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선택A. 불사의 마왕을 계승시킨다.]
그래. 이제 와서 망설일 것이 뭐가 있겠는가.
루시는 이 세상을 지키고 싶어했고. 루시가 그러길 바란다면 나도 그것을 바란다. 그러니까… 애초에 여기까지 온 시점에서 우리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나는 옥좌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가자 루시. 끝이 눈앞이다.”
나는 루시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려놨다.
루시는 흠칫 몸을 떨더니, 이내 비장한 얼굴로 뼈로 쌓은 옥좌를 노려봤다.
“응… 그, 그러자꾸나.”
루시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루시가 천천히 손을 들어, 어깨 위에 얹힌 내 손을 가만히 쥐었다. 그녀의 손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떨림이 눈에 띄게 잦아들었다.
“…….”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입술을 질근 물고, 루시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멀뚱거리는 눈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봤고. 나는 그녀의 앞에 하나씩 토로하기 시작했다.
“루시. 역시… 다른 방도를 생각해보자.”
“… 뭐?”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분명 뭔가… 네가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을 거다.”
루시가 표정을 현란하게 찡그렸다.
갑자기 이러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행색이다.
“용사. 왜, 왜 그러느냐 갑자기.”
“내가 찾아낼게. 무조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가 계승하지 않아도 될 방도를 찾아낼 테니까… 하지 마. 저건 안 돼. 저 옥좌에 앉으면… 기다리는 건, 끝도 없는 지옥이야.”
“하지만 용사! 그런 방도가 있었다면… 지금까지 네가 발견하지 못할 리가…….”
“X발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라고!!!”
지리멸렬한 혼잣말 끝에는 결국 고함을 버럭 질렀다.
루시는 발을 흠칫 물렸다. 그녀의 붉은 시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공포가 아니라, 나를 향한 걱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용사. 너… 괜찮은 게냐?”
루시가 맞잡은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퍼뜩 손을 들어올려 내 눈가로 가져갔다.
그녀의 손끝에 물기가 번져 있었다. 내 눈물을 닦아낸 것이다.
‘이런 망할.’
나는 내 눈가를 거칠게 북북 문질렀다. 질질 짜고 지랄이냐 병신 같은 새끼. 센 척하기도 글렀군.
나는 루시의 손을 철썩 쳐냈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연신 중얼거렸다.
“안 돼. 네가 그렇게 되면. 나는… 나는 절대 참을 수 없어. 미쳐버리고 말 거다.”
그래. 한수호처럼 말이다.
나는 디아나가 죽기 전, 그 끔찍한 몰골을 아직 똑똑히 기억한다.
그것이 세계의 유지자가 당도할 끔찍한 말로다. 엄청난 고통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너절한 삶.
그건 이미 살아있다고 할 수도 없다. 내가 그런 걸 원하고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잖은가.
“다른 것들은 나도 조또 관심없어. 하지만 너만은 불행해지면 안 돼. 나는 네가 행복해지길 원해서 여기까지 왔다.”
나는 진지하게 내리뜬 눈으로 루시를 쳐다보며 말했다.
“… 윽!”
좀 직설적으로 말해서 루시가 놀란 모양이다. 그녀는 퍼뜩 시선을 피하며 어버버거리다, 얼굴을 슬쩍 붉혔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리고 내 정강이를 툭툭 걷어차기 시작했다.
“그, 그렇다면 더더욱 내 의사를 존중해야 하지 않겠느냐!”
“… 그건.”
“됐다! 듣기 싫다!”
루시는 검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내 입술 앞으로 갖다댔다.
그녀의 입가에는 평소처럼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비키거라. 까짓 거, 세상 따위 내가 집어삼켜 주겠다! 원래부터 그게 내 오랜 숙원이었느니라! 그걸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고통이 있더라도 두렵지 않다!”
어떤 고통이라도 두렵지 않아?
나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발끈했다.
디아나를 통해 그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너는…!”
디아나의 말로를 보지 않아서.
그리고 그녀를 지키던 기사의 말로를 보지 않아서.
…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 너는.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나는 알 수 있다.
한수호는 나랑 비슷한 새끼다. 비슷한 사고방식, 그리고 비슷한 처지에 놓인… 나의 거울 같은 새끼다.
‘그러니까. 알 수 있다고.’
루시가 내 선택으로 점점 망가져가는 모습을 내가 본다면. 그러면서도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수십, 수백 년에 걸쳐 느껴야 한다면.
나는 한수호처럼, 절대 이 세상을 용서하지 못한다. 이건 예언에 가까운 확신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모르는 건 바로 너다. 용사.”
루시는 미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어딘가 슬픈 기색을 담은 미소였다.
“너만 그런 줄 아느냐? 나 역시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그리고, 너와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이곳에 찾아왔다.”
“…….”
“누구에게 끌려온 것도 아니다. 내 의지로 여기에 왔단 말이다.”
그리고 루시는 성큼성큼, 내 옆을 제치고 옥좌를 향해 스스로 다가갔다.
아직도 발을 떼지 못하는 나였고. 그런 내 등을 루시가 툭, 힘차게 두들겼다.
그녀는 뒤에서 나를 슬며시 끌어안았다.
“이 어리석은 수호자야. 너를 불행에 내던져놓고 나 혼자 행복하라고? 그런 수단으로 진짜 행복이 찾아올 리가 없지 않느냐. 그거야 말로 지옥이니라. 머저리.”
“…….”
“긴 말은 필요 없느니라. 내 선택을 막는다면… 나는 앞으로 평생 네놈을 원망하면서 살 것이다. 용사.”
…
…
… 그건 안 될 일이지.
두손 두발 들었다. 그녀의 진로에서 슬쩍 비켜줬다.
루시는 희미하게 웃으며 내게 퍼뜩 손을 내밀었다. 나는 머뭇거리다 결국 그 손을 붙잡았다.
더 이상 루시의 손끝에선 망설임의 떨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그 길을 선택하시는 건가요?”
우리가 오순도순 옥좌로 다가가자, 가만히 쳐다보던 똥털이 물어왔다.
복잡미묘한 표정이다. 기뻐하고 안심하는 듯하다가, 어느 구석에선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하는… 내 이미지 속 똥털 그대로의 면상이다.
“왜. 뻔해서 실망했냐?”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괜히 틱틱대는 어조로 물었다.
미네르바가 내 반응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곧장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아뇨. 괜히 뻔한 선택이겠어요. 그게 옳은 선택이니까 뻔하게 느껴지는 거겠죠. 해피엔딩은 뻔하지만… 누구나 좋아하잖아요?”
“스스로 심상이 뒤틀린 년이라고 실토하는 거냐?”
“어머나. 뻔하다는 말은 그쪽이 먼저 꺼냈는데.”
“나는 애초에 안 뒤틀렸다고 한 적도 없어.”
결국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해줬다.
미네르바는 한숨을 길게 흘리며 “진짜 말이나 못하면…….”이라는 말을 중얼거렸지만.
“아무튼 계승의 뜻이 그렇게 확고하다니. 이제 제가 관여할 여지는 전혀 없네요.”
이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자리에서 천천히 허물어졌다.
작별의 말과 함께였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이제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직감이 물씬 들었다.
“둘이서 오붓하게 잘 지내보세요. 이 세상의 끝에서,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똥털은 사라져 버렸다.
곧 그녀의 말대로 이루어졌다. 이 해골만 가득한 세상에 이제 단 둘만 남게 되었다.
나와 루시는 서로를 뻘쭘하게 쳐다보다가, 이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커흠. 새끼 거 이상한 말을 해가지고.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고 그러냐.”
“내, 내말이… 흐흥.”
루시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한참 눈치를 봤다. 그러더니 화제를 돌리려는 양, 퍼뜩 옥좌를 향해 다가갔다.
“아, 아무튼! 내, 내가 여기에 앉으면 되는 거 아니냐!”
“어… 그래.”
잠깐 분위기가 헤벌레 풀어졌는데. 생각해보니 지금 진지한 국면이다. 나는 새삼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루시도 비장하게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디아나의 옥좌에 걸터앉았다.
[알림: 유지의 계승]
[마녀가 마련한 계승의 옥좌가 적합한 유지자에 의해 계승되었다.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는 세계의 유지자로서, 그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기능할 것이다.]
두웅. 둔중한 효과음과 함께 패널이 떠오르는 한 편.
콰아아앙! 디아나를 죽였을 때처럼 칠흑의 파동이 옥좌를 중심으로 거세게 퍼져나갔다. 동시에 거대한 칠흑색 빛기둥이 하늘을 꿰뚫을 듯이 치솟아 올라갔다.
“읏… 아.”
루시는 연신 몸을 움찔거렸다. 찡그린 얼굴에서는 아트막한 신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죽은 듯이 잠잠해졌다. 사위는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으로 가득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내가 존재하는 건지도 헷갈리는 가운데. 문득 패널이 떠올랐다.
[알림: 계승의 안정화]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가 새로운 검은 마력의 주인이 되었다. 안정화까지 세계의 모든 빛이 차단되며, 수복까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된다.]
[완전한 안정화까지 남은 시간: 12시간 15분]
“이, 이럴… 수가. 아, 앞이 안 보여!!”
그리고 그 순간. 어둠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각, 바스슥. 해골더미를 밟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목소리의 주인공… 루시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요, 용사! 어, 어디 있느냐!! 나, 나… 누, 눈이 멀어버린 것 같다!! 으으윽!”
루시가 울먹이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불안에 찬 목소리였다.
나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히죽거리는 한 편. 나도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어느 순간 턱, 무언가 앞에 부딪쳤다. 서늘한 체온이 인상적인 가녀린 체구. 루시였다.
“나 여기 있다. 불렀냐.”
“아… 아! 요, 용사!!”
루시가 아찔한 어조로 나를 부르더니, 이내 내 몸을 더듬거렸다. 진짜 내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그 자리에 반강제로 앉혀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괜히 싸돌아다니지 말고.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
“어, 어?! 하,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야. 나를 믿어.”
“… 으, 응. 그래.”
루시는 볼멘소리를 하려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털썩. 나도 루시의 주변에 걸터앉았다. 등 뒤로 루시의 몸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조금 몸을 떨어뜨리려 했다.
하지만 스르륵. 오히려 루시 쪽에서 내게 등을 가져다댔다.
“… 등이 넓구나 용사. 생각보다.”
루시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되니 이제와서 몸을 빼기가 좀 뻘쭘해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맞받아쳤다.
“내가 옛날부터 등빨 하나는 좀 좋았지.”
“겸손은 어디갔는고. 원… 칭찬을 못 하겠구나.”
루시도 빙글거리며 대꾸했다.
그 뒤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짙은 어둠을 아무 생각 없이 응시했다.
그러자니. 문득 다시 루시가 목청을 높였다.
“용사. 거기 있느냐?”
“있어.”
“응. 그래.”
그렇게 잠깐 시간이 지났다.
또 불안에 찬 루시의 목소리가 퍼뜩 들렸다.
“용사. 아직 있지?”
“있다니까.”
“응… 그래. 알겠다.”
그 뒤로, 컵라면 익을 시간도 안 지났다.
또 한 번 불안에 찬 루시의 목소리가 퍼뜩 들렸다.
“용사. 아직… 거기에 있느냐?”
아니 X바. 애초에 여기 없으면 대답을 어떻게 하냐. ‘안 온 사람 손 들어봐?’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진지하게 하고 앉았네.
“자.”
나는 대답 대신 루시에게 맞댄 등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백 마디 말보다 확실하게, 내가 그녀의 옆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줄 것 같았으니까.
“… 아.”
루시도 그것을 느꼈는지, 한결 몸에서 긴장이 빠졌다. 이내 그녀도 보답하듯이 등을 더욱 바짝 맞대어왔다.
루시의 서늘한 체온이 등 너머로 똑똑히 전해져왔다.
“…….”
“…….”
더 이상 루시의 물음은 들려오지 않는다.
차갑고, 상냥한 침묵이 어둠 속으로 녹아든다.
완연한 어둠이었다.
엔딩(2) ― 계승(繼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