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280화 (256/280)

280화. 외전 1―2. 메모리 오브 위치 (2)

원인 모를 불안이 엄습한 디아나는 발을 동동 굴렀고, 이내 루스티카의 품에 황급히 엉겨 붙었다.

“아빠! 아빠 뭔가 알고 있지? 아빠 대체 저 사람들은 뭔데? 왜 우리를 둘러싼 건데? 아빠!”

“디아나, 다 괜찮을 거야. 얌전히만 있으렴. 저 아저씨들 말을 잘 들어. 내가 모두 알아서 해놓을 테니. 그러니까…….”

“아빠!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하지만 루스티카는 디아나의 호소에 응하지 않았다.

그저 갑주 차림의 남자들, 신성국의 정예 기사단인 ‘발키레아 기사단’에게 올곧은 시선을 보낼 뿐이다.

그러자 앞서 나왔던 사내가 고개를 슬쩍 끄덕였고, 이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포박하라!!”

두두두두! 사방에서 광휘로 둘러싸인 마법진이 생성되었고, 무수한 빛의 실이 뿜어 나와 루스티카와 디아나의 온몸을 옭아맸다.

퍼억! 루스티카는 기사단 한 명에게 주먹으로 배를 가격당했다. 그대로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풀썩 쓰러졌다.

“아.”

디아나의 시선에 그 모습이 슬로모션으로 눈에 들어왔다.

촤르르! 벙찐 디아나의 몸에도 무수한 빛의 사슬이 감싸였다.

“크크큭, 백검의 성당 최고급 사제들이 발하는 빛의 봉인술이다. 아무리 전설 속의 네크로맨서 일족이라도… 파훼할 수 없을 것이야.”

앞장서 거들먹거리던 기사단의 대장 나리가, 계속 잘난 듯이 지껄여 댔다.

디아나는 자기를 빈틈없이 감싼 그 빛의 마법 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는 그 속박 마법의 엉성함과 조악함에 우선으로 경악했다.

‘…왜? 왜 이런 허접한 마법에.’

아빠라면 1초 내로 풀 수 있다. 그런데 아빠는 왜 일절 저항을 하지 않는 것인가. 디아나는 그것에 두 번째로 경악했다.

‘아빠, 대체 뭐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자신이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루스티카가 저항을 않고 있다. 그래서 디아나 자신도 저항하기가 꺼려졌다.

덜커덩! 두 사람은 그대로 각기 다른 마차에 처박혔고, 마차는 두 사람을 태운 채 어디론가 서둘러 출발하기 시작했다.

“아, 아빠.”

이 당시의 디아나는 당연히 이해를 못 하겠지만, 루스티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 대륙에 다시 발을 디딘 자신의 취급이 어떨지는 물론이고, 도착하자마자 격렬한 환영의 무리가 찾아올 것까지.

게이트를 타기 전후의 루스티카 행동을 보면, 그녀는 지금의 모든 상황을 예측했던 게 확실하다.

“안 돼… 아빠…….”

지금 이 시기… 약 500년 전의 파라이소 대륙에는 진짜배기 예언자가 있거든.

신성국 슈엘츠에 어떤 거대한 위기나 격변의 요소가 발생하면, 그것을 미리 간파하여 교회에 알려주는 재난경보 시스템.

이름은 루나 루에바. ‘성녀의 문장’ 아이템 설명의 주인공이자, 한수호의 마누라.

그녀가 눈 부릅뜨고 살아있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아빠아아!!”

그걸 알았음에도 루스티카는 차원 게이트를 열었고, 디아나를 이 세계에 들였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그녀에게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해주고.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선물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루스티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왜… 내 마지막 가족까지, 빼앗아 가는 거야?’

지금 이 순간, 디아나의 마음속에 불같은 적개심이 피어올랐다.

이곳도 똑같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

이름만 다르고 생김새만 예뻤지. 이 세상은 디아나에게 있어서 시작부터 이미 지옥이었다.

“아빠를… 돌려줘… 돌려줘.”

디아나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마차에 갇힌 채 그 말만 되뇌었다. 어둠은 지옥 생활로 익숙했지만, 루스티카가 없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연행 당했을까. 이내 마차의 문이 열리며 오랜만에 맞이하는 햇살이 쏟아졌다.

그리고 예의 고까운 기사단장이 마차 문밖에서 머리를 디밀었다.

“내려라, 사악한 마녀 계집.”

디아나는 그가 엄청나게 싫었지만, 루스티카의 신병도 이자의 손에 달렸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얌전히 그의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마차에서 내려 포박된 몸을 질질 끌고 나가던 그녀는, 이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이 나가버렸다.

“…와아.”

엄청나게 거대하고 지붕이 뾰족뾰족한, 이상한 하얀 건물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엄청나게 거대하고 뾰족뾰족한 하얀 건물’이라는 건 디아나의 이미지고, 정확한 명칭을 말하자면, 내가 한수호와 최후의 결전을 치렀던 바로 그곳, 백검의 성당이었다.

이 시기에 백검의 성당은 슈엘츠 성국의 교황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신성국인 슈엘츠는 교황이 곧 국왕이므로, 말하자면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쯤 되는 곳이다.

“얌전히 따라와라, 사악한 마녀.”

기사단장이 디아나를 포박한 빛의 실타래를 꽉 쥔 채 앞장서 나간다. 디아나는 도살장 끌려가는 개새끼처럼 질질 끌려갔다.

‘아빠는?’

그 와중에 디아나는 퍼뜩 루스티카가 생각났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도착한 마차는 자신이 타고 온 것 한 대뿐. 루스티카가 탔던 다른 마차는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아빠… 어디 갔어?’

디아나는 잔뜩 풀이 죽었다.

아빠가 어딘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아니면 혹시… 나를 버리고 혼자 도망간 건 아니겠지.

생각도 하기 싫은 가정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그런 가정들이 그녀의 뇌리를 쿡쿡 쑤신다.

디아나는 시무룩하게 발키레아 기사단장을 따라갔다. 이젠 반쯤은 될 대로 되라는 어린애 같은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이내 내가 묵시의 기사들과 싸웠던 긴 회랑을 지나, 개선문처럼 거대한 석문을 지나갔다.

‘와아… 굉장하다.’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여신상과, 신의 은총을 표현한 태피스트리, 그리고 태양광을 성스럽게 비추는 스테인드글라스까지, 성당의 모든 웅장한 기물들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디아나는 감상에 푹 빠져있는 자신을 깨닫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리고 한껏 퉁명스러운 말투로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교황 성하께서 네년을 보고자 하신다. 영광으로 알아라.”

“교황……?”

뭐지, 그건. 먹는 건가.

드립이 아니다. 이 당시의 디아나는 진짜 그렇게 생각하더라. 지옥 토박이(?)인 그녀는 지구인 시절 박정용과 파라이소 대륙 상식 수준이 용호상박이었다.

디아나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교황이 뭔데.”

“이 나라, 이 세계의 가장 정점에 계신 여신의 오른팔이시다.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도 삼가라.”

“으음, 그렇구나.”

가족들을 이끄는 대장이라네. 그러니까 우리 네크로맨서 일족에서 라스카르도 삼촌 같은 사람인가 보다.

디아나는 자기 나름대로 그렇게 해석했다.

“저기, 아빠는 어디 있어?”

“…아빠? 누굴 말하는 게냐.”

“루스티카 말이야. 어디 있어?”

“아, 그 마귀할멈 말인가. 그자라면 알 것 없다.”

마귀할멈이라니. 아빠는 마귀할멈이 아니야.

이 아저씨 정말 짜증 난다. 죽여버릴까. 디아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음에 안 드는 장난감이 있다. 그래서 버려야겠다. 그 정도의 가벼운 감상이었다.

‘용용이 발톱 때도 못 벗길 것 같은 게. 너무 건방져.’

그 피폐하고 처절한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탯줄 자르고 태어나서부터 100년을 살아온 디아나다.

외관도 말투도 평범한 꼬마 여자애지만, 그 내부엔 지옥의 괴물에 가까운 흉악한 세계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빠랑 만나게 해줘.”

“안 된다. 그 여자는 지금부터 이 나라를 위해 중요한 사명을 짊어져야 하니까, 교황 성하의 윤허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사명? 그게 뭔데.”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루어야 하는 임무다.”

디아나는 이해가 안 되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숨을 걸어서라니. 목숨보다 중요한 게 세상에 어딨어?”

그 루스티카가 항상 디아나에게 말했다.

세상에 목숨보다 소중한 게 없다. 그러니까 항상 하루라도 더 살 수 있음에 감사해라. 살기 위해 궁리를 멈추지 마라. 네 목숨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라고.

그런 루스티카가 목숨을 걸고 무언가 하러 갔다니. 그녀로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있더군. 그 마귀할멈한테 감사하는 게 좋을 거다, 꼬마 시체술사.”

“그게 무슨 소리야?”

“그 할멈은 너를 위해 사명을 완수하려는 거다.”

별안간 기사단장은 피식 웃으며 그런 말을 했다.

디아나는 고개를 퍼뜩 들어 기사단장의 뒤통수를 멀끔히 쳐다봤다.

“엥? 나?”

“그 마귀할멈이 당돌하게도 교황 성하와 거래를 했다. 우리가 원하는 바를 들어줄 테니, 네년을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조력해 달라 하더군.”

“…아.”

“자애와 아량이 하해와 같으신 교황 성하께서 마음을 크게 쓰셔서, 너희 같은 더러운 시체술사들과의 공존을 택하셨다. 운 좋은 줄 알아라.”

그 말에 디아나는 가슴 깊숙이 따스한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빠가, 루스티카가 나를 위해서. 그 말 하나에 심장을 죄어 오던 불안감과 압박감이 씻은 듯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디아나는 조금 신이 난 어조로 계속 물었다.

“그, 사명이라는 게 뭔데?”

“이세계에서 용사를 불러오는 작업을 할 것이다.”

“…헤에, 용사?”

그 순간 디아나는 루스티카가 줄기차게 들려주던 동화 하나를 떠올렸다.

동화 속 용사들은 항상 ‘드래곤’이라 불리는 괴물을 때려잡았다. 그리고 잡혀간 공주님을 구해내서 행복하게 산다.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고, 왕이라는 사람이 공주님이랑 결혼을 시켜줘.’

루스티카가 말하길, 드래곤은 용용이와 비슷하게 생긴 괴물이라고 했다.

용용이라면 나도 많이 때려잡아 봤는데, 그냥 그 용사라는 거 내가 하면 안 되나? 디아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정신연령이 어려서인지, 생각만으론 참을 수 없었다.

“나도 꽤 센데. 용사라는 거 내가 하면 안 돼?”

사실 꽤 센 정도가 아니다.

스포일러를 하자면, 이후 국가 전체의 정예 병력과 이 애 혼자서 맞짱을 뜨게 되는데, 거기서 전 대륙의 정예 병력이 밀린다.

지옥에서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 중력 500배 수련을 하고 온 디아나는 이미 반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기사단장은 기가 차다는 양 웃었다.

“하핫, 당돌한 계집년이군. 당연히 안 되지.”

“뭐야. 왜 안 되는데?”

“루나 님의 예언은 언제나 절대적이다. 곧 소환될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선, 이계의 용사가 필수적이라고 말씀하셨다.”

“루나 님……? 마왕?”

“어이쿠, 이런. 꼬마라고 너무 떠들었군. 자세한 건 더 이상 말해줄 수 없다.”

“피, 치사하다.”

디아나는 기사단장이 불친절하다고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근데 이 정도면 솔직히 개친절한 거 아니냐? 신성국 기사단장쯤 되는 양반이 꼬맹이의 시시콜콜한 질문에 일일이 다 대답해 줬는데.

뭐 멀리서 보는 내 입장에선 그런데, 어쨌든 디아나는 불친절하게 느꼈는가 보다.

“도착했다. 들어가라.”

어쨌든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기사단장은 한 집무실로 디아나를 안내했다.

디아나는 그곳에 들어갔다. 고풍스럽고 고급스러운 물건들로 가득한 하얀 색조의 집무실이다.

성스러움이 묻어나는 방의 중앙, 탁자 앞에 한 투실한 노년 남성이 앉아있었다.

“오오, 그쪽이 또 하나의 네크로맨서 일족… 마녀 디아나라는 자인가?”

남자는 반가운 체를 하며 디아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디아나는 루스티카에게 교육받은 대로 무의식중에 머리를 꾸벅 숙였고, 이내 핫, 하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때늦은 경계의 시선을 지그시 보냈다.

“아저씨는 누구?”

“나는 슈엘츠의 국교, 성검교단을 이끄는 교황. 카스트로 3세라고 한다. 편한 대로 불러주려무나, 어린 마녀여.”

“…나는 디아나. 디아나 에스파다야. 지옥에서 얼마 전에 올라왔어.”

“허헛, 알고 있다. 루스티카… 그자가 네 흑마법 재능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더구나.”

“에헴, 뭐, 내가 좀 마법을 잘 쓰긴 해.”

서로 통성명이 끝나고, 교황 카스트로는 기사단장에게 슬쩍 눈짓했다.

스르륵. 명령을 귀신같이 알아챈 기사단장은 곧바로 디아나의 포박을 풀었다. 그리고 뒷걸음쳐 빠르게 집무실을 이탈했다.

교황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디아나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서 앉으려무나. 향후의 계획에 대해서… 너도 알아야 할 게 많을 테니까.”

“…응.”

디아나는 경계를 풀지 않은 채 교황 앞 테이블에 앉았다.

쪼르륵. 교황이 디아나 앞의 찻잔에 조심스레 차를 따라줬다. 향긋한 냄새가 순식간에 집무실 전체로 퍼진다.

디아나는 그 차를 홀짝 마셔봤다.

맛있다. 이 세상 것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일단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디아나의 사고방식이란 평범한 어린애 이상으로 단순했다.

맛있는 거 줬으니 나쁜 사람 아닌 거 같다. 그런 논리였다.

‘그런데… 기분이 나빠.’

하지만 동시에 실로 날카로운 직감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얇게 뜨인 교황의 눈꼬리 안에서, 희번덕희번덕하게 빛나는 뒤틀린 욕망을 읽어낸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