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287화 (263/280)

287화. 외전 1―9. 메모리 오브 위치 (9)

언데드 하나의 검이 한수호의 머리를 둘로 쪼개려 달려든다.

―키에에엑!

하지만 그 순간, 익숙한 마법 영창과 함께 한수호의 눈앞에서 언데드가 형체도 없이 찌부러졌다.

―우오오오오!

우두둑, 빠가가각.

관절 비틀어지는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마력 파동이 주변을 후려친다. 고통스럽게 비명 지르며 나가떨어지는 언데드들.

“이건……!”

지켜보던 한수호와 디아나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을 향했다.

마력 파동의 시발점. 어마어마한 힘의 주인이 있는 곳으로.

“용사, 이제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나.”

망자 병사의 거센 파도를 저지한 자는 마왕 헬릭스였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으로 한수호와 디아나를 번갈아 쳐다보는 마왕. 한수호는 쓰게 웃으며 본론만 말했다.

“틈. 잠시면 됩니다. 마법을 쓰든 완력을 쓰든 부하를 쓰든! 디아나가 있는 곳까지 내가 다가갈 틈을 뚫어주십쇼.”

마왕 헬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한수호에게 손을 뻗어 시커먼 기운을 발사했다.

파지직! 꿀렁거리던 칠흑의 기운이 이내 새카만 칼날을 가진 양날 검으로 정제되었다.

지금의 한수호보다도 지켜보는 내가 더 익숙할 칠흑의 마검, 베스타크였다.

“일단 그걸 사용해라. 최소한의 호신용 검 정돈 있어야겠지.”

“오오, 고맙수다.”

그리고 마왕은 한수호 앞에 군단장들과 함께 서서, 망자 병사들을 대치했다.

“잘 뚫으십쇼, 아재!”

“네 앞가림이나 잘하시지!”

“갸아아악!”

그렇게.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한.

불사의 마왕과 좀비 용사의 임시 동맹이 결성되었다.

* * *

디아나의 망자 병사. 신성국의 발키레아 기사단. 그리고 마왕군과 한수호의 연합이 지리멸렬한 삼파전을 벌였다.

“아아악! 여신, 여신이시여!”

“저, 저리 가! 오지 마아!”

“으아아아!”

―우오오오, 우오오!

날개가 부러진 망자의 군세가 인간들을 뜯어먹는다. 단단한 갑옷도, 마법 방어벽도 문제가 되지 못했다.

망자 군대의 뒤에는, 연신 주문을 외며 붉은 문자를 흘려 넣는 디아나가 있었으니까.

“레스렉시온, 인피니타!”

디아나가 언제나 한수호에게만 사용해 주던 언데드의 강화 마법.

디아나의 영창을 맞은 언데드는 맨손으로 갑옷을 부쉈고, 검을 휘두르면 마법의 방어막이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끄, 으어어억……!”

갑옷을 부순 언데드는 그 안에 숨어있는 무력한 인간의 살갗을 뜯어먹었다.

산 채로 갈비뼈가 열리며 눈을 까뒤집는 기사 하나. 장기와 육편이 쏟아져 나온다. 그 광경에 도처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수없이 수라장을 헤쳐왔다 자부하는 나조차 구역질이 치미는 광경이었다.

“그, 으으으으…….”

죽었어야 마땅할 상처를 입은 기사들은 그대로 주춤주춤 일어서더니, 마침내 붉게 물든 눈으로 귀기 어린 눈빛을 사방으로 쏘아내었다.

―우오오오오!

인간의 군세는 기하급수로 줄어들고. 정비례해서 망자의 군세는 점점 세를 불려간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군.”

이내 마왕과 마계 군단장들은 장기전에서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최후의 결전 마법을 준비했다. 그 낌새를 디아나도 눈치채고 그에 걸맞은 대규모 마법을 사용했다.

수만에 달하는 흑색 광탄. 그리고 시체를 처덕처덕 엮어 만든 끔찍한 대포가 시뻘건 흉마의 입자를 한껏 머금는다.

“간다! 한 번에 쓸어버려라!”

“이이이……! 그런 거에 안 당해!”

가공할 속도로 서로의 목숨을 탐하는 혈사포와 군단장의 마법이 격돌하는 순간.

―우오오오오!

“끄아아아악!!”

지축이 뒤집히는 굉음. 하늘이 순간 번쩍 가까워졌다가 순식간에 멀어진다. 한수호는 그 어마어마한 폭발에 휘말려 그대로 날아갔고, 디아나조차 정신을 잃었다.

온 세상이 일순 새하얗게 물든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수호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몸을 질질 끌며 일어섰다.

어느 정도 혼란이 가라앉은 한수호가 사위를 살폈다.

“이, 이게… 어디냐.”

그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얗게 빛나던 석조 건물과 민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운석이 떨어진 양 거대한 크레이터와 산발적으로 남아있는 시체 쪼가리. 그것이 장소를 추측할 수 있는 요소 전부였다.

“우우… 아우.”

그리고, 디아나. 그녀도 멀리서 움찔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그녀의 주변을 호위하던 망자 병사들이 대부분 쓸려나갔다. 그녀는 무방비하게 폐허가 된 광장 한가운데 서있었다.

“용사! 네가 그렇게 바라던 틈이다!”

멍하니 서있던 한수호를 다그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당연히 마왕이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한수호는 다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서슬 퍼런 포효가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으아아아아!”

“히, 히익.”

디아나가 조작한 잔류 망자 병사들이 한수호의 앞을 막아선다.

푸직, 푸푹! 한수호는 온몸에 병사들의 칼날을 정면에서 얻어맞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칼을 꽂은 채, 피를 흩뿌리며 달려오는 그 모습엔 아무리 디아나라도 공포를 느꼈다.

“디아나아아아아!”

이미 두 사람의 거리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눈을 시퍼렇게 뜬 한수호가 검을 한껏 치켜든 채 포효했다.

결전의 순간은 목전이었다.

“흐, 으아아!”

끝이다. 체념한 디아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감긴 눈꼬리 끝으로 피 섞인 눈물방울이 찔끔 맺혀 떨어졌다.

한수호는 그런 디아나 앞에 당당히 섰다. 그리고 치켜든 베스타크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푸욱, 깊숙이 꽂았다.

바닥에 말이다.

“받아라아아아! 사랑의 딱밤!”

바들바들 떨리며 발사를 기다리던 한수호의 중지가 시원하게 작렬했다.

또각! 딱밤은 디아나의 이마에 명중했다. 고개가 홱 젖혀졌다.

“꺄웃!”

앙증맞은 디아나의 신음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 * *

“어, 음?”

자기 이마를 매만지며 눈물을 글썽이는 디아나.

아프긴 아프고, 혼란스럽기도 하고, 의문스럽기도 해서 반응이 애매했다.

한수호는 그런 디아나에게 얼굴을 확 갖다 대며 말했다.

“야, 디아나.”

“으, 으응.”

퍼뜩 고개를 움츠리는 디아나.

한수호는 그 모습을 지그시 쳐다보다가, 한껏 몰아붙이듯 다그쳤다.

“너 때문에 사람 많이 죽었다.”

끄덕끄덕.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디아나.

“건물도 많이 박살 났다, 알지?”

끄덕끄덕. 여전히 고개만 끄덕이는 디아나.

한수호는 쓰읍, 침음을 삼켰고. 이내 턱을 치켜올렸다.

“대답.”

“…네에.”

디아나의 입에서는 자동으로 존대가 튀어나왔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한수호가 계속 디아나를 타일렀다.

“잘못했어, 안 했어?”

“자, 잘못은……!”

“어허!”

“으, 으읏.”

디아나는 고개를 숙였다. 숙였지만, 역시 너무너무 분한 나머지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결국 넋두리처럼 푸념을 늘어놓았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어?”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디아나의 눈. 그녀는 울먹거리며 계속 말했다.

“그놈들이, 그놈들이 먼저 루스티카를 못살게 굴었어. 나를 루스티카랑 떨어뜨려 놨어. 나는, 그러면 나는? 그냥 당하고 있어야 해?”

“그건…….”

“그런 게 어딨어! 루스티카도 바보야. 왜 그냥 당하고만 있어?! 아빠도 바보야!! 세상에 다 바보뿐이라고!”

한수호는 그제야 씨익,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뭐, 뭐가 웃겨. 아빠, 이 바보 멍청이! 씨이이!”

다시 디아나에게서 아빠라는 호칭이 나왔다. 아마 그래서 한수호는 웃은 것일 테다.

툴툴거리는 디아나에게 한수호는 말했다.

“디아나, 내가 살던 세상엔 이런 말이 있다.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은, 절대 남에게 하지 말아라. 공자님 말씀이다.”

“…그게 뭐야.”

“네가 불합리하게 괴롭힘당하는 게 싫었으면, 남한테도 그러면 안 된다는 소리야.”

광기와 혼돈의 행보를 보여준 또라이 용사답지 않은 정석적인 훈계였다. 디아나는 눈을 시퍼렇게 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바보. 바보 같은 아빠. 속으로 연신 ‘바보’라는 욕을 하며, 디아나는 한수호를 원망스럽게 올려다봤다.

“그럼 저 사람들은! 저 사람들은 왜 루스티카를 괴롭히는데! 그러면서 자기가 괴롭힘당하면 싫어하잖아! 그건 순 엉터리야!”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네 말도 맞는 말이더라.”

“어?”

한수호가 쌈박하게 인정하자 디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순간 디아나의 사고가 마비된다.

그런 디아나에게 한수호는 히죽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내가 제안을 하나 하지.”

루스티카. 다시 봐도 사람 하나는 정말 잘 봤다.

디아나를 설득하는 데는 정말 한수호가 적임자였다.

“어어? 제안?”

한수호는 파라이소 대륙의 미래나 평화 따위 모기 뒷다리만치도 관심 없다. 디아나만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할 수 있는, 정신병자급으로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척을 져도, 내 소중한 사람과 나만 웃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괜찮다. 박정용과 놀랍도록 사고방식이 비슷한 사람이지.

“디아나.”

“우, 우응?”

그래, 루스티카가 모멸과 핍박을 군말 없이 감수했던 것도, 애초에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었겠지.

그저 디아나가, 하나뿐인 혈육이, 앞으로도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을 뿐일 것이다.

그때가 돼서야 나도 루스티카의 과거 행동들을 모두 이해했다.

“이 세상 인간의 인구가 몇 명이랬지? 한 천만? 1억은 넘으려나?”

멍하니 한수호를 우러르는 디아나, 한수호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디아나와 시선을 나란히 한 채, 바닥에 꽂아 놓은 베스타크를 들어 디아나의 손에 쥐여줬다.

“내가 대신 죽어줄게. 네가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하는… 전 세계 사람 분량만큼.”

순간 디아나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멍하게 표정이 풀려버린 디아나. 얼빠진 탄성은 조금 늦게 나왔다.

“…어, 어?”

“백만 번이든 천만 번이든 까짓거, 내가 대신 가불해 준다고.”

“어, 어어?”

“자.”

혼란스럽게 손을 떠는 디아나에게 한수호는 고개를 숙였다.

나와의 최종 결전에서조차 장난스럽던 한수호치고는, 제법 엄숙한 자세였다.

“죽여라. 네가 분이 풀릴 때까지.”

물론, 그녀가 정말로 1억 번을 죽이겠다 치면, 한수호는 그 전에 까무러칠지 모른다.

정신이 나가서 발광을 할지도 모른다. 아니… 한 500번쯤 죽어본 내가 장담하는데, 아마 분명 그럴 것이다. 1만 번도 채 못 버틴다.

“어차피 난 죽었다 살아나는 것밖에 못 하는 병신이거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다.”

그래도 저건 분명 진심이다.

디아나가 원하면 죽어주겠다. 백만 번, 천만 번, 1억 번이라도. 그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아빠가, 왜 죽어……! 그… 그게 뭐야!”

“뭐긴 뭐야. 네가 하려고 했던 짓이지. 타깃만 전부 나로 바뀔 뿐이야. 자, 어서.”

“아, 으… 흐으읏!”

갈팡질팡, 어쩔 줄 몰라 검을 든 손을 내려다보는 디아나.

그러다 주위를 둘러본다. 멍한 얼굴로 사태를 관망하는 군중들. 하나하나 시선을 맞춘 디아나.

끝내 디아나의 시선은 다시 한수호에게 왔고, 한수호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나랑 같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디아나.”

그리고 한수호는 디아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나는 네가 소환한 용사님이잖아. 나를 믿어. 내가 곧 정의라고.”

이윽고 디아나의 커다란 보라색 눈망울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녀의 격해진 감정을 쏟아내듯,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우아아앙, 흐아아앙!”

한수호는 그대로 털썩 자빠졌다.

새파란 하늘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꺼이꺼이 우는 디아나의 목소리. 빌어먹게 맑은 하늘.

모든 것이 남의 일처럼 현실감 없이 다가오길 잠시.

“…끝났구나.”

한수호는 한마디 중얼거리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거기서 끝났으면 그거만 한 미담이 없었겠지.

하지만 대충 행복한 데서 자르고 끝내면 되는 소설과 달리, 현실은 그 뒤가 이어진다.

“거기 서라, 마녀의 하수인!”

“히에에엑!”

개과천선을 했든 어쨌든, 디아나는 수많은 인간을 죽인 희대의 살인마다. 게다가 모든 인간을 몰살시키려 했고, 그럴 힘이 실제로 있는 위험 종자다.

마왕과 마왕군은 그 디아나의 야욕을 저지하는 데 조력한 것을 높이 사서, 슈엘츠의 후대 교황으로 취임한 폴룩시우스와 극적인 타결을 하나 맺는다.

―첫째, 마왕군은 ‘공포의 대왕’ 디아나 에스파다와, ‘대왕의 하수인’인 한수호를 사로잡는 데 최선을 다해 조력한다.

―둘째, 그것을 대가로, 신성국 슈엘츠는 마왕군의 파라이소 대륙 정착을 암묵적으로 윤허한다.

“마왕님! 공포의 대왕과 더러운 하수인 놈들을 쳐 죽여버려요!”

“꺄아악, 멋있어!”

그런 상황이다 보니, 여러 방면에서 선동 및 날조가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마왕군과 기사단의 정면충돌도 의견 충돌로 인한 ‘섬싱’ 정도로 미화됐다. 그것마저 사실 한수호의 뒷공작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발키레아 기사단도 일단 신성국 교황청 소속의 군인이다. 교황 명령 아래 함구령이 내려진 이상, 진실을 아는 자들도 항의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거기 서라, 내 안락한 노후 생활! 으하하!”

“아오, 저 끈질긴 년이 진짜!”

시장의 사과를 털어먹던 한수호는, 디아나를 어깨에 걸치고 마왕군을 피해 필사의 도주를 감행하는 중이었다.

“꺄하하, 아빠아, 달려, 달려!”

목에 힘껏 팔을 두르고 해맑게 웃는 디아나를 슬쩍 보는 한수호. 어느새 그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좋아! 더 빨리 달린다! 꽉 잡아, 디아나!”

“꺄아악, 하하하!”

“어디 세상 끝까지 도망쳐 보자고!”

그들은 그렇게, 빌어먹게 파란 하늘 아래로 끝나지 않는 도주를 계속했다.

잘됐군, 잘됐어.

…….

…뭐, 그래. 이게 그들의 황당한 첫 에피소드다.

사실 여기서 이렇게만 끝났어도 충분히 해피엔딩일지 모른다.

하지만 미래에서 디아나의 과거를 읽고 있는 나 박정용은, 이게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지.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절대 행복한 방향으론 끝나지 않는다는 걸.

지금부터 기구하고 박복한 디아나와 한수호의 인생은, 잠깐의 휴식기를 거친 후 2페이즈에 돌입한다.

지금부터가 오히려 진짜다.

세계를 구할 생각 따위 전혀 없었던 시체술사 소녀와 언데드 용사. 그들이 스스로 무너져가는 파라이소 대륙을 구하는… 아니, 구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이 최초의 해프닝으로부터 10년 뒤에 일어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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