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284화 (260/280)

284화. 외전 1―6. 메모리 오브 위치 (6)

그렇게 또 3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슈엘츠 서쪽 끝자락의 쇠락한 마을. 시장에서 사온 사과를 으적거리며 동네 게시판을 둘러보던 디아나와 한수호.

대문짝만 하게 붙어있는 현상수배 포스터에 문득 한수호가 시선을 뒀다.

“…뭐야. 이건?”

이 시국 최고 미친놈은 어느 마을이든 한수호와 디아나였다. 그래서 항상 어떤 마을이든 게시판 1면엔 그들의 얼굴이 붙어있다.

그런데 그들이 2면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만큼 엄청난 대사건이 뭔가 벌어졌다는 의미였다.

“이, 이건……!”

이내 게시판 소식지를 끝까지 읽은 한수호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사과를 행복하게 오물거리던 디아나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야, 디아나! 이거다. 지금 빨리 성도로 다시 찾아가자!”

“어, 엥? 지금? 왜? 가면 큰일 나지 않아?”

“안 나! 이거 봐!”

그렇게 한수호가 디아나의 앞으로 벽보를 내밀었다.

경고문이었다. 마계의 마왕이 결국 차원 문을 열고 파라이소 대륙에 상륙했고, 현재 성도를 향해 군을 이끌고 진격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한수호의 얼굴엔 화색이 가득했다.

“어차피 내가 소환된 게 그 마왕 때려잡으러 소환된 거라며?”

“으응, 그건 그렇지. 성녀님의 예언이 그랬대.”

“이 절체절명 위기 순간에 찾아가서 교황 아재를 구해내자고. 그러면 까짓거 과거의 은행털이 따위가 대수냐? 정의 집행을 위한 사소한 해프닝으로 묻히는 거라니까?”

“아아!”

디아나는 진심으로 탄복했다. 그리고 새삼 존경을 담아 한수호를 쳐다봤다.

“아빠, 아빠는 신이야?”

“나도 이런 내 명석함이 너무 두려워, 크크.”

그렇게 덤 앤 더머는 성도로 발길을 향했다. 은행털이범 주제에 개선장군 행차하듯 당당한 행색으로 말이다.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 * *

한수호와 디아나는 무사히 성도에 잠입했다.

사실 반신급 무력을 가진 디아나의 마법이 있었기에, 성문을 통과하는 건 생각보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한수호는 최신화된 벽보를 읽으며 중얼거렸다.

“파악된 마왕군은… 고작 30명? 그게 군대냐. 우리 동네 조기축구회가 더 많이 모이겠네.”

그들이 성도에 오는 동안 시간이 1주 정도 지났고, 못 보던 사이 성도는 꽤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문제의 ‘마왕군’ 공격으로 추정되는 파괴 현장. 무수한 기사들의 시체가 도처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한수호는 그 무참한 파괴의 흔적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이, 이게 고작 30명이 낸 전과라고?”

마계에서 올라온 ‘마왕’은 이미 성도까지 진군했고, 백검의 성당 교황청에 잠입해 들이닥친 상태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변방 마을에서 벽보를 읽은 시점에선, 이미 현 교황이었던 카스트로 3세는 마왕군에게 살해당했다.

그로 인해 전 국민이 비탄과 공포에 잠겨있었다. 특히 성도의 주민들은 지금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불안에서 떨고 있다고 한다.

“그 교황 아재는 ×바, 아직 면상도 못 봤는데 뒈져버렸네, 씁.”

“응? 뭐가, 아빠.”

“아니, 혼잣말.”

한수호 입장에선 황당할 법도 하다.

말하자면 RPG에서 최초 퀘스트를 주는 임금님 같은 존재가 그 교황일 텐데. 주인공이 서브퀘스트 조지는 사이에, 마왕이 빠른 4드론 빌드로 왕 모가지를 쓱싹 해버린 상황이니까.

“아니, ×발. 아직 슬라임도 못 잡아봤는데, 마왕부터 때려잡는 판타지가 세상에 어딨냐고.”

지금 이 세계에는 소위 말하는 마물, 몬스터 같은 게 전혀 없다. 심지어 아인(亞人)이나 수인도 없다.

신성국 슈엘츠가 건국될 때. 인간 중심인 성검교에 반하는 부정한 존재들은 죄다 외부 세계에 추방당했기 때문이다.

지옥으로 추방당한 디아나와 루스티카, 그리고 복수의 칼을 갈고 지금 재림한 마계의 이종족들이 딱 그런 케이스다.

“어쨌든 성도를 샅샅이 찾아보자, 디아나. 여기 어딘가에 보물 고블린… 아니, 마왕이 어슬렁거린대.”

“응, 알았어! 히히, 술래잡기다, 술래잡기!”

디아나는 마냥 즐거워져서 성도의 복잡한 골목을 마구 종횡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이 마왕을 찾기도 전에, 그들을 먼저 찾아낸 존재들이 있었으니…….

“저, 저놈들은!”

“마테오 상회의 은행 강도들! 그놈들이 돌아왔다!!”

“잡아라아아!!”

바로 은행의 경비 병력을 비롯한 국가의 수비대원들이었다.

한수호는 그 외침이 들리자마자 곧장 디아나를 둘러업었다. 그리고 성도의 으슥한 골목길을 따라 미친 듯이 달려갔다.

“이런, ×발. 기억력도 좋아! 튀자, 디아나!”

“으햐아! 이거 오랜만이다! 히히! 아빠, 달려라, 달려!!”

두두두두!

무수한 발소리. 그리고 디아나의 행복한 비명이 어두운 골목길 너머로 울렸다.

* * *

추격전은 진절머리 나도록 이어졌다.

그동안 디아나와 한수호에게 수많은 물을 먹어서 그런가. 성도에는 한수호와 디아나를 전담하는 별동 추격대가 창설된 상태였다. 병력 하나하나가 독이 바짝 올라와 있었다.

그 기세에 눌린 한수호가 협상을 시도했다.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살려주나요?!”

“네놈은 내 명예를 걸고 사형이다!”

“예, 기대도 안 했습니다!”

물론 턱도 없었다.

뭔가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한수호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느 순간, 휘릭! 한수호가 골목 어귀로 방향을 확 틀었다. 모서리를 빙글 돌아 단숨에 치고 나갔다.

아니, 치고 나가려 했다.

“꺄앗……!”

“으학!”

그는 맞은편 골목에서 헐레벌떡 달려오던 한 여인과 정면으로 충돌해 버렸다.

“이런, ×바. 예미창!”

쓰러지며 욕을 뱉는 한수호와, 망연자실한 여인의 새하얀 얼굴.

허공에 하늘거리는 여인의 드레스 자락. 그리고 흑단처럼 새카만 머리칼이 디아나의 뇌리에 입력되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한수호가 번개같이 움직였다.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낮은 탄성을 흘렸다.

“어?”

두두두두,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경비병들의 발소리를 느끼며, 한수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 아무 생각도 안 했을 거다. 은행털이를 시작할 때처럼. 그러니까 거기서 또 그런 미친 발상을 떠올리지.

“×발, 동작 그만!!”

한수호는 마침 골목 귀퉁이를 돌아오는 추격대들에게 영혼을 담아 소리쳤다.

박력에 놀란 건지 아님 한수호의 꼬락서니를 본 건지, 놈들은 일단 진격을 멈췄다.

“저, 저분은……!”

“이, 이럴 수가……!”

갑자기 경비병들이 심각하게 술렁거린다.

예상외의 좋은 반응에 한수호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서렸다. 그는 어느새 꽉 부둥켜안은 여인의 목에 에스파다를 최대한 밀착시켰다.

나 같으면 이 정도로 반응이 좋았으면, 일단 이상함을 느꼈을 거다. 인질로 잡은 여자의 정체부터 궁금했겠다.

“으흣……!”

난데없이 인질이 돼서, 상황 파악도 안 된 여인이 아찔한 숨을 삼켰다.

그것을 신호탄 삼아 한수호는 소리쳤다.

“이 무고한 여자 모가지가 레고처럼 분리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며어언! 당장 물러나, 이 쌔끼들아!”

아빠바라기인 디아나조차 순간적으로 떠올렸다.

‘아, 이건 좀 심하게 추하네.’라고. 용사 버프로도 커버 불가능한 추악함이었다.

“크으윽……! 네놈!”

“비겁한… 쳐 죽일 놈 같으니!”

“역사가 네놈의 만행을 기억할 것이다!”

인질을 잡은 한수호 본인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반응이 찰지다. 그것을 슬슬 한수호도 눈치챘다.

안 그래도 혼란해 미치겠는 상황에 기름을 들이붓는 건, 디아나의 한마디였다.

“아, 역시! 누군가 했더니, 성녀님이었네?”

디아나가 인질의 정체를 파악했고, 방긋 웃으며 아는 척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 인질로 잡힌 그녀는 디아나의 기억에도 있는 존재였다.

“아빠! 내가 말했지? 용사님을 소환해야 한다고 예언이 왔다고 했잖아! 그 예언을 한 사람이 바로 그 언니야.”

루나 루에바.

이 나라의 예언자이자, 프로피샤의 성녀.

화원 한가운데서 기도를 드리던 아름다운 여자. 타인에게 별 관심 없는 디아나조차 절대로 잊지 못하는 인상적인 여인.

“으, 에? 흐헤헤?”

한수호는 혼란이 중첩되어 이미 혼란 풀 스택이 쌓인 표정이다. 머리가 생각을 그만뒀는지 입꼬리가 경련하듯 움찔댄다.

그리고 사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화룡점정을 찍는 발소리가 그들의 뒤에서 빠르게 가까워졌다.

“프로피샤의 무녀. 더 이상 도망은 무의미하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검은 머리칼의 청년이 골목 어둠을 뚫고 등장했다.

순백의 코트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 언뜻 보면 복장만 좀 특이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이마에는 굵직한 뿔 두 개가 솟아있었다.

인간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 디아나는 그 남자의 정체도 단숨에 간파했다.

“어, 저건 마왕인가 봐.”

당연하게도 디아나는 마왕을 본 적이 없다.

다만 그의 생체 마력이 어마어마하게 많고, 이 세상의 마력과는 완전히 성질이 다르다는 것이 한눈에 간파한 것이다.

“뭐, 뭐? 마, 마왕?”

그 말에 한수호는 물론이고 추격해 온 수비대원들도 경악했다.

갑자기 만남의 광장으로 탈바꿈한 좁아터진 뒷골목. 모인 사람만 자그마치 수십 명.

그것도 이 세계의 명운을 짊어진 예언의 주인공이 모두 모였고, 그 예언을 한 당사자인 성녀님까지 행차했다.

“…….”

“…….”

잠깐 골목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 * *

상황이 이렇게 된 전말은 이렇다.

한수호의 눈앞에 등장한 마왕. 그의 이름은 스트라토 헬릭스. 보통은 줄여서 ‘마왕 헬릭스’라고 불리는 자다.

마왕 헬릭스를 비롯한 마계의 이종족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느라 전력이 매우 약해진 상황이다.

―고작 30명? 그게 군대냐. 우리 동네 조기축구회가 더 많이 모이겠네.

한수호 본인도 그렇게 중얼거렸지.

실제로 조기축구회만큼 초라한 전력임을 마왕 역시 인지한 상태였고, 그 때문에 그들은 중간계로 올라온 직후, 우선 교황과의 교섭을 시도했다.

백검의 성당에 잠입해 교황과 독대를 성사시킨 그는, 마왕군이 이주해 살 토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슈엘츠의 성검교가 건국 이래 세운 기치는 인간 중심, 그리고 이교와 이종족의 철저한 배척이다.

협상은 당연히 결렬됐고, 성당의 최정예 기사단인 ‘발키레아 기사단’이 그들을 척살하기 위해 일제히 움직였다.

―아직 면상도 못 봤는데 뒈져버렸네, 씁.

격렬한 전투 끝에 마왕을 비롯한 네 명의 마왕군 군단장이 역으로 교황을 살해했다.

그리고 그들은 본격적으로 이 나라의 붕괴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나라의 인간 중심 체제가 유지되는 이상, 그들이 이 세계에 발붙일 곳이 없기 때문이다.

“성녀만 납치해 갈 생각이었건만, 이건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군.”

그 붕괴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 바로 한수호의 품에 안긴 인질, 루나 루에바.

교황보다도 더 거대한 이 나라의 상징 그 자체. 현재 인류의 구심점인 그녀를 생포하기 위해 마왕이 친히 행차한 것이다.

한수호는 억울한 나머지 외쳤다.

“야, ×발! 사천왕 어디 가고 본인만 떨렁 왔냐! 명색이 왕인데 체통이 있어야지, ×발!”

“내가 대답할 이유는 없다, 용사.”

마왕은 그렇게 일축해 버렸다.

그때 마왕을 제외한 나머지 마왕군은, 성도의 곳곳에서 조촐한 병력들을 이끌고 매복산개 한 상태였고, 슈엘츠의 기사단과 게릴라 시가전을 벌이고 있었다.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아냐고? 한수호는 몰라도 디아나는 그 사실을 훤히 꿰고 있었거든.

‘으응, 싸우고 있네. 이 사람들이 아빠가 말하는 사천왕이라는 사람들인가?’

전에 없이 거대한 생체 마력들이 성도 곳곳에서 격렬하게 요동친다.

그중에서도 특출하게 강한 생체 마력이 네 개. 디아나는 그 모든 움직임을 세세하게 느꼈다. 전투의 흐름조차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디아나는 단박에 견적을 내렸다.

‘지겠네, 이 사람들.’

마왕군의 패배다.

개체 하나하나는 마왕군 쪽이 터무니없이 강력하지만, 쪽수에서 워낙 상대가 안 된다. 이대로 가면 마왕군은 교황청의 성당기사단과 발키레아 기사단 선에서 정리가 된다.

물론 이대로 전투가 지속되면… 향후 100년은 타격이 갈 정도로 막심한 피해를 입겠지만.

“…….”

디아나는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가장 믿고 좋아하는 아빠, 한수호에게도 물론이다.

어디가 싸우고 어디가 이기든, 그녀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나중엔 내가 아빠만 빼고 다 죽여버릴 건데. 히히, 바보들.’

오히려 좋아.

내가 할 일을, 저 마왕이라는 아저씨가 대신 해주고 있으니까.

감사함까지 느끼며 몰래 히죽거리는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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