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외전 1―1. 메모리 오브 위치 (1)
마녀 디아나를 살해한 직후. 나는 폭주하는 마력의 격류 속에서, 디아나의 기억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무려 500년을 훌쩍 넘는 막대한 기억. 나는 그녀가 느꼈던 감정들과 생각, 그리고 경험 들을 모두 고스란히 체험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내가 한수호와 싸우면서 기억에 구멍이 숭숭 났다 보니, 요즘은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다.
그녀의 기억이 내 기억과 마구 뒤섞인다. 똥인지 된장인지, 어떤 게 진짜 내 기억인지가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뭐 그래서, 뒤섞인 기억들을 좀 정리해 보려고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수호와 디아나의 파란만장했던 파라이소 대륙 여행을 정리해 나가야겠다.
그러지 않으면… 디아나의 파편이 머릿속에서 영원히 유령처럼 떠다닐 것 같았다. 그 징글징글했던 한수호가 내 앞에서 자꾸 히죽대니까 소름이 돋는다니까.
안 그래도 빡통인 대가리인데 말이야.
디스크 조각 모음을 해야 그나마 대가리가 효율적으로 돌아가지 않겠냐?
그래서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다.
이 이야기는 오로지 디아나의 감상과 시선만으로 이루어진, 편협하고, 단편적이며, 자기합리화로 점철된 디아나의 일기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슬프고, 안타깝고, 가슴이 미어지는… 그런 이야기다.
* * *
이건 똥털이 나한테 맨 처음에 설명해 줬던 것이기도 한데, 내가 몸담았던 이세계, 가이알란트에는 총 네 개의 세상이 있다.
제1계는 파라이소 대륙. 중간계. 내가 2년 정도 루시와 함께 살아갔던 그곳.
제2계는 천계. 아신들이 사는 동네.
제3계는 지옥. 드래곤에 버금가는 기괴하고 막강한 괴수들이 바글바글 유폐당한 막장 동네.
제4계는 마계.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무의 땅.
“…….”
디아나는 바로 그 지옥 출신이다.
낯은 시야로 올려다보는 세상은 언제나 피처럼 새빨간 붉은색이다. 곳곳에서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불꽃들이 그들을 잡아먹을 듯 날름거린다.
“디아나, 잘 들어라.”
디아나의 유년 시절은 모두 이런 색조로 물들어 있었고, 이스그라드만큼 거대한 괴수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끔찍한 광경이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그리고 디아나의 시선 중앙에는, 언제나 하얀 머리 할머니가 하나 서있었다.
“지금부터 우리가 가는 세상엔 말이다. 지옥 같은 삶이 기다리고 있단다.”
그 할머니가 디아나의 머리를 쓸어주며 말했다.
디아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이곳에서 자랐으니까.
그 하얀 머리 할망구의 말은 모순덩어리였다.
“루스티카, 여기가 지옥 아니야?”
“그래, 이곳은 지옥이라 불리는 곳이지.”
“히히, 근데 여기보다 더 지옥 같은 곳이 있을 수가 있어?”
“…그래, 그렇구나. 네 말도 옳다.”
“헤헤헤, 아빠는 가끔 바보 같은 말을 한다니까.”
할머니의 이름은 루스티카. 현재 디아나의 아빠였다.
할머니인데 아빠라는 게 이상한가? 디아나는 그냥, 현시점에서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아빠’라고 부른다.
원래 약 100년 전쯤에는 디아나의 진짜 혈육인 아빠가 있었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지옥 같은 지옥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디아나는 말했다.
“삼촌이 그랬어. 우리 가족들은, 다들 중간계의 경험이 있어서 자살을 한 거래.”
“…그놈이 그런 말을 했니?”
“응, 거기서의 생활이 즐거웠으니까. 여기서 적응하지 못하는 거래. 희망을 맛본 사람만이 절망을 안다는데… 으음,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어.”
“몰라도 된다. 너희 삼촌은 원래부터 그랬잖니. 쓸데없는 망언을 일삼았지.”
“응… 그랬지, 히히.”
디아나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도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붉은 용암이 괴수들의 피와 섞여 질질 흐르는 메마른 땅이 보였다.
“그런 삼촌이라도… 없으니까 좀 허전하네.”
그녀는 가슴이 먹먹해지고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비참함’과 ‘무력함’이라는 것을, 정신적 성장이 멈춰버린 디아나는 알지 못했다.
루스티카는 그런 디아나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다. 그저 새빨간 눈동자로 안타깝게 쳐다볼 뿐이다.
“…….”
디아나가 말하는 삼촌. 네크로맨서 라스카르도. 그 역시 얼마 전에 이 지옥의 땅에 뼈를 묻었다.
‘용용이’와 ‘쭉쭉이’의 협공에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루스티카와 디아나를 탈출시키기 위해 그가 대신 희생당했다.
“용용이도 쭉쭉이도, 하나씩만 있으면 별거 아닌데, 씨이.”
용용이니 쭉쭉이니 하는 건, 디아나가 이곳에 사는 괴물들에게 붙인 별명이다.
귀여운 이름과 달리 ‘용용이’는 이스그라드 같은 초거대 고룡의 살아있는 시체를 말하는 거고, ‘쭉쭉이’는 수백의 촉수와 수백의 눈알을 가진 빌딩만 한 크툴루 괴물을 말하는 거다.
“있잖아, 아빠.”
“왜 그러니.”
디아나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시 루스티카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서로한테 불사 계약을 맺은 네크로맨서잖아?”
“그래, 그렇지.”
“그런데 용용이나 쭉쭉이는 어떻게 삼촌을 죽였어?”
“…….”
루스티카는 잠시 대답을 못 했다. 그저 시선을 멀리 던지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결국 루스티카는 디아나에게 씁쓸한 진실을 말해줬다.
“…네 삼촌도. 그 제1계 생활을 해본 사람 중에 하나니까 말이다, 디아나.”
오래전, 제1계에서 최초로 대륙을 통일한 신성국 슈엘츠가 건국될 때.
신성국은 건국공신이었던 네크로맨서 일족을 함정에 빠뜨렸고, 이 지옥에 유폐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 일족들은… 모두 언젠가는 제1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만 붙잡고 버텨왔을 게다.”
혹자는 복수를 위해서, 혹자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와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그들은 이 척박한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에게 불사의 각인을 걸었다.
그렇게 살아있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집념의 지옥 생활을 수십, 수백 년에 걸쳐 해왔다.
“그게 벌써 300년째다, 디아나. 희망이 꺾이기엔 충분한 시간이지.”
“…사실은 자살이라는 거야?”
디아나는 풀 죽은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디아나는 저쪽 세상을 겪어본 적이 없다. 그녀는 눈떴을 때부터 지옥이었고, 이제 100년을 좀 넘게 살았다. 그래서 다른 일족들의 심정 같은 건 잘 모른다.
루스티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본인 의지로 죽었지. 아무리 지옥의 마귀들이라도, 불사 각인이 박혀있는 우리를 물리적으로는 죽일 수가 없어.”
“그게 뭐야. 그러면 이상하잖아. 그러면… 왜 지금까지는 살아있었어? 왜 나랑 놀아주고, 왜 같이 나들이도 가주고, 왜…….”
“자기에게 어울리는 무덤을 찾아간 게다. 불사신인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자신이 죽을 장소를 선택할 때가 오는 법이야, 디아나.”
자기에게 어울리는 무덤을 찾아간다. 그 말이 디아나의 머릿속에 깊게 각인되었다.
하지만 한참을 생각한 끝에, 디아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리고 루스티카… 아빠의 품에 힘껏 안겼다.
“그래도 싫어. 아빠, 아빠는… 절대 날 두고 먼저 가지 마.”
처음엔 수백 명이 북적거렸던 그녀들의 일족도 어느새 두 명. 루스티카와 디아나밖에 남지 않았다.
루스티카도 애틋한 얼굴로 자기 하나뿐인 혈육을 꽉 끌어안았다.
“그래, 디아나. 절대 널 혼자 남겨두지 않을 게야. 약속한다.”
그리고 루스티카는 바닥을 매만졌고, 이내 손을 뻗어 올렸다.
파지직! 시커먼 스파크와 함께 검붉은 문자열이 그녀의 손을 타고 허공에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이내 바닥을 스멀거리는 불길한 마법진을 그렸고, 마법진은 압도적인 흉마의 진동을 뿜어내며 허공의 공간을 마구 일그러뜨렸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 디아나. 파라이소 대륙으로.”
파지지직! 시커먼 스파크와 함께 허공이 찢어진다.
공간이 갈라진 균열 사이로 한없이 어두운 공허가 질질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게 더 넓은 세상을… 진짜 인간다운 삶이 뭔지 보여주고 싶구나.”
차원 게이트.
당시에는 세계의 관리자인 아신들조차 함부로 사용하지 못했던, 차원과 차원을 강제로 연결하는 기적. 신을 넘보는 디아나의 천재성과 루스티카의 오랜 노고가 쌓인 결과물이 눈앞에 펼쳐졌다.
루스티카는 잠시 감동한 얼굴로 그것을 쳐다봤고, 이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네 삼촌, 라스카르도가…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이 광경을 함께 볼 수 있었을 텐데.
아마 그런 말을 삼키지 않았을까 싶다. 그냥 내 추측이다.
“디아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 너머에서 무슨 일이 있든, 나는 괜찮다.”
“응?”
문득 루스티카가 뜻 모를 말들을 중얼거렸다. 디아나의 등을 연신 쓸어주는 루스티카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했다.
루스티카는 게이트를 향해 마지막 한 발짝을 남겨둔 채, 가만히 디아나의 두 손을 꽉 쥐었다.
“디아나, 너는 누구보다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
“어… 무, 무슨 말이야, 아빠?”
“저쪽 세상에서도 많은 시련이 닥쳐올 거다. 하지만 누구보다 지옥 같은 삶을 살아온 너니까. 그러니까…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렴. 무슨 일이 있어도 밝게 웃으려고 노력하렴.”
디아나는 루스티카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루스티카는 전에 없이 절박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디아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응, 아빠 말이라면, 그렇게 할게. 나 무슨 일이 있어도 웃을게!”
디아나는 양쪽 입꼬리를 검지로 붙잡고 한껏 위로 올렸다. 이때의 디아나는, 그저 불안해하는 루스티카가 안심해 주길 바라는 일념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이 루스티카에게도 전해졌는지, 그녀는 디아나를 품에 안고 하염없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그래… 불쌍한, 우리 불쌍하고 사랑스러운 디아나…….”
루스티카의 목소리와 손끝이 떨린다. 울고 있었다. 디아나는 알지만 모른 척을 했다.
이내 두 사람을 서로의 손을 꽉 쥐고, 허공의 균열로 발을 들이밀었다. 두 사람이 거의 동시였다.
우지직. 디아나의 눈앞은 순식간에 이지러지고, 게이트 특유의 메스꺼움이 느껴졌다.
* * *
그렇게 두 사람은 중간계, 파라이소 대륙에 발을 디뎠다.
디아나는 눈을 뜨자마자 펼쳐져 있는 광경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와아, 와아!!”
어딜 둘러봐도 동산만 한 괴물이 없고, 피 냄새나 살 타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밥 짓는 구수한 냄새가 멀찍이 마을 어귀에서 솔솔 풍겨 온다. 기분 좋은 침묵과 새소리가 귓가를 자극한다.
왜 수많은 자기 일족들이 이 세상을 그렇게 그리워했는지. 디아나는 그제야 좀 이해가 되었다.
“대단하다… 진짜 대단하다! 파라이소 대륙!”
생전 처음 보는 파란 하늘. 짙푸른 초목. 그 위를 뛰어다니는 작은 산짐승들.
그리고 방방 뛰는 디아나와 루스티카를 둘러싼, 하얀 갑옷 차림의 수많은 아저씨들……?
“역시 루나 님의 예언대로군. 정확히 이 자리에 나타나는구나, 저주받을 지옥의 네크로맨서들이여.”
갑옷을 입은 아재들 중 하나가 앞으로 한 발짝 나오며 말했다.
디아나는 그제야 덩실대던 몸짓을 우뚝 멈췄다. 그리고 적대감 어린 수백 개의 시선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빠? 이게, 무슨 상황이야?”
이내 디아나는 루스티카를 두 눈에 담았다.
하지만 루스티카는 이미 체념 어린 얼굴로 디아나에게 살포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디아나, 나는 괜찮다. 모두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위태로운 미소다.
“제발 아무도 원망하지 말거라. 너도 다른 일족들처럼… 복수에 눈이 멀어선 안 돼.”
디아나는 이 순간 예언에 가까운 직감을 느꼈다.
루스티카와 제대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