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외전 1―10. 메모리 오브 위치 (10)
본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10년.
그 잠깐의 휴식기 동안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불사의 마녀 디아나와 그 따까리인 한수호.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든 사로잡으려는 신성국. 그 사이 끼어 조용히 연명하는 조촐한 마왕군.
세 진영 간의 다툼에서 나오는 잔잔바리 해프닝 정도는 있었지만, 세상의 명운을 쥐락펴락할 정도의 사건들은 아니었다.
“디아나.”
“응?”
그나마 내가 주목할 만한 사건이 세 가지 정도가 있는데.
우선 첫째, 한수호 자신이 디아나에 비해 전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가 생각해도 나 너무 좁밥이지 않냐?”
“좁밥이 뭐야?”
“아이고, 그 말은 잊어버리자. 지지야, 지지.”
“으잉?”
“어쨌든 내가 지금 너무 약해빠졌단 말이야. 공포의 대왕 하수인 타이틀이 울겠다, 야.”
그래서인지, 한수호는 그때부터 본격적인 검술 연습에 들어갔다.
한 퇴역 용병에게 용병 검술을 배우는 것으로 시작해, 마왕군의 일부였던 용치기 일족에게서 단검술을 배우기도 했다.
급기야는 루나의 연줄을 이용해, 비밀리에 슈엘츠의 성당기사단과 발키레아 기사단의 제식 검술을 배우기도 했다.
“아빠, 난 아빠가 그… 좁밥? 그거라도 딱히 상관없어. 내가 지켜줄게!”
디아나는 날이면 날마다 수련에 매진하는 한수호를 한사코 말렸다.
굳이 힘 빼며 쓸데없이 고생하는 한수호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아빠가 검술 배운답시고 요즘 자기랑 잘 안 놀아준다.
하지만 한수호의 철학은 확고했다.
“안 돼. 너랑 비빌 정도는 안 돼도, 최소한 내가 널 지켜줄 정도는 돼야지, 인마.”
“으잉? 왜? 나 어차피 아무도 못 해쳐. 안 지켜줘도 되는데.”
“아무튼 안 돼. 자존심이 있지. 네 뒤에 숨어서 응원 토템 계속하면 사람들이 숭 봐요, 숭 봐.”
“…이미 전 세계가 우릴 흉보고 있는 거 같은데에…….”
결국 디아나는 한수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때 디아나가 한수호를 좀 더 적극적으로 설득했으면 ×발, 내가 마지막 전투에서 훨씬 수월하게 이 새끼를 때려잡았을 텐데. 통탄에 겹다.
뭐 어쨌든, 한수호가 용병 검술과 용 치기의 단검술의 기본을 마스터하는 데 3년가량이 걸렸다.
“흐음, 이 정도면 얼추 폼은 좀 나오는데?”
“와아, 아빠 멋지다! 춤추는 것 같아!”
실제로 그의 검술은, 스승들이 입을 모아 감탄할 정도로 습득력과 흡수력이 남달랐다.
마왕이 넘겨준 칠흑의 양날 검 베스타크. 디아나의 하얀 골검 에스파다. 두 개의 쌍검을 다루는 자기의 방식대로, 단검술과 용병 검술을 개량해 접목하는 응용력이 특히 발군이었다.
“음하하! 내 놀라운 재능이 심히 두려울 따름이다. 그만 잘해, 한수호!”
“응응! 아빠는 역시 천재야! 헤헤!”
“그래그래! 좀 더 칭찬해 줘, 디아나! 칭찬은 한수호를 더욱 춤추게 한다!”
“어, 아… 그, 그건 싫은데에.”
한수호는 확실히 내가 봐도 전투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하나의 동작을 배우면 열 가지 응용 동작을 떠올린다. 무엇보다도 전투의 흐름을 읽는 것을 귀신같이 잘했다.
본인 아가리로 천재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건 좀 역겹다만, 실제로 가히 천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수호는 용병 검술과 용치기 단검술에서 만족하지 못했다.
“음, 이걸론 좀 부족한데… 뭐랄까. 좀 더 체계적이고 강력한 한 방이 없어.”
“으에… 아직도 더 하려고? 씨이.”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그 결과 한수호는 ‘이 대륙에 나라라곤 슈엘츠 성국 하나뿐. 그러면 슈엘츠 최강인 발키레아 기사단의 검술이면, 당연히 검술도 최강이겠지?’라는 단순한 생각에 미쳤다.
“성녀님, 혹시 나 검술 가르쳐줄 만한 기사단 사람들 알아요?”
그렇게 그는 발키레아 기사단의 검술을 배울 방법을 모색하다가, 신성국의 성녀라는 인맥을 이용하게 된다.
프로피샤의 성녀, 루나 루에바는 한수호의 요구에 굉장히 곤란해했다.
“아… 그, 그렇게까지 간곡하게 부탁하시면… 제, 제가 최선은 다해볼게요.”
하지만 결국은 수락해 줬다.
디아나의 흑화 사건 이후, 신성국과 한수호 일행의 관계는 당연히 최악으로 치달았지만, 한수호와 루나 개인 간에는 의외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던 상태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루나가 한수호에게 굉장한 부채 의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로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속죄가 된다면, 저도 기뻐요.”
폭주하는 디아나를 막아낸 건 한수호였고, 현재 상황에서, 디아나의 폭주를 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도 한수호다.
하지만 신성국의 교황청은 그런 한수호에게 감사는커녕, 오히려 악으로 매도했다.
교황청 위신과 권위의 실추를 두려워한 것이다. 그 알량한 위신 때문에 디아나 일행과 여전히 적대하여, 성국 신민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루나는 일이 그렇게 되도록 방치한 것이 미안했다.
“속죄는 무슨… 그쪽이 뭘 잘못했다고.”
물론 한수호는 언제나 그렇게 얼버무렸다.
뭐 어쨌든, 그렇게 루나의 노력 끝에, 결국 한수호는 신성국 최강의 기사단인 발키레아 기사단의 제식 검술도 배우게 된다.
“디아나, 오늘도 갔다 온다.”
“으응, 갔다 와, 아빠.”
그러나 기사단 제식 검술을 배우려면 당연히 신성국에 출입해야 했고, 국가 수배범 신세인 한수호는 필연적으로 잠입을 해야 한다.
그럴 때마다 디아나는 한수호와 한동안 이별을 해야만 했다.
“괜히 어디 돌아다니다 사람들한테 쫓기지 말고! 위험하니까 웬만하면 우리 은신처 주변에 꼼짝 말고 있어, 알겠지?”
“히히, 아빠는 참 걱정도 많아. 내가 위험할 일이 뭐가 있어?”
“아니, 너를 마주친 사람들 쪽이 위험하다고.”
“아.”
그런 한수호의 신신당부가 있었기에, 디아나는 은신처 주변에서 잘 움직이지도 못했다.
당연히 디아나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심심하네에…….”
깊은 산기슭의 은신처 앞에 혼자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디아나는 아빠가 검술을 배우는 광경을 상상했다.
그렇게 약 1년 정도가 지났을까. 여기서… 보는 내 입장에선 정말 충격적인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난다.
“디아나.”
어느 날. 평소처럼 검술을 배우고 돌아온 한수호가 디아나를 불렀다.
평소보다 뭔가 멍한 기색이었다. 디아나는 의문을 느끼며 곧장 대꾸했다.
“응, 왜?”
“나 여친 생겼다.”
“…으잉?”
그렇다. 한수호에게 때 아닌 봄이 찾아왔다.
지금까지 지켜본 정황과, 미래에 한수호가 누구와 애를 만들었는지를 생각하면, 그 대상이 누군지는 당연히 견적이 나온다.
×발, 족같은 세상. 커플 다 뒈졌으면.
“루나 알아? 신성국 성녀 루나 루에바.”
“어, 응. 다, 당연하지.”
“왜인지는 도저히 모르겠는데, 그 루나가 나 좋아한대.”
“헤에.”
처음에 디아나는 한수호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디아나는 누군가를 이성적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다. 그 때문에 사랑과 호감의 차이조차 몰랐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한수호의 다부진 팔을 끌어안았다.
“나도 아빠 엄청 좋아해! 아빠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나도 좋아, 히히.”
“어, 음. 아니, 디아나. 그런 느낌이 아니고.”
한수호도 이내 그것을 깨닫고 디아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줬다. 그리고 디아나는 나름대로 깨달아버렸다.
동화의 단편적인 지식. 그리고 디아나가 가진 날카로운 직감으로 어렴풋이 깨달은 것이다.
‘아, 그거구나. 공주님이… 용사님이랑, 결혼하는……?’
그 성녀님이 한수호에게 가진 애정은, 자신의 그것과는 어딘가 다르다.
결혼.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 성녀님은 나의 용사님과 그걸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 아빠도… 그 루나 언니가 좋아?”
디아나는 왠지 모를 불안을 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수호는 디아나가 생전 보여준 적 없는 얼굴로 실실거렸다. 그리고 볼을 긁적였다.
“어, 뭐. 당연히 싫진 않지. 이쁘고 착하고 얼마나 좋냐. 나한텐 과분할 정도지.”
“…그, 그렇구나.”
그런 대답이 나오자, 디아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엔 아빠가 웃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는데, 지금은 왠지 저 얼굴을 때려주고 싶었다.
‘아빠가 용사님이고, 성녀님이 공주님이면.’
왠지 자기가, 동화 속에서 가장 큰 방해물인 ‘드래곤’이 된 것 같다.
그래서 두 사람 관계에 대해서 함부로 물어보기도 싫고, 그런 걸 신경 써야 하는 상황 자체도 싫었다.
“으하하! 디아나, 나 오늘은 좀 늦을 거다!”
“어어? 왜애?”
“루나가 공중정원으로 데이트 가잰다! 으하핫!”
“아아… 그, 그래.”
그런 상황이다 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디아나의 마음속엔 조금씩 루나 루에바에 대한 원망이 쌓여갔다.
“아빠는… 내 건데, 씨이.”
산을 거닐며 사과를 따 먹고, 낮잠을 자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혼자서 화를 삭이고 외로움을 달래는 것도 지쳤다. 그 생활이 3년 정도 지나자 디아나도 한계에 달했다.
디아나는 결국 한수호의 말을 몰래 어기기로 했다. 은신처에서 나가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아빠는… 성녀님이 훨씬 좋은걸. 나 따윈 신경도 안 쓰는데 뭐.’
자그마한 복수심도 깃들어 있었다.
그렇다고 신성국에 잠입하긴 너무 위험하다는 것쯤은 디아나도 알고 있었다. 아빠에게 걸리면 혼나는 걸로는 안 끝날 것이다.
그래서 디아나는 대륙의 남쪽 끝자락에 숨어 살던 마왕군 집성촌에 기웃거렸다.
“엥, 너 왜 여기 혼자 있냐?”
마왕군 집성촌을 미아처럼 배회하던 디아나. 그녀를 가장 먼저 발견한 건 푸른 머리의 마녀 군단장, 스키드 레아였다.
“그 정신 나간 용사 놈은 어쩌고? 맨날 사은품처럼 붙어 다니더만.”
디아나는 시무룩해져서 바닥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빠가 너무 바빠. 심심해.”
“허어, 그래서 여기로 놀러 왔다? 이년아, 여기가 무슨 탁아소로 뵈냐?”
“…아빠 빼면… 아는 사람들이 여기밖에 없는걸.”
“허, 참 내.”
스키드 레아는 기가 찬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결국 덥석, 디아나의 팔을 붙들고 마을을 가로질렀다.
“따라와, 꼬마 마녀.”
스키드는 디아나를 데리고 마을을 구경시켜 주고, 마왕을 비롯한 다른 군단장들도 소개해 줬다.
“어머나, 어쩜 이리 귀엽게 생겼담.”
“…저런 가녀린 소녀의 어디에서, 그런 무시무시한 마법이 나오는 건지, 흐음.”
“너무 뚫어지게 보지 마. 애 닳겠다, 야.”
마왕과 군단장들은 각자 한마디씩 하며 디아나를 반겼다. 디아나는 생각지도 못한 환대에 어안이 벙벙했다.
“어… 언니 오빠들은, 우리를 싫어하지 않았어?”
“싫어하긴. 우리라고 좋아서 너희를 쫓았던 건 아니다.”
한때 갖은 오해로 정면에서 충돌했던 사이였고, 슈엘츠의 명령 때문에 디아나를 사로잡는데 열의를 올렸지만, 그것도 벌써 수년 전의 일이다.
마왕군 전체의 생활 기반이 잡혀서 슈엘츠 성국의 지원이 필요 없어졌다. 이제 디아나 일행의 추적은 그들에게도 유명무실한 업무가 된 지 오래였다.
“헤헤… 그, 그렇구나.”
디아나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왁자지껄함에 외로움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녀의 두 눈에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당황한 디아나가 서둘러 닦아냈지만, 그녀 본인보다 더 당황한 마왕군이 그녀를 달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 흐잉. 사… 사실은…….”
디아나는 마왕군의 호의적인 모습에 경계심이 풀어졌고, 결국 자기 고민거리를 털어놓았다.
마왕군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흠… 크흠. 그, 그렇군.”
남성진인 마왕 헬릭스와 조비 케나인, 크로스페이드는 헛기침과 함께 침묵을 지켰고.
“어머, 저런. 딱해라. 그 느낌 잘 알지.”
반대로 여성진인 스키드 레아와 엘테르나 케나인은 공감한다는 양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으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들은 나름대로 머리를 맞대고, 디아나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여러 솔루션들을 앞다퉈서 타진하다가, 문득 스키드 레아가 말했다.
“뭐 끝내주는 선물이라도 줘보면 어때? 그 눈치 없는 용사 새끼가 정신이 번쩍 들 만한 걸로.”
“…선물?”
“어, 마족이든 인간이든, 구워삶는 덴 뇌물만 한 게 없어요, ×바.”
천박한 말씨에 다른 군단장들이 눈치를 줬지만, 디아나는 그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마왕과 군단장들에게 퍼뜩 작별 인사를 했다.
“고마워, 언니 오빠들! 나 아빠한테 뇌물 만들러 가야 해서 가볼게! 헤헤!”
…그렇게 디아나는, 아빠의 관심을 돌려버릴 만큼 엄청난 선물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주목할 만한 사건. 내 입장에선 가장 영향력이 큰 사건이기도 하다.
“아빠! 이거 내가 주는 선물이야!”
디아나가 한수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준 물건은, 피처럼 새빨간 검신을 가진 묵직하고 거대한 대검.
후에 ‘멸망의 대검’이라 불릴 위험한 마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