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외전 1―11. 메모리 오브 위치 (11)
디아나는 한수호에게 비장의 야심작, 멸망의 대검을 선물해 줬다.
흑마법의 정수가 깃든 이 검을 만드는 데, 자그마치 5년 정도를 전부 쏟아부었다.
“내가 물어봤는데, 발키레아 아저씨들 검술은 엄청나게 커다란 검이 필요하다면서? 헤헤, 그래서 내가 아빠 전용으로 만들었어! 어때? 대단하지?”
한수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가장 먼저 파악하고, 그것을 알아낸 다음에는 선물의 품질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빠의 관심을 다시 나에게 돌리겠다는 일념. 그런 디아나의 간절한 마음이 깃든 것이 멸망의 대검이었다.
“…어, 그래. 고맙다.”
그런데 한수호의 반응은 디아나의 예상보다 훨씬 저조했다.
억지로 띤 웃음.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표정. 대검을 쥐고 대강 허공에 휘둘러보는데, 칼끝이 연신 흔들린다.
한수호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
무슨 일이 있었구나. 성녀님이랑 뭔가 있었구나.
디아나는 곧장 그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녀는 끈질기게 한수호를 추궁했다.
한수호는 고민 끝에, 힘없는 웃음을 질질 흘렸다.
“…관뒀어. 전부.”
“어? 뭐, 뭘 관둬?”
“검술 수련. 마침 배울 건 거의 다 배웠으니까 딱 좋은 시기였지. 루나와의 관계도 정리했어. 이제 다시는 루나를 만나지 않을 거니까… 슈엘츠에 잠입할 일도 없어.”
“왜, 왜……? 어째서 그런 거야, 아빠?”
디아나의 물음에 한수호는 잠깐 덜컥, 모든 행동을 멈췄다.
이내 대답을 이어나가는 한수호. 바닥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생기가 실시간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깨달아버렸거든. 루나가 말이야. 나이를 먹어서… 얼굴에 주름살이 생겼더라.”
자칫 들으면 ‘나이 먹고 늙은 여자라 버렸다.’라는 쓰레기의 발언처럼도 들린다.
하지만 기억을 읽는 나는 알고 있다. 디아나의 눈에 비친 한수호의 지독한 공허. 그것은 분명, 불사신 몸뚱이에 대한 고민에서 오는 것이었다.
나 스스로가 그런 적이 있어서 그런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10년 동안 말이야. 정신 차려보니까 세상이 몰라보게 변했더라. 슈엘츠의 도시들도 잔뜩 변하고, 내 검술 스승은 물론이고, 당연히 루나도 나이에 맞게 늙었는데…….”
그렇다. 한수호가 이곳에 소환된 지도 벌써 10년을 넘었다.
10대 후반의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이미… 서른 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어야 했다.
“나만, 이 몸뚱이만… 아무런 변화가 없어.”
하지만 나이는 먹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10대 후반의 고등학생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어떤 변화도 없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한수호의 시계만 완전히 박살 나있었다.
“변해가는 사람들을 마주 보기가, 무서워졌다.”
한수호는 머리를 쥐어 싸매고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무섭겠지. 변해버린 세상과, 빠르게 변해가는 연인의 얼굴을 계속 보면, 괴로워질 것이다.
“그래, 나는… 살아있는 이, 인간이… 아니었어. 부, 분명. 분명 알고는 있었는데……!”
변하는 게 정상이다. 변하지 않으면… 비정상이다.
그러니까 전혀 변화가 없는 나는, 저들과 완전히 다른 괴물이다. 그 사실을 계속 자각하게 된다.
그 상황 자체가 무서워졌다는 소리일 거다.
“…아빠.”
불사신의 사고방식은 불사신이 가장 잘 안다.
내가 지금 한수호의 한마디로 심리를 전부 꿰뚫었듯, 디아나 역시 한수호의 심경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아빠, 괜찮아. 나도 아무것도 안 변했어. 나도 아빠랑 똑같아.”
디아나는 지금 한수호가 가장 듣고 싶어 할 만한 위로를 알고 있었고, 그대로 말했다.
디아나는 한수호를 꽉 끌어안았다. 루스티카가 풀죽은 자신에게 항상 그렇게 해줬듯이.
“…아, 아아.”
생기가 죽어가던 한수호의 눈가에 다시금 총기가 어렸다.
그는 울먹이며 디아나의 하얀 머리카락을 가만히 손끝으로 쓸어 넘겼다. 그 감촉을 영원히 기억하려는 듯이. 끊임없이 그녀를 갈구했다.
“…디아나, 그렇구나. 그래, 맞아… 너는, 나랑 똑같지.”
“응, 그러니까 아빠. 나랑 있으면… 변하지 않아도 괜찮아.”
디아나는 한수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튼 한수호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한수호의 굵직한 두 팔이 자기를 힘껏 껴안는 것을 느꼈다. 언데드답지 않은 따듯한 체온이 디아나의 온몸을 뒤덮었다.
“디아나, 계속 나랑 같이 있어줘.”
“응, 그럴게. 나는 아무 데도 안 가, 아빠.”
“나도 널 위해서…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게. 세상 전체를 척져도, 너를 지킬 수 있을 만큼.”
어린애처럼 공포에 떠는 한수호에게, 디아나는 한없이 연민을 느끼는 한편.
‘아아… 다행이다, 히히.’
아빠가 자기에게 돌아와 줬다는 사실에 당장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 * *
뭐 10년간의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렇게 10년 후의 어느 차디찬 겨울 한복판. 본격적인 사건의 발단은 한 가지 소문에서 시작됐다.
“몰살 마을?”
한수호는 퍼뜩 고개를 들며 되물었고, 디아나는 한 손에 사과를 든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사람들이 막 증발한 것처럼 없어진대. 마을 전체가 하루아침에 다 죽어있기도 하고, 동물 이빨 자국 같은 것도 남아있거나… 땅에 엄청나게 큰 구멍이 뻥 뚫려있거나 그렇대. 그게 열몇 번이나 일어났다고 하더라고.”
“오호.”
“근데 이번에 그 성녀님이 또 예언을 했대. 절대 막을 수 없는 최후의 재앙이 시작될 거라던가? 그래서 슈엘츠 전체가 요즘 난리도 아니래.”
“…흐음.”
‘성녀님’ 얘기가 나오자 한수호는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태연을 가장한 얼굴로 낮은 탄성을 흘린다.
디아나는 자기가 괜한 소리를 했다는 생각에 찔끔했다. 허공을 가만히 주시하던 한수호가 표정을 고치고 물었다.
“근데 디아나, 그런 소문을 너는 어떻게 들었냐? 너나 나나 도망자 신세인 건 똑같았잖아.”
“나… 음, 그게. 마왕 아저씨한테서 들었어, 히히.”
“…마왕? 마왕 헬릭스 말하는 거야?”
“응, 그게 사실은…….”
한수호가 검술 수련과 루나에게 빠져있는 사이, 마왕군과 개인적으로 친해졌던 것을 전부 실토하는 디아나.
얘기를 끝까지 들은 한수호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음, 그랬구나. 알겠다, 그러면 뭐 납득이 되는군.”
“어? 어, 응.”
디아나는 한수호가 화내지 않아서 깜짝 놀랐다.
당연히 혼날 거라고 생각했다. 루스티카는 자기 지시를 어기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면 엄청나게 노발대발 화를 냈으니까.
“미안하다, 디아나. 내가 좀 더 신경을 써줬어야 했는데.”
“으응? 아, 아니야! 아빠는 잘못 없어!”
하지만 한수호 입장에선, 자기가 디아나에게 소홀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딱히 디아나를 나무랄 수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자괴감 어린 쓴웃음을 연신 지을 뿐이었다.
“뭐 어쨌든, 그게 갑자기 추격이 빡세진 이유라는 거지?”
“으응, 아마도?”
한수호는 중얼거리며 주위를 슬쩍 둘러봤다. 디아나도 그에 따라 시선을 사방으로 돌렸다.
사방에서 죽어가는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으… 크윽.”
“어, 어떻게 마녀의 기사 놈이… 긍지 높은 기사단의 검술을……!”
날개 달린 금빛 갑옷을 발키레아 기사단원이 수십 명.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엎어져 낮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전부 한수호가 한순간에 벌인 일이었다. 디아나에게 선물받은 멸망의 대검을 광풍처럼 몰아쳐,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기사단을 쓸어버린 것이다.
“…….”
한수호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쓰레기 쳐다보듯 한 번씩 훑어볼 뿐, 야멸차게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그 사건을 조사해 보자, 디아나.”
“으응? 그래야 해? 왜?”
“띠껍지만 어쩔 수 없네. 이대로 오해하게 놔두면, 저 새끼들이 앞으로도 계속 우리 찾아와서 개지랄할 거 아니냐.”
“아, 그러네.”
“목마른 놈이 우물 파야지, 뭐.”
이미 슈엘츠 성국 내에서 이미지가 나락까지 치달은 한수호와 디아나다. 그 때문에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바가지를 뒤집어쓰는 게 그들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벗으려면, 죄도 없는 그들이 직접 발로 뛰어야 한다. 유죄 추정의 원칙이 족같은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마침 디아나, 너 마왕군이랑 친해졌댔지?”
“으응, 군단장 언니야들이 맛있는 것도 막 준다?”
“어, 그래. 부럽다, 야. 아무튼 한번 협력해 달라고나 해보자. 없는 것보단 낫겠지.”
“응! 걱정 마, 아빠! 내가 잘 말해볼게!”
그렇게 그들은 마왕군이 기거하던 대륙 남단의 계곡 지대로 찾아갔고, 디아나를 앞세워 마왕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협력을 요구했다.
마왕군은 의외로 흔쾌히 협력에 응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 마왕군 부락에도, 이미 그 이상 현상이 일어났다.”
침통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마왕 헬릭스. 다른 군단장들의 표정도 영 좋지 않았다.
마왕군도 소문의 그 몰살 마을 현상을 직접 경험했다. 안 그래도 개체 수가 적은 그들이다 보니, 한 부락 전체가 하루아침에 증발한 듯이 사라져버리자 굉장히 침통한 분위기였다.
“슈엘츠에선 이것을 ‘여신의 분노’라고 해명하고 있다.”
마왕 헬릭스는 아직 슈엘츠 성국과 적당한 거리감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때문에 성도에서 들려오는 소문이나 소식에 다른 이들보다 훨씬 빠삭했고, 자신이 들은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공유했다.
“여신의 분노?”
“그래, 성국의 신민들이 여신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탐욕적이고 원색적인 삶을 쫓았기에 여신이 벌을 내리고 있다는 거지. 몇 개 마을은 이교도 마을이었다는 소문도 일부러 돌리는 듯하다.”
마왕의 말에 한수호는 미간을 슬쩍 찌푸렸고, 이내 신랄하게 웃었다.
“×발, 신팔이가 치트키야, 아주. 아무튼 우린 죄 없고, 다 너희가 잘못한 거니 너희가 알아서 살길 찾아봐라, 이거 아냐?”
“그런 책임 회피 의도도 분명히 있고, 내가 보기엔 의도가 하나 더 있다.”
“다른 의도? 그게 뭔데.”
“이 여신의 분노가 종식되려면 불사의 마녀 디아나와, 그녀의 수호자인 ‘한’의 목이 필요하다. 그런 소문이 같이 돌고 있다.”
디아나와 한수호의 시선이 동시에 마왕에게 향했다. 한수호가 골치 아픈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 아빠가 짜증 낼 때 나오는 습관이다. 디아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발, 이참에 식었던 여론 다시 불붙여서 우리도 잡아 처넣겠다, 이거네.”
“그런 것으로 보인다.”
“사건 해결은 못 할망정, 아주 못 잡아 처먹어서 안달이구나. 이 정도면 사실 우리 사생 팬인 거 아니냐? 개새끼들.”
사실 디아나의 최강급 무력은 10년에 걸쳐 이미 만천하가 아는 사실이 됐다. 그래서 10년 전의 참사 때, 교황청과 기사단이 무능했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는 더 이상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신성국은 디아나와 한수호의 신변 확보에 갈수록 열을 올리고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전보다 더했다.
“지금 교황이 누구랬지.”
“교황 폴룩시우스. 파마(破魔)의 파동으로 마력을 삭제하는 신성 마법을 사용하더군. 나로선 좀 꺼림칙한 자다.”
디아나는 멀찍이서나마 그 교황 폴룩시우스를 본 적이 있다.
전 교황인 카스트로 3세와 다르게 젊은 미소년이었다. 옆에 발키레아 기사단으로 보이는 한 여자 기사를 항상 데리고 다녔기에 똑똑히 기억한다.
한수호와 마왕의 대화는 이어졌다.
“걔가 정권 잡고 나서 이상하게 더 우리한테 집착하는 거 같단 말이지. 마왕 아재, 우리한테 이 정도로 집착할 가치가 있다고 봐?”
“너희는 잠재된 위험성에 불과하다.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집단 폐사 사건의 중대성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혹시 우리한테 왜 이러는지 알아?”
“글쎄, 우리도 교황청의 내부 사정까진 잘 모른다.”
한수호도 당연히 머리가 있다. 이 의미 없는 집착은 이미 도를 넘었다.
마왕이 객관적으로 생각하기에도, 지금의 디아나와 한수호에겐… 수십의 마을들이 폐사당하는 사건의 진상을 흐려서까지 잡을 가치는 없다.
거기서 마왕 헬릭스의 눈가는 슬쩍 가늘어졌다.
“…그렇다는 건, 뭔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겠지. 너희들에게.”
디아나와 한수호는 의문스러운 눈을 끔벅일 뿐, 어떤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그들의 숨은 가치는 그들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