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이 녀석… 싸우면서 성장하고 있어?
“키아아아악!”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채애앵! 마지막 한 가닥의 검을 쳐냈다.
불꽃에 휩싸인 최후의 에스파다가, 열기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커헉… 허억… 후우.”
나는 참았던 숨을 일거에 토해냈다.
이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쿠궁, 하고 거대한 허수아비 육체가 해골무덤 위로 슬쩍 기울었다.
어깨, 몸통, 다리 할 것 없이 전신에 에스파다가 박혀 있었다. 나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그것들을 모두 거칠게 뽑아냈다.
“그으으…!”
푸직, 푸쉬익. 뽑아낼 때마다 질펀한 파육음이 울렸다.
뻥 뚫린 팔 안에서는 붉은 피가 아닌 시커먼 안개가 꿀렁꿀렁 빠져나갔다.
압도적인 희열이 고통조차 눌러 죽였지만… 중요한 무언가가 피 대신 몸속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흐으… 크큭.”
스르륵. 곧 흑익의 천들이 상처들을 뒤덮었고. 뻥 뚫렸던 팔의 구멍들은 씻은 듯이 메꿔졌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슬쩍 웃었다.
상처가 멎었다고 체력이 차오른 건 아니다. 다만 스케어크로우 변신 상태에서는 언제나 공격을 위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 주기 떄문에, 상처만 덮인 것이다.
“내 필살기를 악으로 깡으로 벼텨낼 줄이야. 솔직히 아까부터 놀라움의 연속이야.”
멀찍이서 한수호가 박수를 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는 붉게 물든 시야로 놈을 가만히 노려봤다.
서슬퍼런 눈빛을 마주하던 한수호는, 이내 과장스럽게 어깨를 움츠렸다.
“이야. 면상 진짜 드럽게 살벌하네. 내가 너 손거울 필참하라 했지. 새꺄.”
“… 흐. 흐흐흐.”
“정작 변신다운 변신도 너한테 뺏기고 말이야. 내가 체면이 말이 아니야.”
“흐흐흐. 히히하하하.”
한수호는 사실상 벽보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 혼자 실실 웃기만 했다.
그는 질린 얼굴로 내가 웃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진짜… 이래서야 누가 진짜 악당이고, 최종보스인지 모르겠잖아. 하핫.”
파지직, 한수호가 대검을 들어 올리자 검은 스파크가 번쩍거렸다.
강렬한 자기장이 일어나며 공기가 일렁거렸다. 그에 따라 베스타크와 에스파다가 한수호의 양쪽으로 흐느적거리며 상승했다.
“다시 간다.”
순간 한수호의 안광이 번득였다.
후방, 위, 전방. 세 방향에서 동시에 칼날이 날아왔다.
“캬아아아앗!!”
채채챙! 나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몸을 뒤틀었다.
한수호가 직접 내지른 검은 왼손으로 막아냈고. 동시에 후방으로 오른손을 휘둘러 베스타크를 막았다.
하지만 위에서 찍어누르는 에스파다는 허리 옆을 스쳤다. 우지직! 경갑이 종잇장처럼 찢어지며 검은 안개가 줄줄 흘렀다.
“… 봤다…!”
보였다.
간파했다. 이제야 모두 알겠다.
나는 아가리를 벌리고 한층 목청을 높였다. 괴물의 웃음소리가 한수호의 면전을 향해 쏟아졌다.
‘손목. 그리고 발목의 움직임…!’
능력치는 비슷함에도, 한수호의 검을 따라갈 수 없었던 이유.
급격하게 시야에서 사라지며, 다른 방향에서 치고 들어오는 예측불허의 공격.
“그게 비밀이었군!”
놈의 비밀을 지금 한 순간에 모두 밝혀냈다. 괴물의 눈이 되어서야 겨우 한수호의 미세한 움직임이 포착된 것이다.
키리리릭. 한수호는 내 손톱에 대검을 맞댄 채로 중얼거렸다.
“아아. 이것은 ‘검술’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이세계인들은 가지지 못한 것이지.”
“… 뭐?”
나는 한수호의 말을 곱씹다가, 문득 멍청하게 탄성을 흘렸다.
평소 같았으면 ‘우옷, 현대인 굉장해!’라고 맞장구라도 쳐줬겠지만. ‘검술’이라는 평범한 단어가 튀어나오자 표정을 험하게 뒤틀었다.
“… 검술? 그 움직임이 그냥… 검술이라고?”
“아니지. 여기선 ‘그냥 검술’이라서 의미가 있는 거지. 정용아.”
“그게 무슨…?”
카카캉! 문득 한수호가 맞붙은 대검에 힘을 불어넣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밀리다가 이내 펄쩍 점프해 거리를 벌렸다. 놈과 검을 맞대고 대치해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었기 떄문이다.
“네가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본 검술 및 체술들은 전부, 스킬의 일부였을 거야. 패시브든 액티브든. 체득한 게 아니라 주입된 것들이라고.”
한참 멀어진 곳에 착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수호의 신형이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왔다.
‘이런 X발…!’
대체 어떻게.
사방에 쌓인 해골더미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 마당에, 저런 움직임을 보이는 거냐고!
그런 강렬한 의문도 잠시. 쇄애액! 아까처럼 세 방향에서 다시금 칼날이 쇄도했다.
‘보였다!!’
이번엔 확실히 반응했다.
채채챙! 양옆에서 찔러 들어오는 흑백의 쌍검을 흘려보냈고. 찰나의 순간 칼날 옆을 후려쳐 박살내 버렸다.
나는 부릅뜬 눈으로 한수호를 주시했다. 1대1 대치 상황이 되자, 한수호는 달려오던 방향을 일순간에 급변경 했다.
‘이런…!’
또다. 아까의 그 움직임이다.
타탓. 가벼운 풋워크와 함께 한수호의 발목이 현란하게 꺾였다.
정신 차렸을 때 이미 한수호는 시야에서 이탈해 있었다. 잔상만이 눈앞에서 나를 조롱하듯 일렁거린다.
“이런 자잘한 움직임이 말이야. 시스템화 된 스킬에서는 절대 구현되지 않거든?”
어느새 좌, 우, 후방에서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퍼퍼퍽! 히어로 센스의 반응에 몸을 맡겼다. 양옆에서 날아온 참격 두 방은 막았지만, 후방의 참격은 왼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크악!”
살짝 칼끝이 닿았을 뿐인데 신형이 하늘로 치솟았다.
콰가가각! 나는 쌓인 뼛조각 위를 한참 구르고 나서야 제동을 걸 수 있었다. 몸에 깊숙이 박힌 자잘한 뼛조각들을 거칠게 털어냈다.
“지금 이 세상에선, 누구든지 퀘스트와 마족 사냥으로 강해질 수가 있지.”
한수호의 목소리가 곧장 내 뒤를 추격해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쳐다봤다.
파지지직! 어느새 한수호가 새로 뽑아낸 베스타크와 에스파다가 보였다. 나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고 있었다.
“위험만 감수하면. rpg게임 하듯이 쉽게 강해진다고. 그게 문제인 거야.”
쌍검 뒤로 추격타를 날리는 한수호. 그의 웃는 얼굴도 시시각각 가까워졌다.
이번엔 세 개의 검이 모두 같은 궤도로 날아들었다. 교란 목적이 아니라, 일격에 나를 찍어 누르려는 심산이었다.
“그리 쉽게 괴물이 되는 마당인데. 검술 같은 잡기(雜技)들이 왜 필요하겠어.”
콰아아앙! 양손을 들어 정면을 방어했다.
금속음과 함께 거대한 공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날카로운 세 줄기의 검풍이 몰아닥쳐 내 손톱의 멸망의 화염과 섞여들었다.
“검술 같은 건… 고만고만한 좁밥들끼리 싸울 때나 필요한 거잖아? 그런 거 배울 시간에 레벨 빨리 올리는 ‘공략법’을 전수하는 게 더 이득이라고. 국가든 가문이든.”
불꽃의 잔영이 일렁거리는 한수호의 얼굴이 코앞에서 어른거렸다.
그는 잡아먹을 듯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오며,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래서 내가 이 시스템을 구축한 이후론 말이야. 제대로 된 무술은 모조리 실전돼 버렸어. 기껏해야 마르크트레스에서 스킬의 일부로서 흔적이 좀 있을 뿐이지.”
“그윽…!”
“예를 들면. 네가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기공술 같은 거?”
한수호는 검을 연신 들이밀며 쉴 새 없이 나불댔다. 죽이고 싶을 만큼 여유로운 행색이어서 짜증이 울컥 일었다.
놈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슬쩍 축였다.
“슈엘츠의 기사단이 운용하던 제식 검술. 고대 용치기들의 단검술. 용병검술. 그 모든 게 합쳐진 게 나다. 상대의 심리를 읽고, 힘의 흐름을 제압하는 데 특화된 검술이지.”
휘리릭! 한수호가 대치하던 대검에 슬쩍 힘을 뺐다.
자연스레 내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그는 순식간에 칼날을 뒤집어 내 손톱을 찍어누르더니, 내 배후를 훌쩍 점해버렸다.
일련의 행동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한동안 넋이 나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볼 정도였다.
“이렇게 말이야.”
그는 상큼하게 웃으며 대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번득. 대검이 검붉은 불꽃을 뿜어내며 내 목을 자를 준비를 마쳤다.
월드 엠브리오는 기대할 수 없다. 마력은 까마귀 폭풍을 위해 최대한 아껴야 한다. 이건 맞을 수밖에 없다.
‘… 지금? 지금인가?’
나는 입술을 악물었다.
아직. 아직이다. 더 싸울 수 있어. 그러니까, 까마귀 폭풍을 사용하는 건 이르다!
결단을 마쳤다. 나는 순간적으로 왼팔을 들어올려 목을 보호했다.
“오호?”
푸확! 한수호의 의문 어린 탄성과 함께 내 왼팔이 잘려나갔다.
검은 안개가 잘린 단면으로 줄줄 흘러나왔고. 나는 그것을 한수호의 면상에 대고 흩뿌렸다.
“큭.”
한수호가 미간을 찌푸린 채 왼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 틈을 타서 파바박 뒷걸음질 쳤다. 가까스로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진짜… 개발악을 하는구나. 정용아.”
푸하. 한수호가 얼굴에 묻은 찐득한 안개를 흩어내며 코웃음을 쳤다.
비릿한 조소와 싸늘한 경멸의 눈초리가 내게 쏟아졌다.
“서로 더 이상 강해질 건덕지도 없는 상황에서. 결국의 결국엔 네가 패배했다. 이제 승패는 갈렸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정색하는 한수호에게 오히려 입꼬리를 씨익 올려 웃어줬다.
괴물의 음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글쎄. 내가 강해질 건덕지가 정말 없을까?”
“… 흐음?”
한수호는 내가 웃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곧장 쌍심지를 세우고 표정을 꿈틀거렸다.
문득 그가 지면을 박찼다. 푸확! 바닥의 뼛조각이 튀어 오른다. 한수호가 이미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우리 정용이 팔도 하나 날아갔는데. 이제 어떻게 막으려고?”
한수호가 조롱하듯 말했다.
쇄애액! 다시금 세 방향에서 칼날이 쇄도했다. 섬광과 불꽃이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열기와 살기 속에서. 나는 문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렇게 막는다!”
눈을 터질 듯이 부릅뜨고 검의 방향을 주시했다.
쏟아지는 세 줄기의 칼날이 붉게 충혈된 시야에 잡힌다. 열기와 살기의 방향이 교차하는 가공의 지점을 시야에 그려나갔다.
힘을 계산한다. 시간을 계산한다.
‘바로… 지금이다!’
나는 오른손을 거세게 휘둘러 그 교차점을 분쇄해 버렸다.
콰아앙! 한수호처럼 유려한 곡선을 그리지도 않았고. 최적의 힘으로 최대의 효과를 낸 것도 아니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확실히 막아냈다.
“… 흉내 좀 내봤다. 이 개새끼야!!”
한수호의 베스타크와 에스파다는 반으로 부러져 해골들 사이에 꽂혔고. 한수호 본인은 바닥에 처박힌 대검에 따라 상체가 고꾸라졌다.
스슥. 나는 한 달음에 한수호의 배후로 다가갔고. 놈의 정수리부터 사타구니로 손톱을 긁어내렸다.
“이런!?”
하지만 한수호가 먼저 반격을 눈치 채고 몸을 비틀었다.
퍼거걱! 한수호의 갑옷 상의가 산산조각 났다. 다섯 줄기의 피보라가 일어났지만, 나는 혀를 찼다.
‘얕았다.’
손맛이 제대로 오지 않았다.
예상대로 놈의 육체는 분해되지 않았고. 가슴팍을 긁은 상처는 부글부글 피거품을 끓이며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다.
치명상을 주지 못해 ‘부활’이 아니라, ‘재생’에서 그친 것이다.
“하. 하하하.”
한수호는 멀찍이 떨어져 얼떨떨하게 눈을 끔벅거렸고. 진정 괴물을 보는 듯한, 찡그린 눈매로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이내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 하핫. 디아나가 까마귀의 적합자를 찾을 때. 내가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 하나 있었어.”
스르릉. 한수호가 중얼거리며 다시금 몸을 둥글게 말았다.
돌격의 전조. 더 이상 전처럼 장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놈은 목석같은 얼굴로 건조한 목소리를 낼뿐이다.
“근성은 뛰어나고 싸움에 재능이 있으되. 너무 근성이 좋거나 너무 잘 싸워도 문제거든. 마지막에 내가 폐인으로 만들기가 어려우니까.”
카카카카앙!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우리의 몸이 서로 교차해 있었다.
한 순간에 다섯 번의 합이 오갔다.
“… 그욱!”
푸화악!
한쪽만 남은 내 손에서 손톱 두 개가 잘려나갔다. 허리가 토막나기 직전까지 베였다.
하지만 반대로, 한수호도 가슴 한복판에 다섯 개의 검상이 깊게 나 있었다.
나는 히죽 웃었다.
‘이겼다.’
이번엔 틀림없다.
살은 내줬을지언정… 뼈을 취했다.
파지지직! 한수호의 육체가 한계를 못 이기고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재구성됐다.
한수호가 대검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려하던 일이 그대로 이루어졌구나. 그 단시간에 내 검술을 흉내내다니. 근성도 재능도 지나치게 많아. 너는.”
“똥꼬 헐겠다 X발년아. 아부하는 거 보니 슬슬 쫄리냐?”
듣기 과분한 칭찬이었다. 나는 그냥 생각하기를 그만뒀을 뿐이다.
힘의 흐름, 그리고 놈이 보내오는 살기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나의 일천한 대가리보다, 괴물이 된 내 육체를 믿기로 한 것이다.
“아직 멀었어.”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고. 동시에 온몸을 감쌌던 스케어크로우의 형상이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골수까지 빨아먹어줄게.”
스스스스. 녹아내린 흑익이 안개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것들은 점점 하늘을 뒤덮듯이 불어나, 막대한 까마귀의 군집이 되었다.
나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멸망의 대검을 꺼냈다. 그것을 한수호에게 똑같이 겨누었다.
“이번 생이 안 되면, 다음 생에서라도.”
몇 번을 죽어도. 몇 번이라도 되살아나서.
네가 잘난 듯이 나불거려준 그 검술로. 네가 빨아갔던 흉마를… 이자까지 복리로 쳐서 다시 뽑아가 주겠다.
“괴물신인 박정용의 성장을 기대해라. 스승님.”
나는 이를 한 번 바드득, 갈아붙인 다음. 하나 남은 팔로 대검을 땅바닥에 내리쳤다.
안개까마귀 군대의 돌격신호였다.
“조져버려어어!!”
투두두두두!
검은 안개의 군세가 한수호를 향해 일제히 쏟아졌다.