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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278화 (254/280)

278화 [선택C. 계승을 완전히 포기한다.]

고심 끝에 결국 중얼거렸다.

“… 아무것도 선택하고 싶지 않네.”

내뱉고 난 뒤에는, 괜히 고민한 내가 바보 같아졌다. 열심히 대가리 굴린 것 치곤 싱거운 결론이었다.

나는 루시와 디아나의 옥좌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똥털 쪽을 흘겨보며 말했다.

“포기한다. 전부 다.”

연신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내 지금 솔직한 심정이 그렇다. 이 중요한 순간에까지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 뭐?”

루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퍼뜩 쳐다봤다.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은 시선이 쏟아졌다.

나는 축 가라앉은 눈으로 가만히 그녀를 마주봤다. 그러자 루시가 낮게 숨을 삼켰다.

“진심이냐?”

“어. 진심이다.”

“왜, 왜. 여기까지 와놓고… 어째서?”

“둘 중 어떤 선택도 틀려먹었어. 그 끝에는 결국 네가 불행해져.”

“내, 내가 불행해져…?”

“그래.”

나는 디아나가 죽기 전, 그 끔찍한 몰골을 아직 똑똑히 기억한다.

그것이 세계의 유지자가 당도할 끔찍한 말로다. 엄청난 고통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너절한 삶.

그건 이미 살아있다고 할 수도 없다. 그저 무간지옥의 한가운데일 뿐이야.

‘그렇다고. 루시를 죽여?’

나는 한수호가 왜 이런 선택지를 남겨준 것인지 잘 안다.

계승의 적합자인 루시를 죽이고. 이미 그에 준하는 괴물이 된 내가, 그 자리를 대신 계승해라. 계승의 옥좌를 직접 찬탈해라. 뭐 대충 그런 의미일 텐데.

이건 말하자면… 내 심정을 잘 아는 한수호의 배려 겸 악질적 장난이다.

‘그러면 내 자기만족은 되겠지.’

루시를 죽이면. 루시는 나에 관련한 기억을 모조리 잃는다.

그러면 다시 부활한 그녀는 계승의식 같은 건 신경쓰지 않은 채. 전처럼 불사의 마왕으로서, 희생 따위 상관없이 계속 살아가면 된다.

이 족같은 불행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내가 없는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선 안 돼.’

나는 그쯤에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세계에 도망칠 곳 따윈 아무데도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일이 잘 풀릴 리가 없다. 그런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 뇌리 한 켠을 쿡쿡 쑤셨다.

“다른 것들은 나도 조또 관심없어. 하지만 너만은 불행해지면 안 돼. 나는 네가 행복해지길 원해서 여기까지 왔다.”

나는 진지하게 내리뜬 눈으로 루시를 쳐다보며 말했다.

“… 윽!”

좀 직설적으로 말해서 루시가 놀란 모양이다. 그녀는 퍼뜩 시선을 피하며 어버버거리다, 얼굴을 슬쩍 붉혔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리고 내 정강이를 툭툭 걷어차기 시작했다.

“그, 그렇다면 더더욱 내 의사를 존중해야 하지 않겠느냐!”

“… 그건.”

“됐다! 듣기 싫다!”

루시는 검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내 입술 앞으로 갖다댔다.

그녀의 입가에는 평소처럼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비키거라. 까짓 거, 세상 따위 내가 집어삼켜 주겠다! 원래부터 그게 내 오랜 숙원이었느니라! 그걸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고통이 있더라도 두렵지 않다!”

어떤 고통이라도 두렵지 않아?

나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발끈했다.

디아나를 통해 그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너는…!”

디아나의 말로를 보지 않아서.

그리고 그녀를 지키던 기사의 말로를 보지 않아서.

…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 너는.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나는 알 수 있다.

한수호는 나랑 비슷한 새끼다. 비슷한 사고방식, 그리고 비슷한 처지에 놓인… 나의 거울 같은 새끼다.

‘그러니까. 알 수 있다고.’

루시가 내 선택으로 점점 망가져가는 모습을 내가 본다면. 그러면서도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수십, 수백 년에 걸쳐 느껴야 한다면.

나는 한수호처럼, 절대 이 세상을 용서하지 못한다. 이건 예언에 가까운 확신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모르는 건 바로 너다. 용사.”

루시는 미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어딘가 슬픈 기색을 담은 미소였다.

“너만 그런 줄 아느냐? 나 역시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그리고, 너와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이곳에 찾아왔다.”

“…….”

“누구에게 끌려온 것도 아니다. 내 의지로 여기에 왔단 말이다.”

그리고 루시는 성큼성큼, 내 옆을 제치고 옥좌를 향해 스스로 다가갔다.

퍼억. 둔중한 타격음이 울렸다.

내가 루시의 뒷목을 후려치는 소리였다.

“어… 윽…?!”

핑글. 루시의 눈동자가 격하게 회전했고. 그녀의 몸이 천천히 기울어졌다.

풀썩. 그녀가 해골무덤 위로 힘아리없이 쓰러졌다. 초점이 안맞는 루시의 눈이 나를 필사적으로 쳐다보려 했다.

“요, 요… 용사. 왜…….”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루시.”

나는 그녀의 눈을 슬쩍 감겨줬다. 그리고 옥좌 옆에 가만히 서 있는 똥털을 쳐다봤다.

루시의 머리카락을 잠깐 쓸어 넘기며, 나는 말했다.

“내가 어떻게든 해놓겠어. 약속한다.”

나는 루시를 그 자리에 놔둔 채 똥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유유자적하게 말했다. 내 의도를 처음부터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이미 알고 있어요.”

진짜 알고 있다네.

나는 불쾌감을 애써 숨겼고. 태연한 척 대꾸했다.

“흐음. 그러면 얘기가 더 빠르겠네. 얼른 준비를…….”

“그만 두세요. 실패할 게 뻔하니까.”

“… 뭐?”

“몇 번을 도전하든 마찬가지에요. 당신이 얼마나 어떻게 발악하든. 결국 이렇게 될 게 운명이라고요. 그냥… 이쯤에서 받아들여요. 이보다 더 좋은 결말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요.”

단호하고 냉정한 어조.

하지만 내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언제나 똥털의 차가운 비난 안에는, 나에 대한 걱정이 숨어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기색이 분명히 느껴졌다.

물론 진짜 걱정이든 아니든 상관은 없다. 내가 할 말이 변하진 않는다.

“어딘가엔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 네?”

“분명히 바꿀 방법이 있었는데. 내가 깜빡 놓쳐버린 걸 수도 있잖아.”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까마득한 안개 속의 어둠에서 무언가를 찾듯이, 하염없이 그곳을 주시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루시는 나를 잊어버리지 않고. 나도 루시를 잊어버리지 않고. 제논도 제나도 알드콘도 죽지 않고. 모두가 살아남아서 모두가 행복한… 개쌉노잼 해피엔딩 말이야.”

언젠가는 나올지도 모르잖아.

보는 사람 입장에선 반전도 재미도 없는 개노잼의 향연일지언정.

그렇게 해서 모두가 마지막에 웃을 수 있다면야, 까짓 거 재미 좀 없으면 어떠냐.

“나는 포기할 수 없어.”

혹시라도… 내가 엄청나게 노력한다면. 그런 미래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을 직접 체험하고, 그 힘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게 바로 나다.

그러니까.

“가능성이 억만 분의 일이라도 있으면 충분해. 그걸 무시하고 싶지 않다.”

똥털에게 손을 당당하게 뻗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언제나 내가 그랬듯이. 맡긴 물건 찾듯이 요구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모든 흉마와, 거기에 쌓인 시간을 박살내고. 처음으로 돌아간다.

언젠가… 내가 헥터의 공격으로 멘탈이 무너지기 직전. 똥털이 내게 제안했던 바로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잘 할 자신 있어.”

어떤 선택의 결말도 납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해서 새로운 결말을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똥털은 특유의 울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쥐어 짜내듯이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한 게. 그리고 그 기대가 배신당한 게… 벌써 몇 번째인지. 알고서 하는 말인가요?”

“… 뭐?”

“모르겠죠. 몰라야죠. 안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못할 테니까.”

… 저게 무슨 소리인가.

한참을 생각해보다가 간신히 깨달았다.

그렇군.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똥털이 위화감이 섞인 멘트를 날리기도 하고. 힌트를 꽤 많이 줬었는데. 오히려 너무 늦게 깨달았다.

‘역시. 내가 이세계 생활을 시작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군.’

벌써 몇 번이고 도전해서.

이번과 같은 말로를 맞이하고.

똑같은 결론을 도출해서, 이미 수없이 회귀한 결과. 그것이 지금의 나라는 소리다.

“몇 번째인지 알려드릴까요? 마침 당신의 이번 여정은, 되게 아이러니한 회차거든요. 무려…….”

“됐어. 알려주지 마.”

나는 자포자기식으로 떠드는 그녀의 말을 막아버렸다.

똥털은 입을 콱 다물고 나를 가만히 주시했다. 그녀의 금발 끝단이 파르르 떨린다.

나는 도전적으로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그녀를 가만히 마주봤다.

“도전 횟수를 알면 어쩔 건데. 괜히 기분만 잡칠 일 있냐? 어차피 이미 갈아엎기로 결정했어.”

“…….”

“그러니까 네가 뭐라 하든 소용없어. 돌려 보내주기나 해. 똥털.”

똥털은 한동안 지긋하게 침묵을 지켰고. 이내 못 당하겠다는 양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씨익 웃는다. 할 말은 많은데 하지 않겠다는 그런 얼굴이다.

“… 역시.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죠.”

차라리 후련하다는 말투다.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가기 전에. 이것만 말해둘게요.”

“해봐라.”

“천계의 불문율 때문에, 시간이 회귀해도 나는 당신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 못해요. 또 직접적인 도움도 줄 수 없어요. 이번에 그랬듯이 말이죠. 그리고 또…….”

‘이것만 말한다’라더니. 무슨 물가에 애새끼 내놓은 마냥 잔소리를 늘어놓는 그녀였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똥털의 말을 일축했다.

“아 거 혓바닥 준내 기네. 알겠다니까. 언제는 뭐 도와준 것처럼 말하네.”

“… 후후. 진짜… 말이나 못하면.”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똥털은 묵묵히 계약서 한 장을 허공에 생성해냈고.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불사의 계약 전량 파기 및, 최초단계 시공회귀 동의 계약서]

가장 첫머리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거침없이 그 계약서 말미에 내 이름을 서명했다. 처음 그녀와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계약서가 불길한 붉은 빛을 잠깐 뿜는가 싶더니. 파아앗! 시야가 새하얗게 명멸한다.

“다음엔 꼭. 당신이… 내 이름을 절대 잊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겠어요. 두고 보라구요.”

이윽고 미네르바의 목소리도 형상도 뭉개진다.

삐빅. 아마도 내 인생 최후이자, 새로운 인생 최초가 될 패널이 떠올랐다.

[알림 ? 계약 파기]

[모든 회귀점이 붕괴한다. 회귀점에 축적된 시간과 기억이 소멸한다.]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어지럽다. 눈앞에 육각형의 작은 통로가 보인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곳을 향해 몸을 허우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나는 한 가지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그래. 망자의 함…!’

나는 쥐고 있던 계약서를 퍼뜩 망자의 함에 집어넣었다.

망자의 함은 분명, 불사의 계약과는 완전히 다른 시간선에 있는 아이템이라 했다. 그러니 아무리 계약 파기로 시간이 최초로 돌아간다 해도… 지금 이 계약서 쪼가리를 넣어두면. 그 안에 아이템이 남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보랏빛 염을 토하는 망자의 함을 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부탁이다.’

처음이 아니라는 걸 제발 눈치채라.

앞으로 2년 간. 어떤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절대로 꺾이지 말아라.

‘그리고… 그리고.’

앞으로 네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될… 그녀를 다시 만나면.

꼭 말해라. 네가 있어줘서 내 이세계 생활은, 족같은 와중에도 오질나게 즐거웠다고.

괜히 틱틱대지 말고. 새꺄.

“시공의… 폭풍은… 정말… 최고야…….”

여러 염원과 간절한 비원을 뒤로한 채.

곧바로 정신줄이 날아갔다.

눈이 너무 부셨다.

* * *

내 이름은 박정용.

향년 24세. 직업은 노가다꾼. 여친없음.

내가 죽기까지의 과정은 아무도 관심없을 테니 짧게 요약하겠다.

나는 소위 말하는 노답인생이다. 고졸이고, 막노동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

모아놓은 돈도 딱히 없고, 요즘 같은 헬조선 시대에 결혼할 생각도 딱히 없고. 그냥 이대로 살다 죽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어두운 금발의 미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시급 개쩌는 알바 있는데 해보지 않을래요?”

한다고 했다.

결정까지 3초도 걸리지 않았는데, 판단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여자가 이쁘다.

둘째로 여자가 이쁘다.

그리고 셋째로는.

“당신의 인생을 모두 바쳐야 하는 알바인데… 대신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도 있는 알바랍니다. 어때요?”

그녀의 아리송한 말이 기묘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이라고 하면 좀 지랄이고. 다시 생각해보니 그냥 여자가 예뻐서 그랬던 것 같다.

똑같이 미친 소릴 내뱉어도 예쁜 입술이 내뱉으니 설득력이 오지더라.

속물이라고 욕해라. 나 속물 맞다.

호구라고 욕해라. 호구도 맞다.

“그럼, 계약서 작성할까요?”

그 자리에서 작성하고 피로 지장까지 찍었다. 일단 표면적으론 정상적인 계약서였다.

지장을 찍은 순간 계약서가 불길하게 빛난 것 같다고 느꼈는데, 당시엔 착각인 줄 알았다. 지금은 착각이었으면 차라리 다행이었겠다고 생각한다.

“아! 드디어 할당량 다 채웠네. 길었다 정말.”

하얀 얼굴에 미소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어두운 금발의 여인.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티없이 밝은 얼굴로 계속 말했다.

“이 거지발싸개 같은 나라에서 드디어 탈출할 수 있겠네요. 덕분이에요 용사 후보생님.”

걸쭉한 언사에 순간 흠칫했지만. 털털한 성격인 걸로 쳤다. 원래 예쁘면 저 정도는 용서된다.

하지만 아무리 예뻐도 다음 행동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됐다. 성인군자 데려와도 그녀의 뺨을 즉석에서 후려쳤을 것이다.

“일하러 가볼까요 후보생님?”

여전히 티없는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그대로 툭. 나를 도로 한복판으로 밀어버렸다.

“… 얼씨구?”

그 짤막한 탄성이 내 유언이 되었다.

왜냐하면 곧장 반대편에서 5톤짜리 덤프트럭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장창, 퍼거걱. 덤프트럭인지 나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거하게 박살나는 소리가 났고.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난 바닥에 엎어져 죽어가는 중이었다.

“오예! 스트라이크!”

금발의 미녀… 아니, 똥털의 개년이 주먹을 불끈 쥐며 내뱉은 그 말이, 아직도 무럭무럭 기억 속에서 샘솟는다.

… 근데 당신.

주둥이는 실실 쪼개고 있으면서.

왜 우냐?

엔딩(4) ― 163417414번째 소울라이크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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