차 그녀의 손은 떨려 오기 시작했다.
“아빠…….”
두려움이 점점 커지고 있다.
엄청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자기 자신의 미래. 그것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나 사실은 무서워, 아빠.”
한수호 몰래 볼멘소리를 내뱉어 봤다.
그러자 한수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뒤척이더니, 디아나의 손을 꽉 쥐었다.
순간 디아나는 한수호가 깨어난 줄 알고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잠꼬대였다는 걸 깨달았다.
“…히히, 아빠는 진짜, 바보구나.”
디아나의 입가에는 어느새 옅은 미소가 어렸다.
걷잡을 수 없이 정신을 좀먹던 공포도 어느새 씻은 듯이 사라졌다.
* * *
두 사람은 이번에도 피곤에 절어버린 몸을 이끌고 다음 사냥터로 나섰다.
이번엔 슈엘츠의 성도에조차 들리지 않았다. 성도에서 이런 전갈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재앙의 괴물의 공세가 갈수록 거세진다. 발키레아 기사단과 성당기사단으로 버티는 데 1년 내로 한계가 올 것 같다.
―민중의 폭동 동태가 심상치 않다. 조만간 반란군이 성도와 전면전을 벌인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성도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조심해라, 한수호.
헥터 카사스의 정갈한 글씨체로 쓰인 마법 서신. 그것이 한수호가 잠들어 있는 동안 디아나에게 전달되었다.
한수호는 디아나와 잠깐 작전회의를 했다.
“어쩔까, 디아나. 헥터 말대로라면 성도에 찾아가도 딱히 휴식 따윈 취하지 못할 거 같은데. 반란군 진압하고 재앙을 막느라 개고생할 각이다.”
“으음…….”
하지만 빡대가리와 빡대가리가 모여봤자 딱히 대단한 명안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결국 한참을 고민한 끝에 디아나가 먼저 조심스레 말했다.
“…그래도 루나 언니가 위험할지 모르니까, 돌아가는 게 맞지 않을까, 아빠?”
“음.”
적어도 루나의 연인인 한수호라면, 당연히 여기서 긍정을 했어야 한다. 그것이 도리상이나 이치상이나 맞는 선택이다.
하지만 한수호는 한참을 고민했고, 심지어 그 깊은 고민 끝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1년. 1년 내로 버티는 데 한계가 온다고 그랬지. 그러면 1년 내로 펜니르를 때려잡고 돌아가면 돼.”
“어? 아, 아빠. 그 말은……?”
“케나인 제국으로 바로 출발하자, 디아나. 펜니르가 봉인된 장소로 안내해 줘.”
“…….”
디아나는 진심으로 ‘아빠가 농담하는 건가?’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재밌는 농담을 하는 아빠치곤 좀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실실 웃으며 한수호의 얼굴을 쳐다봤지만, 한수호는 이미 짐을 싸고 앞장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방향은 북동. 케나인 제국이 있는 곳이었다.
“저, 저기! 아빠. 루, 루나 언니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니까?”
디아나는 당황해서 외쳤고, 한수호는 슬쩍 뒤를 쳐다봤다.
디아나가 흠칫 숨을 삼켰다. 마주한 한수호의 표정에서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돈의 이종사촌의 팔촌의 고종사촌이 곧 죽는다더라. 그 정도로 생판 남의 얘기를 주워들은 사람 같다.
“…….”
한수호는 잠깐 디아나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머리를 긁적이고 눈알을 굴리나 싶더니, 이내 천천히 디아나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약간 뜬금없는 화제를 던졌다.
“디아나, 지금 내 배에 칼침이 박혔어. 등까지 꿰뚫려서 피가 철철 나고 있다고 치자. 배는 물론이고 각혈하느라 온 얼굴도 피로 물든 상황이야.”
“…어어? 아빠, 배 뚫렸어? 어디 봐봐.”
“그렇다고 치자고.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할 거냐?”
“어… 그, 그럼. 우선 배의 상처를 막아야겠지?”
디아나는 당연한 대답을 했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였기에, 디아나는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정답이 있는 건가?’ 하고 불안해했다.
“맞아, 배의 상처를 막아야지.”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한수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쌈박하게 긍정했다.
“근본적인 상처를 막지 않는 이상 피가 쭉쭉 빠져서 뒈져버릴 게 뻔하니까.”
“으응, 아, 아빠라면 죽어도 살아나겠지만… 헤헤.”
디아나가 정답을 골랐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찰나.
한수호의 의미심장한 얘기가 다시 이어졌다.
“근데 누군가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이 새끼 입에서 피가 나온다. 그러니 우선 피가 안 나오게 아가리를 꿰매자. 그러면 피가 멎고 만사가 형통이다.”
“에… 그, 그럴 리가 없잖아.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내 말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배의 상처를 막지 않으면… 결국엔 뒈져버릴 텐데 말이야.”
“으응?”
디아나는 그 말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그 후로도 계속 그 대화의 의미를 물어봤지만, 한수호는 묵묵부답으로 그저 케나인을 향해 걸어갈 뿐이다.
디아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잠깐의 대화는 디아나의 기억 속에 굉장히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가자, 디아나.”
“으, 으응…….”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대충 이런 뜻이다.
반란군의 빈발도 공허 괴물의 출현도, 여신이 내리는 재앙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원인을 놔둔 채 두 요소를 힘으로 제압하는 것은 미봉책밖에 안 된다.
괴물이 계속 나오는 한 주민의 피해는 계속될 것이고, 그러면 언젠가 제2, 3의 반란군이 등장할 것이 자명하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봉인된 괴물을 모두 죽인다. 그래서 근본적인 원인인 여신의 육체를 소멸시키고, 저주를 없애야 한다.
“빨리 가자, 디아나. 쉴 시간도 없어.”
“으, 으응…….”
내가 봐도 한수호의 판단이 옳았다.
여기서 한수호와 디아나가 돌아가서 반란군을 진압하거나, 재앙의 공허 괴물을 막는다?
그야말로 배의 관통상을 놔두고 애꿎은 아가리를 틀어막는 격이다.
“…아빠.”
“응? 왜.”
디아나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수호의 뒤를 쫓을 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냐, 아무것도. 그냥… 미안해서.”
그래서 그냥 땅을 쳐다보며 사과를 했다.
당연히 한수호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띠었다.
“응? 갑자기 뭐가?”
“나도 잘 모르겠어, 히히.”
“…새끼 싱겁긴.”
그렇게 그들은 대륙의 동쪽. 타락한 은자 펜니르가 잠든 고룡의 평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