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외전 1―14. 메모리 오브 위치 (14)
마왕군은 본격적으로 한수호와 반목하기 시작했다.
물론 디아나라는 방아쇠를 쥔 한수호가 일방적으로 적대하는 상황이었고, 마왕 헬릭스와 휘하 군단장들은 어쩔 수 없이 한발 후퇴하게 된 것이다.
“…용사, 대화의 여지가 생기면… 언제든 나를 다시 찾아와라.”
마왕 헬릭스는 그 말만 남긴 채, 손에 꼽을 정도로 조촐해진 마왕군을 이끌고 신성국 슈엘츠를 탈출했다.
그들은 성국의 불신감에 지친 백성들을 선동하고 통솔했고, 이내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뿔뿔이 흩어져, 서로 다른 네 나라를 건국하는 데 이르렀다.
“이이… 배은망덕한 이단자 놈들이!!”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어찌 이런 망나니짓을 벌인단 말이오!!”
신성 슈엘츠 성국의 수뇌부는 당연히 격분했다.
물론 격분만 했다. 그들은 점점 거대해지는 공허 괴물의 재앙과, 나날이 사라져가는 신민들의 신뢰와 신앙을 잠재우는 것만도 이미 벅차다.
웬 시정잡배들이 독립 선언을 하든 새로운 나라를 세우든, 저지할 여력조차 없다. 그들의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한수호는, 문득 디아나 옆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춘추전국시대 개막이구만, 크큭, ×발.”
대륙 중앙에서 서서히 망해가는 신성국 슈엘츠.
북쪽으로 마왕 헬릭스가 세운 미텔란트.
서쪽에 거인 크로스페이드가 세운 마르크트레스.
남쪽으론 마녀 스키드 레아가 세운 운터란트.
그리고 동쪽은 엘테르나 케나인, 조비 케나인 남매가 세운 케나인 제국까지.
동서남북. 정직한 방위각만큼이나, 마왕군의 국가 창설 이유는 알기 쉬웠다.
한수호는 성당 정원에서 지평선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 봉인된 괴물들을 저희가 찾아내서, 나름대로 멸망을 막을 방법을 찾겠다는 거겠지.”
“으응, 그런 거 같네.”
“병신들 애쓴다. 어차피 디아나는 희생하지 않을 건데. 뭔 삽질들을 하고 있어. 그치, 디아나?”
“으, 응. 하하…….”
한수호의 입가에 시종일관 떠나지 않는 시니컬한 비웃음. 디아나는 웃어줘야 할지 울어줘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래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억지웃음만 지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디아나. 이건 우리끼리 감당이 가능한 일이 아니야.”
그러나 마왕 일행을 비웃었던 것과 별개로, 한수호 역시 나름대로 멸망을 막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고 있었다.
한수호는 디아나의 양어깨를 힘 있게 붙들었고, 이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소환하자. 나 말고 이세계의 용사를 몇 번 더 소환해 보는 거야.”
“소, 소환을… 더? 아빠 말고, 다른 용사님?”
한수호가 고심 끝에 도달한 결론은 그것이다.
용사가 더 필요하다. 그것도 존나게 많은 용사가.
“그래, 일단 사람이 좀 많아야 뭐라도 해볼 거 아니냐.”
“그, 그건 그렇지만.”
우선은 무작정 더 소환해 본다.
실패하면 그만인 거고 성공하면 좋은 거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으응, 알겠어, 아빠. 한번… 해볼게.”
루스티카의 도움 없이는 소환 의식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솔직히 좀 불안했다.
하지만 그녀도 나름대로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흑마법을 갈고닦았다. 이젠 반대편 세상에서 누군가 도와주지 않아도, 아마 비슷한 차원계를 감지해서 적합자를 소환하는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나만 믿어, 아빠, 헤헤.”
아빠의 희망을 부수고 싶지 않다는 일념. 그것이 디아나에게 뚜렷한 사명감을 부여했다.
디아나는 그날부로 이계의 용사를 소환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기 시작했고, 무수한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듭했다.
그렇게 천신만고를 다 한 끝에, 약 3년. 각기 다른 차원에서 두 명의 용사를 더 소환할 수 있었다.
“여, 여기는… 어디냐.”
한수호 이래 두 번째 소환된 이세계 용사의 이름은 헥터 카사스.
흑마법에 뛰어난 재능을 가져 훗날 디아나의 제자가 되는, 검은 머리칼의 미청년이었다.
500년 후엔 대머리 중년이 되더니 흑화해서, 나를 존나게 못살게 구는 천하의 십새끼이기도 하다.
“나, 나는… 부, 분명… 죽었는데.”
세 번째로 소환된 용사의 이름은 알테어 바토리.
설백조차 명함을 못 내밀 화타 중의 화타. 죽은 이도 벌떡 일으키는 치유 마법의 달인인 붉은 머리 성녀님.
나중에 흑화해서 박격포병으로 보직 변경하고, 나를 존나게 못살게 구는 천하의 십새끼 2다.
* * *
한수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반갑다, 야. 너희도 나처럼 여기 끌려왔구나? 난 한수호라고 한다.”
자기가 주도해서 소환해 놓고, 같은 처지에 놓인 선임 같은 행세를 한 것이다.
한수호는 제 입맛대로 조작된 자초지종을 술술 내뱉었다. 그 자초지종은 대강 이런 식이었다.
“너희들 이제 조졌어. 이 대륙이 지금 멸망 직전이거든? 웬 이상한 시커먼 괴물이 나와서 사람들을 다 죽이고 다닌단 말이야. 그거 막으라고 소환된 거야.”
괴물이 완전히 안 나올 때까지 집에 못 보내준다더라. 나도 지금까지 집 못 가고 있다. 그런 말도 덧붙였다.
이제 보니 딱히 거짓말은 하나도 안 했군. 다만 진실을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했을 뿐이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자, 잠깐.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어요.”
헥터와 알테어는 처음엔 굉장히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생각보다 금방 상황에 순응했다.
헥터는 곧장 자기 장기를 살려 디아나에게 흑마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알테어는 내전과 폭동, 분란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이 있는 곳마다 달려가 회복과 동시에 중재를 했다.
―그키키키키!!
그리고 한수호는 공허의 괴물이 나오는 곳에 누구보다 먼저 달려갔고, 한 차원이 다른 무력 수준을 보여주며 괴물과 정면으로 맞붙었다.
“그…아아아악!!”
무수한 죽음이 그의 몸에 새겨졌다. 갈가리 찢기고, 다시 살아나고, 그리고 또다시 찢긴다.
하지만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온몸이 으스러져도 단 한 발자국도 괴물에게 뒤를 내주지 않는다.
“죽어어어어!!”
흉흉한 살의에 찬 고함을 지르고, 대검과 하나가 된 것처럼 전장을 누빈다.
그 집념과 광기에는 지켜보던 디아나마저 흠칫 몸을 물릴 정도였다.
“한! 가세하러 왔다!”
“주민들의 피난은 맡겨주세요, 수호 씨!”
시간이 지나자, 헥터는 디아나에게 배운 흑마법으로 한수호의 보조를 맞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테어는 성국의 백성들을 괴물의 영향권에서 빠르게 피난시키며,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렇게 세 용사를 주축으로 한 슈엘츠의 방어 체계가 점점 잡혀나갔다.
―그르르르르!
몇 번이나 세 용사의 활약 앞에 괴물의 진군이 저지당했다.
인명 피해가 어느 정도 정체되자, 끝도 없이 거대해지던 공허의 괴물도 거짓말처럼 성장이 멈췄고, 진격하는 기세 또한 주춤해졌다.
“아아……! 봐라! 저, 전설의 3용사님들이다!”
“알테어 성녀님! 한 번만 웃어주세요!”
“만세! 3용사님 만세!! 여신의 축복이 있기를!”
공허 괴물을 저지하고 성도에 개선할 때면, 언제나 성국의 주민들이 그들을 칭송했다.
전설의 3용사. 그들은 이미 그렇게 불리고 있다. 아직 버젓이 살아있는데 전설의 뭐시기라니. 어지간히도 존경을 받았다는 소리다.
“허헛, 이것 참.”
“좀 그렇네요. 그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 열렬한 반응에 헥터는 싫은 척하지만 내심 좋아했고, 알테어는 눈에 띄게 부담스러워했다.
그리고 한수호는 정말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래서 싫어했는지 좋아했는지 어쨌는지, 디아나조차 감히 짐작을 못 했다.
“…….”
그저 전투가 끝나면 지친 얼굴로 자기 방에 돌아왔고, 침대에 디아나와 나란히 앉은 채 멍하니 사색에 잠겼다.
두 명의 용사가 더 소환된 지 벌써 2년. 몇 십, 몇 백 번이나 반복된 과정이었다.
디아나는 2년간 언제나 그랬듯 한수호의 팔에 머리를 기댄다. 그리고 한수호의 체취를 느끼며 얕은 잠에 들었다.
“이대론 안 돼.”
그리고 어느 순간, 한수호는 퍼뜩 그런 말을 내뱉었다.
디아나는 퍼뜩 머리를 뗐다. 그리고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
“으응, 뭐가 아빠?”
“이런 궁여지책은 의미가 없어. 결국 한계가 와.”
“한계라면…….”
“수명의 한계. 식량의 한계. 용사를 이 이상 소환하지 못하니까… 헥터와 알테어 두 사람이 죽으면, 이 평형은 순식간에 깨진다. 그리고 전처럼 서서히 인류는 말라 죽겠지.”
그렇다. 용사는 더 이상 소환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디아나의 힘으론 두 명까지가 한계였다. 사실 두 명을 소환한 것만으로도, 이미 향후 50년은 소환 게이트를 열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리바운드가 왔던 것이다.
“미, 미안해, 아빠. 내가 못나서… 내, 내가 소환 마법을 좀만 더 잘했다면… 히잉.”
디아나는 단숨에 기분이 시무룩해졌다. 고개를 푹 떨구고 울먹거렸다.
한수호는 디아나의 자책을 틀어막았다.
“에헤이, 나 나쁜 새끼 만들지 마, 인마. 내가 너 눈치 보라고 이런 말 했겠냐?”
그리고 평소처럼 해죽 웃으며 디아나의 머리를 벅벅 쓸어줬다.
디아나는 옛날부터 그 거친 손놀림을 좋아했다. 계속 영원히, 내 옆에서 이래줬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나 잠깐 드래곤을 좀 만나러 가야겠다, 디아나.”
그런 디아나의 작은 소망마저 박살 내는 한수호의 한마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다.
“어, 에?”
디아나는 자기 귀를 의심하고 싶었기에 얼빠진 탄성을 흘렸다. 일부러 안 들린 척을 한 것이다.
하지만 한수호의 입에서 나오는 현실은 자비가 없었다.
“유일하게 이 세상에 아직 살아있는 용가리가 있다며. 아스가르드랬나?”
“…이스그라드?”
“어, 그래. 그거.”
파라이소 대륙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으로 알려진 고룡의 이름.
루스티카에게 항상 들었기에 알고 있다. 동화 속에 악당 단골손님인 드래곤. 지옥의 가짜 용용이들 따위보다 훨씬 강력하고, 독특한 마법을 쓸 줄 아는, 이 대륙의 터줏대감.
디아나는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을 삼키며 물었다.
“…근데? 그 용용… 아니, 드래곤이 왜?”
“그 최후의 드래곤이 숨어 사는 레어가, 케나인 제국 고원 끝자락에서 발견됐다 그러더라. 걔네 존나게 오래 살았다며? 죽은 여신에 관해서 좀 알고 있나 해서 말이나 섞어보려고.”
디아나가 지금 격심한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지금 한수호가 주절주절 말하는 모습 때문이다.
“그, 그런 걸 누가 알려줬어, 아빠?”
“마왕 헬릭스. 자기 마왕군 중에 진룡의 피가 좀 섞인 마족이 있으니, 대화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네. 그래서 같이 가보자 그러던데.”
그것이 아무리 봐도, 자기를 그곳에 데려갈 행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위험하다. 지금의 한수호에게서는… 옛날 루스티카와 마지막 대화를 했던, 그때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래서 알겠다고 했어. 간다고 했지. 너를 희생하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진짜 모기 눈물만치라도 있다면… 뭐라도 해봐야 하는 건 맞으니까.”
“그, 그렇구나. 아빠, 그럼 나도……!”
디아나가 퍼뜩 선수를 치려 했다.
하지만 한수호는 별안간 디아나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며 디아나의 말을 막았다.
“잠깐 좀 출장 갔다 올게. 너는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지켜줘, 디아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한수호는 디아나가 우려하던 그 말을 내뱉었다.
“아, 으……!”
싫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루스티카가 떠났을 때처럼, 비명을 지르고 떼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필사적으로 참았다.
“…왜? 왜 나를 두고 가?”
그렇게 의젓하게 물어볼 수도 있게 됐다. 사실상 같이 가는 건 포기하고 이유나 좀 듣자는 거다.
디아나는 요 몇 년 사이, 아빠의 처절한 희생 덕분에 숙녀가 다 돼있었다. 체념과 포기를 배워서 어른에 한발 가까워졌다.
“드래곤한테 한번 붙잡히면…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더라. 그래서 넌 안 데려가. 절대로.”
그 뒤로도 한수호는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했다.
드래곤의 사고방식은 다른 생물들과 완전히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른다. 얼마나 강한지도 미지수다. 일이 잘못되면 도망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불사신 네크로맨서나, 그 휘하의 언데드를 죽이는 방법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위험한 곳에 너를 데려갈 순 없다. 블라블라 이러쿵저러쿵.
“응, 으응… 그렇…구나.”
디아나는 중간부터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그냥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 납득해 버렸다.
이번에도 똑같다. 한수호는 모든 것을 바치려 하고 있다. 디아나의 건강, 안전, 그리고 행복을 위해서.
“아빠,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디아나는 결국 울먹이면서 그렇게 물었다.
이 집착과 광기가 이해되지 않는다. 불사신인 그녀조차 이젠 한수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수호는 애초에 그녀의 이해 따윈 바라지도 않는다는 양, 전에 없이 후련한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그날… 네가 날 안아줬을 때. 내가 얼마나 구원받았는지, 알아?”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 이건 불사신 인생 평생 갚아도 부족한 은혜 갚기일 뿐이다.
한수호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한수호는, 헥터와 알테어에게 편지 한 장씩만 남긴 채 동쪽으로 사라졌다.
이 세계 최강의 생명체. 드래곤과 담판을 짓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