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종극과 선택
‘아니. 대체 뭐지.’
왜 저 여자가 스스로 깨어나서 내 앞에 온 거냐.
분명 한수호의 말로는 깨어나는 데만 한 달은 걸린다고 했을 텐데.
나는 고통으로 마비된 머리를 최대한 돌려서 상황을 파악했고. 이내 정답 비슷한 것을 도출해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 그 한수호와의 싸움이… 한 달 넘게 이어진 건가.’
전생 때마다 수 분, 길게는 수 시간이 걸린 개싸움이었다. 그것을 수백 번 전생동안 반복했다.
불사의 마왕은 나와 불사의 계약으로 이어져 있다. 그래서 그녀의 몸뚱아리도 절대적인 시간이 아닌, 상대적인 시간이 흐른다.
‘얘는… 나와 똑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지.’
이게 무슨 말이냐고?
시간이 돌아오면 같이 시간이 돌아가는 다른 이들과 달리. 루스티카만은 내가 겪어왔던 모든 전투 때도 시간이 계속 흐른다.
이미 그녀의 육체 기준으론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기에 스스로 깨어났다는 소리다.
“… 뭐. 아무튼 마침 잘 왔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가자. 마왕.”
대충 납득한 나는 그에 대해서 가타부타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그녀에게 눈짓하며, 디아나의 옥좌를 향해 걸어갈 뿐이다.
새삼 나는 마지막 선택지의 패널을 눈앞에 띄워봤다.
[1. 불사의 마왕을 계승시킨다.]
[2. 불사의 마왕을 살해한다.]
[3. 계승을 완전히 포기한다.]
[완전붕괴까지 남은 시간: 1시간 03분 12초]
사실 루스티카를 재촉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은 거였는데. 의외로 진짜 시간이 없었다.
이번생에선 그 너절한 최후의 전투가… 무려 10시간도 넘게 이어졌던 모양이다.
“으, 으응. 그래. 드디어… 진짜 마지막이로구나.”
루스티카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척대는 내 옆으로 바짝 붙었다. 그리고 애써 밝은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그 엄청난 상처는 어찌된 게냐. 이런 곳까지 와서, 어디 귀신한테라도 맞고 다녔느냐? 쯧쯔.”
놀리는 말투였지만, 정작 표정은 분노와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솔직하지 못한 행색에 피식 웃었다.
사실, 지금 웬만하면 얘랑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는데… 저렇게 분위기 풀어보려 노력하는 걸 보니. 맞장구는 좀 쳐줘야겠다 싶었다.
“헹. 믿었던 형님한테 뒤통수 좀 맞았다.”
“으음. 그 놈은 강하더냐? 내가 대신 혼내줄까?”
“됐어. 이미 내가 조져놨으니까.”
“으음! 그래야 내 수호자답지. 잘했느니라! 칭찬해주마!”
루스티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까치발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쓰다듬었다.
나는 가소로운 그녀의 행색에 코웃음을 쳤다. 긴장이 탁 풀리며 한숨이 쏟아졌다.
“칭찬은 개뿔. 너나 어디서 맞고 다니지 마라 마왕. 너 개좁밥이잖아.”
“뭣이?! 이, 이 무례한 놈이 어느 안전이라고! 이몸이 마음만 먹으면 네놈 따위는…!”
불 같이 화를 내던 루스티카는, 그 시점에서 퍼뜩 말을 멈췄다.
그리고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봤다.
“… 마왕?”
그녀가 의아한 듯이 되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더니. 이내 장난기 어린 미소와 함께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뭐냐. 이제 와서 웬 마왕? 내 이름을 부르기 민망해진 게냐?”
“뭐? 그게 무슨 말이냐?”
“푸훗! 네가 붙여 놓고는 웃기는 놈이로구나! 평소처럼 부르거라 용사! 네가 부활한 이몸에게 멋대로 붙였던 그 이름말이다!”
“… 아.”
순간 숨을 삼켰다.
…
…
… X발.
옛날의 박정용, 이 개새끼야. 왜 쓸데없이 애칭 같은 걸 붙이고 지랄이야.
… 나중에 잊어버리면 어쩌려고. 병신 같은 새끼.
“음. 잠깐 좀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이제부턴 그렇게 부를게.”
“어? 그, 그래.”
나는 그렇게 얼버무렸다. 그리고 입을 꽉 다문 채 옥좌를 향해 걸어 나갔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루시가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그럴수록 걸음만 더욱 재촉했다.
드디어 뼈로 쌓은 산의 정상에 다다랐고. 그곳에 있는 디아나의 옥좌를 눈에 담은 그 순간이었다.
“… 용사.”
루스티카가 나를 불렀다.
아까처럼 밝게 꾸민 목소리가 아니다. 진지하고, 불안감에 찌든 목소리였다.
뭔가 이상함을 느꼈나 보군. 이럴 줄 알았다. 좀 더 입 놀리는 걸 조심했어야 됐어. 뒤늦은 후회를 잠깐 했다.
“내 이름. 불러라. 지금 당장.”
이렇게 뒤 돌아보기가 무서웠던 적이 또 있을까.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는 불사의 마왕을 정면에서 마주봤다. 그녀는 눈가에 한 가득 눈물을 담은 채, 나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전에 없이 필사적인 얼굴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는 대로 대답했다.
“루스티카잖아.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
“그게 아니야! 내 이름은… 네가 붙여준 내 이름은 그게 아니잖느냐!”
“…….”
“빨리! 용사! 내 이름을 말해보란 말이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빽 소리 질렀다.
듣기 괴로울 정도로 절박한 목소리였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주려고 입을 열었다.
“…….”
그대로 닫았다.
왜냐고? 왜겠냐.
나는 지금. 그녀에게 이름 같은 걸 붙여준 기억이… 전혀 없다.
“대체… 여기서.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퍼억, 퍽. 루스티카가 내 정강이를 툭툭 찼다.
푹 수그린 얼굴 아래로 투명한 물방울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말해봐라. 기억나는 것 전부. 나에 대해서 전부!”
루스티카가 어느 순간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젖은 목소리라서 딱히 박력은 없다.
하지만 나는 거스르지 않았다. 생각나는 대로 대가리를 최대한 쥐어짜냈다.
“… 할센베르크에서 너를 처음 만났고. 엘더리치도 같이 죽였지. 어떻게 죽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네. 뭐 이몸의 혜성 같은 지략으로 돌파하지 않았을까.”
“… 또.”
“음. 그 뒤로, 일행과 같이 여행했고. 케른이라는 마을에서, 불사교와 싸웠다. 그 때 너한테 크게 빚을 한 번 졌어. 일행의 구성은… 음. 전혀 기억이 안 난다.”
“… 또?”
“그리고… 음.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메이드 로봇이 합류했지. 마르크트레스에서 하얀 머리 중년 아저씨한테 신세를 졌다가, 헥터 카사스한테 뚜들겨 맞다가. 너는 한 번 죽었다.”
“… 그리고! 또!”
“그리고… 음. 그리고.”
거기서 잠깐 말을 멈췄다.
이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네 계승의식을 완수하기 위해서 운터란트에 갔다. 그 후로는 거의 기억이 없는데.”
루시는 내 행색에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공허하게 풀린 얼굴로 허탈하게 웃었다. 잠깐 멈췄던 그녀의 눈물이 다시 펑펑 흐르고 있었다.
“… 그건 내가 아니다. 용사.”
퍼억, 퍽. 원망과 울분이 담긴 발길질이 이어졌다.
원망 어린 목소리가 나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너는… 지금 네 앞에 있는 나를… 거의, 전부. 잊어버렸구나.”
그녀는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하다가.
이내 나를 힘껏 껴안고 목놓아 울었다.
“뭐냐고 대체. 왜… 왜! 기억을 못 하냔 말이다…!”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좀 나한테 묻고 싶다.
그녀 입장에선 지금 상황이 기가 찰만도 하다. 갑자기 세기말 풍경의 성당 한 가운데서, 혼자 덩그러니 깨어난 것도 당황스러웠을 텐데. 거기다 계약자란 놈이 자기를 까먹었다고 하고 있으니. 나 같아도 어이가 없겠다.
“무슨 변명이라도 좀 해보거라! 왜 잊어버린 거야! 대체 왜!”
“…….”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말에 아무 대꾸도 못했다.
괜히 아가리 놀렸다가 긁어부스럼만 만들 것 같아서 말이다. 내 지론상 대가리 가벼우면 아가리라도 무거워야 한다.
“으흑… 흐그윽… 으흐흑…….”
가슴팍에서 루스티카의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거의 오열을 하고 있었다.
얘는 원래 이렇게 잘 울었던 건가? 기억에 심심찮게 빵꾸가 난 지금의 나로서는, 신선하고 당황스러운 반응이다.
내 기억속의 그녀는 언제나 당당하고. 뻔뻔하고. 그래서 눈부셨다.
‘사실은 이렇게… 울기도 하는 건가.’
아무래도 내가 기억하는 루스티카의 이미지는… 내가 좋을 대로 짜맞춘 십덕 망상 속의 루스티카였던 모양이다. 하긴. 아무리 마왕이라도 살아있는데. 서러우면 울기도 해야지.
우는 루스티카를 앞에 둔 내가 혼자 실실 웃고 있자니. 문득 루스티카가 눈물범벅된 얼굴을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다시 붙여라.”
“뭐?”
“내 이름. 아무거나 좋다. 네가 다시 붙여다오.”
“… 음.”
“이제부턴… 너와 함께, 죽는 날까지. 나는 그 이름으로 살겠다. 용사.”
어려운 주문을 하는군. 여기가 철학관으로 보이냐.
똘망똘망한 붉은 시선을 보아하니, 루스티카는 꽤나 기대하고 있는 표정이다.
이건 좋지 않다. 무슨 좋은 이름을 붙여도 전의 이름과 비교당할 각이 보인다.
“흐음.”
그렇다면 깊게 고민할 거 뭐 있나.
아무리 길게 고민해도 욕을 먹을 거라면. 그냥 당장 생각나는 대로 지어주자.
“그럼 루스티카를 대충 줄여서, 루시로 하자.”
어떻게 줄이면 이렇게 되냐고? 사실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대충 여자 이름 같잖아. 그럼 됐지.
“루, 루시… 루시라고?”
루스티카… 아니, 루시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눈을 부릅뜨고 그 이름을 연신 혼자 되뇌었다.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애매한 반응이다.
이내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동시에 입가에 함박웃음이 피었다.
“… 기억이 없어져도, 네놈은 변하는 게 없구나. 정말로.”
질타의 말이 날아오길래 싫어하는 줄 알았다. 얼른 다음 이름 후보들을 생각하고 있자니.
별안간 그녀가 까치발을 들어, 내게 입을 맞춰왔다.
“…….”
“…….”
영원과 같은 찰나가 계속되었다.
그제야 루시가 이름을 마음에 들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 *
“분위기 좋네요. 내가 다 민망할 정도야.”
문득 등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시는 화들짝 놀라며 입술을 뗐고, 이내 내 뒤로 후다닥 숨었다.
‘이 타이밍에 이 목소리라…….’
누군지는 안 봐도 뻔하다. 여기에 출입할 짬이 되고, 항상 굵직한 일 끝나면 놀리듯이 등장하는 게 그년 말고 또 있으려고.
나는 부드러운 감촉이 남은 입술을 괜히 할짝이며 뒤를 돌아봤다. 역시나 어두운 금발의 여인, 똥털이 있었다.
나는 괜히 그녀에게 툴툴거렸다.
“너 X바. 평소에 눈치 없다는 소리 자주 듣지 않냐? 한창 분위기 좋았는데 말이야.”
“그대로 놔두면 천년만년 쪽쪽 빨고 있을 거 같아서요. 시간이 얼마 없는 거 아시죠?”
“… 커흠험. 흐흠.”
옆에서 루시가 얼굴을 확 붉히며 “쪽쪽 빨긴 누가!!”라고 항의했지만. 아쉽게도 나도 똥털도 그녀를 신경써줄 상황이 못 됐다.
그렇군. 시간. 마지막 선택의 시간이… 이제 1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시간이 얼마 없다.
“자. 두 분 다 이리로.”
똥털은 뼈로 쌓아 만든 옥좌 옆에서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답지 않게 엄숙한 표정과 동작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옥좌로 다가가는 우리에게 문득 눈웃음쳤다.
“이제 당신의 선택만이 남았어요.”
똥털은 나를 주시하며 기다리고 있다.
정확히는, 내게 남은 선택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유난히 날카로웠다. 마치 내 눈동자 너머의, 또 다른 누군가를 꿰뚫어보는 듯한… 그런 불가사의한 시선이다.
“직접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에서… 당신이 바라는 결말을요.”
… 원하는 결말?
나는 그 말에 홀린 듯이 선택지 패널을 다시 열었다.
[1. 불사의 마왕을 계승시킨다.]
[2. 불사의 마왕을 살해한다.]
[3. 계승을 완전히 포기한다.]
[완전붕괴까지 남은 시간: 0시간 51분 37초]
…
…
… 오랫동안 침묵 끝에, 나는 결정했다.
똥털과 루시의 얼굴을 한 번씩 훑어봤다. 루시의 얼굴 생김새를 가만히 가슴에 새겼다.
그리고, 선택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