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281화 (257/280)

281화. 외전 1―3. 메모리 오브 위치 (3)

그 뒤로 중천이었던 해가 꼴딱 넘어갈 정도로 이야기가 이어졌는데, 대충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너희가 지옥에서 이 중간계로 왔다는 건, 이계 소환진의 사용법을 터득했다는 소리렷다?”

“응, 맞아. 나랑 아빠가 함께 만들었어.”

“옳거니. 그럼 우리랑 일 하나만 하자.”

“무슨 일인데.”

“곧 이 세계를 파멸시킨다는 ‘공포의 대왕’… 소위 마왕이 마계에서 돌아온다. 그놈을 막으려면 이세계에서 용사를 소환해야 한다는 성녀님의 예언이 있었지. 그러니까 너희들의 마법으로 이세계에서 용사 좀 소환해 줘라.”

참고로 이 대화에서 나온 ‘마왕’이란, 내가 약 2년간 수십 마리나 때려잡았던 디아나의 마력 찌꺼기와는 아예 다른 존재다.

문자 그대로 마계의 왕이다. 제3계인 지옥으로 네크로맨서들이 추방될 때, 제4계인 마계로 추방되었던 인간 외의 모든 이종족들. 그들의 왕을 뜻하는 단어다.

당연히 이 아니꼬운 요구에 디아나는 이런 의문을 표했다.

“추방당했던 것도 좆같은데 다른 똥도 치워달라고? 우리가 왜?”

“아이, 씻팔! 너희 아빠 고문 맛 좀 볼래?”

“이런 족같은 돼지 새끼…….”

“순순히 말 안 들으면 너는 호래자식 되는 거야. 처신 잘하라고.”

물론 실제로 이런 애기 공룡이나 할 법한 스펙터클한 대화는 없었다만, 말투만 좀 과격할 뿐이지 팩트만 담았다.

디아나는 루스티카를 인질로 잡힌 채 정중한 협박을 당했다. 아마 내 예상엔 루스티카 쪽도… 디아나를 인질로 잡힌 정중한 협박을 당했을 것이다.

“그럼,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마, 디아나.”

그렇게 대화는 끝났고, 디아나는 교황이 성도(聖都) 후미진 곳에 마련해 준 허름한 판잣집에 안내를 받았다.

“응,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그녀는 잠을 청하기 위해 짚을 깐 침대에 누워 천장을 쳐다봤다. 그리고 지나간 대화를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일단 교황 아저씨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해.”

그러지 않으면 평생 루스티카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건 싫다. 절대로 싫다.

그러니 마음에 들진 않지만… 교황이 원하는 대로, 이세계의 용사를 소환해 준다고 해야겠다.

그러기만 하면, 당장 내일 바로 루스티카를 만날 수 있다. 교황 아저씨가 그렇게 약속해 줬다.

‘졸리다… 일단 자자.’

디아나는 잠을 청했고, 금방 잠들었다.

다음 날, 그녀는 자신의 뜻을 교황에게 전달했다. 교황은 그런 그녀를 다시 백검의 성당으로 불러냈다.

교황은 인자하게 웃으며 디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허허헛, 그래. 잘 생각했구나, 디아나. 여신께서 네 일족의 죄를 사하여주실 것이다.”

우리 가족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데.

디아나는 속으로 불평을 하며 교황의 손을 뿌리쳤다.

“…흐음.”

교황은 잠깐 눈꼬리를 움찔했고, 디아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디아나는 그 시선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경멸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 교황은 자애의 가면을 뒤집어썼다. 경멸의 기색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래, 모처럼 위대한 대업을 함께할 가족이 되었으니, 네게 성검교단의 자랑인 성녀님을 만나게 해주마.”

“…성녀님?”

“그래, 프로피샤의 무녀 루나 루에바. 여신의 뜻을 받들어 세상에 전달하는 위대한 예언자님이시다.”

“헤에…….”

이 대성당도 교황도 꺼림칙하다. 하지만 ‘성녀님’이라는 사람은 좀 관심이 갔다.

결국 디아나는 교황을 따라 걸음을 옮겼고, 성당 깊숙한 곳에 위치한 칠흑의 성소에 다다랐다.

거기서 교황은 제단 중앙의 거대한 기둥을 매만졌다.

“자, 따라오너라.”

우우웅. 짧은 공명음과 함께 기둥의 일부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기둥 내부의 텅 빈 통로에 떠있는 부유석을 디아나는 멍하니 쳐다봤다.

그녀는 이미 부유석에 각인된 마법부터 분석하는 중이었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프레이즈였다.

‘으음, 내가 쓰는 마법이랑 완전히 다르네.’

디아나가 쓰는 마법은 네크로맨서 일족만이 사용했던 사장된 마법. 후대에게 ‘흑마법’이라 불리는 일종의 사술(邪術)이다.

하지만 부유석에 각인된 것은 백마법, 혹은 그냥 마법이라 불리는 그것이다.

흑마법은 기본적으로 ‘흉마’라는 인간성을 망가뜨리는 힘을 사용한다.

그래서 성검교단이 지배하는 성국 슈엘츠에서는 금단의 술법 취급을 받았고, 그 때문에 추방을 당했다. 후대에도 그 인식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던 걸로 알고 있다.

“저기, 교황 아저씨. 어디로 가는 거야?”

우우웅. 디아나는 부유석 위에 올라타며 교황에게 물었고, 교황은 위쪽을 가만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백검의 성당 위, 아득한 하늘 위에 떠있는 공중정원이다. 아름다운 사계(四季)의 꽃이 사시사철 피어있는 비밀의 화원이지.”

“흐응, 그렇구나.”

그때까지도 디아나는 이렇다 할 감흥이 없었다.

애초에 꽃이란 걸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상상력이 빈약한 디아나는 꽃이 흐드러진 화원의 정경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디아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기 몸을 손끝으로 훑었다.

‘아, 방금 결계를 지나쳤어.’

디아나조차 이해하지 못할 방어 술식이 신체를 통과하는 것을 느꼈다.

이런 견고하고 정교한 결계라니. 디아나는 그 술식의 완결성에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뭐야?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본 마법들이랑은… 차원이 달라.’

그것은 또 다른 마법. 이 시점에서도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되어버린 ‘신들의 마법’이다.

이 정도면 승강기를 제외한 다른 곳으로는 절대 침입하지 못하겠네. 가만히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디아나였다.

‘그 공중정원이라는 곳에 가까워졌나 봐.’

디아나는 직감했다.

이내 부유석이 멈추며 두 사람은 공중정원에 도달했다. 디아나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아.”

파란 하늘이 가깝다. 뻥 뚫린 사방으로 멀찍이 지평선이 보인다.

공중에 둥둥 떠있는 거대한 원형 광장. 그곳 전체가 무지개처럼 알록달록하다.

오색의 꽃잎이 나비처럼 팔랑거렸다. 시야를 어디로 돌려도 꽃잎이 가랑비처럼 흐드러졌다.

“아… 와아.”

디아나는 그 광경을 잊지 못했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실제로 그녀는 계승의 옥좌 위에서 죽어가는 그 순간, 항상 이 화원의 흐드러지던 오색 꽃들을 떠올리곤 했다.

―불사신인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자신이 죽을 장소를 선택할 때가 오는 법이야, 디아나.

‘내가 죽을 장소를 선택해야 한다면, 이곳이었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디아나는 그 환상적인 공간 한가운데 무릎 꿇은 한 여인을 눈에 담았다.

“저게… 성녀님?”

단박에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검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새하얀 피부의 여인. 고고한 자태와 쳐다보는 것조차 불경스러울 정도의 미모. 그녀가 생각하던 동화 속의 공주님 그 자체였다.

교황은 디아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기도를 드리는 중이시구나. 미안하지만 지금은 방해하면 안 되겠다.”

“아… 응. 알겠어.”

디아나도 퍼뜩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딱히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도저히 말을 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 * *

인상적인 경험을 한 디아나는, 다시 거처로 돌아왔다. 그날 밤은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가 잠에서 깨기도 전에 문득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으응.”

디아나는 본능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랜 지옥살이의 영향이었다. 작은 소음에도 몸이 먼저 반응하도록 본능이 각인됐다.

한 템포 늦게 그녀는 부스스한 눈을 떴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손을 뻗었다.

언제라도 공격 마법을 사용하기 위함이다.

“…어?”

그러나 거기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하얀 머리와 붉은 눈의 할머니, 루스티카가 있었다.

디아나는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서 연신 탄성을 흘렸고, 그런 그녀 대신 루스티카가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를 슬며시 안아줬다.

“우리 귀여운 디아나, 그동안 잘 지냈니?”

“아… 아!”

그제야 디아나도 루스티카가 찾아왔음을 실감했다.

그녀는 펄쩍펄쩍 뛰며 루스티카의 가슴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와아! 아빠! 아빠다! 돌아와 줬어! 진짜로 돌아왔다! 와아아!”

지켜줬다. 교황이 약속을 지켰다!

의외로 교황은 착한 아저씨였을지도 모른다. 속으로 너무 욕한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교황에게 심심한 사죄를 보내는 디아나였다.

* * *

디아나는 전에 없이 신나서 루스티카를 데리고 성도 곳곳을 구경하러 나갔다.

루스티카는 곤란한 기색으로 한사코 만류하려 했지만, 디아나의 기세가 너무 완강했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붙었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거기에 얼굴을 가리는 가면까지 쓰는 루스티카. 그 모습에 디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잉, 아빠? 왜 가면까지 써? 무도회라도 나가? 히히!”

“…그냥 오늘은, 좀 그러고 싶은 기분이구나.”

“히히, 아빠는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며 디아나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성도의 시장 거리를 향해 나아갔고, 생전 처음 보는 광경과 수많은 인파에 압도되어 즐거운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곧 루스티카가 무슨 생각으로 가면을 썼는지, 뼈저리게 알게 된다.

“저년들, 그 게시판에 붙어있던 그것들 아니야?”

“그래, 배신자 시체술사 놈들.”

“세상에, 끔찍해라…….”

디아나 본인은 시장 구경에 정신이 팔려 눈치조차 못 챘지만, 그 기억을 읽어 들이던 나는 한참 전부터 알 수 있었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신성국 시민들의 목소리. 불안과 공포에 찬 시선. 그리고 집단적인 분노까지.

“저리 가라! 더러운 시체술사 놈!!”

퍼억! 루스티카의 머리에 커다란 돌 하나가 날아와 처박혔다. 피 묻은 돌멩이가 바닥에 떨어지며 루스티카의 신형이 크게 휘청거렸다.

디아나는 그 광경을 직접 보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

그리고 우수수, 수많은 돌멩이가 루스티카와 디아나의 몸을 타격하기 시작하자 드디어 이해했다.

퍼억, 퍼벅! 아프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고통에 디아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우우웅. 디아나가 본인과 루스티카를 감싸는 핏빛 방어막을 황급히 둘러쳤고, 동시에 사람들이 분노에 차서 그녀들을 비난한다.

“신성국의 적! 더러운 배신자들!!”

“꺼져! 지옥으로 돌아가!”

“무슨 낯짝으로 대낮에 시장을 돌아다니는 거냐!!”

왜 저들은 저렇게 화가 나있지?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돌멩이에 얻어맞는 와중에도 디아나는 그것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 디아나. 귀를 막아라. 나는 괜찮으니, 어서 도망가자꾸나…….”

스르륵. 문득 루스티카가 그녀를 감싸기 위해 품에 안았다. 디아나는 추레한 로브로 가려진 어두운 시야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녀는 그 순간 확신했다. 더 이상 주저하는 마음이 없어졌다.

“뭐야. 너희들도… 역시 그냥 괴물이었구나?”

디아나 입장에선 이곳의 인간들이 모두 괴물처럼 보였다.

지옥의 ‘용용이’나 ‘쭉쭉이’는 엄청나게 강했다. 그 강대한 힘으로 디아나의 일족을 하나씩 잡아먹거나 못살게 굴었다.

이곳의 인간들도 똑같다.

‘용용이’나 ‘쭉쭉이’와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그러나 그것들보다 한참 약하고 쪽수만 바글거리는, 바퀴벌레 같은 괴물들이다.

‘다른 건 상관없어. 하지만 아빠를 건드리는 건… 참을 수 없어.’

놈들은 아빠와 나를 갈라놓으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부 죽여야 한다. 덤벼 오는 용용이와 쭉쭉이를 내가 전부 죽였던 것처럼.

‘이곳에서 아빠랑 둘이서 살면… 응, 행복할 거야.’

방해가 되는 바퀴벌레들을 싹 박멸하고, 용용이도 쭉쭉이도 인간도 하나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디아나. 그녀의 입가에 자연스럽게 해맑은 미소가 어렸다.

당연하다는 듯이 인류 말살로 흘러가는 사고의 흐름. 그것을 읽어 들였을 땐, 괴물 다 된 나도 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역시, 전부 죽여버려야겠다.’

쿠구구구. 디아나를 중심으로 공기와 대지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디아나의 피부 위를 뱀처럼 기어 다니는 붉은 문자열. 그것들이 바닥에 퍼지며 불길한 핏빛 마법진을 순식간에 수십 개 그려낸다.

디아나는 히죽 웃으며 시동어를 영창했다.

“발라 네크로.”

우우웅.

이내 수백 수천, 아니 수만 개의 어둠의 광탄들이 그녀의 주변으로 떠올랐다. 푸른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을 정도로 까마득한 수의 마탄(魔彈). 시간을 멈춰놓은 유성우를 보는 듯하다.

실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내가 맞붙었던 헥터 카사스조차, 지금 디아나에 비하면 어린애 재롱 잔치에 불과했다.

“으, 으어……!”

“저, 저게 뭐야!”

그것을 눈에 담은 시민들은 강제적으로 돌팔매질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공포에 찬 시선으로 디아나에게서 점점 뒷걸음친다.

디아나는 더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어. 전부.”

키이잉! 그 명령에 따라 광탄이 일제히 어둠을 토해냈다. 당장이라도 발사될 것처럼 날 선 공명음을 냈다.

“안 돼! 안 된다… 디아나! 사람들을 죽이면 안 돼!!”

하지만 그 순간, 루스티카가 디아나를 꽉 끌어안으며 만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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