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외전 1―7. 메모리 오브 위치 (7)
어쨌든 갑작스럽지만 용사와 마왕이 맞닥뜨렸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이 세계의 명운과 자신의 목숨을 건 피 튀기는 싸움뿐이다. 한수호는 새하얀 골검 에스파다를 고쳐 잡으며 디아나에게 외쳤다.
“디아나! 저놈이 마왕인 건 확실하지?!”
“웅? 그렇지?”
“좋았어! 저놈만 족치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한수호는 마왕에게 돌격했다.
마왕. 때린다. 죽인다. 집에 간다! 이미 그것밖에 머릿속에 안 들어오는 표정이었다.
“으라아아아!”
그렇게 파라이소 대륙 최초의 마왕과, 최초의 용사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력과 무력의 차이는 실로 명확했다. 마왕은 수많은 마법을 사용해 한수호를 찢고, 태우고, 부숴 죽였다.
“그하악!”
뿌드드득. 한수호의 온몸이 뒤틀리며 공중으로 몸이 튕겨 나갔다.
팔뼈가 튀어나오고 창자가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다리와 허리마저 방향으로 비틀려 사람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걸레짝이 된다.
철퍽. 고깃덩어리로 변한 한수호가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고…….
“우오오오옷!”
그 고깃덩어리들이 바닥을 발발발 기어가기 시작하자,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마왕이라도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뭐냐, 미친!”
“뭐긴 뭐야, 현실이지!”
그렇게 그들의 싸움은 장장 사흘간 지속되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모두 디아나 덕택이었다. 한수호가 반복되는 죽음 속에서 꺾일 것 같을 때. 귀신같이 디아나의 마법이 작렬해 전황을 역전시켰다.
“아빠를 괴롭히는 사람은, 내가 용서 안 해!!”
한수호를 마법으로 강화하고, 직접 가공할 위력의 공격 마법을 사용하는가 하면, 주변의 시체를 일거에 일으켜 무적의 시체 군대를 만들어 진격시키기도 했다.
“크으으…….”
분한 신음을 흘리는 마왕과 디아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한수호는, 그럴 때마다 물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브라보! 디아나 님! 브라보!!”
“에헤헤, 나 잘했어?”
“아유 그럼! 잘하다마다!”
사실상 한수호는 응원 토템으로 전락해 있었다. 박수 머신 딸랑이였다.
한수호는 마왕에게 진다. 그러나 마왕은 디아나에게 진다. 먹이사슬이 형성된 그들의 싸움은 좀처럼 끝나는 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먹이사슬 하위에 있는 한수호와 마왕 헬릭스가… 둘 다 불사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망할… 끈질긴 놈들!!”
바지직, 빠직! 새빨간 전광이 마왕의 치명상을 타고 흐른다.
순식간에 아물어가는 마왕의 치명상. 상처가 부글부글 끓으며 재생하는 한수호와 달랐다. 저 친구는 좀 멋있게 재생한다.
한수호는 당연히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대해 문의를 때렸다.
“…디아나?”
“우웅?”
“저게 어떻게 된 일이냐.”
“어떻게 되다니.”
“그사이 시간이 되돌아오거나, 내 눈이 병신 된 게 아니라면, 마왕이 멀쩡히 서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멀쩡히 서있어, 아빠!”
해맑게 소리치는 디아나.
한수호의 안면 근육이 신나게 꿈틀거린다.
“아까까지만 해도 바닥에 발발 기면서 다 죽어갔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으응, 지금 보니까 제4계 마왕한테도 불사 각인이 박혀있네! 저 마왕도 나랑 비슷한 마법을 쓸 줄 아나 봐, 헤헤.”
“…아, 그러냐.”
“응!”
그야말로 불사신 바겐세일의 현장이구나.
기억을 읽어 들이던 나는 그런 생각을 했고, 한수호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린 표정이다.
한껏 들뜬 디아나의 외침이 등짝을 후려친다.
“가라, 아빠! 정의의 힘을 보여줘!”
…그렇게 한수호는 사흘 내내 미친 듯이 죽었다.
정말로 미친 듯이, 죽기만 했다.
“기에에에엑!!”
한수호와 나의 마지막 전투가 떠오를 정도로 너절한 싸움의 연속.
시산혈하였다. 한수호의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 쪼가리는 산을 이룬다.
“갸아악! 이, 이건 뼛속까지 아프다!”
형체도 못 알아보게 찌부러지고.
“크허억, 뜨, 뜨거워!”
용암으로 하반신부터 녹아내리는가 하면.
“끼에에엑!”
쏟아지는 불벼락에 얻어맞아 괴성을 지르고.
“끄어어어, 추워어어!”
갑자기 몰아치는 얼음 폭풍에 휘말려, 냉동육 한수호가 되기도 했다.
“꺄욱, 으헥! 오와아악!”
그리고 그것의 반복. 반복. 또 반복.
그러나 한수호는 끝내 패배를 선언하지 않았다. 그 오기와 깡에는 지켜보는 나조차 탄복할 정도였다.
결국 먼저 진저리를 낸 마왕 쪽이 눈을 부릅떴다.
“좋다, 나도 더 이상은 참지 않는다. 이제 진심으로 네놈들을……!”
한수호는 그 멘트를 듣자마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저것은 누가 들어도 마왕의 2차 변신 선언. 그 전에 선수를 치겠다는 심정인 듯하다.
한수호는 지면을 박차고 곧바로 놈에게 달려갔다.
“마왕님!”
달려간 그는 별안간 바닥에 철퍼덕, 납작하게 엎드렸고.
“항복하겠습니다!”
이마를 쾅쾅 찧으며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 * *
“이잉?”
“…뭐라고?”
반응은 두 곳에서 각각 나왔다.
디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마왕은 입을 쩍 벌린 채 한수호를 내려다봤다.
이건 나도 좀 놀라웠다. 대체 무슨 속셈으로 저런 말을 한 건지 궁금증이 치솟았다.
“아니, 거 생각을 좀 해보십쇼. 이렇게 뚝배기 터지게 싸워봐야 결국 서로 피만 보고, 천년만년 끝도 안 날 거 아닙니까? 시간 낭비지, 시간 낭비.”
모두의 의문 속에서, 한수호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지성인답게 대화로 해결해 봅시다!”
참고로 선제공격은 한수호 쪽이 먼저 쳤다. 이 새낀 정말 디아나의 기억을 까보면 까볼수록 광기가 더해지는 양파 같은 미친놈이었다.
간접 체험하는 나도 기가 막힌 뻔뻔함인데, 하물며 당사자인 마왕은 얼마나 황당할까.
“예언의 마지막 조각이라는 놈이 이런 난봉꾼이라니… 여신을 저주하고 싶어지는군.”
예언.
그렇다. 그들 셋은 모두 문제의 예언 때문에 여기서 개고생 하고 있는 것이다.
한수호는 손을 퍼뜩 들고 질문했다.
“저기요.”
“뭐냐.”
“대체 그 예언이라는 게 뭡니까?”
한수호의 말에 마왕은 눈을 크게 떴다. 어이가 없는 걸 넘어 경악했다는 표정이다.
“네놈… 용사인 주제에 예언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나? 나도 아는데?”
“디아나가 말을 안 해줘서.”
“디아나?”
한수호가 손가락을 치켜들어 디아나를 가리켰다. 두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디아나를 향했다.
“음?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징? 어라, 아빠가 마왕한테 항복? 이이잉? 그러면? 마왕이 정의의 편이 되는 건가아?”
디아나는 눈앞의 상황조차 아직 이해하지 못한 상태다.
눈알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며 헤죽거리는 미소가 걸려있다.
미친년이라는 단어를 사람의 형태로 빚으면 딱 저 꼴이겠다.
“저런 애라서요.”
“으음.”
한수호는 안타깝다는 행색으로 그녀를 삿대질했고, 마왕도 알 만한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다, 그러면 예언의 내용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해 주지.”
결국 마왕은 한숨을 내쉬며 모든 전말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한수호는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을, 이세계 소환된 지 근 1년 만에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디아나도 교황님도 아닌, 마왕님 덕분에 말이다.
“…이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왕의 설명이 끝난 순간, 한수호는 입을 굳게 닫고 상념에 빠져있었다.
무언가 떠올린 얼굴이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눈을 부릅뜨고 어깨를 움찔거린다.
“…그건, 좀… 이상한데.”
“이상하다니?”
“예언의 내용은, 세상을 멸망시킬 공포의 대왕이 이계에서 곧 소환된다. 그러니까 그걸 억제하려면 또 다른 이계에서 용사를 소환해야 한다, 이거죠?”
“그렇다. 그것의 뭐가 이상하지?”
한수호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자기 생각을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듯이.
“근데 마왕님, 당신 세상 멸망시키러 온 거 아니라며.”
“그건…….”
마왕 본인도 정곡을 찔려서 입을 콱 다물었다.
한수호가 느낀 이상한 점은 다른 게 아니라, 마왕 헬릭스가 파라이소 대륙에 찾아온 목적이다.
“봐요. 지금 다른 세상에서 게이트 열고 넘어온 게 총 세 명인데…….”
마왕 헬릭스는 인간들에게 복수를 절치부심하며 찾아온 것은 맞지만, 인류를 멸망시키거나 세상을 멸망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럴 힘도 없다. 그저 개체 수가 얼마 안 남은 마족들이 평화롭게 안주할 땅이 필요했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발악하듯 신성국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 뿐이다.
“마왕님 아니고 내가 아니면, 그 세상을 멸망시킬 공포의 대왕이라는 건?”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다.
이내 그는 유령에 홀린 듯이 멍한 눈빛을 디아나에게 던졌다.
“디아나는 말이야. 지옥이라는 다른 세상으로 쫓겨났다가 돌아온 거 맞지?”
“응, 왜애?”
“그 루스티카라는 할망구도 너도, 네크로맨서 일족이라 그랬지?”
“응! 헤헤, 아빠 벌써 잊어먹었어? 역시 아빠는 바보구나, 바아보!”
“하하, 그래. 뭐…….”
한수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갈 데가 없어진 시선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한수호의 안에서 한 가지 결론이 나온 듯하다. 그는 나직하게 한마디를 혼자 씨근거렸다.
“이런 뜻이었구나. 이 ×발, 족같은 빨간 눈 할매.”
아무래도 여기에 소환되기 전, 지구에서 루스티카에게 무슨 말을 들은 모양인데, 정확히 어떤 말을 들었던 건지까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는 존재들이 난입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둘러싸고 네 사람의 신형이 마왕 쪽으로 몰려들었다.
“마왕님! 모시러 왔습니다!”
4인 4색. 개성적인 복장과 생김새를 가진 네 명의 마계인들.
그들이 한 명씩 마왕 앞으로 나와 각자의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마왕님, 교전이 점점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저희만으론 벅찹니다.”
길게 기른 하얀 머리칼에 붉은 눈. 하얀 드레스를 입고 하얀 석장(錫杖)을 든 관능적인 여인.
이름은 엘테르나 케나인. 마왕의 전속 부관이었다.
“…이 새끼들 쉬지를 못하게 합니다. 좀 도와주십쇼, 마왕님.”
엘테르나와 놀랍도록 유사한 외모에, 검은 제복을 빼입고 쌍수 단도를 든 남자.
그의 이름은 조비 케나인. 엘테르나의 쌍둥이 오빠이자, 마왕군 암살 부대의 군단장이다.
“야, 마왕! 뭔 짓을 하길래 이리 뺀질거려! 우리 개조뺑이 치고 있잖아! 빨리 너도 가세해, ×바!”
그렇게 괄괄하게 소리치는 건, 고깔모자를 눌러 쓰고 시약병을 온몸에 잔뜩 두른 푸른 머리칼의 꼬마 마녀였다.
이름은 스키드 레아. 마왕군 폭격 부대의 군단장이다.
“죄송합니다. 제 힘이 일천하여… 더는 적의 공세를 버티기 힘듭니다.”
마지막은 침통하게 고개를 숙인 집채만 한 거인.
터질 듯한 근육을 눌러 담은 군인다운 제복과, 안면부를 완전히 가린 낡은 투구가 인상적이다.
거인의 이름은 크로스페이드. 마왕군 선봉 돌격대의 군단장이다.
“와아, 저 사람들 쫌 멋지다. 그치, 아빠?”
디아나가 한수호에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내가 봐도 저렇게 어벤저스처럼 순식간에 어셈블 하니 좀 멋있긴 했다.
한수호는 어색하게 웃어주며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하하, 그, 그래.”
…혹시나 마왕군 간부들 이름에서 눈치챘을지 모르겠다만, 내가 용사 현역이던 대륙력 1108년 기준, 파라이소 대륙에는 이 마왕군 간부들 이름을 딴 도시나 지역이 하나씩 존재한다.
우선 마왕 스트라토 헬릭스는, 미텔란트의 수도인 마도(魔都) 헬릭스.
엘테르나 케나인과 조비 케나인 남매의 이름을 딴 용제국 케나인.
스키드 레아는 운터란트 망자의 계곡의 유서 깊은 유원지, 스키드 랜드.
거인 크로스페이드는 기사의 나라 마르크트레스의 수도. 크로스페이드.
지역명에 그들의 이름이 붙은 이유는 간단하다. 실제로 그 모든 지역들은 그들이 직접 세운 곳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는 지금 시점에선 한참 이후의 얘기다. 일단 시간순으로 사건을 정리하는 중이니, 이 얘기는 나중에 하겠다.
“마왕님, 지시를.”
부관인 엘테르나가 먼저 마왕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자 다른 개성 만점의 부관들도 하나같이 무릎을 꿇고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자 마왕 헬릭스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고, 이내 시선을 하늘 위로 올렸다.
“손님들을 정중하게 모셔라.”
마왕의 시선 끝에는, 광휘로 둘러싸인 갑주와 날개로 무장한 기사들이 공중에서 도열해 있었다.
골목 끝까지 꽉 채운 것도 모자라 하늘 저 너머, 그리고 마왕의 머리 위에서도 은빛 날개를 퍼덕거리는 기사들. 발키레아 기사단의 모습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우리가 너희를 놓칠 줄 아느냐. 이 신성국의 검 앞에 아무도 도망칠 수 없다.”
가장 선봉에 선 한 남자가 칼을 겨누었다.
거인에 가까운 거대한 체형과, 투구 사이로 예광을 뿜는 눈빛의 기사. 발키레아 기사단의 단장이다.
디아나는 발키레아 기사단장을 보며 낮게 탄성을 흘렸다.
‘와, 저 아저씨 오랜만이다.’
수년 전. 파라이소 대륙에 갓 발을 디뎠던 디아나와 루스티카를 포박해 끌고 간 그 남자. 그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마왕군을 대치하고 있었다.
“돌겨어어억!!”
“우오오오!”
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격돌하는 마왕군과 기사단.
피와 비명,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마법이 폭발하는 굉음이 성도의 한복판에 쩌렁쩌렁 울렸다.
“히히히, 아무나 이겨라! 와아!”
디아나는 그 광경을 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인간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는 지금, 순수한 즐거움이 그녀의 안에 가득했다.
“…응?”
그러다 문득, 디아나는 시선을 느껴 눈을 돌렸다. 멍한 표정의 한수호가 있었다.
디아나는 티 없이 맑은 얼굴로 방긋 미소를 보냈다.
“히히, 아빠. 왜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