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선택B. 불사의 마왕을 살해한다.]
…
…
… 나는 한동안 망부석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수가 없었다.
“… 용사?”
어찌나 조용히 있었는지, 옆에서 루시가 머뭇거리며 내 옆구리를 찔러댔다.
그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아.”
나는 멍한 정신으로 루시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내가 워낙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그런가. 루시가 퍼뜩 내게 들러붙었다. 그리고 뺨을 철썩철썩 때렸다.
“왜 이러냐 갑자기. 상처라도 도졌느냐? 피가 모자란 게냐? 응?”
“…….”
나는 바싹 달라붙어 오도방정 떠는 루시를 하염없이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 생김새. 목소리. 하는 행동. 체구와 체향까지. 모두 뇌리에 각인시키려는 것처럼 말이다.
―디아나는 세상을 용서했지. 하지만 나는 용서할 수 없어. 용서하고 싶지 않아.
머릿속에서 한수호가 내뱉었던 말들이, 경종처럼 윙윙 울려댔다.
그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루시가 앞에서 떠드는 걱정 어린 말들이 허물어진다.
몽롱했던 정신은, 한 점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말했잖아. 흑마법은 발동원리가 저주 그 자체라니까. 고통을 매개로 하는 술식이라고.
―이제 디아나는 내 말을 듣지도, 나를 보지도, 내 손길을 느끼지도 못해.
―디아나는 내게 고통을 대신할 권리를 주지 않았어. 하지만 인도하는 까마귀. 너는 그 자격을 가지고 있거든.
―선택권이 있다. 그것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너는 모를 거다. 정용아.
한수호는 말했다.
나한테 선택권이 있다고.
그 말의 의미. 그리고 그것이 정말 얼마나 큰 축복인지가… 지금, 알 것 같았다.
“용사, 용사! 왜 그러느냐! 씨이, 진짜! 어디 아프면 아프다고 말이라도 좀 해보거라!”
루시는 답답하다는 듯이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힘아리없이 내게 발길질을 해왔다.
그리고 나는 루시를 안심시켜주는 대신. 베스타크를 뽑아 들었다.
푸직. 질척한 파육음과 함께 루시의 아찔한 신음이 흘렀다.
“… 아?”
루시는 잠깐 내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내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자기 복부를 쓰다듬은 그녀는 손바닥을 쳐다봤다.
피가 한가득 묻어나왔다.
“… 요, 용사.”
내가 뽑은 베스타크가 루시의 뱃가죽을 뚫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의문과 혼란, 그리고 고통이 뒤범벅된 시선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 왜?”
루시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힘겹게 물어왔다.
뭐라고 설명해줘야 할까. 뭐라 하면 그녀가 납득할까. 가만히 생각해보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나도 알고 있다. 무슨 설명을 얼마나 조리있게 하든. 루시는 절대 내 결정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그냥. 꿈에서 깰 시간인 것 같아서.”
“… 뭐, 뭐라고?”
깨지 않는 꿈은 없다.
사실 지금도 너무 늦었다. 이제라도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한수호와의 처절한 싸움 끝에, 먼저 꿈에서 깬 나는 현실을 직면했다. 현실은 내게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게… 정답이다.”
다른 선택들도 오답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것은 분명히 이거다.
내가 만족하면서, 동시에 그녀가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잠깐의 희생쯤이야 감수해 주겠다.
“잊어벼려. 전부 다.”
내 쪽으로 늘어진 루시의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
쑤욱. 베스타크를 뽑아냈다. 새빨간 선혈이 슬로우 모션처럼 공중으로 흩날렸다.
“아… 흑.”
루시는 아찔한 탄성과 함께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복부를 부여잡고 나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고통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는 모르겠다만… 보고 있기 즐거운 광경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서로가 괴로운 이런 일은. 빨리 끝내버리고 싶다.
“어디에 누구랑 있어도, 너는 너답게 살아갈 수 있을 거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베스타크를 어깨 뒤로 깊숙이 당겼다.
의문에 찌든 붉은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며. 나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했다.
“굳이 여기일 필요가 없어. 굳이 옆에 내가 있을 필요도… 없어.”
그래. 꼭 네가 희생할 이유가 없다.
그런 엄청난 고통을 받는 모습을… 옆에서 아무 것도 못한 채로, 그녀가 죽을 때까지 옆에서 넋놓고 지켜보라고?
X까. X발. 그런 지옥을 겪을 바엔, 내가 직접 희생하고 만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앞으로도 너답게 살면 돼.”
죽어서 전부 잊어버려라.
내가 말해줬던 계승의식에 관한 것도. 세상이 곧 두쪽난다는 것도. 네가 희생해야 한다는 것도. 그리고… 나 자체도. 전부 말이다.
나는 어거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뒤틀린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지금까지도 그랬잖아.”
최대한 유쾌한 표정을 짓고 싶었는데. 마지막 루시의 얼굴에 막대한 슬픔과 원망이 깃든 걸 보면… 아무래도 실패한 듯하다.
서걱! 슬픔에 잠긴 루시의 얼굴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용사… 이… 머저리…….”
루시는 머리가 잘린 상태에서까지 내 욕을 했고.
이내 두동강 난 그녀의 육체가 파스스, 잿빛의 먼지가 되었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허공으로 덧없이 흩날려 버렸다.
나는 한동안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하염없이, 그야말로 하염없이 응시했다.
[불사의 계약이 파기되었다.]
두둥. 눈앞으로 시커먼 패널 하나가 등장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2월 25일, 14시 31분]
[장소 ― 멸망의 성흔. 신성국 슈엘츠. 백검의 성당 내부 / 비밀의 화원]
[상세: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가 사망했다. 생존한 수호자가 재계약을 이행할시, 수호자에게 알이 재생성 된다. 부화 시기는 직전 계약에서 수호자가 쌓은 흉마의 총량에 영향을 받는다.]
루시의 사망선고였다.
멍한 머리로 그것들을 읽어들이는 와중. 또 다른 패널이 곧장 뒤를 이었다.
[불사의 계약 ? 분기 선택]
[1. 재계약을 이행하고 불사의 마왕의 알을 받아들인다.]
[2. 계약을 파기하고, 흉마와 회귀점의 소멸을 속행한다.]
나는 당연히 재계약을 받아들였다. 앞으로 하려는 일을 위해선 우선 내가 불사신일 필요가 있다.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파앙―! 청명한 빛과 함께 내 손으로 익숙한 알 하나가 안착했다. 나는 미미하게 웃는 얼굴로 그것을 멍하니 응시했다.
“… 진짜 신기해 죽겠네요. 자기가 가장 불행해지는 선택지를 고른 주제에…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워 보여요.”
문득 디아나의 옥좌 옆에 있던 똥털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얼마 없던가. 나는 루시의 알을 그녀에게 휙 던졌다. 똥털은 어렵지 않게 그것을 받아냈다.
나는 성큼성큼 옥좌 앞으로 다가갔다. 잠깐 심호흡을 하고 옥좌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 후회는 없나요?”
똥털이 깊게 잠긴 어조로 말해왔다.
“이건 마녀의 기사가 판 함정이에요. 이미 한 번 겪어봤잖아요. 그녀는 기억만 잃을 뿐, 당신에게 품었던 감정까지 잃는 게 아니라고요.”
“… 뭐. 그래서 어쩌라고?”
“불사의 마왕이 부활하면, 소중한 것이 깡그리 사라졌다는 막대한 상실감에 허우적대겠죠. 자기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언가를 찾아 헤맬 겁니다. 영원히 찾을 수 없는 당신을요.”
“…….”
“그게 진짜 그녀의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지옥이에요. 당신은 그녀를 무간지옥에 몰아넣은 거라고요.”
물론 똥털이 뭐라 지껄이든, 나는 단호하게 확신했다.
여전히 실실거리는 웃음이 입가를 떠날 생각을 안 했다. 미쳐서 그런 건지, 실제로 즐거운 건지. 나도 이제 잘 모르겠다.
“그래도 언젠간. 내가 아닌 다른 해답을 찾아낼 거야.”
“…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내가 아는 루시라면 분명 그럴 수 있어. 루시를 믿으니까 이런 선택을 한 거다.”
좋아. 준비는 끝났다.
나는 옥좌에 다가가 그대로 털썩, 깔고 앉았다. 해골에서 스며드는 서늘한 촉감이 전신을 타고 흘러내리길 잠시.
푸화악! 내 육체를 거쳐, 검은 섬광 한 줄기가 허공을 찢어발기며 하늘로 치솟았다.
“크윽…!!!”
온몸의 힘이, 뼈와 살과 영혼마저 어딘가로 빨려나가는 듯한 엄청난 상실감이 무한히 이어졌다.
신음을 참을래야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온몸이 덜덜 떨리며 정신이 혼미해진다. 당장이라도 옥좌에서 몸을 떼어내고 싶다는 충동이 수백 번씩 닥쳐왔다.
“그욱… 그아아아악!!”
하지만. 절대로 몸을 떼지는 않았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절대 옥좌에서 엉덩이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러자 어느 순간, 모든 일들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커헉… 허억…!”
머리를 쥐어 싸맸다. 옥좌에 팔을 괴고 숨을 격렬하게 몰아쉬었다.
그런 내 앞으로, 패널이 등장했다.
[알림: 계승자 찬탈]
[마녀가 마련한 계승의 옥좌를 찬탈하는 데 성공했다.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는 너를 완전히 잊은 채, 고통도 희생도 없는 새로운 삶을 살 것이다. 부럽구나. 축하한다.]
‘부럽구나. 축하한다.’라니.
설명 패널에 사적인 감정을 집어넣으면 어떡하냐. 한수호.
나는 애써 숨을 가다듬으며 쓰게 웃었다. 이내 사위를 한 번 빙 둘러봤다.
잿더미가 눈발처럼 휘날리는 화원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신기한… 감각이군.’
시야가 전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이 세상의 삼라만상, 인과의 흐름이 내 손에 당장이라도 잡힐 듯한… 불가사의한 감각이다.
그야말로 신이라도 된 기분이랄까. 평범한 사물들조차 압도적이면서도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
“…….”
점점 짙어지는 사위의 강렬한 암흑 속에서. 잠깐 침묵이 일었다.
그 침묵을 못 견딘 건지, 똥털이 별안간 퉁명스럽게 말문을 텄다.
“… 뭔가 재밌는 얘기라도 해봐요. 심심하네요.”
“싫어 인마. 내가 네 위병소 부사수냐?”
“그럼 뭐, 천년 만년 여기서 뭐하려고요? 모처럼 대화 상대나 해주려 했더니.”
“… 쓰읍.”
그건 그렇군. 생각해 보니 육체적인 고통은 둘째 치고. 이렇게 심심해서야… 그게 오기 전까지도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고통스럽겠다.
나는 고심하다가 결국 화제를 툭 던졌다.
“똥털. 나한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지?”
이걸 가장 먼저 질문한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마녀의 원래 계획이 아니라, 한수호가 반강제로 집어넣어 놓은 불완전한 찬탈자. 그러니 분명 루시에 비해서 이 옥좌를 버틸 수 있는 시간이 한참 적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내뱉은 질문이었는데. 예상은 적중했다.
“어마어마하게 쌓인 흉마로 수명이 연장된 걸 감안해도. 당신이 그 자리를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150년?”
“에게 X발. 짜다 짜.”
“2년 전까지 평범한 인간 남자였던 것치곤, 심각하게 긴 건데요.”
“뭐 그거야 그렇다만.”
150년은 사람의 삶으로서도 절대 짧은 시간은 아니지. 다만 루시의 간절한 염원까지 짓밟아가며 얻은 시간치곤 지극히 짧다는 소리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고. 중얼거렸다.
“시간이 얼마 없네. 곧바로 다음 계승자 찾을 준비를 해야겠어.”
“네. 그러시죠. 저도 힘이 닿는 한에선 최선을 다해 돕겠어요.”
“협조적이라 좋네. 진작 좀 그러지 시불장년아.”
“말했잖아요. 저도 제 나름대로 사정이 다 있다니까요.”
똥털은 난처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문득 하늘을 가만히 쳐다봤다. 나도 덩달아 같이 쳐다봤다.
디아나가 쳐놓은 절멸의 안개가 서서히 옅어지며, 시커먼 태양이 떠올랐다. 그것이 내 위로 암흑을 아스라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 강대했던 디아나조차, 계승 의식을 완성하는데 수백 년이 걸렸어요. 치밀한 계획이 필요할 거예요.”
똥털이 이죽거리며 겁을 한 바가지 줬다.
저 새낀 여전히 일 시작도 전에 초치는 게 취민가 보다.
하지만 계획이 치밀해야 한다는 말 자체는 통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그래서 내가, 전부터 하나 생각해 놓은 게 있는데 말이야.”
흥미와 장난기가 다분한 말투였다. 한수호도 용사지원 시스템을 만들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었다.
똥털이 즉각 반응하며 눈썹을 튕겼다.
“생각해 놓은 거라뇨?”
“결국 적합자를 찾으려면. 또 너희들이 이세계를 뒤적거려야 하지?”
“그렇겠죠. 귀찮긴 하지만.”
똥털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귀찮다는 표정에 대고 퍼뜩 삿대질을 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아신들이 직접 용사 후보생을 일일이 스카우트 하는 시스템 말이야. 번거롭고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뭐… 저희 입장에선 그렇지만. 그 외에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애초에 저쪽에서 먼저 흥미를 갖고, 자연스럽게 이세계에 빠져들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건 어때.”
그 말에 드디어 똥털의 눈가에도 이채가 서렸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직접 발로 안 뛰어도 되는 기획이라니 흥미가 동한 모양이다.
나는 그녀에게 계획을 차근차근 말하기 시작했다.
“저쪽 세상에서 게임을 만드는 거야. 이 세상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게임.”
“… 게임이라. 용사지원 시스템 같은?”
“그래. 다른 데는 몰라도 한국엔 효과 직빵일걸? 관심도도 엄청 높은 데다, 튜토리얼을 미리 시켜서 적성도 미리 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잖아?”
“… 오호. 좀 더 자세히 말해봐요.”
“그러니까 어떻게 만드냐 하면…….”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는 깊어져 갔다.
해골로 가득한 화원. 뼈로 쌓은 왕좌 주변에는 한동안 내 목소리만 잔뜩 울렸다.
하늘에선 검은 태양이 나를 원망하듯, 교교한 암흑을 내리쬐었다.
엔딩(3) ― 찬탈(簒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