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외전 1―4. 메모리 오브 위치 (4)
“으…아, 아빠. 이, 이거 놔.”
디아나는 숨이 막혀서 버둥거렸다.
이내 가까스로 품에서 빠져나온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저히 루스티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아빠? 아픈 거 좋아해?”
“아니다. 그게 아니야.”
“그렇잖아. 근데 왜? 쟤들이 이유도 없이 우릴 공격해. 용용이나 쭉쭉이처럼. 그러면 죽여야 해. 아빠가 그렇게 가르쳐줬잖아?”
그렇다. 다름 아닌 루스티카가 그렇게 가르쳤다.
지옥에서 디아나를 살아남게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디아나는 그런 삶의 방식밖에는 모른다.
하지만 루스티카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디아나를 내려다보는 눈에는 슬픔이 가득 들어있었다.
“여기는 지옥이 아니다. 디아나… 내가 가르쳤던 건 모두 잊어야 해.”
“…그게 뭐야.”
디아나로서는 도저히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그녀에겐, 최초로 루스티카를 향한 반항심이라는 게 생겼다.
“그걸 전부 잊어버리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해?”
“…….”
“아빠, 가르쳐줘, 응?”
공허함이 깊게 찌든 한마디. 루스티카는 불에 덴 듯이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다시 디아나를 힘껏 껴안았다. 완강했던 아까와는 다르게, 따스하고 애정이 느껴지는 손길.
디아나는 앗 하는 사이 모든 화가 풀려버리는 걸 느꼈다.
“디아나, 이 할미를 믿니?”
“…응, 아빠 말은 무조건 믿어.”
정확히는, 디아나는 이 세상에서 아빠의 말밖에는 믿지 않는다.
스르륵. 하늘에 떠있던 수천 개의 광탄이 단숨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밝아진 하늘이 루스티카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만들었다.
그림자로 얼룩진 아빠의 얼굴. 그 위로 흐르는 눈물을 디아나는 가만히 주시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꼭 데려와 주마.”
“데려오다니. 누구를?”
“이 세상에서… 오직 너만을 구원해 주기 위한 사람. 네게 살아갈 길을 가르쳐주고, 같이 의지하고, 나처럼 믿고 따를 수 있는… 믿음직한 용사님을 말이다.”
“…용사님?”
나를 구하기 위한 용사님이라니.
그러면 내가 공주님이 되는 건가. 그때 봤던 성녀님처럼?
‘아, 그건 좀… 좋을 거 같아.’
디아나는 멍하니 생각한다.
그러자니 루스티카가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 그때마다 줄줄 흐르는 눈물이 디아나의 볼을 적셔 왔다.
“그래, 그러니까… 너를 위한 새로운 아빠를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주렴, 디아나.”
“…기다려?”
아빠,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디아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왠지 절대 듣고 싶지 않을 말이 루스티카의 입에서 나올 것 같아서. 무서워서 그런 것이다.
…….
그리고 얼마 후.
디아나는 루스티카가 했던 말의 의미를 강제로 깨닫게 되었다.
그래, 이계에서 용사의 적합자를 찾아 소환한다.
그 말은 일단 이세계로 먼저 파라이소 대륙의 누군가가 넘어가서… 적합자를 색출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것이 바로 사명. 디아나의 목숨을 대가로 루스티카가 교황과 거래한 내용이었다.
“아빠… 루, 루스티카……!”
그로부터 며칠 후. 스파크가 날름거리는 허공의 균열 앞에서, 디아나는 루스티카의 소맷단을 잡고 울먹였다.
“안 가면 안 돼? 응?”
루스티카는 말없이 그저 그녀의 머리를 쓸어줄 뿐이었다.
“알겠어. 말리진 않을게. 않을 테니까… 몇 밤 자면… 얼마나 지나면 다시 돌아와?”
“…….”
“왜 말이 없어… 아빠! 말 좀 해보란 말이야!!”
루스티카는 끝까지 디아나의 말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다만 이런 말을 남긴 채 균열 안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부디… 날 잊지 말아다오, 디아나. 나의 가장 소중한, 불쌍한 아이야.”
스르륵. 허공의 균열과 함께 루스티카는 사라져버렸다.
디아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하염없이 울었다.
그 작별 인사가 무얼 뜻하는지는, 아무리 정신연령이 어린 디아나라도 단박에 직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 *
그렇게 약 1년 좀 넘는 시간이 흘렀다.
어두운 공동 안. 디아나는 여느 때처럼 자연스럽게 그곳에 출근하듯 기웃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그려놨던 붉은 마법진이 불길한 공명음을 뿜어내는 것을 목격했다.
“…와, 왔다.”
신호. 루스티카가 저쪽 세상에서 보내는 신호다!
1년 만에, 드디어 루스티카가 용사의 적합자를 발견했다. 지금 물밑 작업에 들어가고 있으니, 소환 의식을 시작하라는 신호가 온 것이다!!
“됐다! 거의 다 완성됐어! 이히히.”
디아나는 들고 있는 시약병을 기울였다. 약병은 섬뜩한 붉은 액체를 토해내 그대로 바닥을 적셨다.
처덕, 처덕. 그것들은 이내 기괴한 붉은 문자가 되어 마법진 안으로 거세게 빨려 들어갔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으로 디아나는 손을 뻗었다.
“내가 부를게, 루스티카.”
디아나의 말에 반응하듯 붉은 무늬는 꿈틀대기 시작했다.
“불러내서 전부 고쳐놓을게.”
붉은 무늬는 벽을, 천장을, 그리고 디아나의 육체를 침범해 미친 듯이 몸을 비틀고 뻗어나갔다.
우웅, 우웅. 무늬가 토해내는 붉은 빛이 동굴을 가득 메웠다.
“그러니까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마, 히히.”
붉은 무늬에 잡아먹히다시피 한 그녀의 입가에 가냘픈 미소가 스르르 번졌다.
“나와줘, 나의 용사님.”
나직하게 중얼거린 디아나가 별안간 바닥을 쾅, 하고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붉은 빛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엄청난 굉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 결과.
“구와아아악!”
그런 기괴한 비명 소리와 함께 파아앗! 눈부신 광휘가 동공을 뒤흔들었다.
엄청난 빛무리가 사그라들자, 어느새 마법진 위에는 남자 하나가 혼절한 채 쓰러져 있다.
“아… 성공……!”
디아나는 그것까지 확인한 후에 털썩, 그대로 혼절했다. 너무 많은 흉마와 마력을 한꺼번에 사용해서 정신을 잃은 것이다.
여기서 잠깐 디아나의 기억은 암전된다.
…….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던 나, 박정용은, 순간적으로 스친 남자의 정체를 단박에 간파했다.
대충 자른 듯한 더벅머리에 꽤 호방한 장신. 적당히 체격이 잡힌 10대 후반가량의 한국인 남자.
징글징글할 정도로 익숙한 면상의 그 남자는… 마녀의 기사 한수호였다.
* * *
“야, 아가. 꼬마야! 일어나 봐! 에비! 에비이!”
미친 듯이 흔들리는 디아나의 몸뚱이. 그리고 머리를 쩌렁쩌렁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
디아나는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우응… 웅?”
탈곡기처럼 탈탈 털린 디아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뜨기 시작했다.
디아나는 눈앞의 소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아빠?”
한수호는 디아나를 홀린 듯이 쳐다보며 흠칫 숨을 삼켰다.
그러더니 이내 퍼뜩 고개를 세차게 휘저었고, 디아나를 코앞까지 들어 올려 자기 앞에 앉혔다.
“아빠는 집에 가서 찾고. 너 누구냐? 난 왜 여기 있지? 네가 데려온 거냐? 그것보다 여긴 어디냐. 나 학교 가야 하거든?”
“우응? 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수호를 빤히 응시하는 디아나.
“…이런.”
디아나는 머리가 멍해서 지금 상황을 이해 못 하고 있다. 알기 쉬운 반응에 한수호는 이마를 짚었다.
혼자서 뭐라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질문할 내용들을 정리하는 듯하다.
“에헤, 아빠. 루스티카가 보낸 용사님이구나!”
하지만 그 순간, 오히려 디아나 쪽이 얼굴을 활짝 펴며 들러붙기 시작했다.
“엉? 뭐?”
“와아, 성공이다! 루스티카, 나 해냈어! 헤헤!”
“이, 이거 놔!”
한수호는 그 갑작스러운 돌격에 식겁한 나머지 파바박 물러섰다.
“아가, 나를 납치해서 뭐 어쩌려는 거야! 인신매매냐? 새우 잡으러 가는 거야? 러시아 앞바다로 대게 잡으러 가냐? 애가 인형처럼 이쁘장하게 생겨서 순 악질이네, 이거!”
…이 새끼 가만 보면 나랑 말투가 좀 비슷하단 말이지.
괜히 우리가 쿵짝이 잘 맞았던 게 아니라니까. 한수호와 관련된 디아나의 기억을 읽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새우? 대게?”
그리고 좀 늦게 반응한 디아나가 한수호를 빤히 올려다본다.
그리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용사님은 새우 안 잡아.”
“…뭐?”
“대게도 안 잡아!”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를 내뱉는다. 한수호는 당황한 기색으로 눈을 끔벅거렸다.
그런 한수호를 빤히 쳐다보던 디아나는 활짝 웃으며, 당당하게 소리쳤다.
“아빠는 나랑 같이 마왕 잡으러 갈 거야!”
“…뭐시기?”
“나랑 같이. 공포의 대왕을 잡으러 가는! 나만의 좀비 용사님… 히히히.”
그것이 불사의 마녀 디아나와 마녀의 기사 한수호의, 황당한 첫 만남이었다.
* * *
그 뒤로 한수호는 디아나를 닦달해서 자초지종을 물었고, 디아나는 해맑게 웃으며 열심히 설명해 줬다.
“으음, 쉽게 말하면… 아빠는 교황 아저씨 때문에 내 전 아빠한테 죽어서 말이야. 내 새아빠가 된 거야, 응.”
“디아나, 이 세상은 ‘쉽게’의 의미가 대한민국이랑 다르니?”
루스티카는 이렇게 말해도 잘 알아듣던데. 내 새로운 아빠는 좀 바보구나.
디아나는 그렇게 한수호의 견적을 내리고 측은한 어조로 설명해 줬다. 그 내용은 대충 이렇다.
―여기는 신성국 슈엘츠라는 곳인데, 세상을 멸망시킬 무서운 존재가 이계에서 소환된다는 예언이 최근에 들어왔다.
―그 무서운 존재를 막으려면 마찬가지로 이계에서 용사를 소환해야 하는데, 그 차원 문을 여는 게 가능한 사람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
―나는 시체술사라 시체밖에 소환을 못 한다. 그래서 너를 죽이고 좀비로 만들어서 소환했다. 끝.
디아나는 부족한 어휘력으로 어떻게든 그에게 상황을 납득시키려 노력했다.
“아니… 이, 이게 대체, 무슨… 구에에엑.”
그 시점에 한수호는 차원 게이트 부작용으로 속을 게워낸 뒤 기절해 버렸고, 디아나는 그를 둘러업고 다시 성도로 돌아왔다.
그녀는 깨어난 한수호에게 신성국의 판타지 만만세 한 광경을 직접 보여주며, 다시 설명에 들어갔다.
“허, 허허, 허허허허허. 꿈이다. 이건… 꿈이야.”
하지만 한수호는 하늘을 유영하는 날개 갑옷의 기사단을 보며 실성한 듯이 웃을 뿐, 끝까지 본인이 처한 현실을 부정했다.
결국 디아나는 극약처방에 들어갔다.
“헤헤, 아빠가 그렇게 못 믿겠다니. 어쩔 수 없네.”
스르륵. 사방에서 모여든 붉고 시커먼 빛무리가 디아나의 손에 깃든다.
이윽고 꾸물거리며 모여든 빛은 어떤 형태를 이루었다. 기다랗고 십자 모양에 끝은 날카롭다.
섬뜩할 정도로 새하얀 검신을 자랑하는 검. 에스파다였다.
“믿을 수밖에 없게 해줄게!”
디아나가 손에 든 검을 쓰윽 훑어본다. 음험한 보라색 눈을 빛내며 천천히 한수호에게 다가갔다.
위험하다. 지금 분위기가 뭔가 위험하다. 한수호는 그것을 직감했는지 퍼뜩 입을 열었다.
“아냐, 디아나! 믿어, ×발! 할렐루야 아미타불, ×발. 그 칼로 뭐 하려고!”
한수호가 침대를 펄쩍 박차고 뒷걸음쳤으나, 늦었다. 디아나는 이미 코앞에 서있었다.
디아나는 기어코 명랑하게 외치며 한수호의 심장에 검을 콱, 박아 넣었다.
“크, 어, 헉……!”
단말마를 흘리는 한수호. 천천히 초점이 없어지는 눈동자가 디아나를 멍청히 쳐다본다.
이내 통한의 유언 한마디가 그의 입으로 새어 나왔다.
“원통…하다.”
털퍽. 그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고, 한동안 미동도 없었다.
그러나 파지직! 곧 시커먼 스파크가 그의 몸을 감싸더니, 이내 상처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꿰뚫렸던 육체가 봉합되기 시작했다.
“으아아나스타샤아아!!”
이내 한수호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순간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는지 온몸을 경련한다.
한수호는 황급히 자기 전신을 확인했고, 그제야 몸에 힘이 풀린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또 꿈이었나…….”
“꿈 아닌데?”
“갸아아악!”
“이제 좀 믿겠어?”
디아나가 히죽거리면서 한수호를 올려다봤다. ‘사람 말 안 믿더니, 어떠냐?’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멍하니 거울을 보던 한수호는 그녀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어, 그래. 이러고도 못 믿으면… ×바, 원숭이지 내가.”
그렇게 한수호는 본격적으로, 자기가 처한 현실을 수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