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외전 1―16. 메모리 오브 위치 (16)
그들은 대륙의 동서남북을 떠돌며, 여신이 봉인한 괴물 사냥에 박차를 가했다.
대륙 북쪽의 가장 끝자락. 훗날 ‘눈의 평원’이라 불리는 곳에서 요르문간트를 사냥하기까지, 약 3개월이 걸렸다.
―키에에에에엑!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거대한 호수. 그 호수가 작아 보일 정도로 거대한 뱀이 괴성을 지르며 쓰러진다.
콰장창! 호수를 메웠던 얼음이 속절없이 부서져 나갔다. 천천히 괴물의 힘없는 육체가 호수 아래로 침몰해 간다.
“죽어, 죽어! ×발, 죽어!!”
놈의 대가리는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그 머리 위에는 한수호가 붉은 대검을 연신 쑤셔 박으며 매달려 있었다.
괴물이 완전히 호수 아래로 수장되기 직전. 한수호는 놈의 머리를 박차고 뭍으로 착지했다.
“현역 용가리에 비하면 좁밥이네, ×바.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
한수호는 피식 웃으며 허세를 부렸다.
우두둑! 박살 났던 한수호의 온몸이 스파크와 함께 재생한다. 칠흑의 갑옷 안은 흘린 피로 가득 차서 파도가 넘실거릴 정도다.
한수호는 갑옷을 해제하며 안에 찬 피를 털어냈다.
“끄응…….”
무려 2주일간 지속된 이 전투로 한수호는 63번 죽고 185번의 중상을 입었다.
그래, 뭐. 3천 번 죽고도 패퇴했던 드래곤 이스그라드에 비하면… 어쨌든 한참 약한 것은 사실이었다.
“히히, 아빠는 역시… 싸울 때가 제일 멋져!!”
그런 한수호에게 디아나가 쌍따봉을 날려줬다.
한수호도 유쾌하게 웃으며 쌍따봉으로 화답했다.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디아나!!”
디아나는 죽은 요르문간트의 시신에서 마력을 정제한 핵을 추출해 냈고, 다시 신생 슈엘츠 성국으로 돌아왔다.
쉬고 있을 틈은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여행 준비만 마친 뒤 곧장 대륙의 서쪽 나라… 마르크트레스로 향했다.
“우와, 아빠! 무슨 싸움 대회 같은 거 하나 봐! 잠깐만 봐도 돼?”
“에헤이, 우리 그럴 시간 없어, 디아나. 빨리 따라와.”
“으아… 무신제라는 거, 보고 싶었는데.”
“나중에 보여줄게. 나중에.”
이 당시 마르크트레스 무신제는 500년 후처럼 카발리어 뽑는 대회가 아니었다. 이 나라의 건국자인 크로스페이드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만든 제례 겸 무투 대회다.
솔직히 나도 이 당시 무신제의 형태가 좀 궁금하긴 했다만, 디아나의 간청에도 한수호가 완강하게 거절하는 바람에 구경은 물 건너갔다.
“여기구나. 두 번째 괴물이 봉인된 장소.”
훗날 ‘무신의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카발리어 집성촌이 이루어질 거대한 평원.
그 한복판에 선 한수호와 디아나.
“정말 아무것도 없는 폐허구만.”
“헤헤, 그러네.”
수년간 거듭되는 전쟁과 재앙으로, 현재 대륙의 전체 인구는 500년 후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다. 그 때문에 나라 자체도 500년 후에 비할 바가 없이 작다.
500년 후 마르크트레스의 수도, 크로스페이드가 있던 땅은… 지금 이 시점에선 아직 마르크트레스의 영토조차 아니었다.
“시작하자, 디아나.”
“으응, 알겠어.”
디아나는, 두 번째 괴물 베히모스의 봉인을 풀었고, 그대로 한수호와 함께 격전에 돌입했다.
그들의 두 번째 괴물 사냥이 시작되었다.
―우오오오오!!
투두두두! 두 번째 괴물 베히모스는 땅속을 기어 다니는 거대한 지룡(地龍)이었다.
퇴화한 눈과 몇 겹으로 입안에 겹쳐 난 이빨. 쭈글쭈글하면서도 질긴 가죽을 온몸에 뒤집어쓴 그것이 땅속을 춤추다가, 엄청난 속도로 지면에 쇄도한다.
―쿠에에에엑!!
콰콰쾅! 요동치던 지면이 분수가 터진 것처럼 폭발한다. 그곳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분수가 아닌, 드래곤에 준하는 크기를 가진 거대한 괴물 지렁이였다.
한수호는 디아나가 만들어준 칠흑의 날개를 등 뒤에 붙인 상태였고, 허공에 유유히 떠서 놈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해내고 있었다.
“그래, 언제 다시 나오나 했다!!”
놈이 지면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 그때를 노렸다는 듯 한수호가 베히모스의 등가죽을 향해 달려든다.
콰자작! 불꽃이 이글거리는 대검이 놈의 살가죽에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한수호는 그대로 지룡의 몸을 타고 질주한다.
“아하하하하!!”
불꽃이 베히모스의 표면을 타고 치달린다.
고통 때문인지 놈이 지면 위로 완전히 튀어나와 격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케에에엑! 키에에에엑!!
하늘을 찢어발길 듯한 고음을 내며 버둥거리는 베히모스.
콰자작! 거대한 몸뚱이에 짓눌리고 얻어맞은 한수호는 갑옷째로 산산조각 나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갑옷과 함께 멀끔한 모습으로 재생되었다.
“크윽……!”
아무리 부서져도, 착용자가 살아있으면 거짓말같이 다시 회복되는 갑옷.
이것이 최후의 드래곤 이스그라드가 한수호에게 준 특별한 아이템, 불사의 용갑(龍鉀)이었다.
“멀었다. 아직 멀었어!!”
되살아난 한수호는 또 위태로운 광기의 미소와 함께 베히모스에게 달려든다.
“으아아아아!!”
―케에에에에엑!!
한수호의 고함과 베히모스의 괴성이 뒤섞이고, 그들의 신형이 뒤섞이고, 육편과 핏방울이 하늘 높이 튀어 뒤섞인다.
그렇게 며칠. 수십 일. 끝내 한 달이 넘어가는 전투 끝에, 피와 살점으로 점철된 땅 위에 서있는 건 한수호였다.
“크아아아! 이 조오오빱쓰애애애끼이이!!”
한수호는 베히모스의 죽음을 확인하자마자 격렬한 괴성을 질렀다.
베히모스의 푸른 피를 전신에 두른 채 격렬한 숨을 내쉬는 한수호. 광기로 젖은 눈이 유난히 형형하게 빛났다.
약 29일간. 한수호는 베히모스에게 213번을 죽었다.
“으어어… 뒈진다. 뒈져, ×바…….”
그런 지독한 강행군을 휴식 없이 하자니, 아무리 한수호라도 뻗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성도로 돌아온 순간, 철퍼덕. 한수호는 사실상 혼절하듯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으엥? 아, 아빠?! 왜, 왜 그래!”
“아, 아나스타샤…….”
“그게 어떤 년인데, 아빠?!”
당황하는 디아나를 앞에 두고 혼절해 버린 한수호는,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딱히 봉인된 괴물의 저주에 걸렸다거나, 흉마의 영향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그냥 잠든 거였구나… 휴우.”
일단 불사의 계약이 걸려있다 해도 한수호의 베이스는 인간이다. 그래서 한 달 내내 잠도 못 자고 전투를 지속한 피로가 쏟아졌을 뿐이다.
아무리 불사신이라지만 수면 시간을 가불해서 쓸 수 있다니. 잠 은행이냐. 이건 좀 부러운 능력이다.
“크어어… 그르렁, 큼, 음후후, 케헤헤.”
한수호는 코를 신나게 골며, 제 혼자 이따금 헤죽거렸다.
디아나는 그런 한수호의 모습을 하루 종일 쳐다보는 게 일과가 되었다.
‘아빠…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무슨 꿈이길래…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그를 웃게 하는 걸까.
즐거워 보인다. 평소 같은 시니컬한 웃음이 아니라 헤벌쭉한 표정. 저런 표정 자체를 오랜만에 봤다.
‘그 꿈 안에 나는 들어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디아나는 흠칫 놀랐고,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어 잡생각을 물렸다.
그리고 그 순간, 한수호의 개인실에 누군가 슬며시 들어왔다. 디아나가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루나 루에바였다.
“수호 씨는… 아직도 숙면 중이신가요?”
루나는 한수호가 쓰러진 이후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문안을 찾아왔다.
한수호가 걱정되어서 그런 것도 있고, 이제 여신의 예언자라는 짐도 털어버린 마당이라 그녀는 딱히 할 일이 없다. 남는 게 시간이라 자주 들르는 것이다.
“…….”
“…….”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한수호가 자는 모습을 지켜본다. 디아나는 이제 성도에선 루나가 없으면 허전해서 못 살 지경이었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디아나가 별안간 말을 건 것은.
“저기, 루나 언니.”
“네? 왜 그러세요, 디아나 씨.”
“아빠랑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을 때. 누가 먼저 좋아한다고 말했어?”
“어, 어? 예?”
디아나 나름대로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수호를 뺏기는 것 같아서, 선물 공세까지 해서 두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 그, 그건… 일단, 제가 먼저 했지요.”
그것을 알 턱이 없는 루나는 꽤 많이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슬쩍 붉히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당신을 어쩔 도리가 없이 좋아한다고… 수호 씨가 곤란할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답니다.”
그 말에 디아나는 조금 눈을 크게 떴다. 예상과 다른 대답이어서 그런 것이다.
“으음? 그랬구나. 난 당연히 아빠가 먼저 들이댔을 줄 알았는데.”
“아…하하, 저도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수호 씨는 사실 제가 고백하기 전까진, 저를 여자로 봐주지도 않았어요.”
“으응? 루나 언니는 누가 봐도 여자야. 아빠도 알고 있었는데?”
디아나의 순진한 물음에 루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게 아니라, 좋아하는 상대로 봐주지 않았다는 소리예요. 그냥 지켜야 할 신성국의 중요한 사람… 뭐 그 정도였겠죠.”
“아, 그렇구나. 나랑 아빠 사이처럼 말이지?”
“으음, 디아나 씨와는 좀 많이 다르지만, 일단 그렇다고 해둘게요.”
다르게 말하면, 디아나는 지금 루나 루에바를 아빠에게 어울리는 여자라고 인정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직접 나서주는 것이다. 다시 아빠와 루나가 잘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럼 언니, 다시 한번 아빠한테 말해봐. 좋아한다고. 아빠도 분명 좋아할 거야.”
“어, 네?!”
“언니는 아직 아빠 좋아하잖아, 아니야?”
“그, 그건… 네, 맞아요.”
루나는 생각보다 쉽게 수긍했다. 숨길 생각도 애초에 딱히 없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우물쭈물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자기 볼과 입가를 천천히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그, 그래도… 저는… 이미 이렇게 늙어버렸는걸요. 수호 씨도 저 같은 늙은 여자보단 젊은 여자가 더 좋을 테고…….”
“으음, 그렇진 않을걸?”
“네?”
“모르겠으면, 직접 한번 확인해 봐, 언니.”
“그게 무슨…….”
아리송한 디아나의 말에 루나가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잠시.
디아나가 침대를 가리켰다. 루나가 고개를 슬쩍 돌리자, 어느새 눈을 뜬 한수호가 그곳에 누워있었다.
히익, 루나는 어울리지 않게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수, 수호 씨. 어, 언제부터… 기침하셨나요?”
“당신을 어쩔 도리가 없이 좋아한다고… 수호 씨가 곤란할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답니다. 여기였나?”
“아아악! 그만, 제발 그만!!”
루나는 그 뻘쭘한 상황에 어쩔 줄을 몰랐고, 이내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디아나는 숨죽여 그 상황을 지켜봤다. 이내 그 침묵을 못 견딘 듯이 한수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진짜 다시 하시게요? 고백?”
“여, 역시… 좀 그렇죠? 얼굴에 주름도 자글자글해진 아줌마인데, 제가 주책맞은 소리를 했어요. 잊어주세요.”
“에이, 그래도 나이에 비해선 훨씬 젊어 보이십니다.”
“하아, 옛날 모습 그대로인 수호 씨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복잡한 기분이네요.”
큰 의미 없이 농담을 내뱉었던 루나였지만, 쓴웃음과 함께 돌아오는 한수호의 대답은 꽤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나이를 먹는 게 어때서요. 살아있으면 변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아?”
“나이를 먹는다. 주름살이 생긴다. 죽어간다. 죽어간다는 건… 지금 살아있다는 증거니까요. 놀리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는데, 저는 부럽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시간적인 존재다. 한수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그 말은, 대충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나도 불사신 경력이 길진 않았다만. 뭐…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는 알 것 같았다.
아무튼 한수호의 넋두리는 이어졌다.
“죽지 않는다는 건… 이미 죽어버린 거랑 다를 게 없더군요. 원래 시체의 시계는 움직이지 않죠. 그래서 변하지도 않아요. 지금 나처럼.”
“아! 저, 저는 그런 의미로 했던 말은……!”
그제야 루나는 자기 농담이 경솔했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한 기색으로 한수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지만 한수호는 이미 그런 고민에서 초연해진 기색이었다. 오히려 유쾌하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한다.
“솔직히 지금 제 눈에는. 나이를 먹고, 딱 그 시간만큼 변한 루나의 얼굴이 더 이뻐 보입니다.”
“…예?”
“미시 취향이라는 거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시고.”
“아… 그, 그럼……!”
뭐 그런 경위로, 두 사람은 근 10년 만에 다시 연인이 되었다.
정황상 지금부터 시작해서 세 번째 괴물인 레비아탄을 잡으러 운터란트에 갈 때까지, 한수호가 성국에서 휴식하는 사이 루나가 한수호의 아이를 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뒤로 한수호는 네 번째 괴물을 잡을 때까지 성국에 돌아오지 않고, 한수호가 약 1년 만에 모든 괴물을 잡고 귀환했을 때, 이미 신성국은 완전히 멸망해 버려서 루나의 행적이 묘연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